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기 101년 8월 24일, 수요 마음공부방
한국 기독교의 초기 역사 : 확장과정과 선주 주제의 변천사
강사: 이정배 교수/목사
타이핑: 초벌)심하은 완성)김도권
Ⅰ. 확장 및 발전과정
기독교는 벌써 년이 2천여 년이 되고 카톨릭도 오래되었지만 개신교는 500여년이 되고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는 120여년이 지납니다.
좋지 않은 이야기도 많이 들리지만 이슬람종교가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하려니까 너는 안되 이렇게 만듭니다. 본인 스스로 외래종교인데 이런 말을 취하면 안되죠.
한국적으로 변한 것도 많아요. 저희 선생님들 가운데에서는 서양의 토양, 흙이 달라지면 같은 씨앗 꽃의 색깔 열매의 향기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한국에 들어온 색으로 변했습니다. 유명한 역사학자 신채호 선생님이 말씀하셨는데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면 조선의 불교가 되지 않고 유교의 조선이 되고 조선의 기독교가 되어야하는데 기독교의 조선이 되고 공산주의 조선이 되는 노예적인 근성이 어디 있는가를 탓 했어요. 저희 기독교도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 대구도 하나님께 바친다. 하셨습니다. 교무님께서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은 기독교가 오랜 역사속에서 공도많고 화도 많고 그런데
반면 원불교는 짧은 역사속에서 좋은 이미지가 많지만 원불교라고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죠? 아름다웠던 모습이 퇴색되고 인간의 모습이 묻어나니 기독교의 말도 해봐라 하고 크게 생각 하신것같아요. 그래서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왔을때는 참 좋은 종교였어요 그때 기독교는 참 좋은 기독교 였지요. 19세기 말에는 우리나라라는 국가는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고 유교가 백성을 버리고 무책임했던 그런 때 였습니다. 아무도 우리 백성을 돌보지 못했을 때, 바로 미국에서 기독교가 들어왔죠. 200년지나니 미국도 힘이 생기고 선교의 열정이 굉장히 많았어요. 기독교를 보수적으로 이해하는 선교자들이 인간구혼을 하겠다는 선교사들로 살았고 목숨을 묻는 사람이 있어 고마웠어요. 당시 처음왔던 선교사들은 교화보다도 학교, 병원, 고아원을 세우면서 도움을 주려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여성들, 아이들, 노예들 일생동안 머슴한 사람들도 다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다 라는 평등사상을 가지고 말이지요. 물론 동학이라든가 천주교라든가 그런생각이 있었지만 양반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 힘겨워한 사람들이 기독교에 입문했고 그들을 가르쳤고 성경을 한글로바꾸어 읽게 했고 1896년 기독교가 들어와서 했어요. 한국의 기독교를 이해할 때는 평양쪽의 기독교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해요. 평양은 죄인들, 정계에서 쫒겨난 사람들이 가는 곳 이였고, 위험인물 이며, 귀양가고, 피난 가고 도망가고 그런 지역이 바로 평양을 포함한 서북지역이었습니다. 서북지역에 사람들이 주위의 피박을 받고 현직에서 많이 멀어지니 한국 기독교가 꽃을 피운거에요. 영광 익산에서 자란 것처럼 평양이라 하는 곳을 포함한 함흥, 원산등 서북지역에서 번성을 했어요. 기독교가 번성을 한 것은 차별, 서러움, 억압 그런 안타까운 것 속에 새로운것의 이해가 선교사들에 의해 가르쳐지니까 민중들이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였어요. 우리나라 유명한사람이 다 서북지역사람들이였어요. 도산 안창호 등등..
1907년에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교회에서 예배를 보다보니 자기가 죄인이라 하는 것을 알게되죠. 사실 그들이 죄를 지어야 얼마나 지었겠어요.. 수탈만 당하고 배고픈사람들인데..
