♣복음말씀의 향기♣ No2910
10월11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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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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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7Dvp_kq33Q (김상태 사도요한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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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시대 표징은 일상생활 그 한가운데에서 숨어있기에, 매일 눈을 부릅뜨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저기 황금빛 들판이 장관입니다. 점점 익어가며 고개를 숙이는 벼이삭을 바라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도 저렇게 성숙되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더해가면서 점점 균형 잡히고 성숙한 신앙인, 영적이고 겸손한 신앙인으로 성장해나가면 좋겠습니다. 크신 주님 앞에 나란 존재가 얼마나 미소한 것인지를 잊지 않는 신앙인, 주님 떠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사는 신앙인으로 익어가면 좋겠습니다.
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게 되는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상승과 추락, 병고와 죽음, 그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기꺼이 수용하며 살아가는 넉넉한 신앙인, 지나가는 작은 것들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은 관대하고 너그러운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정반대의 길을 걷은 신앙인들이 수두룩합니다. 십계명을 어기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있으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죄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나 모릅니다. 자신이 얼마나 정도를 벗어나 엉뚱한 길을 걷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주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신앙은 너무나 미성숙하고 유아기적인 것이어서 또 놀랍니다. 눈만 뜨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현실성 떨어지는 끝도 없는 기적이요 치유요 표징입니다.
예수님 시대도 상황은 비슷했나 봅니다. 얼마나 한심스럽고 안타까웠으면, 예수님께서 장탄식을 터트리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복음 11장 29절)
그런 분들이 즐겨 찾아가는 곳이 있습니다. 조금 밋밋하게 느껴지는 본당 공동체나 신앙 공동체는 뒷전입니다. 지극히 어색하고 볼썽 사나운 곳을 찾아 먼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거기 가면 그런 분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맞춤형 행사가 이어집니다.
입만 열면 성공이요 합격입니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불치병의 치유나 기적이 설교의 거의 전부를 차지합니다. 신앙을 빙자한 사기꾼들입니다. 거기에 현혹되어 교회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는 분들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오늘 이 시대 표징은 우리들의 일상생활 그 한가운데에서 숨어있기에 매일 눈을 부릅뜨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성체성사야말로 표징 중의 표징입니다. 매 미사 전 고백소 안에서는 수시로 기적이 거듭됩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 안에서 용서와 사랑, 헌신과 배려를 통한 기적과 표징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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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tK98x230s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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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마음’은 자신 안의 뱀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지금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악한 이유를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들이 표징을 보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듣지 않으면서 보기 원하면 악한 것입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악한 세대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증거를 대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불신을 깰만한 화끈한 무엇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거를 보여주면 의견을 바꿀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그런 것으론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고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기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속에서 사흘을 있다가 밖으로 나온 사건입니다. 예수님도 사흘 동안 땅속에 머물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울 수 없는 표징에도 악한 세대는 꼼짝하지 않습니다. 이미 귀를 막고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부터 본인들은 마음이 굳게 닫혀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남방 여왕이 긴 여행을 했다는 것과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기적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는 것은 듣는 것 다음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 마음에 이미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합당한 증거를 보여주어도 그 사람은 바뀌지 않습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뀌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최강의 영향력》이란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증거가 우리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가?’ 이 책에서 여러 실험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사형제가 범죄율을 낮춘다는 증거와 또 범죄율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객관적 증거를 준비하였습니다. 물론 객관적 정보이기는 하지만 둘 다 편향되게 만든 그럴싸한 허위 정보들입니다.
