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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IS IS TOTAL WAR 원문보기 글쓴이: 게이볼그
마지막 십자군
드 게클렝이 사망할 즈음되어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피 튀기는 험난한 전쟁은 일단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전과를 종합해 보건대, 잉글랜드 군은 수많은 프랑스 기사들의 목을 살포시 따준다거나, 잡아서 몸값을 뜯고 풀어준다거나, 혹은 농촌이나 도시를 불태우는 기마대 약탈(chevauchee)같은 어쩐지 뭔가 파괴적이고 불건전한 일들에 대해서는 대단한 빠워를 보여주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남은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잉글랜드의 기마행렬은 프랑스 전역을 불지르고, 약탈하고, 프랑스군을 전장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지만, 그것도 공격 패턴이 파악되면서 서서히 약발이 떨어지고 있었다. 대규모 약탈행렬만 해도 11번에 달했으니 이렇게 두들겨 맞고도 상대방 콤보를 못읽어낸다면 진정 닭대가리라고 불려도 할말은 없으리라. 다행히 프랑스의 상징은 닭이건만, 이 때 드 게클렝과 프랑스 지도부의 머리는 닭대가리가 아니라서, 특히 69~80년에 걸친 4차례의 기마행렬은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약탈부대가 만약 툭하고 전장에서 떨어져 나오면 기다리고 있던 드 게클렝과 프랑스군이 슬며시 검은 손길은 내밀어 엉덩이 아픈 추억을 각인시켜 주었고, 기껏해야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농촌에 불지르며 깔짝거리는 사이 프랑스 군은 착실히 잉글랜드의 도시들을 우려빼고 있었다.
이쯤 되니 잉글랜드의 입장으로써는 대박 몇 번 터트렸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리저리 조금씩 잃다보니 어느새 본전치기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프랑스군도 서서히 전력을 회복하고 있었고, 다음 번에 잉글랜드 군이 쳐들어올 때 어떤 패턴으로 들어올지 훤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마대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워졌다. 물론 그렇다고 프랑스도 잉글랜드 군을 완전히 몰아낼 전력을 회복한건 아니었다. 적어도 서로간의 힘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정면 승부라면, 프랑스군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국토가 잉글랜드군에게 범함을 당한 상태에서 용병들 고용해서 꼬박꼬박 봉급 주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자칫 잘못해서 전군을 물에다 말아먹으면 다음에는 어떤 사단이 날지 모를 일이었다.
이럭저럭해서 양군이 정유재란 전의 조선군과 일본군처럼 서로 노려보는 동안, 이제 서서히 좀이란 놈들이 바늘을 들고 기사들의 성감대...가 아니라 대뇌피질을 쿡쿡 쑤셔대기 시작했다.
전투는 기사들의 생애요, 명예와 부를 얻는 길이요, 또한 영광이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끝나자 이 기사들이 죄다 중세생활백수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유럽이란 동네가 대규모 전투가 없어도 어디간에서는 치고박고 하는 곳이니 취직 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용병들이 그랬는데, 이들이 새롭게 발을 디딘 시장은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치고 박는 현장이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다음 번에 살펴보기로 하고-- 이번엔 좀 더 고귀하고 높으신 분들인 기사님들의 사정을 들여다보자.
아니, 명색이 기사인데 용병들같이 저런 곳에 끼어들기가 좀 꺼림칙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교황님은 자기를 도와 북이탈리아의 싹수머리 없는 도시들을 조지는 기사들에게 죄를 사해 주리라는 보장도 해주지 않으셨다. 하기사 교황님 개념이 씨벌교황이 아닌 이상에야, 블로그에 댓글좀 달아줘ㅠ.ㅠ라며 찌질댈 수는 없지 않은가. 북이탈리아의 도시들도 전부 카톨릭인데, 교황님 낯짝이 아무리 90mm 전면 장갑으로 도배를 했다고 해도 그렇지 카톨릭 교도 때려잡는데 "성전~!!!"을 부르짖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기사들은 북이탈리아로 진출하는 일이 꺼림칙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사들에게 "머나먼 모든 것의 이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정말 그 곳은 "머나먼" 곳이었다. 혹시 들어보았는가, "리투아니아"란 곳을. 저 멀리 북동쪽에 있는 춥고 습한 나라를.