그렇게 내 마음속에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회개하고 간증하는 원산 대 부흥운동이 일어납니다. 그 원산에 일어난 대부흥운동이 서북지역에 확 퍼졌어요. 원산 대 부흥운동을 근간해서 새사람이 되는 새로운 정신이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하는건데, 자기들이 알게 모르게 잘못을 많이 지었다라고 사람들 마음속 이야기하는거에요. 자기속의 부끄러움을요. 그것을 우리는 원산 대 부흥운동이라해요. 한국의 기독교를 알려면, 그런 기독교인이 있던 지역에 거기가 남과 북이 갈리면서 이북땅이되고 공산주의가 들어오잖아요. 김일성체제에서 부지런히 일궜던 땅과 재산을 몰수하고 억압하기 시작해요. 공산주의 체제에서 또다시 억압을 당하죠. 남쪽으로 내려올 때 그때 우리정권이 이승만, 박승희 정권이죠. 당시 서북지역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에 당했던 뼈져린 기억이 수없이 많죠. 남한에 내려와서는 그 우리나라(북한)에 대한맺힘과 서러움이 뭉쳐져서, 기독교=반공이 되어버려요. 남과 북이 다시 하나가 되게 하는 지금 새로운 새 시대에 그때 그 경험으로 말미암아 대교회들이 반공의 기독교가 무신론자를 기독교가 아니면 좌빨 용공이라고 제일 만들어내는 곳 이 지금 한국의 대형교회에요. 통일운동, 역사를 옳게 만들어냈던 곳 이였던 서북지역 기독교가 오히려 지금 우리의 미래 역사를 과거로 회기시키는 역사의 오류를 범하고 있어요. 당시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함경진 목사를 통해 모든 구조물자를 다 보냈어요. 그러면서 그 서양에 들어온 구호물자를 가지고 바로 반공으로 하나 되어 똘똘 뭉친 한국의 기독교 한 특징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어요.
그런 역사적인 경험 때문에 그래요. 그런 이해를 우리가 하나 해야할것이고,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가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기독교가 그 하나의 기독교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나면서 수십개 백개이상의 종파가 생긴것입니다. 불교에도 종파가 많이 있는것처럼 기독교 안에도 굉장히 많은 종파가 생겼습니다. 개신교는 이성과 감성이 중요해서 스스로 해석하고 경험하는 것이고 다른 장로교 중 감리교도 남감리교, 북감리교가 들어오고 했는데, 바로 이 차이는 흑인들 사이에 흑인과 같이싸운 사람이 북감리교이고, 흑인을 노예로 뒀던 것이 남감리교에요. 자기들의 교세를 기독교를 잘하려고 하는 틀에서 벗어나 자기들의 교세를 확장하려고 많은 종파가 들어와요. 이렇게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필요한 구호물품도 많이 가져오고 동시에 선교사들이 자기의 백그라운드를 가져오니까, 그때 배경을 기초로 지금도 너무 경쟁적으로 선교하는거에요. 지금 미국도 한 교회가 망해야 다른 교회가 삽니다. 어느 교회가 안돼서 교도들이 떠나야 다른 교회가 삽니다. 개신교가 자연적으로 경쟁이 심화되면서 스스로 몸을해쳐요. 1980부터 선교가 안돼요. 개신교가요. 제가 속한 감리교도 한국에서 2번째로 큰 교단인데, 헌금을 연 3천만원 기준으로 3천만원 안되는 교회들도 50프로가 넘어요. 이제 앞으로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노인들은 이제 은퇴하니 돈이 없어요. 젊은이들도 선교가 안되니 없어요. 이제 점점 갈수록 점점 헌금할수 있는 사람들이 없을거라고 해요. 실제로 돈이 없고 어려운거죠. 그러니 서로 돈을 가지고 있는 노인세계가 최대의 시장이 되버리고 마는거죠. 이런상황들은 정말 서로 덕스럽지 않아요. 