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 윤씨 판도공파 34세손
파평 윤씨의 시조는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莘達)이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공으로 개국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開國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관직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소양(昭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943년 태조 왕건이 승하하고 혜종이 즉위한 후 신라 수도였던 동경(경주) 대도독으로 부임하여 30년간 재임하다 81세에 임지에서 서거했다. 묘는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 아래에 있다.
*삼한벽상공신이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워 공신당의 동,서 벽에 삼한공신의 초상을 그려 넣었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하여 이들을 삼한벽상공신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삼한공신은 개국공신을 포함해 모두 3,900명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30명. 1등 삼한공신에게만 내려지는 최고의 벼슬이 삼한벽상공신이다. 공신당(功臣堂)에 그려진 삼한벽상공신은 1. 의성 홍유 2. 성산 배현경 3. 무송 유금필 4.목주 복지겸 5.평산 신숭겸 6.선산 김선필 7.벽진 이총언 8.안동 김선평 9.안동 권행 10.안동 장정필 11.파평 윤신달 12.동주 최준용 13.남평 문다성 14.청주 이능희 15.김의 이도 16.양천 허선문 17.능성 구존유 18.원주 원극유 19.봉화 금용식 20.해평 김훤술 21.청주 한란 22.냉천 강여청 23.밀양 손긍훈 24. 남양 방계흥 25.금성(나주)나총례 26.부평 이희목 27.서원-파주 염형명 28.강릉 최필달 29.김홍술 30.김락 등이 있다. [고려개국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 30명 중 1등 8명/ 2등 12명/ 3등 10명]
윤신달의 5대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은 파평 윤씨의 중시조이다. [-2세 공신공 윤선지(尹先之)- 3세 복야공 윤금강(尹金剛)- 4세 문정공 윤집형(尹執衡)- ]
(문숙공 윤관(???~1111) 고려 전기 문신,군인, 초상화/조선시대 그림)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 때 합문지후(閤門紙候)와 좌사낭사(左司郎中)을 지냈다. 1107년(고려 예종2년)에 별무반을 조직하여 여진정벌에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17만대군을 이끌고 동북면으로 출전하여 함주(咸州), 영주(英州) 등에 9성을 쌓아 여진을 평정하였다.
(여진정벌 직후 국경비:척경입비도를 세우는 장면, 조선17세기 그림) 이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적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에 책록되었고, 영평현(鈴平縣) 개국백(開國伯)의 작위를 내리고 식읍 2,500호와 식실봉 300호를 하사하였다. 이 후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영평의 본호)으로 삼았다고 한다. 한편, 윤관이 예종에게 신임을 받는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조정관리들이 윤관을 비방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고려의 여진정벌과 동북9성 설치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여진족은 완옌부를 중심으로 모여 무력항쟁을 계속하였고, 사자를 보내 9성을 돌려주고 생업을 편안히 해주면 자손 대대로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9성을 되돌려달라고 애걸하였다. 이에 일부 주화파(온건파)들은 9성을 되돌려 주자고 주장하였고, 윤관(고려군 대원수)과 오연총(吳延寵/고려군 부원수)은 9성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고려는 여진족의 계속된 공세 앞에 9성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또 동북9성의 땅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지키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서 조정에서도 화평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서쪽에 강력한 요나라(거란)와 접경하고 있던 여진은 고려와 화친을 맺는 것이 필요했으나 윤관의 동북9성 축조와 농업이주민으로 말미암아 농경지를 빼아긴 토착 여진족으로서는 강력히 항쟁할수 밖에 없었다. 결국 고려 예종은 6부를 소집, 회의를 열고 32명의 국무대신들 중 재상 최홍사 등 28명이 찬성하고 윤관과 오연총, 예부낭중(禮部郎中), 한상(韓相) 등 4명만이 반대하여 동북9성을 동여진 우야소에 되돌려주는 것으로 하였다.(예종4년, 1109)
[천리장성 동북면 윤관의 동북9성 위치도 ]
1109년(예종4년) 여진족이 갑자기 쳐들어와 길주성이 함락되자 윤관과 오연총이 함께 출정하였으나 공험진에서 기습공격을 당하여 패전하고 여진족과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계속된 여진족의 침범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재상 최홍사 등의 탄핵을 받아 관직과 공신자격이 박탈되고 파면되었다. 그런 얼마 후 예종은 윤관을 복관시켰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 벼슬을 주어 가까이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많고, 몸도 아파 곧 사직했다. 이 후 예종은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감 수국사(守太保 門下侍中 判兵部事 上柱國監 修國史)에 임명시키자 윤관은 표문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예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1111년(예종6년) 서거하시고 나라에서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동북9성 환부 이후 여진족은 아골타(阿骨打)에 의해 통일되어 금나라를 건국하고 만주일대를 장악하였다.(예종10년,1115) 금나라는 고려에 형제관계를 요구했고(1117), 중국본토 요나라(거란)를 멸망시켰으며(1125), 같은 해 고려(인종)에 군신관계를 요구해와 1126년 사대외교를 수용했다. *동북9성환부는 여진족이 힘을 키우는데 도움을 주었고 이는 곧 금나라에 사대외교를 맺게했다.
