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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연두
홀로 화두 몰입 4년째 가슴속에서 태양 솟아
젊디 젊은 청년이 천하제일사찰이라는 대찰에 와 승려들에게 반말지거리를 하자 승려들은 별 미친놈 다보겠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대장부였던 혜봉 선사에게 데려다주었다. “너를 거드름피우게 하는 물건이 무엇인고?”
혜봉이 아만에 대한 철퇴이자 그의 윤회를 끊어낼 검을 던져준 것이다. 혜봉은 고봉의 기고만장한 아만심이 꺾어지길 기다린 것인지 행자생활을 한 지 몇 개월이 지나도 머리를 깎아주지 않았다. 스승을 따라 상주 남장사로 간 고봉은 어느 날 새벽에 법당에서 예불을 마친 뒤 스스로 머리카락을 깎아버렸다. 고봉의 출가길은 처음부터 독불장군 식이었다.
만공이 고봉의 종아리를 내리쳤다. 모진 매질에도 고봉의 얼굴은 구름을 시비 않는 하늘이었다. 경계에 끄달리지않는 고봉의 견성을 인정치 않을 수 없던 만공은 드디어 (깨달음의) 인가 법어를 내렸다.
古峯 禪師
한국의 선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린 스님으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스님이 바로 숭산 행원 큰스님인데, 이 숭산 행원 스님의 은사 스님이 바로 저 유명한 고봉 경욱 스님이다.
고봉 스님은 1890년 9월 29일, 경북 대구시 지동(池洞)에서 출생, 15세가 되기 전에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1911년 9월에 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남장사에서 이혜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 경욱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유일한 제자 숭산행원의 스승 1915년 4월 경북 팔공산 파계사 성전에서 좌선,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개오의 노래를 불렀다. 비바람 가고 나니 밝은 태양 솟아냈네 푸른 산 흰구름 눈앞에 뚜렷하니 흐르는 물소리 시원도 하여라. 그 후 스님은 1922년 충남 예산의 덕숭산 정혜사 만공 스님께 전법입실 건당하고 양산 내원사에서 혜월 스님과 선농생활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후 정혜사 조실을 지냈고 마곡사 은적암, 봉곡사, 복전암, 미타사 조실을 거쳐 서울 강북구 수유동 화계사 조실로 계시다가 1961년 8월 29일 세수 72세, 법랍 61세로 열반에 들었다. 혜월 스님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미 간단히 기술한바 있었지만, 혜월 스님이 양산의 내원암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젊은 고봉 스님이 대구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왜경에게 체포된 후 마산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출옥하여 곧바로 찾아간 곳이 혜월 스님이 계시던 내원암이었다. 그 때 혜월 스님은 산을 개간해 농토를 만들기 위해 젊은 수행자들을 동원, 혹심한 운력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젊은 수행자들이 온종일 고된 운력을 하는데 비해 먹거리가 너무 형편 없었다. 젊은 고봉도 별수 없이 이 고된 황무지 개간사업에 동원되었다. 일은 고되기 짝이 없지, 먹거리는 부실하지, 이대로 가다가는 젊은 수행자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불만을 터놓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혜월 스님이 부산에 볼일을 보러 나가셨다. 고봉 스님은 이때다 하고, 혜월 스님이 애지중지 키워오던 소를 끌고 양산장터로 끌고가 팔아버렸다. 그리고 그 돈으로 몇몇 수좌들과 함께 곡차를 한 잔 걸치고 내원사로 돌아와 소 판돈을 공양주에게 내놓으며 “대중공양에 맛있는 반찬을 장만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혜월 스님이 절에 돌아와 보니 소가 없어졌는지라 날벼락이 떨어졌다. “대체 소가 어디로 갔느냐? 어서 나서거라! 어느 놈이 소를 어찌 했는고?!” 그러나 대중들은 감히 어느 누구도 얼른 나서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젊은 고봉이 입고 있던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혜월 스님의 방안으로 들어가 “움머어- 움머어-” 소울음 소리를 내며 기어 다녔다. 혜월 스님은 곧바로 고봉의 소행이었음을 알아차리고 고봉의 엉덩짝을 철썩 때리며 한마디 했다. “어 녀석아 내가 찾는 소는 어미 소이지, 이런 송아지가 아니다!” 