뫼비우스 선교정책이라해요.어느 교파가 들어오면 자기들 세를 확장하려고 서로 싸우는 것이죠. 장로교는 평안도랑 경상도지역에서만 감리교는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남부 캐나다에서 들어온 남감리교는 호남지역에서 교세가 확장되어있어요. 저 호주에서는 저 북쪽에서 이제 여러 단체들을 모아두고 한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으니 그렇게 하지 말고 지역을 나눠서 교세를 정립 하자고 해요. 그것을 뫼비우스정책이라해요. 경상도 지역은 사실 감리교를 찾아볼 수 없어요. 거기서는 ‘이단’이라해요. 이 2가지를 생각해야해요. 그 지역민들이 받아들인 것을 굉장히 활성화시키고, 잘 받아들이는지요. 사실 경상도지역도 평양도 못지않게 기질적으로 종교적 파워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구요. 과거 박정희 정권이후로 경상도쪽으로 경쟁력이 올라가면서 장로교가 가장 큰 개신교의 종파가 되었어요. 제일 중요한 것이 선교의 과열, 경쟁을 없애려고 지금 우리 개신교를 보면 크게 하나씩 있어요. 개신교는 여호와의 증인 등이 있고 있는데 제가 화나고 부끄러운 것이 있어요. 우리는 가끔 하나의 건물안에 각각 다른 층에 층층히 위치하고 있어요. 사실 같은 감리로에 있으면 500내지1키로는 떨어져서 세워라. 이게 법에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것을 지키지 않는 개신교가 너무 부끄러운 모습이에요. 상점을 여는데 상도가 있듯이 현실이 부끄럽고 좋게 말하면 열정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목회자수는 점점 많아지면서 저희때는 감리교신학교가 1개인데 이제는 그 수가 3개가 되었어요. 그렇게 목사는 자꾸만 많아지고 정작 자기들의 삶의 길을 없어지고, 이제 꿈 잡는 매가 되고 교회가 큰 위기가 되었어요. 첫 번째 중요한 것이 선교의 과열을 막기 위한 교통정리가 급히 필요하고요. 두 번째 중요한 것이 과거에는 선교사들이 가져다준 자금과 물품을 가지고 공부도하면서 그 효과가 먹혔지만 이제 교회가 자립을 해라며 교회의 자립을 요구했어요. 그때 생겨난 것이 ‘성미’라했어요. 교회올 때 마다 특정한 것을 목사님댁에 주는것이죠. 개신교만큼 헌금을 당하는 교회는 없죠. 종교개혁당시에 카톡릭이 면제부를 팔았다했죠. 조상을 안 믿다 천국에도 못가고 지옥에도 못가고 여록에도 못가고 살아있는 사람이 부모님의 죄를 면제하는 것을 사서 천국가라고 했어요. 중세의 카톨릭이 바로 타락하는 문제였죠. 개신교는 오직 믿음만 있어면 된다고 해서 구원비용이 안들어요. 이거는 제 말이 아니라 종교개혁의 역사를 이야기한 학자들의 이야기에요. 그것만 때문이 아니지만 개신교로 많이왔죠. 개신교사람들은 돈이없어서 교회나오기 어렵다해요. 너무나 헌금에 대한 요구를 강하게 하는 교회가 많은 거에요. 바로 그게 문제인거에요. 그래서 그만한 규모를 키웠는데, 교회가 몇백억씩 부동산 매물로 나오는게 많죠. 은행이 교회들에 돈을 빌려줘요. 신도가 몇 명이냐에 따라서요. 그리고 그 인원이면 갚을수있겠다를 보는거죠. 이런 대출 등을 감당못하면 교회는 도산을 하죠. 어쨌든 한국교회가 과거 선교사들의 의존도를 줄이려고 교회의 자립을 강조했어요. 신도들이 헌금을 해서 한국인들이 스스로 우리교회는 우리가 하는 교회공동체를 유지하기위해 필요한 것이였죠. 그것이 사실은 개신교를 부흥시키기 위한 아주 중요한 것중 하나이죠. 그리고 세 번째로는 한국 목회자들의 수준이라는 것이 높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목회자들의 교육수준을 강조했어요. 선교사들을 능가해야하는 수준을요. 선교사들보다 교육수준이 낮은 보통 백성들보다는 높거나 그 수준에서 있는 교육수준이 우리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선교사들이 도왔어요. 