물론 백년 전쟁 와중에서도 십자군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쪽 모두에게 충성 의무를 지는 영주들은 더더욱 그랬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잘못 편들었다가는, 아니 잘들어도 쪽박차기 십상인 상황이었다. 이번 선택지에서 얻을 수 있는 히로인은 알퀘이X나 X이버가 아니라 라오X나 켄X로였다.
한 가스코뉴 기사인 Aymenion de Pommiets는 현명한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십자가를 들고 예루살렘과 성지를 도는 순례자가 되겠소"하고 떠나버렸다. 이 이후 선택지에서 ALT+F4를 누른 이 분의 운명이 어찌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드문 선택은 아니었다.
그래도 에드워드 3세는 범 카톨릭 세계적인 십자군의 열정을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바꿔놓는데 성공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고귀한 가터 기사단으로, 기사들의 "고귀한" 성품과 승리에 대한 증명이 되었다. 하지만 뚜렷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까지 집중도를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6월 모의평가 끝나고 월드컵이 다가오는데 수험생들이 집중할 수 있으랴-_-^ 실제 있었던 일이지만, 2002년에는 갑자기 선생님이 들어갔더니 교실이 텅 비어있고 칠판에 "태극 전사들이 싸우는데 공부가 웬말이냐! 가자! 광화문으로!"라는 글씨가 써져 있었던 적도 있었다던가-_-
그나마 지지리도 안받쳐주게, 교회는 백년 전쟁에서 죽은 기사들이 구원을 받는 다는 보장도 내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한 술 더 떠서 한 수도원 연대기 작가는 더더욱 음침하고 오싹오싹한 다크 오오라가 물씬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립흘을 달아놓았다.
"안타깝게도, 이 사건은 지옥에 있는 찌질이들만 조낸 좋아할만한 일이오. 차라리 그 ?d들이 이교도와 싸워 천상의 왕국과 카톨릭 갤러리의 청결도를 유지하는데 피를 쏟았다면 훨씬 개념있다는 소리를 들었겠소만."
교회가 이 모양이니, 기사들은 명예와 개념있다는 소리를 위해 쉬는 시간마다 매점으로 달려가듯, 틈만 나면 십자군하러 달려가기도 했다. 1360년 맺어진 브르타뉴 조약으로 잠시 쉬는 시간이 찾아오자 다수의 잉글랜드-가스코뉴 기사들은 단체로 키프로스로 건너가 알렉산드리아 원정에 참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 아무리 "셀 수 없는 이교도와 싸우는" 용맹성과 명예욕이 대단하다고 해도, 진짜 셀 수 없는 이교도와 싸울 수는 없지않겠는가.
특히 이 시기에는 그랬는데, 이즈음 되어 저 동방의 투르크인이 크게 팽창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 넣고 유럽에까지 발을 디뎌 맹렬하게 팽창하고 있었다. 소규모 기사들이 잠시 난장판을 저지르고 돌아오기에는 투르크인의 언리미티드 빠와~가 지나치게 후덜덜했다. 할 수 없이 기사들은 그들이 범하기 쉬운 좀 더 무난한 적을 찾았던바, 그 곳은 저 멀리, 리투아니아에 사악한 이교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교도들과 싸우는 선봉에는, 에이지 2에서 코끼리에 버금가는 후덜덜한 근접전 능력을 자랑하시는 튜튼 기사단이 있었다.
