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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정례법회] 청년법회
정산종사법어 권도편
원기 106년 06월 05일
설교 : 전성욱 교무님
타이핑 : 박준성
권도편 문답하겠습니다. 질문이 두 개가 있네요. 저는 권도편 법문을 읽으면서 질문이 너무 많이 나오면 어떡하나 고민했어요. 법문이 확확 다가오지 않나요? 저 편하게 해주려고 두 개만 질문하신 것 같습니다. 권도편입니다. 도를 권합니다. 마음공부의 바른길을 정산종사님께서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Q. 이승민 교우님
법은 듣는이의 마음 정도에 따라 평범하게 한 말이 소중한 법설이 되기도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에서 법을 구할 수 있나요? 하루에 듣는 말 중에 법으로 느껴지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법을 말하는 이는 적고, 이익, 돈 버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이는 많으니 하루에 듣는 말 중에 이익에 대한 말이 절반이 넘는 것 같습니다.
정산종사법어 제2부 법어 제7 권도편 1 |
정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법은 듣는 이의 마음 정도에 따라, 평범하게 한 말이 소중한 법설이 되기도 하고, 애를 써서 설한 법문이 범상한 말이 되기도 하나니라. 그러므로, 법을 듣는 이는 먼저 돈독한 신성과 극진한 공경을 바치고 무조건 봉대하는 심경으로써 한 마디라도 그 말씀을 헛된 데에 돌려 보내지 아니 하리라는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들어야 그 법이 깊이 감명되어 길이 잊혀지지 아니하며 실지 경계에 활용되어 실다운 이익을 얻나니라.] |
A. 전성욱 교무님
일상생활 속에서 법을 듣느냐, 법이 어디 있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승민 교우가 신심이 투철해서 교당에서만 법을 들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네요. 제 말만 법인가요? 참 좋은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생각 해보셨나요? 이 질문은 저한테만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에게도 하는 질문입니다. 질문이 나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할까 생각해보고, 자신에게 적용해보세요.
전대원 교우님: 직접 들었을 때 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말이 오가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수양함에 따라서 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법이 아닌 것 같아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그 안에 법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승민 교우는 사람들이 이익되는 일만 좇아서 사는 것 같다. 이익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면 나에게 이익되는 일 이외에 어떤 것을 이야기하시나요?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을 이야기하죠? 왜 그럴까요? 이기적이거든요. 나를 위해 살아갑니다. 시비이해 속에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비이해를 말하지 않는 것이 어렵습니다. 대소유무만 이야기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 시비이해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다 보면 법을 이야기하지 않고 맨날 자기 이익만 쫓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 반대로 질문을 해볼게요. 무엇이 법인가요? 왜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은 법이 아니고 교무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법일까요?
이승민 교우님: 법은 짧은 말이라도 임팩트가 있고, 집에 가서 다시 생각해봐도 통하는 도리가 있고, 그 말속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승민 교우가 권도편을 확실히 읽었네요. 법문에 있는 내용이죠? 법을 그렇게 들어라, 그러면 그 안에 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법인가? 법은 부처님께서 무유정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법이다. 하면 법이 아닙니다. 승민 교우가 일주일을 한번 돌아보세요. 주변에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친구가 있었나요? 있었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법으로 느껴지셨나요? 길거리 가는데 누가 싸우고 있어요. 결과가 어떻게 되나요? 한 사람은 병원에, 한 사람은 경찰서에 가겠죠? 이익을 두고 둘이 싸웠다고 보면 그걸 보고 법이 없다 이런 생각이 들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경계 속에 파묻힌 사람은 이렇게 판단할 거예요. 저 사람이 잘못했네, 맞을 짓을 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폭력을 쓰냐? 하면서 그 안에 매몰되어 한쪽을 두둔하는 입장이 될 수 있겠죠. 그래서 같이 한쪽을 미워하는 마음을 낼 거에요. 여러분도 그렇게 하실 건가요? 법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법을 발견하죠. 아, 저렇게 싸우고 보니 은혜가 아니고 서로 해를 만들었구나, 양보했다면 인내했다면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을 저렇게 처리했구나! 그 안에서 경계를 보고 가르침을 받겠죠. 공부하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도 가르침을 찾아내는 거죠. 아까 대원 교우가 이야기한 것처럼요. 그러면 나에게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힘들게 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똑같은 상황을 보고도 누구에게는 법이 되고 누구에게는 같이 괴롭게 하는 번뇌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법인가 마인가를 구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실 생활 속에서, 만나는 경계 속에서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법이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교당에 올까요? 법을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들을 수 있는데 교당에서 법을 듣고자 하십니까?
이승민 교우님: 교당에 와서는 굳이 과거 미래 생각할 필요 없이 현재 법을 전해주려고 노력하시는 교무님이 계시잖아요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마음을 깨끗이 한 다음 들으면 법이 잘 들립니다.