여러분 안중근이라는 분이 카톨릭 신자라는 것 아시죠? 김수경 추기경 시절에 다시 복권했는데, 안중근이 한국에도 신학교를 세워서 목회자들을 제대로 한국에 학교를 만들어서 잘키워달라했는데 그 당시 프랑스 카톨릭이였죠. 내가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더이상은 선교사들을 능가하지 못하도록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은 순종하도록 백성을 가르치는 보편적인 지식만 갖도록 하지만 그게 지속될수없으니 그런 교육을 강조했어요. 예를들면 당시 선교사들은 우리들에게 다음 두가지를 강조했어요 첫 번째는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지말라했습니다. 미국이 필리핀을 먹을테니 일본은 필리핀에 관여하지말고 일본이 한국을 먹는 것을 관여하지 않겠다. 일본에 의해 주권을 빼앗았는데 묵인하고 우리는 너희들의 영적인 것을 구원하겠다. 상당히 종교의 끄나풀이 있었습니다. 서양이 제일먼저 강조한 것은 기업이구요. 그 기업을 지키려고 군대가 가요. 그리고 그런 상황을 잘아우르기 위해 종교가 가요. 기업과 군대, 종교는 삼위일체에요. 기독교가 그런 역할을해요. 서양의 선교사의 역사는 서구의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와 맞물려있는 경우가 참 많아요. 그런데 한국적인 경우에서 정치적인 것에 관여하지말라해요. 우리나라가 주권을 빼앗겼는데 천국만 가라고해요. 두번째는 미국도 세월이 200여년 지났으니 기독교의 바램이 있던 선교사들은 대부분 보수적이었어요. 빛-어둠, 천사-악마 한국은 정말 형편없는 곳이고 이들은 다른 종교들과는 절대 말도 행동도 섞이면 안된다 해요. 다른 종교인들과 절대로 섞이지 말아라 이걸 선교사들이 한국목사들에게 시종일관 가르쳤어요. 당시 3.1운동 독립운동이있었는데 천도교 1919년 목사들의 연령도 20대중후반이여서 약했지만 천도교는 손병희같은 인물에 힘도컸어요. 독립자금도 건물몇채값을 주면서 기독교에서 권유를 했어요 어쨌든 그 권유를 받아들여서 11,11,11명하자, 불교는 2명밖에 없잖아요. 그런 이유가 기독교가 숫자적으로 많아 요구를해서 그랬다고 해요. 이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고민을했어요 신석교목사는 제일 마지막까지 서명하고 변절하지 않았던분이였어요. 많은 분들이 변절했지만 제일 마지막까지 변절하지 않은분이 신석교목사였어요. 내가 한국사람인데 한국의 독립을 하겠다는데 내가 이것을 안하겠다면 어떻게하겠는가. 그렇게 독립운동에 서명한 16명의 장로교 목사들이 있어왔다고 하는 것은 천도교에 도움을 받았지만, 당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선교사의 강령에 반하는것이었고 일본에 반하는것이었고 굉장한 일을 했다고생각해요. 돌아가신 함경진 목사님의 일기책에서 당시 천도교로부터 그렇게 많은 독립자금을 가지고, 우리민족이 진 빛이 너무 크다. 무엇으로 갚냐. 그것을 통일운동으로 갚아야 할터인데 불행하게 아직까지도 한국교회는 4.3사태등으로 힘이 하나로 뭉쳐져 있지 않다는 것이였죠. 근데 지금 우리시대는 서북청년들을 다시 만들어지고 시대가 거꾸로 가요. 아주 무서운일이죠. 그런일이 있었구요. 3.1독립 운동이 좌절된 이후에 한국기독교의 성격이 크게 달라집니다. 우리민족의 역사속에서 하나님이 관여해서 독립을 임박하게 했다면, 현실문제에 관심이 없습니다. 꽁초 오상순의 시아시죠? 그 분의 제자가 오상순이 신학을 공부해서 정동감리교에서 중요역할까지 했어요. 뇌세지향적인 현실의 문제를 다 눈감으니 동아일보에서 한국교회여 다 길거리로 나가라. 정동교회를 박차고 나와서 나중에는 불교 스님이 되셨죠. 우이동쪽에 묘지가 있어요. 그런 나름대로 과정을 통해 교회가 발전할 수 있는 장치를 잘 가지고 있었어요.
