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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 레지나 변)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320
부활절에 세례 받은 ‘강정의 딸’ 미량 씨흔들려도 끝까지 가보고 싶은 제주 해군기지 반대투쟁, 그리고 신앙생활승인 2014.04.28 11:35:58
강정 주민 김미량(미카엘라) 씨는 지난 19일 부활 성야 미사 때, 제주교구 서귀복자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해군기지 건설 싸움이 시작된 후 강정마을에서 탄생한 첫 번째 신자다. 세례 받은 다음 날 해군기지 공사장 앞 미사 천막에서 열린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에서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김미량 씨를 앞으로 불러 세례를 축하하고 영육간의 강건을 기원했다. 자리를 지키며 묵주기도까지 마친 미량 씨는 “어제 세례식 할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오늘 성체를 받을 때 갑자기 심장이 막 뛰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고 고백했다. 문정현 신부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미량 씨를 ‘강정의 딸’이라고 부른다. 강정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여서 마을 어른들과 가족처럼 스스럼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난 몇 년간 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미량 씨는 공사 현장에서 매일같이 경찰에 맞서 싸웠고, 좋은 게 생기면 강정의 사제, 지킴이들과 아낌없이 나누었으며, 투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결과, 1천만 원이 넘는 벌금과 수없는 재판, 그리고 감옥살이까지 경험해야 했지만 여전히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 처음 미량 씨가 교리교육을 받겠다고 한 건 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을 위해 강정 주민이 된 방은미(요한보스코) 씨 때문이었다. “강정마을 주민도 아닌데 자기 집 놔두고 왜 여기 와서 고생하나 싶었어요. 그런데 강론이나 영성체할 때 그 언니 눈에서 눈물이 막 떨어지는 거예요. ‘왜 저러지? 저 느낌이 뭐지?’ 궁금했죠.” ‘강정 주민’ 의무감으로 함께한 생명평화미사 미사에 참여한 건 주민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이었다. 매일 오전 11시 생명평화미사에 주민이 한 명도 없으면 정말 ‘외지 것들의 싸움’이라고 할까봐, 미량 씨는 꼬박꼬박 미사에 참석했다. 새벽부터 소리 없이 마을을 돌보는 지킴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미사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게 없었다”고도 말했다. 본인은 “참석만으로 의무는 다한다고 생각했기에 집중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사제들의 강론과 문정현 신부의 노랫가락은 긴 시간 눈송이처럼 차곡차곡 마음에 쌓였다. 교리교육을 시작한 게 2012년 9월이었으니 세례 받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린 셈이다. 미량 씨는 교리를 받는 중간에 몇 번씩이나 멈춰 섰다. “하느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신부님들이 반대운동에 같이 해주시니까 마음이 확 쏠린 건가 싶었어요. 가다 멈추고 흔들리고 그랬어요. 그런데 공소 회장님이 그냥 묵묵히 잘 기다려 주셨죠.” 미량 씨와 교리교육을 한 강정공소 정선녀 회장은 그런 시간이 ‘중요한 과정’이라 말했다. “그런 성찰을 한다는 건 대단히 훌륭한 자세인 것 같아요. 아무런 성찰 없이 교리를 받기도 하잖아요. 상황이나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점검이니까 시간이 필요하죠, 자기 정화의 시간이. 하느님의 섭리는 한 순간 확 쏟아지고 받아들이는 거라기보다는 여러 만남과 체험을 통해 꾸준히 자양분처럼 쌓이는 거잖아요. 그건 과정은 하느님의 도움이 아니라면 불가능하고요.” 미량 씨는 세례를 받기까지 강정마을 미사 천막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이라는 특별한 과정을 거쳤다. 1년 365일이 십자가의 길인 공사장 앞의 시간은 미량 씨의 신앙에 많은 자양분이 되었다. 미사 천막에서 바라본 세상은 이전에 알던 세상과는 달랐고, 외로운 싸움을 함께하는 사제, 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연대, 신뢰 등 소중한 가치를 더 깊이 배웠다. 하지만 정작 세례를 받기로 한 건 사람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었다. 자양분은 사람을 통해 공급되지만, 결정적인 마음의 끌림은 사람을 넘어선 곳에 있었다. 미량 씨는 자신에게 오는 크고 작은 신호들을 신비와 섭리로 느꼈다. 작년 5월, 미량 씨가 강정천 아래로 추락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밤늦게 전화를 건 문정현 신부는 “영세 받자”고 말했다. “당신도 2012년 봄에 방파제에서 추락하셨는데 신기하게 심하게 다치지 않으셨거든요. 그런데 저도 6미터 아래로 추락했는데 부러진 데 한군데 없는 거예요. 문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너를 기적적으로 지키시는 거 같다. 내가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미량아, 영세 받자’ 하셨어요.” 미량 씨는 자신이 세례 받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친구에게 뜻밖의 천사 도자기 인형을 받은 일이나 기침이 심했던 세례식 당일 기도했더니 세례식 동안 기침이 멎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전했다. 우연이라 여기고 스쳐지나갈 수 있는 일상 속에서,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듯 했다.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미량 씨가 ‘영혼이 맑은 사람’이라 했다.