두 그룹에 각자 하나씩의 정보를 주었더니 사형을 반대하던 학생들은 사형이 범죄율 감소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증거에 대해서 잘못되고 조작된 정보라고 반기를 들었고, 사형을 찬성하던 학생들은 범죄율을 낮춘다는 증거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가 아니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실험은 온실가스에 관련된 실험입니다. 처음 환경학자가 2100년까지 지구 온도가 3.4도 오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의견에 수긍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과학자들이 정보를 재평가한 후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절반에게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했고 다른 절반에게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바뀐 정보를 수용했을까요?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3.4도 맞을 텐데?”[참조: ‘팩트를 제시해도 신념을 바꾸지 않는 진짜 이유’, 유튜브, ‘더 나은 삶 TV’]
이것은 지금 대선 주자들에 대한 인지도 평가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잘못된 일들을 아무리 쏟아내도 일단 한 번 지지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좀처럼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한국일보, 2021년 10월 5일’ 자 신문에 ‘대선이 이상하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선주자 빅2’로 불리는 두 사람에겐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고발 사주 의혹 같은 대형 악재를 맞아도, 실언·실책으로 자질 시비가 일어도 콘크리트 지지율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사와 윤 전 총장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겠지만, 이 같은 기현상엔 그늘도 있다.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똘똘 뭉쳐 격돌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뜻인 동시에, 대선에서 정책·인물 경쟁이 변별력을 발휘할 공간이 지극히 좁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 선거를 할 때 나라를 위한 대통령을 뽑으려는 것보다는 내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증명하려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증거를 제시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나를 부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열린 마음’을 갖고 올바로 판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확증편향은 의견이 곧 자신이라 여기는 오류에서 시작함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부정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험이 있습니다. 서울 아파트 시세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32평 아파트를 보여주고 “10억 원이 넘을까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은 10억 원 아래다, 더 나간다는 두 쪽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자신과 의견이 같은 사람들이 몇 명씩인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이 많으면 자신감이 생겨 자신이 배팅한 가격보다 더 내리거나 더 올렸습니다. 하지만 처음 정한 의견은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남더라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더 자신의 의견을 견고하게 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은 견뎌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듯 ‘자기가 부정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견이 틀릴 수 있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믿고 있었던 자신의 의견이 뱀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와는 뱀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뱀을 철저히 믿은 것입니다. 뱀의 의견이 바뀌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아가 뱀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기에 귀를 막아버립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자아를 뱀이 아니라 천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버린 것만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지도 않을 것이면서 끊임없이 증거를 보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명확한 증거를 눈으로 보더라도 자기 식대로 합리화해버립니다. 따라서 듣지 않고 보여달라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어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가 뱀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오류만 있음을 알기에 진리를 외부에서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듣는 마음’을 청했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지혜는 듣는 마음입니다. 자신이 뱀이요, 오류요, 어둠이요, 악임을 인정할 때야만 듣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뱀임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외부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책을 찾아서 읽고, 강의를 찾아서 듣고, 묵상하며 하느님 음성을 들으려 합니다. 고집불통이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뱀임을 아는 것뿐입니다. 내가 뱀임을 알았다면 외부에서 진리를 습득하기 위해 남방 여왕처럼 진리를 찾는 노력을 반드시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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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1,29-32 :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참 메시아’임을 입증할 수 있는 표징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져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나라는 표징 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요나의 표징이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요나의 표징은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으로 갔겠지만, 요나의 예언을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날 수 있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 멸망하기도 한다. 이 표징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남방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도 주님께 왔고, 남방 여왕이 이 세대를 단죄하듯 교회도 그럴 것이다. 지나가고 마는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왔던 남방 여왕이 그 세대를 단죄한다면, 지혜자체이신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어떻겠는가?
