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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논란] ● MBC <기황후>, 제작 전에 역사 공부 좀 하지… |
▲ 원 무종(하이산칸)의 영정(원대 그림). |
▲ 원 세조(쿠빌라이칸)의 영정과 사냥하는 모습(1280) 자료. ⓒ위키피디아 |
▲ 원 성종(테무르칸)의 영정(원대 그림). |
본문 주석 (주1) 哈眞曰: "我等來自萬里與貴國合力破賊千載之幸也. 禮當往拜國王吾軍頗衆難於遠行但遣使陳謝耳."哈眞札刺請冲就礪同盟曰:"兩國永爲兄弟,萬世子孫無忘今日." (<高麗史> 列傳「金就礪傳」) 이 기록은 <고려사>의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歲戊寅太祖聖武皇帝應天奮擧之初有亡遼遺種金山王子驅掠中原陸梁東土略無歸順之意妄有興復之謀. 朝廷命哈眞扎刺以討其罪天寒雪深粮道不繼. 我五代祖忠憲王遣趙冲金就礪助兵餽餉恊力攻破. 於是兩元帥聞奏朝廷與冲等結兄弟之盟世世子孫無忘今日.(<高麗史> 36卷 「世家36-忠惠王」) (주2) 朕觀今天下有民社而王者惟是三韓. 及祖宗而臣之殆將百載厥父菑而子復肯播曰我舅則吾謂之甥.旣勳以親宜貴與富 (<高麗史> 忠宣王 1年) (주3) B.하과(Б.Лхагва), <13~14세기 몽골-한국의 관계와 전통으로부터>, 1996(서울)을 박원길 S.촐몬 <한국·몽골 교류사 연구> (이매진, 2013)에서 재인용. (주4)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 (주5) "庚寅元遣中書舍人愛阿赤來先是爲征日本運江南米十萬石在江華島今遼瀋告飢帝詔以五萬石賑之.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 (주6) "高麗君臣, 感戴來朝, 義雖君臣, 而歡若父子"(<元史> 世祖紀) (주7) "今朕視爾國猶一家, 爾國若有難,朕安敢不救乎"(<高麗史>列傳「李藏用傳」) (주8) 예를 들면 <高麗史>의 기록에 "삼가 생각컨대 세조께서 특히 우리나라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고조 증조가 계속하여 親朝하였으며 마침 1천년에 際하여 부자가 따라서 입근함이 우금에 70년이 넘었나이다 "라고 한다. 원문은 庚寅以五道人民流入雙城女眞遼陽瀋陽等處表請刷還曰:"天本無私雖高卽聽人如有告所欲必從故罄卑情冀回大度. 欽惟世祖偏恤我邦高曾繼以親朝適此一千年際父子因而入覲于今七十歲餘.(<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 그리고 세조는 고려군신의 내조를 크게 기뻐하면서 고려를 여러 나라에 자랑하는 장면들이 <高麗史>에 보인다. 즉 "高麗君臣感戴來朝. 義雖君臣歡若父子. 計王之君臣亦已知之.' 褒獎小邦誇示諸國光寵至矣. 繼以帝女齊國大長公主嬪于忠烈王誕得一子卽太尉王年十六入侍天庭冊爲世子詔曰:'嗣惟汝嫡親是我甥. 世爲藩輔.'"(<高麗史>36卷 「世家36-忠惠王」). (주9) (충렬)왕이 조서 받기를 마치자 경령전에 배알하고 강안전으로 돌아와 황포를 입고 즉위하여 군신의 하례를 받았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조사(詔使 : 황제의 사신)를 접대하여 잔치를 베푸는데 詔使가 왕이 황제의 부마이기 때문에 왕을 남쪽으로 추양하고 조사는 동쪽으로 다루가치는 서쪽으로 앉았다. 왕이 행주하매 詔使가 절하며 받고 마신 뒤에 또 절하는데 다루가치는 서서 마시고 절하지 아니하자 詔使가 말하기를 "왕께선는 천자의 부마인데 늙은 놈이 어찌 감히 이 같이 무례하게 행동하느냐? 돌아가서 천자께 아뢰면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라고 꾸짖으니 다루가치가 답하기를 "공주께서 계시지 아니하고 또 이것은 그 동안의 관례였습니다."라고 변명하였다. 원문은 [王受詔畢謁景靈殿還御康安殿服黃袍卽位受群臣朝賀仍宴詔使詔使以王駙馬推王南面詔使東向達魯花赤西嚮坐 王行酒詔使拜受飮訖又拜達魯花赤立飮不拜詔使曰: "王天子之駙馬也老子何敢如是吾等還奏汝得無罪耶?"荅曰: "公主不在且此先王時禮耳."(<高麗史> 28卷「世家28-忠烈王1」)] (주10) (충렬)왕이 합백평장(哈伯平章)에 이르기를 "왕경 다루가치의 임기가 만료되었는데 랑가알(郞哥歹)은 일찌기 우리나라에 왕래하였으니 그를 대신하면 가히 쉽게 부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합백이 천자(세조)에게 이를 아뢰어 여쭈어 보니 천자가 말하기를 "굳이 (고려에) 다루가치를 둘 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 랑가알이라는 자는 어떤 사람인고? "라고 말했다. 