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뛰어난 정치영화다. 현실과 유리된 비현실적 판타지 영화가 아니라, 동화적 판타지의 힘을 빌려 현실의 억압과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폭압적 지배세력과 맞서 싸울 수 없는 힘없는 민중들은 판타지의 힘을 빌려 현실의 고통을 잊고자 한다. 어린 소녀의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판타지는 아름답지만 슬프고, 신비롭지만 비극적이다.
스페인 장교의 아이를 임신한 어머니와 함께 부대가 있는 산 속에 도착한 소녀 오필리아(이바나 바케로 분)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너무나 슬프고 가슴 아프다.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힘든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스페인 장교 비달 대위(세르기 로페즈 분)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산 속에는 시민군들이 정부군과 맞서 싸우고 있다. 부대 내에는 시민군의 스파이인 의사, 유모 등이 있는데, 소녀는 자신이 처한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화의 힘을 빌린다
스페인 내전은 1936년 선거를 통해 좌파가 집권할 상황에 이르게 되자 우파의 프랑코 장군이 쿠테타를 일으키며 시작되었다. 스페인 내부에서만 일어난 말 그대로 내전이지만, 유럽의 많은 좌파 지식인들이 스페인 내전에 기꺼이 참전하여 파시스트 세력에 맞서 싸웠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목숨을 걸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서구 지식인들의 일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는 멕시코 출신 기에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이다. 헐리우드로 진출해서 [블레이드 2][헬보이][미믹] 등을 연출했던 기에르모 델 토로 감독은 스페인 내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44년을 배경으로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를 만들었다.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우파 세력의 압도적 힘에 밀려 산간 지역에 숨어 있는 좌파 세력은 힘겹게 게릴라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영화의 도입부는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산간 지역에 도착한 비달 대위, 그리고 그에게 가기 위해 만삭의 몸을 끌고 힘겹게 차를 타고 이동하는 오필리아의 어머니를 보여준다. 첫 남편은 죽었고 이제는 비달 대위의 부인이 된 오필리아의 어머니는 긴 여행 끝에 산 속에 도착한다. 오필리아는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의 거칠고 사악한 모습에 본능적으로 냉기를 느낀다.
[판의 미로]는 매우 정치적인 영화다.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는 산 속 군대의 막사, 거드름 피우는 의붓 아버지, 소녀에게는 이런 현실이 무섭고 끔찍하기만 하다. 더구나 만삭의 어머니는 여행중 병을 얻어 누워 있다. 비달 대위는 의사에게, 출산 중 만약 위험한 상황이 오면 뱃속의 자기 아이를 먼저 살리라고 말한다. 소녀의 탈출구는 오직 동화 속의 세계 뿐이다. 오필리아는 자신이 빠진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화의 판타지에 의지한다.
현실과 환상이 결합되어 한몸이 되는 [판의 미로]의 내러티브는 무척 매혹적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같은 순수 판타지는 아니지만, 비참하고 억눌린 현실의 출구로 판타지가 갖는 힘을 제시하는 영화적 힘은 매우 울림이 크다. 하얀 분필을 벽에 네모나게 그으면 그대로 문이 되어 열리는 마법의 세계를 오필리아는 만들어 간다.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구분이 안가는 모호함이 전반부의 서사를 신비롭게 이끌고 가지만, 우리는 곧 알게 된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는 저 놀라운 판타지의 세계는 오필리아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안타까운 외침이라는 것을. 견디기 힘든 지상의 고통을 동화 속 판타지의 힘을 빌려 벗어나고 싶은 그녀의 눈물겨운 몸부림이라는 것을. 우리 귀에 오필리아의 갸냘픈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우리는 비현실적으로만 보였던 판타지에 놀라운 현실감각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전율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 속으로 따뜻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