튜튼 기사단
총 300년에 걸친 기사단의 기나긴 욕사 속에서, 투르크인은 별의별 평지풍파와 잦은 오컬트적, 심지어 민족적 대상이 되어 왔다. 예컨대, 그들은 몽골군에게 캐발리는 역할을 맡기도 했고--실제 이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리그니츠 전투에서 사망한 기사단장 포포 본 오스테른은 전투 후 10년 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때 전사했던 쉴레지엔 공과 오스테른이 같은 교회에 묻혀있기 때문에, 튜튼 기사단이 참가했다고 기록된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후에 힛총통과 슷할린씨는 각각 "게르만"과 "슬라브"를 외치며 다시 기사단을 역사로 끌어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기사단의 최초 목적은 의료 행위로, 1190년 저 먼 열사의 팔레스타인에서 창설되었다. 물론, 이들의 행위라 함은 본래 병에 걸린 순례자들을 보살피는 일이었건만, 이들에게는 선배 둘이 있었으니 바로 유명한 성당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다. 그리고 선배들의 행각을 보아하건대, 튜튼 기사단이 정말 순백의 의료집단으로 남을 지에 대해서는 이미 만들어진 순간부터 싹수가 샛노랬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가 성지에 군사를 이끌고 참가하자 튜튼 기사들의 입지도 크게 변했다. 이들은 이제 팔레스타인 말고도 저 멀리 북독일까지 슬금슬금 세력권을 뻗치기 시작했다. 대부분 독일인으로 이루어져 있던 튜튼 기사단은 저 멀리, 주로 프랑스에서 지원군을 받아 무슬림들과 싸우던 선배들과는 달리,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인력을 충당해 세력권을 넓힐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 튜튼 기사단의 팽창은 강력하게 이루어졌고, 적어도 1286년까지 추운 프리슬란트의 늪지대와 프로이센이 기사단의 영향력 하에 놓였던 것 같다. 한편, 여기에 튜튼 기사단의 원정에 박차를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1290년 아크레의 함락이다.
십자군 최후의 거점이었던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났다. 다행히 십자군을 찾는 분들은 튜튼 기사단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기사단 입장에서는 미슷허 ya와 함께 목욕탕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 떨어진 비누까지 줍는 격이었다. 드디어, 기사단은 세상을 오지게 들썩이게 만들 힘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새로운 탄력을 얻었으니, 곧 다음에 범할 상대는 뻔했다. 바로 리투아니아였다.
리투아니아는 유럽에서는 마지막까지 이교도 국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강력한 뇌전의 신, 페룬의 가호를 받는 용맹스러운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강력한 두 카톨릭 국가를 상대해야 했다. 그 중 하나는 폴란드였다.
뭐, 미디블 토탈워 하다보면, 처음에 폴란드만큼 안습인 나라도 찾아보기 힘들고(...그 처참한 재정수입...), 거기 영주의 직함은 무려 "약소국 폴란드의 공작"이라는 지극히 위엄이 철철 넘쳐서 안구에 쓰나미가 넘치는 지경이지만, 실제 폴란드가 약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적어도 리투아니아에게는 아니라고 하는 편이 옳다. 강력한 폴란드 군대와 리투아니아군은 해가 지날 때마다 치열한 전투를 벌여왔다. 그렇긴해도 리투아니아인에게 폴란드보다 더 무서운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주저없이 손가락을 들어 서쪽을 가리키며 말할 것이다.
그것은 성전을 부르짖으며 달려드는, 튜튼 기사단일거라고.
튜튼 기사단과 리투아니아 사이의 처절한 격전은 단기간에 끝나는 싸움이 아니었다. 둘은 1세기 이상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니, 가히 동유럽의 백년 전쟁이라는 칭호를 겸양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나 이들의 격전은 백년 전쟁보다 훨씬 폭력적이고 위태로운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도 백년 전쟁 당시 귀족이나 영주들이라면, 상대편에게 범해진 영주나 기사는 지갑이 좀 가벼워지고 통장이 마이너스가 된다거나, 하는 비교적 가벼운 수준의 피해만 입고 아픈 엉덩이를 감싸고 돌아올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쪽 귀족들은 적어도 엉덩이 아픈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다.