Ⅱ.선교 주제의 변천사
이런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따로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초보적인 개론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이시간은 사실은 따로따로 했어야 했지만 두 이야기를 합치려고 합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는데 자기가 기독교의 뭔가를 이런것들을 가르치고 알리는 일을 해야하는데 소극적-전도, 적극적-선도라고 하고 다른 말로는 불교-포교 원불교-교화라고 하죠. 자기가 믿는 것을 그렇게 해야 하는데 그 이야기 들어가기전에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자기가 자기 종교에 관계하는 방식 3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시나요?
하나는 믿음의 문, 둘은 의심의눈, 세번째는 새롭게 발견하는 자기발견의눈입니다. 이제 원불교를 다니시니까 원불교의 관계를 하시는거죠. 그러면 우리들에게는 의심의 눈이 가동되어 정말 그런가 하는 의심이 생기게 됩니다. 제가 하는 말씀을드리면, 기독교와 원불교를 통해 무엇을 다룰수 있는가를 보고 자기 종교에 열려지고 확신이 드는데, 기독교는 이땅에 와서 무언가를 정해야하는데 사실 ‘예수그리수도가 우리 주님’이다. 그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아니겠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인데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왔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고 아파야 고통 받고 있는 인간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고, 그것이 가르침 내용의 길이죠. 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시대 시대마다 이런 메시지가 해당되어지는 여러 주제들이 있습니다. 선교초기에는 19세기말 20세기초 처럼 기독교가 맨처음 들어왔을때 선교사가 주관하고 우리민족을 개화시키는 것 이였습니다. 선교의 일화 에서도 장님이 눈을 떴다 이런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모르는 사람을 배우고 가르치는 개화라고 하는 것이 선교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선교사들은 교리적으로 접근 하지않고 술주정뱅이들을 가정으로 복귀시키고 하듯이 말이죠. 보통 기독교하면 술 담배 하지말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되어있지만, 술 담배가 얼마나 해로운지 잘 하시죠? 중국의 경우에는 아편하지말라고 해요. 과거 영국이 중국을 패망시키기 위해 아편을 싼값에서 비싼값에 파는등 그렇게 못된 일을 한거죠. 중국인들에게 싸게 아편을 줘서 중국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어요 이처럼 술로 패가망신하니까 예수님이 혼인장치에서 포도주만 허락해주셨죠. 원불교도 가니까 술한잔 못하게 하더라구요. 성주에서는 그러면 안되죠. 어쨌든 그 사회에서 천대 받고 인간대접 못받고 하던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딸로 불러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겠어요 눈물 펑펑 흘리면서 그 이야기를 온몸으로 다 받아들인거죠. 시기가 조금 지나서 일제에 36년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선교사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지만 선교사들은 3.1독립운동을 선교의 과제라고 여기게 되요. 나라가 있어야지.. 비록 선교사에게 정치적인 것을 하지말라고 가르쳤지만 그 당시에 중국에 와서 살았던 한 목회자의 소설에 의하면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민족주의자였어요. 그걸 아주 둘로 나눌 수 없는 독립이 되지 않으면 기독교가 우리 기독교가 될수 없다 생각했죠. 그래서 유명한 김교신이라 하는 분이 있잖아요 조선땅에 성서를 놓고 조선땅을 해방시키는 분 말이죠. 그 당시는 주권을 빼앗긴 이나라에 성경으로 다시 찾겠다.라는 마음이였어요. 민족주의와 기독교와 같은거죠. 이 시기에 김교신과 더불어 활동했던 유명한 함석현 이 분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이 책의 원래 제목이 성서로 본 조선역사 1950년대 후 제목이 개명되고 내용이 달라졌지만, 일본은 일본의 을지늑약 조약에 따라 일본사람들이 계속 우리나라사람들을 열등한 사람으로 한의민족, 슬픔의 민족이다. 