승민 교우님이 공부심이 충천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하려는 말을 했습니다. 고누지 않아도 법이 들립니다. 법과 마를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법이 들립니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흡수하느냐는 본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경계 속에서 법을 찾는 것과 편안하게 법을 듣는 것. 어디가 더 좋을까요? 또 하나는 교당에 와서 법을 들어야 법과 마를 구분할 힘이 생깁니다. 싸우는 모습을 보고 거기에 매몰되는 사람이 있고, 거기서 법을 찾아서 내 생활을 바꾸고 스스로를 진급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릅니다. 그 힘은 바로 생기는 것이 아니죠, 교당에서 법을 듣고 내 생활에, 마음에 대조해봐야 그것이 능이 나서 생활 속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싸우는 모습을 보고 거기서 법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내가 그 경계 속에 있다면 정말 어렵습니다. 내가 법으로 단련되고 법이 이것이구나 알고 찾아갈 지혜가 없다면 경계 속에서 법을 찾는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법설을 듣는 것이 어렵습니다. 권도품 3장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큰 소견이 열린 사람과 지각 있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 나옵니다. 큰 소견이 열린 사람은 우주 만물을 부처님으로 모시고 때 없이 상주 설법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려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주 설법으로 들리겠죠. 지혜가 없으면 번뇌로만 들립니다. 같이 파묻혀서 같이 원망하고 같이 다투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법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비를 다투느라 정신이 없을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법을 구하러 교당에 왔죠. 왔는데 소득 없이 가면 안타깝겠죠. 와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왔으면 얻어가세요. 그러려면 나에게 대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승민 교우의 1장에 대한 질문은 2장에 답이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법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 그리고 법이 되려면 그 안에서 법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때로는 법이 아닌 것 같은 헌화 잡담 속에서도 법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상주 설법이 되는 것이죠. 모든 경계 속에서 법을 듣는다. 모든 경계 속에서 나를 진급시킨다. 그렇게 하자는 것이 1장의 말씀이죠.
Q. 이경주 교우님
경계에는 순경, 역경, 공경이 있고 공경이 마음이 게을러진 경계라고 하시는데 정확하게 뜻을 알고 싶습니다.
정산종사법어 제2부 법어 제7 권도편 41 |
말씀하시기를 [국방을 하는 데에도 육, 해, 공 삼방면의 방어가 필요한 것 같이 공부인에게도 삼방면의 항마가 필요하나니, 그는 곧 순경과 역경과 공경(空境)의 세 경계라, 순경은 내 마음을 유혹하는 경계요, 역경은 내 마음에 거슬리는 경계요, 공경은 내 마음이 게을러진 경계니, 법강항마할 때까지는 방어에 주로 주력하고 항마 후에는 이 모든 경계를 노복처럼 부려 쓰나니라.] |
A. 전성욱 교무님
공경의 공이 빌 공(空)자를 씁니다. 비워버린 것입니다. 여기서는 수도인의 마음 상태가 게을러진 상태를 말합니다. 중국에 요즘 탕핑족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바닥에 누워버린 청년들이라는 뜻이래요. 비협조, 비폭력 운동이라고 한답니다. 내가 누워버리면 자본이 나를 절대 착취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사회가 나를 착취하지 못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우리나라에 n포 세대 있죠? 5포 세대, 7포 세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있으신가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그러면 여기 앉아있지 않겠죠? 아무것도 안 하면 누구 손해인가요? 이 사람들은 근데 자기가 이익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한편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생활, 사회 속에서 힘들었으면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했을까? 한편으로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수도인의 마음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순경, 역경 속에 오랫동안 있다 보니까 지쳤어요. 그래서 수도도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래 하고 그냥 지나쳐 가겠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죠. 경계를 당해서 게을러진 마음으로 이 경계를 극복할 수 있나요? 경계가 왔을 때 그냥 놔두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됩니까?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줘요? 마음이 아프면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해주기도 하는데, 경계가 해결됩니까? 해결이 안 되죠. 해결을 봐야 합니다. 물론, 언제 하는 것이 효과적인지는 다를 수 있겠지만 게을러진 마음 가지고는 경계를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공부를 해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공부인의 마음이 공부심이죠. 그것이 가라앉고 경계에 당해서 그냥그냥 대처하죠. 그러나 그것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공경을 많이 해보세요. 그러면 괴로움이 쌓입니다. 수도를 통해서 해결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대로 지내고 보면 괴로움만 쌓입니다. 그리고 순경을 당했을 때 역경을 당했을 때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회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 본인만 손해이듯이 공경의 경계를 오랫동안 방치하고 괴로움이 쌓여있으면 나는 어느샌가 한없는 강급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공부와는 더 멀어지게 되고, 순경보단 역경이 더 많이 찾아올 것이고, 원망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분·의·성에도 이것이 있죠. 반대되는 그것이 뭐예요? 불신·탐욕·나·우에도 있죠. 나태가 있습니다. 나태는 그냥 두면 별로 티가 안 나요. 그런데 이것이 오래되다 보면 나를 결국 강급의 길로 안내합니다. 다 하기 싫어지고 하는 일마다 실패하죠. 수도인에 있어서는 공경을 조심해야 합니다. 잘 티도 안 나거든요. 역경은 제일 티가 잘 나죠. 그다음이 순경, 그다음이 공경입니다. 공경은 티가 안 나요, 안 해도 별로 티가 안 납니다. 공부를 깊게 하는 사람이라면 공경을 주의 깊게 봐야 하고 살펴야 합니다. 주로 공경이 언제 찾아와요? 언제 게을러져요? 주말에, 쉬고 싶을 때, 피곤할 때, 몸이 아플 때, 목표가 없을 때, 자존감이 떨어질 때. 저번에 제가 유무념 공부 이야기했죠? 유무념 공부도 본인이 할만큼만 해야 합니다. 목표를 엄청 높게 잡고 안된다고 하면 공부 순서를 잘못 잡은 것입니다. 자존감만 떨어트리게 됩니다. 자기에게 맞는, 단계에 맞는 유무념을 잡아서 해야 합니다. 공경을 조심해라.