교리교육 받는 동안 분노 잠재우게 돼 미량 씨는 어려서부터 개신교 교회에 나갔다. 외가에 개신교 신자가 많았고 이모부는 목사였다. 어린 시절 무교였던 할머니가 성경을 불태우기까지 했건만, 어머니는 ‘교회 가야 착한 어린이 된다’며 삼남매를 교회에 보냈다. “그땐 친구도 많았고 교회 가는 게 재미있었죠. 그게 다였어. 하느님과 함께하는 건 물론 좋지만 여태까지 내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던 거예요.” 하지만 어려서부터 성서와 교회 생활에 익숙했던 덕분에 교리 공부를 재미있게 할 수 있었다. 정선녀 회장은 교리 공부를 시작했을 당시를 떠올리며 “미량이가 성서를 읽는데, 감동했다”고 말했다. “말씀 나눔이 몸에 배어 있었어요. 강정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성서가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진행했고, 본인도 아주 맑게 흡수했어요. 성서를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미량 씨는 자신이 교리 공부를 하는 동안 많이 달라진 게 느껴진다 했다. 무엇보다 분노가 잠재워졌다.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앞에서 미량 씨는 경찰과 많이 싸웠다. 경찰은 평화로운 집회도, 미사도 그냥 놔두는 법이 없었다. 주변에서는 부당한 대우에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겁 없이 싸우는 미량 씨를 ‘야생녀’라고 불렀다. 하지만 요즘 ‘야생녀’ 미량 씨는 경찰에 둘러싸여서도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눈을 감고 기도를 한다. “처음에 천주교 신자가 되려는 이유에 ‘마음의 평안을 갖기 위해서’라고 썼어요. 그런데 쓰고 나서 분노가 많이 사그라졌죠. 어느 순간 경찰들이 뭘 어떻게 하건 상관없이 나는 침묵의 시위를 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을을 지키는 싸움을 위해 미량 씨는 서귀포에서 운영하던 식당의 문을 닫았다. 솜씨 좋고 사람 좋은 미량 씨가 직접 요리하고 운영했던 식당은 사람들이 줄을 서 먹을 정도로 소문난 맛집이었다. 하지만 싸움을 시작한 후 식당에 메여 있을 수 없던 미량 씨는 과감히 식당을 포기했다. 미량 씨는 자신이 ‘중간이 없는 사람’이라 했다.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중간만 하는 게 좋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전 중간이 없어요. 하하. 삼남매가 다 그래요. 긴가민가 하는 게 없죠. 해군기지는 옳지 않아요. 그건 명확하고, 그러니 계속 싸우는 거예요.” “아버지로 생각하라”던 ‘삼촌’도 앗아간 해군기지 갈등 미량 씨는 마을 의례회관 앞의 제주식 전통가옥을 개조해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었다. 해군기지 건으로 강정마을을 방문하는 이들이 묵을 곳이 마땅치 않기도 했지만, ‘퍼주고 남으면 내 것’이 신조인 미량 씨가 워낙 사람들과 맛있는 식사를 나누는 걸 즐거워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선녀 회장은 미량 씨가 “일할 때는 더없이 정확한 사람인데도, 주변 사람들과 나눌 때에는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퍼주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중 미량 씨가 유달리 마음을 쓰는 이들은 강정마을의 사제와 지킴이들이다. 미안함과 고마움, 안쓰러움 때문이다. “‘신부님, 고생하십니다’, ‘얘들아, 고생한다’ 이런 말을 잘 못해요. 대신 우리 집에서 맛있는 거 만들어 같이 드실 수 있게 하죠. 제가 하는 마음의 표현이에요.”