우리 민족에게 열등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감강찬 장군은 을지문덕을 가르쳤어요. 우리의 골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영웅사관을 가르쳤어요. 함석현이 보기에는 둘다 틀린거에요. 아무리 과거에 훌륭한 사람이 있어도, 지금 우리는 남에 나라의 종노릇 하고 있는데 영웅사관이 무슨소용이냐는 거에요. 그러니까 열등사관 영웅사관을 다 비판 하고 함석현은 우리민족의 이 고난에도 뜻이 있다. 역사라는 마지막이 있어서 우리의 처음이 있다. 마지막이 있어서 처음을 다시 찾으려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뜻을 찾는 백성이라야 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우리가 열등사관 영웅사관도 아니지만, 이 내용이이게 성서에 나타난 중요한 관점이거든요. 너무 과하게 보지 말고 고난에도 뜻 이있다 역사는 마지막이 있어 처음이 있다는 말이죠. 그 마지막을 우리가 이 고난에 뜻을 가져야 한다면서 민족주의자들과는 다르지만 우리 독립의 해방을 위해 애를 쓴 기독교인이 많았습니다. 3.1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많은 기독교인이 독립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이였다 생각 했어요. 그 민족주의 기독교 신앙이 푹 주저앉아 현실에서는 길이없다, 생각해서 한 개인의 영혼구혼 사적으로 변질되었어요. 그리고 3.1운동 독립이후에 확 달라졌어요. 기독교에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무력으로 쓰면 안되겠구나. 생각하며 완화 문화정책을 씁니다. 꽉 긴장한 사람들을 살살달래줘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강한태풍에는 옷을 조이면서 지켜냈는데, 온풍에는 창시개명, 신사참배 절하고 이런인들이 기독교에서 많이 벌어졌는데. 절하지않은 것이 고려신학교파만이 순결을 하면서 안했죠. 그 사람들이 신사참배한 장로교, 감리교, 카톨릭교에 너희들은 틀렸다. 신사참패를 한 너희들이 무슨 기독교인이냐며 비판했씁니다. 그리고 그안에서 서로 용서안해주고 싸웠어요. 우리 종교 안에서도 지금 친일이 청산안되고 일본시대에서 능력있는사람들이 다시 독립 후에 권력이되니 기성교단이 되고 주 교단이 된거죠. 그렇게 3.1독립신앙이후 기독교가 달라졌어요. 원불교는 지금 어떻게 달라졌는지 정리해볼 일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우리민족은 독재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그 휴유증이 있는데, 독재에 대해서 한국의 주류 기독교는 민족운동을 이를 구제하기 위한 핵심이라 생각했어요.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개신교라고 봐야해요. 수많은 사람들이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감옥에 갔고 민주화운동을 했던 날은 하나님의 날이라 해요. 하나님이 직접 세상일에 말하고 세상일이 교회에 말한다해요. 교회안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에 갇히지말고 세상이 하는 소리를 들어라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게 말하고 교회가 세상에게 말하고 하는 것이죠. 오늘날 이 독재현실에 대해서 세상이 교회에게 뭘 요구하는가, 바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것이죠.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비록 독재국가가 잠시 되었지만 이 당시 경제를 빌미삼아 경제 대국이 됨과 동시에 민주화가 된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을 지키려하였고,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분이냐?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만드신 분입니다. 1960년 70년 민주화 운동을 바로 한국 개신교 운동이 앞장서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러다가 1900년 들어 3페이지 희년운동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관야에서 고생고생하다 가난한 땅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에굽에서 포로생활하던 사람들을 데리고 그 안 속으로 모세가 들어갔는데 적과 꿀이 흐르는땅에서 누구나 다 편안한게 잘 살았어요. 그러다가 49년이 지나간 시점에서 누구는 누구의 적이 되었고, 누구는 빈털터리 가난뱅이가 되었어요. 과거 50여년 동안 삶의 편차가 무수하게 많이 생겨난거에요. 아우성 고통이 있으니, 성경에 하나님이 일반적의로 희년을 선포합니다. 