바로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지혜, 요나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표징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는데도, 즉 다른 어느 세대, 어느 백성에게도 베풀지 않은 특전을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자기 고집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지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지혜와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소화시켜 전해준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 성서 등 우리는 하고자만 한다면 더더욱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더욱 의욕적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때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특전이 내린 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잘 안된다면 우리도 성경 말씀대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태하기 쉬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위해 기적을 요구하듯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의 이익만을 찾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는지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하겠다.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기적도 나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 변화될 때에 참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생명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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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표징>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29-30)
이 말씀의 뜻은,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회개하여라. 그리고 나를 믿어라. 나의 죽음과 부활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입니다. (여기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사용한 ‘표징’이라는 말은 ‘놀라운 기적’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것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표징’이라는 말은, 갈림길에 서 있는 표지판 같은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고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이라는 말씀은,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가 겪은 일과 그의 설교가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 서 있는 표지판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구원을 선택한 것처럼”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 서 있는 표지판이다.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어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은 예수님의 신원을 증명하는 표징입니다. 그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믿거나 안 믿는 것은 각 개인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들이 선교활동을 하면서 한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40)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사도들의 증언을 ‘믿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녹음 파일이나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증’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어떤 체험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믿음이 먼저입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태도를 여러 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믿고 있지만 믿음보다 더 강한 확신과 용기를 얻고 싶어서 표징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고, 믿기 싫어서 요구하는 경우가 있고, 믿음과 상관없이 불순한 호기심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 판관기에 나오는 기드온의 경우, 그는 이미 주님을 믿고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믿었지만 확신과 용기를 얻고 싶어서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참으로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저와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당신이시라는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판관 6,17) “이미 이르신 대로 저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렵니까? 그렇다면 제가 타작마당에 양털 뭉치 하나를 놓아두겠습니다. 이슬이 그 뭉치에만 내리고 다른 땅은 모두 말라 있으면, 이미 이르신 대로 저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줄로 알겠습니다."(판관 6,36-37) “제가 한 번 더 아뢴다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이 양털 뭉치로 한 번만 더 시험해 보게 해 주십시오. 이 뭉치만 말라 있고 다른 땅에는 이슬이 내리게 해 주십시오."(판관 6,39) 겉으로만 보면 기드온이 하느님을 믿지 못해서 시험해 보려고 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그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였습니다.(판관 6,2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가 청한 대로 계속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판관 6,21.38.40)
2)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믿기 싫어서) 표징을 요구한 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요한 6,30)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루카 11,14-16)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42-43) 표징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그들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믿으려는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한 대로 어떤 표징을 보여 주셨다면,
그들은 그 표징 자체를 부정하면서 다른 표징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3) 헤로데는 불순한 호기심으로 표징을 보고 싶어 했던 자입니다. “......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루카 23,6-8)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표징을 헤로데가 보고 싶어 한 것은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고, 그냥 세속적인 호기심이었을 뿐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표징이 나타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표징들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표징을 통해서 더욱 강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특히 무신론자들은 표징과 기적 자체를 부정하고,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애를 쓰면서, 점점 더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 갑니다. 그들의 인생은 ‘영원’의 반대쪽에 있는 ‘허무’를 향해서 가는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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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두 가지 주제를 전해 줍니다. 하나는 가벼움입니다. 감각적인 삶, 육체의 만족, 하고 싶은 일을 사랑하려는 삶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거움입니다. 이성적인 삶, 영적인 만족, 해야 할 일을 사랑하려는 삶입니다. 이 두 가지 주제를 연결해 주는 단어가 있습니다. ‘키치’입니다. 키치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밤 길 운전에 오두막을 봅니다. 오두막에 한 가족이 식사를 ĺp합니다. 그 가족이 참 행복하다고 보는 것은 나의 생각입니다. 실제로 그 가족이 행복한지는 모릅니다. 독재정권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은 민주화된 나라의 생활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민주화된 사회에도 ‘희로애락’은 있기 마련입니다. 풍족하고, 만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모험과 열정을 동경합니다. 투쟁의 현장으로 가보지만 모험과 열정 뒤에는 위험과 죽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은 육적으로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님입니다.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은 영적으로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육적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보는 것입니다. 많은 표징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권위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감각적인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고통으로 죽으셨지만 영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는 이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바오로 사도가 전한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율법과 계명의 잣대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느님 아들의 죄명이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혁명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아넘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을 사람들은 직업과 가문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집안의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놀라운 표징을 보일 리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빌라도는 권력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하였지만 권력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서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많은 보물을 남겨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발견합니다. 어떤 이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어떤 이들은 감성, 이성, 오성을 통해서 참된 진리의 길을 찾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물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면 잘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물은 잠시 멈추어서 바라모면 보일 것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는 것도 큰 표징입니다. 우리는 밤에 잠을 자면서 죽음을 체험합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깊은 어둠을 체험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어쩌면 늘 새로운 부활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바라볼 때, 내가 만나는 이웃, 내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의 눈으로 바라볼 때, 교만함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서로를 믿을 수 없고, 서로를 이용하려하고, 모두가 경쟁의 상대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서 지내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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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選民思想’이라고 합니다.