이 때 젊은 고봉이 곧바로 대답했다. “새끼소가 어미 소 되지, 어미 소가 새끼 소 됩니까?” “새끼소가 어미소 됩니다” 고봉 스님이 도반 금봉 스님과 함께 충남 예산의 덕숭산 정혜사로 천하의 선지식 만공선사를 찾아갔다. 고봉은 지대방에 들어 앉아 만공선사께 인사도 드리지 않고 한나절 동안이나 먹을 갈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금봉이 고봉에게 물었다. “뭘 하려고 먹물을 이리 많이 가는가?” “사진을 찍으려고요...” “무슨 사진을 먹물로 찍는단 말인가?” 고봉은 대답대신 옷을 훌훌 벗고 온몸에 먹물을 잔뜩 묻혀 벽지 위에 앞뒤로 몸도장을 찍었다. 뒷몸도장을 엉덩짝의 모양에 탐스러운 복숭아 모양이요, 알몸도장은 기이한 모양이었다. 물기가 마르자 고봉은 그 백지 두장을 들고 조실로 들어가 만공 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그 괴이한 백지 두 장을 스님 앞에 내놓았다. 만공 스님은 노기등등하여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이 지금 법으로 묻느냐, 그렇지 않으면 장난을 하는 것이냐? 만일 법으로 묻는다면 고금에 이러한 법은 없다. 그리고 허구 많은 법과 이야기거리가 있는데 이런 것으로 법을 묻느냐? 장난으로 했다면 내가 너희들보다 무엇으로 보아도 위인데, 함부로 이런 장난을 해?! 이놈들 둘 다 종아리를 걷어라!” 고봉과 금봉은 꼼짝없이 종아리를 걷어 올린 채 만공 스님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만공 스님은 두 엉뚱한 젊은 수좌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두 젊은 수좌는 ‘아얏’소리도 하지 않은 채 실컷 두들겨 맞았다. 한참동안 매질을 하고 난 만공선사가 두 젊은 수좌에게 물었다. “매맞은 기분이 어떠하냐?” “시원합니다.” 고봉이 얼른 대답했다. 무심(無心)으로 때리고, 무심으로 맞은 매.... 그것은 벌로 때린 매가 아님을 스승과 제자가 주고 받는 법거량이었는지도 모른다. 매를 맞고 나서 “시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온갖 번뇌망상에 몸부림치며 법을 묻는 젊은 수좌들에게 혼침과 번뇌와 망상을 일시에 놓아버린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었다. 만공 스님은 이 때 벌써 고봉의 그릇을 알아보고 법을 전했다. “법은 꾸밈이 없는 것. 조작된 마음을 갖지 말라.” 이후부터 고봉은 덕숭산에 머물면서 후학들을 제접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했으니 만공 선사와 고봉 선사는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덕숭산맥을 이어주고 이어 받으며 찬란한 한국불교의 내일을 마련하고 있었다. 숭산(崇山) 법호 하나에 담긴 스승의 뜻 고봉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정혜사 만공 스님의 문하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이 무렵만 해도 삼천리강토가 가난했던 탓에 덕숭산 정혜사의 절 살림도 늘 빈궁하기 그지없었다. 수행자는 많고 식량은 모자라니 그해 겨울 삼동안거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정혜사에 있던 모든 수행자가 걸망을 메고 양식을 탁발해 오기로 하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 후 어떤 분은 열흘을 탁발한 뒤 걸망에 곡식을 가득 짊어지고 돌아왔고, 또 어떤 분은 보름을 탁발한 뒤 곡식을 짊어지고 절로 돌아와 양식을 보탰다. 당나귀 타고 온 괴이한 탁발 행각 그런데 유독 고봉 스님만은 괴이하게도 보름이 지나 당나귀를 타고 한들한들 정혜사로 돌아와 그동안 탁발한 양식은 한 톨도 내어놓지 않고 오히려 타고 온 당나귀 품삯을 만공 스님더러 물어달라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만공 스님이 고봉에게 물었다. “그동안 탁발한 것은 어찌하고 오히려 타고 온 당나귀 값을 내놓으라고 하는가?” “소승이 탁발한 곡식은 모두 다 가난한 사람들 주고 왔습니다.” “그렇다고 당나귀를 타고 와서 그 삯을 내달라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러자 고봉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만공 스님께 대답했다. “스님, 그동안 소승이 보름동안 절에서 나가 살다 왔으니 그것만 해도 쌀 한말 정도는 벌어놓은 셈이요. 또 소승이 그동안 절에 머물며 용돈을 썼다면 그 또한 몇 십량은 족히 넘을 것이니 그 두 가지만 계산해도 당나귀 값이 훨씬 쌀 것입니다.” 만공 스님은 하도 기가 막혀 더 이상 할 말이 잃었다. “자네는 참 어찌할 수 없는 똑별난 사람일세. 다시는 상관 않을테니 자네 멋대로 지내게.” 그 후로는 일체 간섭조차 않았으니, 그렇게 해서 선객 고봉은 마음껏 선기를 드날릴 수 있었다. 