처음으로 모든 것을 다시 되돌립니다. 인간이 만든 세상은 결국 불평등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희년을 선포하는거에요. 세상의 노예들을 다 자유롭게해주고 빛 다 갚아주고한 희년 사상이 기독교에서는 중요한 이야기에요. 1950년에 우리민족에게 희년 사상을 선포해요. 온갖 불평등이 다 생겼고 아우성 여전히 있고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희년에 살게해요. 그래서 희년 운동을 굉장히 일으켰죠.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것을 일으키고 처음의 상태로 불평등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고 하는 것을 사회적 영성이라 해요. 우리들은 그런사회를 만드려고 마음공부를 하는거 아니겠어요? 원불교에는 왜 이런 사상이 없겠어요? 당연히 있겠죠. 이것이 어떻게 우리들의 삶속에서 실천될 것 인가? 이런 이야기를 선교의 과제로해요. 사실 선교사들사이에 불평등 구조가 가장 심한곳이 개신교입니다. 이제 목사의크기=교회의크기가 똑같아졌어요 교회의 크기가 크면 목사의 크기가 커진거죠. 교회가 완전히 자본주의에 먹혀 버렸어요 이게 우리 교회의 현실이에요. 2008년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OECD내에서 욕망 제일 높은나라로 되어있어요. 첫째, 한국에는 포르노 문화가 강하다. 그리고 짝퉁문화가 강하다. 세 번째는 성형문화가 강하다. 마지막으로 땅을 뒤엎어 높고 아무생각없이 혈세를 사용해 순식간에 터무늬없이 만들어놓는 한국이야말로 욕망지수가 높은 국가입니다. 그래서 한국은 다른나라에 비해서 총 인구 대비 종교인구가 많아요. 하지만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무형론입니다. 종교가 있으면 이런 욕망이 낮아져야 하는게 옳은데, 아니라는 것은 한마디로 종교 무형론이죠. 그러니 욕망지수가 높으니 자살률이높고 행복지수는 낮은거죠. 종교가 무엇 때문에 있는가요? 이런 아이러니가 계속 일어나는거죠. 성경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성경안에는 인간이 쓴 글도 있어요. 자기 입맛에 다 길들이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은 급진적인 것을 요구하는데 인간은 급진적인 것을 감당할 힘이 없잖아요. 그것을 올바르게 분별하는게 신학하는거에요. 교회가 인간에 의해 운영되니까 그러니까 메시지가 바뀌지 않는거에요. 하나님은 나는 배고픕니다. 이 땅에 정의가 없는 것이 바로 가장 큰 배고픔입니다. 우리가 헌금한다고 하나님이 배불러지나요? 그런 이야기 하면 누가 헌금하나요? 므ㅏ 믿으면 잘돼요. 대학가요. 건강해요. 라고 하니까. 다들 헌금하죠. 문제는 종교 무형론 시대이다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현실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할것인가? 말입니다. 2010년도 접어들면서 종교개혁 500여년을 어떻게 넘길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불교도 500년 유교도 500여년 기독교도 500여년되서 끝장을 보는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시작하는것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우리는 자본주의에 먹혀버린 종교 이 자본주의와 더불어 작은 운동교회를 합니다. 작은 교회가 우리 교회의 본질입니다. 가난해야 가난한 사람을 품을수 있습니다. 교황은 오히려 종교개혁시대에 세상을 복음화하려면 교회부터 복음화해야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교회의 복음화가 우선입니다. 교회가 아주 너무나 이제는 한마디로 교회라는 것을 빌어먹습니다. 큰 교회들가보면 대부분 웰빙센터처럼 되었잖아요 별별강승들을 다 하려고해요. 교회는 벌어먹는 것이다, 빌어먹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바로 그런 마음으로 다시시작하려해요. 우리도 욕먹을 수밖에 없는 교회가 있지만 어느 교회는 20여년만에 분가하고 노동자들이 하는 교회는 살 수 없다 하지만 목사가 직접 시골에서 농사짓고, 주일은 서울로 와서 신도들에게 하나도 받지않고 운영하는 곳도 있기도 해요. 내년이 종교개혁 500여년이어서 이렇게 가는 교회가 상당히 많을 겁니다. 작은 교회운동을 해보는 것이 제가 하고싶은 것이고요. 자본주의와 맞서보겠다는 의지입니다. 탈성장, 탈성장 대신에 성숙한 교회, 탈성직 성직자 중심의 교회안하고 평신도 중심의 교회, 세 번째는 탈선교 남성중심 아니고 남녀평등 그리고 하나 더하면 탈교파를 이룩한 교회입니다. 이 욕망에게 먹혀버린 종교들을 어떻게 넘어서볼까하는 새로운 선교의 과제로 삼고 요즘 제가 하는 일입니다. 대충이렇게 말씀드려봅니다. 고맙습니다.