인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생각을 하였고,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중국인들은 다른 민족은 오랑캐라고 업신여겼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민족우월주의를 극단적으로 생각하여 유대인들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종교도 타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교도라는 이름으로 배척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신분과 계급에 따라서 사람의 인격을 차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Veritas liberbit vos!)’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불꽃이 뜨겁게 타올랐고, 이제 우리는 신분과 계급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세계 인권선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모든 인간은 성별, 피부, 민족, 재능, 능력’에 따라서 차별받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모두 소중한 존재이며, 평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 질병, 굶주림은 사람들의 인격을 병들게 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세상에 살고 있고, 재물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명예와 권력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욕망은 전쟁과 폭력을 가져오고 있으며, 수많은 난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정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Veritas liberbit vos!)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입니다.
방전된 핸드폰은 충전을 해 주어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연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연을 날리는 사람과 연줄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주는 것, 우리를 영적으로 충전시켜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요나가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한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3번씩이나 말씀하십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고, 생각을 바꾼 사람은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의 얼굴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얼굴이 분노와 짜증, 원망과 불평의 모습이라면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영혼의 암세포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암세포는 우리의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암세포는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미움, 시기, 질투, 욕심은 우리의 마음에 암세포처럼 자라납니다. 그것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드리면 감사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반대로 원망을 하면 원망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회개한 사람은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참으면 그것이 마음에 쌓이게 되고, 언젠가는 분노로 폭발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주님께 봉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주님께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잠시만이라도 모든 것을 털어내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길이 보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진리가 환난 중에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시련 중에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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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활하셨던 시대를 가리켜 "이 세대가 악한 세대이다."라고 단정하셨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를 보시고 어떻게 말씀하실까?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세대가 악한 세대이다."라고 현재 동사를 사용한 것을 보면 2천년 전의 세대를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사는 이 세대가 왜 악한 세대인가? 무엇을 보고 악한 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래 전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이 있었지만 연일 서울 지하철의 안전 소홀로 적지 않은 사건들이 매일 일어나고 있고, 부정 부패가 극에 달하고, 이라크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위험한 세대이기 때문에 악한 세대라고 말하시는 것일까?
물론 이런 것만 본다면 분명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악한 세대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사건들을 보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보도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사회가 꼭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좋은 일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한 세대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무슨 뜻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사건이나 부정 부패 등에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라고 요나 예언자와 당신에 관한 것이다.
즉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였는데 이 세대의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와서 말씀하시는 데도 전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표징만 요구하기 때문에 악한 세대라고 하신 것이다.
그럼,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
"'요나가 니느웨에 들어 가 하룻동안 돌아 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이 말에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을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니느웨 임금도 용상에서 일어나 어의를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의 뜻을 모아 니느웨 시민들에게 아래와 같이 선포하였다.
사람이나 짐승, 소떼나 양떼 할 것 없이 무엇이든지 맛을 보아서는 안 된다.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굵은 베옷을 입혀라.
그리고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라.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남을 못살게 굴던 나쁜 행실은 모두 버려라. 하느님께서 노여움을 푸시고 우리를 멸하려던 뜻을 돌이키실지 아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 서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었다."(요나 3, 4-10)
라는 것이 요나의 말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이다. 즉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던 사건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즉 요나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단순히 요나의 말만 듣고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도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그리고 임금도 용상에서 일어나 어의를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한다는 것이 오늘 우리 세대에 가능한 일인가?
우리가 사는 이 세대에는 요나보다 더 크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과연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 세대가 악하다는 것은 어떤 부정을 저지르고,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 때문에 악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생활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미 선포된 복음은 믿지 않고 어떤 특별한 표징(기적)만을 요구하는 것이 악한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만을 듣고도 회개하였는데 이 세대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하느님이 직접 복음을 선포하시는데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 악한 세 개인 것이다.
오늘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순절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지정된 날에 단식을 하고 금육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복음의 삶을 생활하는 것이다.
즉 복음과 달리 생활하였던 생활에서 다시 복음적인 생활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떤 기적이나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포된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을 생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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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악한 세대”라는 말은 <마태오복음>에 비추어 보면,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앞 장면에서 그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1,16 참조).