Q. 전대원 교우님
정을 쌓되 동정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고, 혜를 닦되 지우에 집착하지 않으며, 계를 지키되 선악에 속박이 없다는 것이 어떤 말씀인지 궁금합니다.
정산종사법어 제2부 법어 제7 권도편 52 |
말씀하시기를 [정(定)을 쌓되 동정에 구애 없는 정을 쌓으며, 혜(慧)를 닦되 지우에 집착 않는 혜를 닦으며, 계(戒)를 지키되 선악에 속박 없는 계를 지키라.] |
A. 전성욱 교무님
정·혜·계를 쌓되 구애 없는 정, 집착 않는 혜, 속박 없는 계를 쌓으라, 지키라, 닦으라 하셨습니다. 계를 예로 들어볼까요. 계를 지키되 선악에 속박 없는 계를 지키라 하셨습니다. 뭔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우리 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계문이 있습니다. 우리 보통급 10계문 1조가 뭐죠? 연고 없이 살생을 말며, 입니다. 이것을 지키되 선악에 속박 없는 계를 지켜야 합니다. 선은 무엇인가요? 죽이지 않는 것이고 악은 죽이는 것이겠죠. 여기에 속박되면 안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속박되지 않는다.
전대원 교우님: 계문이 지켜야지 생각하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다 보니 지켜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속박되지 말라는 말씀이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술에 속박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술을 절대로 못 먹겠죠? 그것이 선이거든요. 대원 교우를 문화원에 가둬놓고 열흘간 아무것도 안 준 다음에 막걸리를 한 병 가져다 놨어요. 먹어야 하나요 먹지 말아야 하나요? 악이니까 절대로 먹으면 안 되나요? 속박되면 거기에 갇히게 됩니다. 법을 자기 기준에 따라 바꾸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속박되지 말라는 것은 그 법에 매몰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흘 동안 굶어서 내일 죽을 것 같으면 막걸리라도 마시고 후에 은혜를 갚아야겠죠? 뭔가에 속박되면, 법에 속박되면 다른 걸 할 수 없습니다. 때론 그게 은혜가 되더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인과에 갇히게 되면 은혜가 됨에도 불구하고 그 선택을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속박되는 거예요. 작은 선에 갇힙니다. 그러면 큰 선을 나툴수가 없습니다. 지극한 선을 나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악을 넘어서 지선의 자리로 가자고 하는 것이거든요. 고락을 넘어서 극락으로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작은 낙에 집착하면 거기에 매몰되어 큰 낙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작은 정에 매이면 큰 정에 들지 못합니다. 작은 지혜에 매몰되면 큰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큰 지혜는 지우를 넘어선 것입니다. 큰 정은 동정을 넘어선 것입니다. 지선은 선악을 넘어선 것입니다. 무언가에 잡히면 안 됩니다. 공부가 깊어갈 때 이것이 대두되는 것이지 선악이 뭔지도 모르고, 동정 간의 정을 쌓는 것도 모르고, 지혜와 우도 구분하지 못하는데 이것을 들이댄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이 경지에 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 법문을 마음에 두고 있어야겠죠. 그래야 그 경계가 왔을 때 넘어설 수가 있습니다. 일단 작은 선부터, 작은 지혜부터 계속 쌓아보세요. 닦아가다 보면 부딪히게 됩니다. 이것은 최종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애 없는 정을 쌓아야 하고, 집착하지 않는 혜를 닦고, 속박 없는 계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법에 매이지 않고 참 법을 추구하면서 본인이 은혜로울 수 있습니다.
본인한테 적용되는 법문이 너무 많지 않나요? 정산종사님께서 서원에 대한 말씀, 법을 듣는 것, 자력 타력, 생활 속에 정말 대조해서 표준 삼을만한 법문들을 권도편에 많이 해놓으셨습니다. 법을 담아두어야 생활 속에서 쓸 수 있습니다. 꼭 다시 읽어보시고 본인의 생활과 대조하시고 활용되는 법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은혜롭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핳
와우 준성교우님 꾸준한 타이핑 공양 정말 감사합니다!! 잘 읽을게요!!!😆😆
감사합니다~ 도자부 화이팅!!
감사합니다! 준성교우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