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영화평(by 다소 허풍기가 있어 보이지만 재미있게 쓰는 이승재 기자)을 읽고, 이 건 꼭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요일에 맥주를 적당히 마신 관계로 일요일 아침 7시 기상. 그런데, 별로 적절치 않은 영화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와이프와 딸래미가 따라 나섰습니다. 영화는 "12세 이상 관람가"였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매우 세련됩니다. 감독의 연출솜씨가 훌륭하다고 감탄하게 되는 정도입니다. 특히, 뉴욕 근교(차로 1시간 남짓 거리라고 되어있습니다)로 이사를 가는 장면을 하늘에서 잡은 장면은 압권입니다. 자살한 아내에 대한 기억, 죽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차에 싣고 해안도로를 굽이굽이 돌아 숲으로 향하는 아빠와 어린 딸의 모습이 너무도 가슴시리게 잡혔습니다(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실종되는 장면을 카메라가 하늘로 풀풀 날아가버리듯이 위에서 멋지게 잡아낸 것이 생각납니다.) 제 옆자리에 딸래미와 와이프가 같이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와이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영화를 보는 것인지 알 길이 없고, 5살짜리 우리 딸래미는 영화속 엄마가 딸을 재우기 위해 숨바꼭질(hide and seek) 하는 것을 그저 어렴풋이 이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새로 이사를 간 시골마을 낯선 동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부동산중개인과 보안관의 메마른 표정에서는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는듯한 느낌이고 자식을 잃은 이웃집 부인과 사내는 굴곡많은 사연을 무겁게 짊어진 사람들로 그려집니다. 단 한 명, 엘리자베스 정도가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객은 "챨리"가 대체 누구인가를 잔뜩 긴장하면서 추측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관객을 속이기위한 "연막"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영화는 싱겁게 끝나버립니다. 시골사람들의 무뚝뚝한 표정이라기에는 너무도 의미심장한 냄새를 풍겼던 것이므로 그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가 필연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는 것은 너무도 실망스럽습니다. 그리하여, 엄마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아빠(로버트 드 니로)가 살해하였다는 것, 엄마가 자살한 것으로 아빠가 위장하는 것을 딸이 보았다는 것, 딸의 정신분열 징후에 비해 아빠의 정신분열은 이미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는 사실 등에 충분히 수긍할만한 필연성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관객들은 묘한 배신감을 맛보게 됩니다.
딸에 대한 엄마의 지극한 사랑, 딸에 대한 아빠의 마찬가지로 지극한 사랑, 엄마를 잃은 딸의 지독한 슬픔, 나쁜 아빠를 부정하지 못하는 어린 딸의 본능... 이런 점들에 대해 진득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뜨거운 눈물이라도 흘려볼 심산이었던 제 기대가 너무 턱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와이프와 딸래미랑 같이 보는 영화에서 아빠가 못된 존재로 그려지고 만 것이 저는 좀 억울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첫댓글 참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님의 글을 읽고나니 안봐도 되는 영화인가 싶네요 ^^ (농담이구요 ^^ 한번은... 비디오라도 꼭 보고 싶네요 ^^) 님의 감상평 잘 읽었습니다 ^^
얼마전 이 영화를 보았죠... 결론은 사실 좀 허무하긴 했지만... 자기자신도 자각할 수 없는 다른 내가 내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구요...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자신의 또다른 모습이었던 <찰리>로 밖에는 살아갈 수 없는 심리를 그런대로 잘 묘사하지 않았나 싶네요...
믿었던 사랑에 대한 배신이... 사람을 이렇게 완벽하게 변하게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섬뜩하기도 했구요...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새삼 느꼈답니다... <찰리>라는 존재를 만들어내 스스로 용서받고자 했던 나약한 지성인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했답니다... 엘리자베스만 불쌍해...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