예컨대, 사로잡힌 기사나 지휘관들은 산채로 장작단 위에서 통구이가 된다거나, 혹은 연기에 의식이 흐릿해지고, 깨어나보니 영혼은 아스트랄계에 들어 이교의 신들이 제물로 걷어간다는, 무슨 판타지소설 흑마법사에게나 있을법한 일을 당해야 했다(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뭐, 그렇다고 리투아니아쪽 상황은 나았냐고 싶으면 그도 아닌가 보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처한 리투아니아인들은 집단자결을 마다하지 않았던 곳으로 보아, 잡힌 포로는 물고문, 불고문, 전기고문, 고추냉이고문, 등에다 얼음 집어넣기 고문, 남자고문, SM을 비롯해 갖은 쾌감...이 아니라 고통을 맛보아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기사단과 리투아니아 사이의 전쟁을 촉발시킨 쪽은 다름아닌 로마의 교황님이었다.
뭐? 교황님이? 이거야 말로 옆자리에 있던 미소녀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며 "내 정체는 정보통합 사념체에 의해 만들어진 대 유기 생명체 콘택트용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야."라는 무슨 이해없는 말을 지껄일 때의 경악과 공포와도 맞먹는 것이었다.
(정보통합사념체에 의해 만들어진 대 유기생명체용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
그것도 꽤나 아스트랄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요즈음들어 유럽으로 건너온 성당기사단에 콩고물이 좀 넉넉하다는 소문을 들으신 교황님은 몰래 프랑스의 단려왕 필리프 4세와 동맹을 맺고 성당기사단을 배신 때려 불태워버리셨다. 물론 자크 드 몰레이의 처절한 절규 때문인지는 몰라도, 교황님은 성당 기사단 골로 보내고 1년 후 자기도 같이 천국 특등석 예매표를 받아 떠났던 바, 역시 세상은 권려과 돈, 빽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라기보다 이 사건은 다른 기사단의 경각심을 곧추세우게 만들었다. 결국 1309년, 기사단장은 단호한 결단을 내려 제노바에 있던 본부를 저 멀리, 마리엔부르크라는 북방의 도시로 옮겼다.
이 천도(-_-)는 꽤나 나이스한 타이밍이었던 것 같다. 성당기사단이 감옥에서 군만두를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6월에 교황이셨던 클레멘스 각하는 다른 기사단을 비겁한 책략을 쓰는 자들로 몰아붙여 맹비난을 쏟아붓기 시작하셨다.
뭐, 교황님께서 "대가리 밟아터트리고 배때지 천갈래 만갤로로 찢어죽이기 전에 ...(중략)... 본인 홈페이지 기어들어가서 본인을 숭배하고 찬양하라 명령이니까 내 글 지우거나 내 말에 불복종하면 니 자손 천대만대가 길바닥에서 가장 비참하게 빌어처먹고 니 일가족을 공개처형하고 니 집을 불바다로 만들것이다 알아처먹었느냐"같은 악플보다야 훨씬 무서운 것이었던 바, 튜튼 기사단은 좀 더 나은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뽑아낸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교황님에게 우리가 얼마나 절륜하게 이교도를 범하는지를 보여드리겠삼!"
이리하여, 기사단은 그들의 절륜한 정력을 자랑하기 위해 옆에 있던 리투아니아를 향해 송곳니를 들이밀었다.
오랜 전란의 시작은 순수한 종교보다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이유에서 촉진된 것이었다.
십자군 투어
튜튼 기사단의 군사작전의 특징은, 이놈의 전쟁을 일종의 관광 패키지로 이용했다는데 있다.