1130년(인종8년)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가 문숙(文肅)으로 고쳐졌다. 사후 무속에서는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묘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에 있다. 윤관의 묘는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었다. 1332년(고려 숙종1년) 문숙공과 오연총을 위국공신(爲國功臣)으로 내외(內外) 후손 중 한 사람을 초직(初職)에 명하였다. 1437년(조선 세종19년) 함경북도 경성(鏡城)에 문숙공과 오연총의 묘우(廟宇)를 창건하다.(후에 화당(花堂)이라 칭함) 1483년(조선 성종13년) 문숙공과 오연총의 후손들에게 군역(軍役)과 잡역(雜役)을 면하도록 하라는 전교가 내리다.
*대중들의 평가와 비판 ㄴ 동북9성의 환부 : 윤관의 9성 설치는 일단 고려의 군사적 승리를 의미하는데, 여진인(말갈인)은 이를 돌려달라고 애원하기도 하고 군사적 저항을 해오기도 했다. 고려는 여진인의 저항을 막기도 어렵고 서북쪽의 거란(요나라)과도 대치상태에 있었으므로 최홍사, 김인존 등 온건파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예종은 1년 만에 동북9성을 다시 여진인에 넘겨주었다.(1109) - 한영우 '다시 찾은 우리역사' p.234 여진족을 토벌하고 강동6주(거란침입격퇴)와 동북9성(여진정벌)을 쌓아 북방의 방어력을 높인 점을 높이 평가 받는다. 또한 만년에 공신호를 삭탈당하고 불우한 최후를 맞이한 것에 대한 동정 여론도 있다.
[고려 문벌귀족 가문, 11세기 고려 6대 성종~18대 의종] 안산 김씨(김은부), 경원(인주) 이씨, 해주 최씨(최충), 파평 윤씨(윤관), 경주 김씨(김부식)
고려 충선왕 때는 즉위 교서에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 15개(재상지종)을 정하였다. 원간섭기(13세기, 고려 26대 충선왕, 권문세도가문 ) *재상지종 [ 宰相之宗 ] ;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공신, 재상의 가문 ㄴ 언양 김씨 일종과 정안 임태후 일종과 경원 이태후와 안산 김태후와 철원 최씨, 해주 최씨, 공암 허씨, 평강 채씨, 청주 이씨, 당성 홍씨, 황려 민씨, 횡천 조씨, 파평 윤씨, 평양 조씨는 다 누대의 공신 재상의 종족이니 가히 대대로 혼인할 것이다. ; 彦陽金氏一宗 定安任太后一宗 慶源李太后 安山金太后 鐵原崔氏 海州崔氏 孔岩許氏 平康蔡氏 淸州李氏 唐城洪氏 黃驪閔氏 橫川趙氏 坡平尹氏 平壤趙氏 並累代功臣宰相之宗 可世爲婚 [고려사 권제33, 24장 앞쪽~뒤쪽, 세가 33 충선왕 복위.11]
문숙공 윤관은 아들 5형제를 두었으며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파평윤씨 가운데 주로 판도공파와 소정공파에서 대대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파평윤씨의 약80%를 차지한다.