이렇게 사람 잘 챙기는 강정의 딸에게도 여전히 용서하기 힘든 이들이 있다.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한 같은 마을 주민들이다. “(찬성한 주민들은) 군부대가 들어온 뒤 마을이 어떻게 변할지 전혀 몰라요. 좋은 군부대 있는 데 관광시켜주고 그러니까 거기에 홀린 거죠. 차라리 해군기지가 들어와서 빨리 실상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어요. 지난 몇 년간 매 맞고 울고 재판에 가고 했던 시간들, 저는 너무 아팠거든요. 그 고통을 찬성한 사람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어요. 왜, 미사 중에 ‘제 탓이요, 제 탓이요’ 기도하잖아요. 세례 받기 전에 신부님께 ‘이것만큼은 내 탓이요가 안 된다’고 얘기했어요. 정말 못하겠다고요.” 미량 씨는 해군기지 문제로 집안 어른들끼리 호형호제하던 이웃을 잃었다. 한창 집안이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의 성실함을 높이 사며 아무 조건 없이 사업자금을 선뜻 내놓던 삼촌이었다. 미량 씨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 없다고 생각지 말고 나를 아버지로 생각하라”던 삼촌이었다. 어렸을 땐 매일 그 집에서 밥을 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남이다. 간혹 마을을 지나다 만나도 모른 척 지나간다. 씩씩하고 당찬 미량 씨는 해군기지 반대집회로 재판을 받을 때 판사 앞에서 삼촌 이야기를 하며 울었다. 해군기지 건설로 피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일 가운데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라 했다. “끝나면 언젠가는 다 잊고 함께 살 날이 올까요? 저는 어려울 것 같아요. 평생 씻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골이 너무 깊어요.”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싸움도 끝나지 않았다. 태어나고 자란 마을을 지키고자 죽을힘을 다했던 싸움은 이제 공권력에 맞서는 싸움으로 옮겨갔다. “평생 과제예요. 계속 싸울 거예요. 그 각오 안 했으면 왜 매 맞고 감옥 가고 했겠어요. 그렇게 마음이 정리되니까 두려움이 별로 없어요.” 공정률 50% 넘어섰다는 제주 해군기지 ‘미카엘라’라는 세례명은 강정마을에서 오래 같이 지낸 이영찬 신부(예수회)가 지어줬다. ‘강정을 지키는 천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 번 옳다고 생각한 해군기지 싸움을 끝까지 가고자 하는 것처럼, 미량 씨는 신앙생활도 “흔들리면서 가볼 것”이라 말했다. “평생 약속한 거니까요. 이젠 빼도 박도 못할 거 아니에요. 중간에 고민과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럴 때마다 붙들어 주실 거라고 믿어요. 천천히 시작하려고요.” 정선녀 회장은 “미량이는 신중해서 천천히 자기 신앙으로 가져갈 것 같다”고 말했다. 대모인 방은미 씨는 미량 씨에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 밖에서 늘 나를 지켜주신다는 걸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며 “강정이라는 아픈 땅에서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분과 함께할 수 있다면 덜 외로울 것”이라고 따뜻하게 당부했다. 대화를 마치고 일어날 때, 미량 씨가 갑자기 생각난 듯 “아, 세례식 때 그런가보다 한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거기서 눈물이 터졌어요.” ‘두려워하지 마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2014년 부활 대축일 제주교구장 사목 서한에서 강우일 주교는 “두려움은 사람을 한없이 약하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악의 세력이 가장 즐겨 활용하는 수단입니다”라며 북한 핵실험과 우리 정부의 국방 예산 증가가 모두 실체 없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강 주교는 “주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헛것에 매달리기보다 현실로 돌아가라고 하신다”며 “예루살렘의 텅 빈 무덤에 매달리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살아 있는 갈릴래아로 가라”고 말했다. 제주 해군기지사업단은 4월 16일 기준으로 해군기지 공사 총 공정률이 50.9%라고 발표했다. 펜스 안에서만 이뤄지던 항만 공사를 넘어 5월말 도로, 군 관사 아파트 등 펜스를 넘어선 공사가 시작될 예정이다. 미량 씨의 신앙처럼, 싸움도 이제 다시 시작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