-질문시간-
1. 아까 강연 하실 때 중간에 동아시아 사회시간에 배울 때 나오는 내용이기도 한데요. 정확히 우치무라가 무엇인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질문하고 싶어요.
답변: 우치무라는 루터파 신학자 인데 오직 믿음, 은총, 선서로만으로 종교개혁을 했어요. 그것을 철저하게 믿는분이에요. 하지만 2000년대는 다 루터와 멀어졌다해요. 할 수 있다면 구약선서는 히브리어로 읽고 감동을 나누고 이런 면에서 보면 함석현 김교신이 일본유학중에 그분을 만났어요. 퀴엔커라하는 것은 설교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1시간동안 명상하고 흩어지는 것을 말해요 철저하게 우치무라는 기독교가 일본을 향해 존재한다 생각 하는거에요. 기독교는 전쟁국익을 위해 존재하기도 하는거죠. 하지만 우리 목회자들은 기독교는 한국을 위한 것이라는 그런입장을 가지셨던 분이지 제도권 교회에 대한 철저한 배반을 실천한 분이십니다.
2. 기독교의 장래에 대해서 희망적이십니까?
답변: 사실 절망이 커요 그렇지만 절망만 이야기하면 얼마나 무책임하고 나쁜 사람입니까. 희망이라는 것은 없다고 할수도 없고 있다고 할수도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가고 두 사람이가고 세 사람이가고 이제는 길이생겼으니 희망을 만들어보자. 바로 제가 그 일을 잘할수 있는지 자신없는 부분도 있지만 제게는 아직 살아있어요.
3. 제가 봤을때는 그 어떻게 보면 일본의 지배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큰 죄로 나라를 배반하는것으로써 모든 기독교인들이 어쩔 수 없이 모두 나라를 배반하는것으로써 보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답변: 일본의 기독교 행보와 한국의 기독교 행보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친목내용을 설명하면 마테—선교사가 일본에 왔습니다. 바로 개신교가 서운한거에요. 잃어버린 절반을 바깥에서 찾겠다해서 선교사들을 보냈어요. 극동에서는 일본에 갔는데 그러다가 마테모리치가 일본이 중심이 아니다해서 중국으로 갔고, 선교사들이 많이 머물렀던 시기인데 그런데 이제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다 가려서 죽이는 절차를 만들어놓는 절차를 만들었는데 예수님의 얼굴을 바닥에 두고 밞고 가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해서 살려두고 아닌 사람들은 다 죽였어요. 많은 사람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못 밟고 다 죽었잖아요. 사실 예수님이 살아계셨다면 환하게 웃으면서 밟아도 좋다. 언제나 나는 너희들에게 밟혀왔다. 말했겠지만요.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온거지, 안 믿으면 죽이고 하는 그런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저도 동감을 하고 있구요. 일본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거에요. 일본에는 0.7프로 밖에 안되는 기독교이지만 사회에서 이질적이지만 일본은 모두가 믿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장로라고 집을 맡기면 부수고 신학교맡기면 다 부실이 되고 장로가 건축사라고 하면 믿고 싶은 마음이 없는,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작아도 제대로된 기독교인이 있어야 하는데,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음식의 양도 작지만 질이 풍부하듯 우리는 양으로만 승부하려는 것이 아닌가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