[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 - 윤사윤(尹士○, 1409 己丑生) : 문과(文科) 세종18년(1436) 친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 윤희손(尹喜孫, 1409 己丑生) : 문과(文科) 성종7년(1476)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윤현(尹鉉, 1514 甲戌生) : 문과(文科) 중종32년(1537)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윤희성(尹希聖, 1514 甲戌生) : 문과(文科) 중종35년(1540)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윤담휴(尹覃休, 1544 甲辰生) : 문과(文科) 선조2년(1569)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윤계선(尹繼善, 1557 丁巳生) : 문과(文科) 선조30년(1597)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윤진(尹搢, 1631 辛未生) : 문과(文科) 현종7년(1666)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 윤헌주(尹憲柱, 1661 辛丑生) : 문과(文科) 숙종24년(1698) 춘당대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윤심형(尹心衡, 1698 戊寅生) : 문과(文科) 경종1년(1721)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윤돈(尹O, 1815 乙亥生) : 문과(文科) 헌종15년(1849)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등 모두 1424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340명, 무과 86명, 사마시 934명, 역과 41명, 의과 11명, 음양과 2명, 율과 10명) 조선시대에 들어와 왕족인 전주 이씨(2,719명) 다음으로 파평 윤씨(1,424명)가 가장 많은 과거합격자를 낸 집안이며, 조선시대 왕비 39명 청주 한씨(6명) 다음으로 여흥 민씨(4명)와 함께 두번째로 많은 왕비를 배출했다. 그 다음으로 청송심씨와 안동김씨가 3명을 배출했다.
[조선 왕실과의 인척관계]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 판중추부사 정정공(貞靖公) 윤번(尹璠)의 딸 성종비 정현왕후(貞顯王后) : 우의정 평정공(平靖公) 윤호(尹壕)의 딸 중종비 장경왕후(章敬王后) : 영돈녕부사 정헌공(靖憲公) 윤여필(尹汝弼)의 딸 중종비 문정왕후(文定王后) : 영돈녕부사 정평공(靖平公) 윤지임(尹之任)의 딸 *성종 폐비 윤씨 : 봉상시판사 윤기견의 딸, 함안 윤씨이다.(연산군의 생모) ㄴ연산군 때 제헌왕후, 묘 이름은 회릉으로 추숭→중종반정 이후 모든 관작이 취소됨 *순종비 순정효왕후 :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 해평 윤씨이다.
[최고(最古)의 족보] 조선 중종34년(1539년)의 기해대보(己亥大譜)로 문화 유씨(文化柳氏)와 안동 권씨(安東權氏)와 함께 가장 오래된 족보로 알려져있다. 이후 1920년대에 경신대보가 발간, 1959년 기해대보가 발간되었다.
[주요 집성촌 ] 황해도 황주군, 송화군/ 평북 운산군/ 전남 함평군/ 경북 예천군, 충남 논산시
파평윤씨 세계분파도(坡平尹氏 世系分派圖)(링크) 함안파(咸安派) 남원파(南原派) 덕산군파(德山君派) 문정공파(文定公派) 신녕공파(新寧公派) 대언공파(代言公派) 봉록군파(奉祿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야성파(野城派) 전의공파(典儀公派) 소정공파(昭靖公派) 원평군파(原平君派) 소도공파(昭度公派) 판도공파(版圖公派) - [나는 판도공파 ] 소부공파(小府公派) 태위공파(太尉公派)
[ 판도공파 ] 판도판서를 지낸 판도공(版圖公) 윤승례(尹承禮/14세손)를 파조로 하는 계파 *판도판서: 2성6부 중 호부(국가 수입원을 파악하기 위해서 호적과 양안을 작성하였고, 호구(戶口), 곡물, 부세 등 돈과 식량, 기타 경제에 관한 정무를 맡아보던 중앙관청)의 장(長)(長官) (정3품)이다. 1257년 충렬왕 때 관청명이 판도사(版圖司)로 개칭되었다. 고려 2성6부체제가 원의 내정간섭으로 1부(첨의부) 4사(전리사,판도사,전법사,군부사)로 격하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 영평군(鈴平君) 윤척(尹陟)의 아들 5형제 가운데서 다섯째로 고려 공민왕 16년(1367년)에 신돈(莘旽)의 살해를 모의하다 누설되어 유배되었다가 공민왕 20년에 신돈이 주살된 후에 풀려나서 응양군 상호군(鷹楊軍 上護軍)이 되어 수차에 걸친 왜구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웠으며, 창왕1년(1389) 문하평리(門下評理)로 권근(權近)과 함께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와서 명제(明帝) 지시에 공양왕을 즉위케 하였다.