"십자군 여행! 이 여행에 참가해서 이교도를 죽이시면 파격적인 죄사함과 사은품을 드립니다! 북국의 음습한 날씨와 최고급 숙박시설, 이교도를 잡아 족치는 쾌감이 단돈 4,000 파운드!(서비스에 따라 가격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어찌되었건 튜튼 기사단은 멋진 십자군 관광지였다. 이 곳에 참가하는 기사들은 오래 있기보다는 잠시 머물러 있다가 돌아갔는데, 그 때마다 무용담과 좋은 추억, 죄사함을 받았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스트레스로 가득찬 업무로 돌아올 수 있었던 셈이다. 물론 북국의 구름 잔뜩 낀 음습한 날씨 대문에 비행기는 물론이고 원정대도 못뜨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부르고뉴 공작이 원정이 가능하냐고 물어봤더니, 기사단장, 즉 그랜드 마스터는 "신의 뜻과 의향, 그리고 날씨에 달려있습니다"라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런 일시적인 십자군은 기사들에게 찬양을 받았다. 크레시 전투에서 가장 용맹스럽게 싸운 보헤미아의 장님왕 얀은(원문에는 푸아티에에서 전사한 보헤미아왕 John이라고 되어 있는데...역시 크레시에서 죽은 장님왕 얀이 맞겠지?) 튜튼 기사단을 "리투아니아와 이교도, 기독교 세계의 역병같은 자들을 가로막는 불괴의 벽"이라고 찬양할 정도였다. 물론 이 원정 투어 역시 기독교 세계의 기사들이라면 놓치기 힘든 기회였다.
특히 전편에도 자주 언급되었던 부흐의 대성주 장 드 그레일리 역시 휴전기간 동안에 십자군에 참가했는데, 그는 용맹히 싸웠을 뿐만 아니라 되돌아 오던길에 귀족 부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비천하고 추악한 농부들에게 러쉬를 감행해 혹은 뼈와 살을 분리시키고, 혹은 범하며, 절륜함을 과시하고 레이디들을 구함으로써, 기사로써 더 높은 명성을 얻게되었다나 뭐라나. 어찌되었건 수많은 기사들이 이 십자군 원정의 가치에 대해 "이것은 좋은 것이다...키시리아님께 전해드리도록"이라는 평가를 했는데, 이런 원정들은 백년전쟁 당시 약화되고 있었던 범 기독교 세계적 기사의 결집을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았다.
다음 권주가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나 있다.
<<술을 오지게 마시고는
바다에 대해 이야기하리.
산티아고의 순례자,
프러시아의 십자군,
그리고 다시 쾌활한 노래를 부르리.
다시 술을 오지게 마시리.
그 중에서 가장 센 놈이
탁자 아래로 격침될 때까지!>>
더비의 백작이자, 후에 국왕 헨리 4세가 되는 헨리 볼링브로크는 기사단이 맞은 가장 고귀한 잉글랜드 손님 중 하나였다. 물론 그의 모험은 초서의 기사다운 심한 구라와 허풍으로 가득차 있어서, 현실과는 65535광년 이상 떨어진 김억추 행장록과 비견될만 할...지는 모르겠지만, 부동산 투기만큼 뻥튀기 되었음은 사실이다. 1390년 그가 십자군에 참여했을 때, 연대기 작가는 "그는 훌륭한 기사들을 데리고 있어서 공성전에 큰 전력이 되었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 분은 기어이 2년 후 참가한 원정에서는 아예 놀러가러 작정했는지 겨우 100여명만 이끌고 참가했는데, 그 중 6명은 음유시인이었다. 대신 그는 좀 더 다른 방법으로 기사단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는데, 은식기를 사고 보트를 빌리고 이리저리 놀면서 쓴 돈이 무려 4360파운드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1395년에는 튜튼 여행사의 독점적 지위를 더더욱 굳혀주는 상황이 발생했으니, 바로 니코폴리스에서 십자군과 투르크군 사이의 치명적인 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 날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은 일단 투르크군의 예봉을 피하고 나서 싸우자는 헝가리 기사들의 건의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만약 하늘이 무너진다면, 내가 이 랜스로 받아낼 것이다!"