사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달려왔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지역에서는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지혜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시험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요나의 표징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고 외치는 회개의 때가 왔음의 표징이며, 동시에 그가 바다에 빠져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의 표징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곧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표징을 볼 줄 아는 눈, 곧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일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활동이요 현존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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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루카 11,29)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먼저 베푸신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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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https://youtu.be/X4I_92r57H8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1,29)
<회개의 표징!>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으로 가득 차 있었던 니네베가 요나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 곧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3,4)는 말씀을 듣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니네베 사람 모두가 완전히 '회개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딱 한번' 외쳤고, 그것이 그가 수행한 예언직에 전부였는데, 니네베 사람들 모두가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요나보다 더 큰 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지금 여기에 계시며, '말씀으로'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매일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성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매일 복음을 통해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체의 기적'과 '말씀의 기적'을 체험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도 니네베 사람들처럼 '회개하는 것'입니다.
'모령성체', 곧 '성체를 모독하는 행위'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 삼키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지금 회개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지금 우리 안에서 회개의 표징(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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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사람아, 왜 그러는가>
루카 11,29-32 (요나의 표징)
그때에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사람아, 왜 그러는가>
사람아
왜 그러는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아
보여주어도
보지 않으며
왜 보여 달라는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아
들려주어도
듣지 않으며
왜 들려 달라는가
알고 싶은 것만
아는 사람아
알려주어도
알지 않으며
왜 알려 달라는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사람아
하라하여도
하지 않으며
왜 할 바를 알려 달라는가
가고 싶은 데만
가는 사람아
가라하여도
가지 않으며
왜 갈 데를 알려 달라는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아
살라하여도
살지 않으며
왜 살 길을 알려 달라는가
사람아
왜 그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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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요나, 예수님,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나>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내렸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요나 1,2)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달아났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살기 위해 도망쳤던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 동안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요나를 살리셨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주님 말씀의 선포를 거부했던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헛된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은 신의를 저버립니다. 그러나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9-10)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요나는 두려움 없이 외쳤습니다. 니네베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로부터 구원이 오니까요. 쾌락과 탐욕에 제 몸 던지고 우상 숭배를 탐닉하던 니네베 사람들은 준엄함 심판을 선포한 요나를 죽이는 대신 악한 길과 폭행에서 돌아서서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힘껏 부르짖었습니다.(요나 3,6-7 참조)
예수님께서 분열, 불평등, 억압, 배척, 탐욕에 물든 악한 세대에게 회개하라 외치셨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악한 세대가 살길이니까요. 비록 이 외침이 당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광기어린 음모를 자극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외치고 외치고 외치셨습니다.
악한 세대는 참회의 피눈물 흘리며 가슴을 찢지 않고 자신들을 살리려던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모질게 때리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서.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스스로를 죽였습니다.
요나 예언자와 예수님의 자리에 감히 주제넘게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저를 놓아봅니다. 요나와 예수님의 외침을 가슴 깊이 새기며 감히 주제넘게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제가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스스로 들어봅니다.
큰 물고기의 밥이 되기 전제 살길 찾아 하느님으로부터 달아나던 요나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두려움 없이 외침으로써 니네베 사람을 살린 회개한 요나를 닮은 제2의 요나 예언자가 되어야 하는데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온갖 질시와 비난 속에서 십자가 수난 여정을 당당히 걸어가신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때때로 약하고 비겁하며 아직은 때때로 두렵고 흔들립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다시 시작해야죠. 오늘 제게 들려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네가 나의 참 사제가 되고자 하느냐?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마음 깊이 간직하여라. 내 십자가의 표징을 뼛속 깊이 간직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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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봄을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만물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꽃이 피고 새순이 돋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봄에 피는 꽃은 겨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포가 우리나라의 개나리를 너무 좋아해서 고국 방문 때 개나리 몇 토막을 잘라다가 시드니 자기 집 정원에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나리는 위로 자라기만 하지 몇 해를 두고서도 꽃을 피우지 않는 것입니다.
개나리꽃이 예쁜 것이지, 개나리의 줄기는 별 볼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는 식물학자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시드니에는 겨울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춥고 황량한 겨울을 이겨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게 보입니다. 암을 극복하신 분이 더 열심히 사시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자기 삶이 다져져서 삶 자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지금을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 후에야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
요나 예언자의 말 한 마디로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했던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며 표징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나 예언자는 이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민족을 지배하던 니네베 사람들이기에 이들의 멸망은 곧 자기 민족의 구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망까지 갔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대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몽땅 다 회개합니다.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말이지요.