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오르시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와 정3품직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셨다. 이후 고려가 망하자 하늘아래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는(조선 개국 초기) 고려충신들은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거나 두문동72현 처럼 절조를 지켰다. 이때 파평산에 들어가 길재(吉再) 등과 함께 고려를 그리워하면서 노후를 보냈다고 전한다.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으며 사후 작목동 묘좌에 안장되었고, 후에 손녀인 윤번(尹璠/15세손)의 딸이 조선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로 책봉됨에 따라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또한 손자인 공간공 윤형(尹炯/16세손)이 좌익공신에 책훈되어 순충보조공신에 추증되기도 하였다. *좌익공신(佐翼功臣): 조선 세조가 즉위한 직후(1455년,세조1년) 자신의 집권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 총46명
판도공 아들대에서 분파하여, 장방제학공파(윤규), 2방부윤공파(윤보로(尹普老)/15세손), 3방정정공파(윤번)로 나뉘며, 1371~1444, 음사(陰仕)로서 사복시직장(司僕寺直長)에 보직되셨다가 여러 번 옮겨 이조정랑(吏曹正郞) 지사간(知司諫) 판통례(判通禮)에 이르셨다. 외방의 수령(목민관)을 역임한 것이 4곳인데 부죽, 선주,수원, 원진 등이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인수부윤(仁壽府尹)이 되시었다가 연세가 6순이 되시어 사퇴하시고 여생을 평안히 하셨다. 손자 윤암(尹巖)의 공으로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증자되셨다. *가선대부란? 종2품의 봉작(품계), 일종의 작위를 말함, 실질적인 관직이 없더라도 품계가 종2품이 되면 가선대부가 됨, 조선의 관직수는 실제 500여개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 실직(실질적 관직종사자)보다 산직(실직없이 품계만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함, 봉작(품계)는 꼭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특별히 공이 있거나, 나라와 왕실에 경사가 있거나, 전관예우차원에서도 주어졌다고 함, 종2품 가선대부의 실직에는 경관직(내직)으로는 돈녕부의 동지사, 의금부 동지사, 6조 참판, 한성부 좌,우윤, 사헌부 대사헌, 개성부 유수, 경연 동지사, 홍문관 예문관 제학, 성균관 춘추관 동지사, 세자시강원 좌우부빈객, 내시부 상선, 중추부 동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오위 장 등이 있으며 외관직(외직)으로는 각도의 관찰사와 부윤, 각도 병사와 절도사등이 있었고, 종친부의 종2품 군, 의빈부의 종2품 위또한 가선대부이다. (N포털사이트 지식in답변글 참조)
*인수부윤 관직이란? 1423년(세종5년) "예겸제조제"에 의하면 영의정- 종묘서, 봉상시의 도제조 좌의정-문소전,인수부,승문원,사재감,도화원의 도제조 우의정- 광효전,승문원, 군자감,성문도감의 도제조 좌찬성- 예빈시의 제조 좌참찬- 내섬시의 제조 우참찬- 인순부의 제조...등등 을 각각 겸하면서 그 관아의 업무와 관원의 인사,지휘관장...한다고 되어있음. 여기서 좌의정이 통솔했을 인수부(仁壽府)는 정종2년 정안군(훗날 태종,이방원)을 왕세제로 세우고 세제부(동생이기에 세제부,아들이면 세자부가 됨)를 세워 인수부라 칭하였다. 인수부라는 명칭보다는 '세자시강원'으로 더 알려져 있던 곳임, 부윤(府尹)은 부(府)에 소속된 정2품 관직으로(단,모든 부(府)에 부윤이 있었던 건 아님), '세자시강원'의 빈객(賓客)으로, 세자교육의 교도관을 담당했던 관직을 뜻함. 좌의정이 '인수부'의 도제조를 겸직했다고 나오는데, '도제조'란 '자문명예직'으로 실무직은 아니고 '예겸제조제'에 나와있지 않지만, 좌찬성(종1품)이 인수부에서 좌의정을 보좌했다고 함, 따라서 자연히 실무직은 정2품 이하 관리들이 맡았을 것이므로 , 그것이 인수부윤(仁壽府尹) 이다. 즉, 세자 교육의 교도관으로서 실무총책임자이다.(세자교육만 전문적으로 책임지던 직책은 정3품 '찬선'이하임) 따라서 세자와 친분을 쌓아 후대에까지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던 그런 자리이기도 함, 경우에 따라서 청요직(품계는 높지않으나, 고위관직을 오를 수 있는..)으로 가는 통과의례로 보여질수도 있음. 현대시대 관직과 지위와 비교할 때 장관,차관급에 해당하는 관직임. (N포털사이트 지식in답변글 참고: 인수부윤(仁壽府尹)이 지니는 그 영향력이 느껴지지 않나요?)