덕숭산 정혜사에 머물고 있던 고봉 스님은 어느날 갑자기 승복을 벗어버리고 거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대구로 내려갔다.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독립투쟁을 하던 김좌진 장군이 암살되고, 함경도에서는 탄광부들이 들고 일어나 독립운동을 하고, 만주에서도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산중에서 나만 편히 지내며 열반락을 즐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대구의 유명한 술집 청수장의 주인 아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공부한 친구였으므로 고봉 스님은 그 친구와 더불어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독립운동을 모의하며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에서 ‘대한독립 만세’을 외친 이른바 ‘대구 만세사건’을 일으키는데 적극 가담, 결국은 체포되어 마산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때 왜경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해 입은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해야 했다. 고봉 스님이 서울 미타사에 잠시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충남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서 수행하던 제자 행원이 은사이신 고봉 스님을 찾아뵈었다. “스님,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이 다 죽었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승복 벗어던지고 독립운동 이렇게 행원이 스승께 문안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고봉 스님이 대답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 행원이 먹다 남은 오징어와 술병을 꺼내 스님 앞에 놓았다. “그럼 한잔 따르라.” “잔을 내 주십시오.” 고봉 스님이 손을 내밀었다. “이게 손이지 술잔입니까?” 행원이 술병으로 방바닥을 쳤다. “이놈 봐라. 고약한 놈이로고!” 고봉 스님이 자세를 고쳐 앉으시며 제자 행원을 노려보았다. “그럼 내 마지막으로 묻겠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이에 행원이 대답했다.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3·3은 9입니다.” “아니다!” “오늘은 날씨가 맑습니다.” “아니다!” “방바닥이 뜨끈뜨끈 합니다.” “아니다!” 행원이 더 이상 말없이 즉여(卽如)의 도리로 답하니 이윽고 고봉 스님은 제자 행원의 손을 뜨겁게 꽉 잡으며 말했다. “꽃이 피었는데 내 어찌 나비가 되어주지 않겠느냐?” “꽃 피었으니 나비가 되어 주마” 그리고 그 후 18일 만에 스승은 제자에게 게송을 내렸다. “일체법은 나지 않고 일체법은 변하지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이것이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한다.” 고봉 스님은 이때 유일한 상좌 행원에게 법호를 내렸다. “오늘부터 그대 당호를 숭산(崇山)이라 하게.” 그렇게 해서 행원의 법호가 숭산으로 정해졌다. 숭산(崇山) 충남 예산 덕숭산(德崇山)의 법을 널리 펴고 법맥을 크게 전하고, 법을 깊이 행하라는 스승 고봉 스님의 간절한 뜻이 담긴 멋진 법호였으니, 이 법호를 내려받은 제자 행원 숭산 스님은 스승의 깊은 뜻을 그대로 마음에 새겨 한평생 덕숭산의 법을 전세계를 무대로 한껏 펼치며 덕숭산의 법맥을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 전세계 방방곡곡에 부처님의 법음을 확산시켰다. 참으로 법호 하나에 담긴 스승의 간절한 당부와 원력은 이토록 엄청난 위력을 나툴 수도 있다는 것을 고봉 스님과 그 제자 행원 숭산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스승에 그 제자…” 이 말을 듣기가 얼마나 어렵고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새삼 느낀다. 그리고 부모와 스승으로부터 내려 받은 내 이름에 대해, 과연 나는 내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스스로 한번쯤 물어볼 일이다. 고봉 스님은 호방하기 짝이 없는 스님으로 잘 알려졌다. 곡차도 사양하는 법이 없었고. 흥이 났다 하면 두주불사였다. 어느 해 여름. 고봉 스님은 그날도 곡차를 많이 하시고 크게 취하여 절로 돌아와서는 마루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시자를 불렀다.
