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버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가끔 꾸는 꿈으로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벨기에 국적인 얀 반 겔더라는 이름으로 필립스 전기회사의 영국 주재원이라는 패스포트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만약 세관원이 슈트케이스의 무전기를 열어보았을 때의 대비책이었다. 그의 영어는 유창했지만 구어적인 표현이 아직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세관은 우방국의 국민이라 해서 까다롭게 따지려 들지 않았다. 그는 런던 행 열차에 탔다. 그 당시만 해도 좌석이 많이 비어 있었고 식당 차도 영업하고 있었다.
그는 로스트 비프와 요크셔 푸딩을 먹었다.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과 유럽의 정치정세도 이야기했다. 이 꿈은 열차가 워털루 역에 도착하기까지는 현실 그대로였지만 그후는 악몽으로 변했다.
말썽은 개찰구에서 일어났다. 문제가 된 것은 그의 위조한 서류들이 아니라 진짜 차표였다. 승차권을 회수하는 역원이 페이버의 표를 보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독일 첩보부의 차표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페이버는 이상할 정도로 독일어 액센트를 강하게 발음하며 항의했다.
'도대체 평소 그 깨끗한 영어 발음은 어디 갔는가?'
"본인 이것을 도배르에서 구입했소."
"제기랄 이젠 끝장이 나는가 보다."
그러나 역원은 어느 틈엔가 그 톡특한 철모를 쓴 런던의 경관으로 변신해서 페이버의 독일어 어조에는 관심도 없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게다가 독일어를 섞어가면서 말을 했다.
"그러면 가방 속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역에는 많은 군중이 붐비고 있었다. 저 군중 속에 끼어들면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한 페이버는 무선기를 넣은 슈트케이스를 버리고 군중 속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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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틈을 뚫고 달려가는 동안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바지를 벗은 상태로 독일마크가 붙은 양말을 신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빨리 상점을 찾아서 바지를 사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마크가 들어 있는 양말을 걱정하면서 꿈 속의 군중을 헤치고 나갔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난 예전에 너를 본 적이 있어."
그는 순간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길바닥이 아니라 자신이 잠들었던 그 열차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에 잠시 안도감을 느끼고 양말의 마크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옆에 앉아 있던 작업복을 입은 사나이가 말을 붙여왔다.
"잘 주무시던데요."
페이버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 사나이를 보았다.
무슨 잠꼬대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을 언제나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아주 기분 나쁜 꿈을 꿨어요."
페이버가 대꾸했다.
사나이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잤던 모양으로 창 밖은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차내에 불이 켜졌다. 누군가가 창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러자 승객의 얼굴이 코도 눈도 다 없어진 타원형으로 모두 바뀌었다.
페이버는 다시 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실제로 그가 영국에 입국하는 데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벨기에 사람을 가장해서 호텔에 투숙했지만, 1주일도 지나기 전에 그는 시골의 묘지를 몇 군데 찾아가서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사망자의 이름을 알아내고 그 이름을 사용하여 3명의 출생증명서를 2통씩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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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숙을 정리하고, 전의 근무지가 맨체스터였던 것처럼 근무 증명을 위조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여 남의 관심을 별로 끌지 않는 일자리를 얻었다.
게다가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하이게이트 지역에서 선거권까지 얻게 되어 보수당에 투표했다. 그리고 생활물자의 배급제가 실시되자 하룻밤 사이에 세 군데의 하숙집에 나타나서 세 개의 가짜 이름으로 된 세 개의 배급통장을 받았다.
이제 불필요하게 된 벨기에 인의 패스포트는 태워버렸다. 만약 필요하다면 -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 언제라도 영국인으로서의 패스포트를 발급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열차가 서고 승객들은 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페이버는 열차를 내리자 그때 비로소 공복과 갈증을 느꼈다. 어제 소시지와 건빵과 물을 먹은 것을 마지막으로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는 개찰구를 나와서 역의 입식 스탠드에 들어갔다. 그곳은 군인들로 붐비고 있었다.카운터에 치즈 샌드위치와 홍차를 주문했다.
"군인 이외에는 안돼요."
카운터에서 냉정히 거절했다.
"그럼 홍차만이라도 좋아요."
"컵을 주세요."
놀란 페이버가 중얼거렸다.
"컵은 없는데......."
"여기도 없어요."
카운터에서 냉정한 대꾸가 되돌아왔다.
페이버는 그레이트 이스튼 호텔의 식당으로 갈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자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까운 퍼브에 들어가 맹물같은 맥주를 마신 후, 생선튀김과 감자튀김을 파는 가게에서 감자튀김을 사 가지고 나와 길에 선 채 먹었다.
곧 배가 불러왔다. 자, 이제 필름현상소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필름을 현상해 보고 그 사진이 제데로 찍혔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 쓸모도 없는 필름을 독일에 가지고 갈 수는 없다.현상을 해보아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면 새 필름을 훔쳐 가지고 다시 한 번 그 장소에 촬영하러 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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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생각만 해도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침입할 장소는 현상처리를 할 수 있는 집이라야 한다. 큰 특약점에서는 고객의 필름을 현상소에 가지고 가서 집중적으로 처리를 하니까 현상 설비가 있지만 작은 상점에는 없을 수도 있다.
작아도 설비를 가진 집은 이 지역에서는 좀처럼 없을 것 같다. 카메라를 갖고 있는, 또는 예전에 갖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가서 찾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는 블름즈베리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달빛이 환한 거리는 조용했다. 오늘 저녁은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다.
도중에서 헌병이 그를 검문했다. 페이버는 일부러 좀 취한 척했다. 헌병은 신분증만 보았을 뿐 묻지도 않았다.
사우삼푸든 가의 북단에서 꼭 그가 찾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창에 코닥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고, 놀랍게도 아직 문을 열고 있었다.
그는 상점으로 들어갔다. 머리숱이 별로 없고 까다로운 인상을 한 사나이가 흰 가운을 입고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상점에 들어온 페이버를 보자 사나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떻게 오셨나요?"
"사진 현상을 하는지요?"
"해요. 그러나 내일 가지고 오시오."
"좀 급한데요."
"하지만 오늘은 안되겠어요."
"당일로 됩니까? 동생이 휴가로 돌아와 있는데 부대에 가지고 가고 싶다고 해서요."
"24시간은 걸려요. 아무튼 내일 와 주시오."
"네, 그러면 그렇게 하지요."
상점을 나가면서 앞으로 10분이면 상점 문을 닫는다는 것을 안 그는 도로 건너편에 가서 상점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