부윤공 아들대에서 다시 분파,(파평윤씨대동보 p.501~) 참판공파(윤수미(尹須彌) /16세손)와 영상공파(윤태산)로 나뉜다. 1392~1441, 지사간(知司諫)으로서 호조참판(戶曹參判)를 지내셨다.
*참판(參判): 조선시대 6조(六曹)에 속해 있던 종2품의 관직. 각 조(曹)의 부장(副長), 차관(次官) ,예하 주요기관의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제조(提調) :조선시대 최고 책임자가 당하관 이하인 관청에 당상관인 제조를 임명해 당하관들을 관리하게 한 제도. 관리고과, 왕에게의 보고, 건의 등의 일을 주관, 당상관 이상의 재상들이 여러 관서의 일을 총괄하는 겸임제.
첫째 아들 파성군(坡城君) 윤우(尹愚) : 태종 8녀 숙녕옹주의 남편, 좌익공신(佐翼功臣) 둘째 아들 감사공(監司公) 윤자(尹慈) : 세종29년(1447) 식년시 정과 급제 7위, 경기감사를 거쳐 예종1년(1469) 한성(漢成)좌윤(左尹)을 지내심 셋째 아들 정언공(正言公) 윤서(尹恕) : 세종26년(1444) 식년시 정과 급제 6위 진의부위(進義副尉), 판관(判官)을 지내심 넷째 아들 윤유(尹愈) : 은진현감(恩津縣監)을 지내심 다섯째 아들 윤혜(尹惠) : 여섯째 아들 윤민(尹愍) : 단종1년(1453) 식년시 정과 급제 17위 대사헌(大司憲) 좌리(佐理), 문종실록(文宗實錄)기사관(記事官)을 지내심
<참고문헌> 파평윤씨 판도공파보 권지육 부윤공 참판공수미파 도사공희남계 坡平尹氏 版圖公派譜 卷之六 府尹公 參判公須彌派 都事公喜男系
파평윤씨 항렬표(링크)
[조선 3대왕 태종의 자녀] 총29명 중 적녀4명 서녀6명 중 1녀 정순공주 ; 남편 한산이씨 공무공 이계린 2녀 경정공주 ; 남편 평양조씨 강안공 조대림 3녀 경안공주 ; 남편 안동권씨 호분사상호군 겸우군도총제 권규 4녀 정선공주 ; 남편 의령 남씨 소간공 남휘 5녀 정신옹주 ; 남편 파평윤씨 윤항 6녀 정정옹주 : 남편 양주조씨 소회공 조선 7녀 숙정옹주 : 남편 연일정씨 총경공 병조판서 정효전 8녀 숙녕옹주 : 남편 파평윤씨 파성군(坡城君) 윤우(尹愚) (참판공 윤수미의 첫째 아들) 9녀 숙경옹주 : 남편 파평윤씨 좌익공신 제도공 윤암(영상공 윤태산의 둘째 아들) 10녀 숙근옹주 : 남편 안동권씨 좌익공신 양효공 권공
*잉어에 대한 전설 윤신달의 5세손인 윤관의 일대기에 나온다. 윤관 장군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 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이번에는 장군의 뒤를 쫓던 적군이 뒤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윤관 장군에게 다리를 만들어 주었던 잉어 떼는 어느틈에 흩어져 버리고 없어졌다. 문숙공은 그 포구 이름을 모일‘徒’ 비늘‘鱗’자 도인포(徒鱗浦)라 했고, 파평 윤씨는 문숙공 윤관장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 사돈(査頓)의 유래 ㄴ고려 예종 때 여진을 함께 정벌한 대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은 아들과 딸의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어느 봄날 술이 잘 빚어진 것을 본 윤관은 하인에게 술동이를 지게하고 오연총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일 밤에 내린 소낙비로 물이 불어나 개울을 건널 수가 없었다.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고 있는데 개울 건너편을 바라보니 오연총도 술통을 옆에 두고 발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등걸나무 조각을 구해 걸터앉았다. 먼저 윤관이 술잔을 비운 뒤 개울 건너 오연총에게 잔을 권하는 시늉을 했다. 오연총도 머리를 숙여 술잔을 받는 예를 표시한 뒤 스스로 채운 술잔을 비웠다. 이렇게 둘은 등걸나무(査)에 걸터앉아 서로 머리를 숙이며 술잔을 주고받는 흉내를 내며 거나하게 마셨다. 이때부터 자식 사이의 혼인을 제안할 때는 '사돈 하자'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한다. 사돈: 등걸나무(査)에 머리를 숙이다는 뜻의 돈수(頓首)의 합성으로 등걸나무에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문양공 오연총(1055~1116) 고려전기 문신,군인, 중국 사천성 출신 , 문숙공 윤관과 사돈지간이다. 1107. 고려군 부원수로 원수 윤관과 함께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뒤 개선하였다. 1109. 동계병마부원수로서 원수 윤관과 더불어 길주성을 포위한 여진을 다시 공격하다 실패하여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1109. 재상 최홍사(崔弘嗣) 등의 탄핵을 받아 윤관과 함께 관직과 공신의 자격을 박탈 당함. 1110. 