(x랄한다-_-)
지가 무슨 무림지존이라도 되는 줄 알았던 이분들은, 과연 세상을 오지게 들썩이게 만들 모 단체 단장님 정도는 되어야 해낼 임무를 완수할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초반 공세는 매서웠다. 순식간에 1열의 바시바조우크들이 붕괴되었고, 2열의 예니체리들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프랑스 기사단에게는 다행히도, 이 예니체리들은 400미터 밖에서 플레이트를 일격관통하고 혼자서 아즈텍군을 궤멸시키는 T모씨판 예니체리하고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곧 기사들의 분전에 밀려 패주하기 시작했다. 과연 프랑스 기사단의 크고 아름다운 절륜함은 최고였던 바, 이들은 지치지 않고 적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곧 투르크의 시파히들이 몰려왔지만 이 절륜한 기사들인 시파히들마저 언덕 위로 몰아 붙였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절륜함이라도 한계는 있기 나름이다. 몰려온 투르크군의 본진인 제 3군은 프랑스 기사단에게 역습을 가해 붕괴시켰다. 그 이후는 처참한 살육전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바예지드는 그날 기사들을 살려줄 마음도 있었다고 하는데, 죽어 쓰러져 있던 예니체리들의 시신을 보자 크게 분노해서 기사들의 목을 따주라는 친절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니코폴리스 전투의 결과, 투르크군대를 향한 십자군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만큼 튜튼 기사단이 십자군의 독점 기업으로서 갖는 위상도 커졌다.
더군다나 백년 전쟁 이후 실업철이라 때도 때인만큼, 일거리를 찾는 실업자...보다는 기사들도 많았다. 예컨대 프랑스의 원수인 부시코 경은 "이제 프랑스에서 전장을 찾기 어려워" 십자군에 참가했다고 한다. 하긴 일상 생활에 흥미가 없는 분들이라면 이 참을 맞아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를 찾아나서든지 전장으로 나서든지 해야할 것이다. 다행히 이 기사들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를 선호할 것이다.
물론 기사들이 십자군에 참가하는 모티브는 이것 말고도 더 다양했겠지만, 튜튼 기사단이 십자군 관련 책임자가 된 것은 확실했다. 물론 때로는 놀러온 분들도 많았다고는 해도 적어도 기사단의 금고에는 큰 도움을 주었다. 1352년부터 82년까지 그랜드 마스터였던 Winrich von Kniprode는 31년간 기사단장에 있으면서, 이런 순례자들을 이용해 [국제적인 대군]을 조직해 효과적이고 냉혹하게 리투아니아를 범했다. 물론, 전리품도 이 [국제적인 대군]들이 따로 나눠가졌다.
위험한 국경
Kniprode와 그의 계승자들이 사용한 대 리투아니아 전략은 어찌보면 잉글랜드군의 기마대 초토화작전과 유사하다. 리투아니아는 춥고 몸이 후덜덜 떨리는 곳이라, 대군이 오래 주둔하기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침입해서 불태우고 삥뜯으며 그 지역을 천천히 점령해 가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 방식에는 역시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이 사이에 기사단은 여러 전술적인 혁신을 선보였지만, 그 때마다 리투아니아인은 이를 즉각 받아들여 역으로 기사단에게 써먹었다. 곧 리투아니아의 요처마다 벽돌 요새가 세워지고, 얼마 안되어 리투아니아군의 대포가 기사단의 성채를 향해 입에서 바주카를 날렸다.
또 하나 리투아니아인이 유리한 것은 바로 수송력이였다. 리투아니아와 기사단의 성채는 대부분 강을 따라 건설되어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리투아니아가 상류고 기사단이 하류였다. 제아무리 절륜한 미슷허 야라고 해도 커브길에서 스피드를 줄이지 않는 타쿠미 86을 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사단 역시 "어째서냐, 내가 먼저 썼는데!"하는 사이 리투아니아인은 강 하류로 대포를 내려보냈다.