“이것 보아라, 어서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내 발을 좀 씻겨다오.” “예, 스님.” 시자가 스님의 분부를 받고 돌아서는데 다른 스님 한 분이 시자를 불러 세웠다. “이봐라. 고봉 스님이 너에게 발을 씻기라고 하시더냐?” “예, 그러셨습니다” “이 녀석아, 고봉 스님께서 발을 씻어라 하셨으면 그 땐 네가 이렇게 물어보아야 하는게야.” “뭘 어떻게 물어보라는 말씀이신지요?” “스님,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닌데, 발은 씻어 무엇 합니까?’이렇게 물어야 되는게야. 알겠느냐?” “아 예. 그럼 제가 그렇게 한번 여쭈어보겠습니다.” 시자는 이렇게 대답하고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와서 고봉 스님의 발을 씻겨드리기 시작했다. 시자는 조금 전 다른 스님이 시킨 대로 고봉 스님께 물었다. “스님,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닌데 발은 씻어 무엇 합니까?” 발을 씻겨드리며 시자가 그렇게 묻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고봉 스님의 엄지발가락이 시자의 입안으로 벼락같이 들어왔다. 시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자빠지면서 침을 뱉었다. “아이구 스님, 더러운 발가락을 왜 소승의 입안에다 넣으십니까?” “이놈아,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니라고 한 말은 네 말이 아니었더냐?” 시자는 더 이상 할말을 잃었다.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인 줄 알았다면 스님의 발가락이 입안으로 들어간들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 고봉 스님의 선지는 실로 이처럼 전광석화였다. 호방함 속 선지 번득여 고봉 스님은 은사 혜봉 스님이 사바세계와의 인연을 마치려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남장사로 달려갔다. 평소 은사 스님을 곁에서 모시지는 못했지만 고봉 스님은 늘 혜봉 스님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고봉 스님이 손에 수건을 들고 스승께 물었다. “스님, 이것이 보이십니까?” “그래, 보인다.” “경욱이는 항상 이 속에 있습니다.” “그래. 그대는 남장사의 꽃이요, 세상의 빛이다.” “스님, 중노릇은 생사를 초월하고 범성을 벗어나는데 목적이 있다 하였는데, 스님께서는 걸릴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동산 대본선사는 자다가 갔고, 불인선사는 이야기 하다 갔지. 다 이것은 선정과 지혜의 힘이니 공부들 잘들 하게나.” 혜봉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스스로 잿속에 불사그라지듯 조용히 열반에 드셨다. 고봉 스님은 스승의 수족을 편안히 해드리며 담담히 말했다. “옛사람도 이렇게 갔고, 지금 사람도 이렇게 갔고, 우리 스님도 이렇게 가셨으니 장차 우리도 이렇게 가리라.” 그리고 나서 고봉 스님은 스승의 열반을 위해 다비문을 읽었다. “인도에서 오신 달마대사의 뜻이 당당하여 스스로 그 마음 깨끗이 하여 고향에 들어갔습니다. 묘한 몸 담연(淡然)하여 처소가 없으니 산과 물 땅, 참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세상의 빛이로다” 고봉 스님은 늙기 전에 이미 생사의 경계를 훌쩍 뛰어 넘은 분이었다. 고봉 스님은 평소에 곡차라도 한잔 하시고 나면 곧잘 다음과 같은 시를 외우곤 하셨다. 고봉 스님의 ‘십팔번’인 셈이었다. “강바람은 만고에 나부끼고 산달은 천추에 빛나네. 만고의 천추객이 몇 번이나 풍월루에 올랐던가. 태어나면 기뻐하고 죽으면 슬퍼하니 이것은 모두 뜬구름.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하리.” 늘 이렇게 노래하며 유유자적한 가운데 호방한 선풍을 드날리던 고봉 스님이 안국동 선학원에서 향곡 스님을 만났다. 하루는 향곡이 누더기를 깁고 있는 것을 보고 고봉이 물었다. “바느질을 어떻게 하는고?” 향곡 스님이 대답 대신 바늘로 고봉의 허벅지를 찔렀다. 고봉 스님이 “아야! 아야!”소리를 지르니 향곡이 다시 한 번 찔렀다. 그러자 고봉이 껄껄 웃으며 한마디 했다. “허허 그 녀석 바느질 잘 하는구나!” 찌르는 사람도, 찔린 사람도 호방한 선풍을 드날린 셈이다. 무엇을 기뻐하고 슬퍼하리 1961년 여름. 세속 나이 72세에 이른 고봉 스님은 서울 미타사의 조실로 계시다가 서울 수유리 화계사로 들어 와 사바세계와의 작별을 준비하고 계셨다. 고봉 스님이 하루는 제자들에게 일렀다. “들 것을 만들어 오너라.” “들 것을 왜 만들라는 말씀이신지요?” “그 들것에 나를 태우고 수유리 골목골목을 한바퀴 돌아보도록 하지.” “예에? 스님을 들것에 모시고 한바퀴 마을을 돌아 보자구요?” “그래. 어서 내 시킨대로 해라.” “무슨 까닭이신지요 스님?” “천하에 도인으로 소문 난 이 고봉도 이렇게 늙고 병들어 이렇게 빈손으로 간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가려고 그런다. 내 뜻을 알겠느냐?” 고봉 스님은 이 사바세계의 중생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이렇게 남기시고 열반에 들었다.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가셨고, 옛 조사님들도 이렇게 가셨고, 천하의 도인들도 모두 이렇게 가니 이 세상 모든 중생들도 이렇게 가는 법, 무엇을 욕심내고, 무엇을 기뻐하며, 또 무엇을 슬퍼하리. 윤청광/法寶新聞 논설위원 |
첫댓글 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