원문은 王語哈伯平章曰: "王京達魯花赤秩滿而郞哥歹嘗往來小邦若以爲代可使如耳目也."哈伯以奏帝曰:"安用達魯花赤爲抑郞哥歹么麽人也?"(<高麗史>28卷「世家28-忠烈王1」) 또 <고려사>다른 부분에는 "(충렬)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천자께서는 가깝고 믿을만한 타타르인으로 다루가치를 삼아주소서.'라고 말하니 천자가 말하기를 '어찌 꼭 다루가치가 필요하겠는가 ? 네가 스스로 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王曰: "願得上所親信韃靼一人爲達魯花赤." 帝曰: "何必達魯花赤汝自好爲之."(<高麗史>28卷「世家28-忠烈王1」) (주11) "六月壬子王至上都謁帝于椶殿仍獻方物帝大設只孫宴.只孫華言顔色赴會者衣冠皆一色帝命王侍宴王於諸王駙馬坐次第四 寵眷殊異."(『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 또 다른 기록에는 "甲午皇太子卽皇帝位是爲成宗王與公主獻金盞銀鏤葵花盞各一副金甁金鏤銀尊壺湯甁酒甁各一事半鏤銀尊胡甁各一事銀盂八十一事銀鍾十八事紫羅九匹細苧八十六匹豹皮十八領水獺皮八十一領以充庭實表賀禮訖帝命王赴宴時諸王駙馬畢會王坐第七"(<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라고 되어있다. (주12) 壬申太上王餞于金郊酒酣使臣孛魯兀以帝命取國王印授逸壽王. 於是太上王復位. 王如元宿衛凡十年.武宗仁宗龍潛與王同臥起晝夜不相離忠烈王三十三年皇姪愛育黎拔力八達太子及右丞相荅刺罕院使別不花與王定策迎立懷寧王海山.左丞相阿忽台平章八都馬辛等謀奉安西王阿難達爲亂太子知其謀先一日執阿忽台等使大王都刺院使別不花及王按誅之. 五月皇姪懷寧王卽皇帝位是謂武宗. 三十四年五月戊寅元以定策功封瀋陽王制曰: "咨爾推忠揆義恊謀佐運功臣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駙馬王璋世祖外孫先朝貴壻方朕纘承之始寔叅翊贊之功. 以賞善罰惡之至公保孝父忠君之大節可特授開府儀同三司太子太傅上柱國駙馬都尉進封瀋陽王."又令入中書省叅議政事賜金虎符玉帶七寶帶碧鈿金帶及黃金五百兩銀五千兩. 皇后皇太子亦寵待所賜珍寶錦綺未可勝計. (<高麗史>33卷「世家33-忠宣王1」) 이에 대하여 충선왕 스스로도 백관(百官)에 하교(下敎)하는 자리에서 "부마가 되어 삼조(세조ㆍ무종ㆍ성종)를 겪어 모신 것이 어언 19년이 되었다. 더구나 년전에 황제 황태후 황태자를 우러러 의지하여 공을 일으키고 황제 폐하를 옹위하여 그 뜻과 일을 도와 사해를 숙청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辛未王在金文衍家百官會梨峴新宮王下敎曰: "肇自祖王統合三韓臣服述職者尙矣.逮我父王上國顧遇夐異於前獲承釐降厚沐寵光孤亦入侍繼爲駙馬歷衛三朝于今十有九年越於年前仰憑皇帝皇太后皇太子奮庸熙載肅淸四海至於本國奸佞之儔亦皆蕩除內外安寧. (<高麗史> 33卷 「世家33-忠宣王1」)] 충혜왕도 "大德末我祖太尉王佐仁宗皇帝平定內亂行至央骨迎立武宗皇帝爲定策一等功臣."(<高麗史>36卷 「世家36-忠惠王」)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13) 박원길 <배반의 땅, 서약의 호수 -21세기 한국에 몽골은 무엇인가> (민속원 , 2008)> 22쪽. 이와 관련된 기록은 [癸酉世祖皇帝崩王與公主以羊十馬一祭于殯殿其文曰: "鰈墟莫遠佇瞻蓂陛以來賓龍馭忽回曷極鼎湖之哀慕夢也覺也顚之倒之聊修菲薄之儀冀垂歆容之賜." 將使贊成事鄭可臣讀之諸大臣止之曰: "豈宜用諸侯之禮祭天子乎?" 遂不讀王奠薦之禮哀慕之誠皆致其極 元朝喪制非國人不敢近唯高麗得與焉故王之從臣雖輿臺之賤出入無禁.(<高麗史> 31卷「世家31-忠烈王4」)] (주14) 박원길(2008) 22쪽. (주15) 이상면 「한국-몽골 국가연합 가능성 분석」『한몽국가연합의 의의 세미나』 ; <신동아> 2007. 6월호. (주16) "其國禁, … 騎而相向者,其左而過,則謂之相順,食人以肉而接以左手,則謂之相逆 "(<黑韃事略>) |
김운회 동양대 교수
첫댓글 옳바른 역사 의식이 나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면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공부 좀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