여담이지만, 이는 신라와 백제가 처했던 상황과도 유사하다. 즉, 백제가 고구려군을 몰아내고 한성을 점거하자 측면이 위협받은 고구려군이 한강 상류에서 물러났고, 신라 역시 한강 상류를 점거했다. 이후에 백제는 고구려는 물론, 신라에게 측면을 위협받게 되었다. 백제가 아무리 신라보다 강했다고 해도, 투입될 수 있는 물량의 기동성의 차이와 고구려의 존재 때문에 백제의 한성 지배는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되어 백제가 신라의 배신으로 인한 기습으로 물러났든, 일본서기에 밝힌대로 스스로 물러났든간에 성왕은 통한의 눈물을 뿌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뭐, 그런 셈이지요.)
튜튼 기사단으로 돌아가보면, 기사단은 1381년 최초로 대포를 활용했지만, 3년 뒤에는 역으로 리투아니아인이 Marienwerder 성을 공격하는데 사용했다. 성은 6주간의 포격을 받았다. 기사단 역시 대응 사격을 해 트레뷰쳇의 카운터 웨이트를 박살내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요새는 리투아니아인에게 점령되었다.
그렇다고 기사단이 전력을 다해 리투아니아의 중심부로 치고들기도 어려웠다. 이 곳은 대대로 춥고 음습한 곳인데다,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적한테 맞아죽는 것보다 굶어죽기 쉬웠고, 철을 잘못 만나면 강이나 질척질척하고 끈적한 습지에 빠져죽을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리투아니아로 가는 길에는 많은 강이 있는데, 당시 수송 능력으로는 이 강을 건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 기습적인 폭우나 폭설, 서리도 무서운 적이었다. 폭설이 오는 때에는 무수한 병사들이 동장군에게 범해지는 것을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었다. 봄이 와도 이놈의 폭설은 철저한 적이었다. 눈이 녹으면서 리투아니아의 넓은 평원은 진흙밭으로 변해버리게 된다. 폭우 역시 무서운 적이었다. 1332년 폴란드군은 강을 건너는 사이 갑자기 내린 폭우로 꼼짝 없이 두 강 사이에 갇혔고, 1348년에 달아나던 리투아니아군은 갑자기 내린 폭우 때문에 강이 불어나 퇴로가 막혀 뒤따라오던 기사단에게 범해짐을 당했다.
물론 병사들도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정말 안습인 사람들은 평민들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잔혹행위는 백년 전쟁 당시의 브르타뉴나 노르망디보다 더했으면 더했다. 특히 튜튼 기사단이 벌이는 잔혹행위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1372년, 한 침공부대에 대해서는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특별히 선발된 백 여명의 전사와 함께 이교도의 마을을 불태우고 교란시키기 위해 적의 영토로 진입했다...그는 아무 경고도 없이 네 마을에 들이닥쳐 막 잠에 빠져든 마을 사람들에게 검을 휘둘렀다.---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실제 백년 전쟁 와중에서도 수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이에 대해 연대기 작가들은 잉글랜드 병사들이 남편들 앞에서 아내를 강간하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계속해서 강간하겠다고 협박했다고한다. 물론 이 때에도 엄청난 학살이 존재했고, 영주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리투아니아에는 아예 그런 것도 없이 처참한 살육이 벌어지곤 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돈있고 빽있는 분들은 이런 쪽에서도 특권을 보았다. 초기에 벌어졌던 바베큐와 최루가스 질식보다는 좀 더 세련된 포로 처리방식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외국의 높으신 분들이 십자군에 참가하면서 기사단에게 수용되었다.
즉, 유럽식으로 포로를 잡고 몸값을 받는데 익숙해져 있는 높으신 분들은 포로의 목을 잘라 밀랍에 절여 돌려보내주는 것보다는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돈냄새를 맡은 기사단은 이 방식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특히 타국의 높으신분들은 오래 머물러 있을 형편이 못 되었으므로, 그들은 기사단에게 포로를 팔아넘겼다. 그러면 기사단은 여기에 높은 마진을 붙여 다시 몸값을 받으려고 협상을 벌이곤 했던 것이다.
첫댓글 이.. 이건 지금 읽을 수 있을만한 정보량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