바로 가장 큰 기적과 표징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을 때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 모습이 때로는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이를 인정하고 굳은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했을 때, 가장 큰 기적과 표징이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내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적과 표징을 찾아보세요. 고통과 시련 속에서 그 기적과 표징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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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향을 세상에 전달하겠습니까?>
스탠퍼드 대학에서 104명을 대상으로 실험했습니다. 우선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제1그룹에는 지루함을 느꼈던 때를 주제로 짧은 에세이를 쓰게 했습니다.
제2그룹에는 인생이 불공평하거나 ‘타인에서 부당한 대우나 무시당했다’라고 느꼈을 때의 상황을 쓰도록 했습니다. 이 작업을 마친 사람들에게 혹시 연구진을 도와줄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부정적인 글을 쓰도록 했던 제2그룹이 제1그룹보다 26% 낮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2그룹은 계속해서 이기적인 행동을 보였고, 실험 후 그들의 자리에는 쓰레기가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실험용 펜까지 가지고 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삶 자체를 바꿔놓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전달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으로 다른 이에게 좋은 영향이나 나쁜 영향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향을 세상을 전달하겠습니까?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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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다리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군중을 보시고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1,30).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음의 쇄신을 갖지 않은 이상 어떤 것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표징을 알아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징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단죄의 표징이 됩니다.
요나 예언자가 회개의 삶을 가르쳤을 때 삶을 바꾼 사람은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체가 벌이 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벌입니다.
일상을 하느님의 손길이 주어지는 자리로 인정할 때, 매 순간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마음의 변화 없이는 주님의 손길이 매 순간 주어져도 결코 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어떤 일을 하든지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성녀 줄리아르는 말합니다. “정력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일하되 법석을 피우지 마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 조용한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겉모양에 힘쓰는 허영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더 소중함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착각과 오류 속에 살면서 그것을 지적해 줘도 인정하지 않고 완고하게 버티면 그것은 악한 세대입니다. 악한 세대는 자신이 회개할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과 심지어 예수님이 회개의 대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착각 속에 삽니다. 그럼에도 이 악한 세대 사람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죽음을 체험한 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회개하였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회개의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성령께, 돌같이 딱딱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주기를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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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택받은 우리들의 복된 삶>
-환대歡待와 경청敬聽-
문득 이름에 관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이런 이름은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신순이’라는 60년전 초등학교 시절 여학생 이름입니다. 이름을 거꾸로 하면 ‘이순신’ 장군이라며 놀리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런 놀림은 기분 좋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 중 압권은 전임 의정부 교구장이었던 ‘이한택’ 주교일 것입니다. 거꾸로 하면 ‘택한이’라 바로 하느님이 선택한 이라 웃으며 자신의 성소를 자랑했다는 어느 자매로부터 들은 주교님 일화도 생각납니다.
또 어제는 지인과 통화하던중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시가 생각나 나눴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귀한 살아있는 성경聖經같은 존재인지 실감케 하는 많이 회자되는 명시입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이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의 마지막 말마디중 ‘환대’란 말에 즉시 21년전 썼던 제 자작 애송시 ‘환대’가 연상되어 다시 나눴습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찌프린 적 있더냐
하루 이틀 몇 날이든
언제나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주차장 옆 코스모스 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다
볼 때 마다 환히 밝아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우리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성경책 같은 귀한 존재입니다. 하여 저는 세 성경의 성독, 렉시오 디비나를 강조합니다. ‘1.신구약성경, 2.자연성경, 3.각자 삶의 성경’ 셋입니다. 어제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주님의 선택, 지혜의 선택, 말씀의 선택이 행복의 첩경이라는 요지의 강론이었습니다.