다시 회복 되어, 중서시랑 평장사 판삼사사 1112. 수사도 판상서병부사 감수국사 1114. 추충공신에 봉해짐. 1116. 수사도 수태위 감수국사 상주국(守司徒 守太尉 監修國史 上柱國)이 되었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 윤관 장군 묘를 둘러 싼 산송문제 ㄴ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4-1에 위치한 윤관 장군 묘역(약 40,000평 임야/ 사적 제323호)은 조선시대부터 400여 년동안 계속된 산송으로도 유명하다. 1614년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윤관 장군 묘를 파헤치고 부친 등 일가의 묘를 잇따라 조성하자, 이에 반발한 파평 윤씨가 1763년에 심지원의 묘 일부를 파헤치고 청송 심씨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다툼이 발생한 고양지역 군수는 명문가의 다툼에 개입하기를 꺼려 이 문제를 조정에 넘겼다. 결국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는 윤관의 묘와 심지원의 묘를 그대로 두고 양 가문이 합의하도록 종용했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가 조선시대에 왕비를 각각 4명, 3명씩 배출한 외척 가문이었기 때문에 영조도 섣불리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평 윤씨 가문 도사공(都事公) 윤희복이 이에 불복하여 심지원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오히려 '어전발악'을 했다며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 병사(病死)하는 등, 두 가문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영조40년(1764) 영조실록".. 윤관과 심지원의 묘는 파주에 있다. 윤씨가 먼저 이곳에다가 묘를 썼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그에 대한기록을 잃어 버리게 되니 심씨가 그 산을 점령하고는 심지원의 묘를 썼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노력이 있어 왔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2006년 음력 4월 10일, 파평 윤씨 대종회와 청송 심씨 대종회는 파평 윤씨 측이 이장에 필요한 땅 약 2,500평을 제공하고 청송 심씨 측이 윤관 장군 묘역에 조성된 청송 심씨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기로 합의하면서 조선시대부터 392년 동안 이어진 묘지 다툼을 끝내기로 하였다.
[ 문숙공 윤관 장군 묘역과 맞닿은 청송 심씨 영의정 심지원 묘 지도]
<업데이트 2012.12.31>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 1908~1932, 판도공파 32세 본명은 우의(禹儀), 호는 매헌(梅軒), 황(璜)의 아들, 3.1운동 때 왜놈의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소학교를 자퇴하고 독학하여 19세때 야학을 설치, 20세때 농민독본 3권 저술, 22세때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농촌자립과 계몽에 힘썼다. 1930년 상해로 망명,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 1932년 4월 29일 왜국일왕 생일축하 겸 상해사변 전승기념을 거행하는 홍커우공원(虹口公園)식장에 김구(金九) 주석의 지시로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 대장 등을 살상하였다. 公은 현장에서 잡혀 상해의 일본군법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 의거가 후일 장개석 총통이 한국독립을 강경히 주장한 동기가 되었다. 묘소는 서울 효창공원. 1947년 윤의사의 유업 계승위해 덕산에서 월진회 재건. 1949년 충남 예산읍 "윤의사기념비"세움,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1968년 덕산면 시량리 충의사(忠義祠) 사당 창건, 1972년 윤의사 유품과 유적을 보물 제568호로 지정, 충의사일원 "매헌사적지" 지정, 대전시내에 "윤의사동상" 건립 1975년 상해의거 43주년기념, 덕산면 시량리 고택경내 농촌지도자 모습의 윤의사동상 건립. 1988년 서울 양재동 "매헌숭모회관"건립, 경내에 "윤의사동상"건립. 2012년 박근혜 18대대통령 당선인 수석대변인 윤창중씨 '윤봉길 의사와 같은 문중'논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