오늘 강론을 묵상하면서 기막힌 진리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런 선택에 앞서 이미 주님은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사랑의 주님께 대한 환대歡待와 말씀의 경청敬聽의 응답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또 만나는 하나하나의 사람들이 주님께 선택받은 형제자매들이라면 이들에 대한 환대와 경청 역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상담의 기본 자세인 환대와 경청의 자세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도 없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신원은 물론 로마의 모든 신자들을 통해 우리의 신원을 명쾌하게 밝힙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로마 신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신자들 모두가 ‘부르심을 받아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신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자 성도聖徒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 하느님께 사랑받는 하느님의 사람들이자 더불어 교회의 사람들입니다.
이 복된 신원에 맞갖는 삶이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이자 참행복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더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총과 평화를 선사하시니 우리는 늘 성소에 충실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콜로3,12)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라는 오색五色 덕德의 옷을 입은 모습이 바로 우리 선택된 사람의 모습이자 신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선택해 주신 주님을 닮아갈수록 오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우리의 영적 삶일 것입니다. 바로 복음은 이런 자신의 신원을 망각한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자신의 신원에 맞갖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지난 토요일 참행복에 곧장 뒤를 잇는 복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참 행복한 삶을 살았더라면 이렇게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어리석은 일은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회개의 표징인 요나를 보고 회개한 이방의 니네베 사람들을, 또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왔던 이방의 남방 여왕을 본받아, 당대 세대들은 물론 우리 모두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이들보다 더 큰 당신 자신을 보고 회개하여 본래의 부름받은 존재로서의 복된 신원을 되찾으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크신, 언제나 우리를 부르시는 영원한 회개의 표징인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선택된 신원에 맞갖는 환대와 경청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합시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기쁨,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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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표징 이야기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루카 11,29)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일갈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더 확실하고 더 많은 표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으려 하기보다, 표징을 일으켜 자기들이 믿게 해 보라고 예수님을 재촉하지요. 하지만 감각적인 표징에 집착하는 이들은 대개 사람이나 사건 안에서 의미를 캐내는데 게으릅니다. 표징은 저 심저에 있는데 말이지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보내진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징이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은 굳이 예언자를 보내실 것도 없이 그냥 죄악이 만연한 도시 니네베를 단번에 싹 쓸어버리시면 그만이었을 겁니다.
요나가 니네베의 타락과 하느님의 진노에 대해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이 곧 회개했고 하느님도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요나는 아무리 죄인이라도 끝까지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 죄인이 돌아서면 당신도 당장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는 하느님 자비의 표징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하느님은 인류와 화해하시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자께서는 기꺼이 순명하시고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로 오셨고 제단 위에 당신을 스스로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이시고 하느님 자비의 표징이시니까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제1독서는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로마 1,6)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가 로마의 모든 신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자체가 참 위험한 시대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사랑하기에 죽기까지 따를 결단을 내린 이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지요.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분과 동반했던 사도들에게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로 확장됩니다. 이들은 각자 또는 공동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삶의 길에 숨겨진 표징들을 따라가면서 영적 여정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그들 자신이 사도가 됩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로마 1,5)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이들은 자기가 있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표징이 됩니다. 그의 존재가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표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사도들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표징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과 말과 사건에서 그 안에 심겨진 표징을 알아보고,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향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바로 그 표징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따라가다보면 언젠가 표징이 가리키는 분, 주님을 만나게 되지요.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고 이기적으로 돌아간다 해도,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징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고 사람들 안에는 여전히 선한 힘이 흐르지요. 게다가 더 멋진 사실은 우리 자신이 바로 선하고 자애로우신 주님의 표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각자 자신의 역사에서, 지금 머무르는 삶의 자리에서 주님 사랑의 표징을 찾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 사랑의 표징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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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 32)
소중한 인격을
탄생시키시는
공감의
주님이시다.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신다.
삶의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할
주님이시다.
회개를 일깨우고
삶을 일깨우는
스승이시다.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들에게
활짝 열어
보여주신다.
삶의 시작부터
삶의 끝까지
희망 자체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는
깊이만큼
깊어가는
우리들
믿음이다.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지를
다시 묻게 된다.
하늘을 향하듯
가을 햇빛을
간절히 바라듯
주님을 향하는
우리들이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을 통하여
하느님 자녀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께서
누구이시며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하는
이것이 참된
은총이다.
신앙은
마음 깊이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
이곳에 가장
필요한 것은
먼저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삶의 길
관계의 길을
알려주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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