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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 外編 第22篇 知北遊篇 解說(장자 외편 제22편 지북유편 해설)
마서윤馬叙倫이 ≪장자고莊子故≫에서 인용한 요내姚鼐의 주장에 의하면 이 편은 내편 〈대종사大宗師〉편을 조술祖述한 것이라 했다.
육덕명陸德明은 “의미를 취하여 편 이름을 지었다[이의명편以義名篇].”고 했지만 편의 첫머리에 나오는 ‘지북유知北遊’ 세 글자를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 편의 대지는 제1장에 있다. 제1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지知, 무위위無爲謂, 광굴狂屈, 황제黃帝 네 사람인데, 지知는 인간의 분별지를 상징하고, 무위위無爲謂는 도道를 상징하며, 광굴狂屈은 세속의 예교禮敎로부터 일탈하여 분별지를 잊은 사나이를 각각 상징한다(이께다도모히사池田知久). 특히 ‘무위위無爲謂’는 ‘무위無爲’와 ‘무위無謂’를 하나의 이름으로 합친 것으로 참된 도의 체득자는 말이 없다(무위無謂)는 점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곧 ≪노자老子≫ 제56장에 나오는 것처럼 “아는 이는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고 한 논리와 유사한데, 제1장뿐 아니라 이 편 전체를 꿰뚫는 논리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네 주인공 중에서 도道에 관해 가장 자세하게 말하는 황제黃帝는 그저 ‘지언知言’의 수준에 있는 것으로 평가될 뿐이다.
제9장에서는 명지明知의 밝음(광휘光輝)를 의미하는 광요光曜라는 이름의 현자와 상식적인 존재를 초월한 도道를 의미하는 무유無有라는 유도자有道者와의 문답을 통해 모든 개념적인 규정을 초월한 ‘도道의 절대성’을 밝히고 있다.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 불언지교不言之敎
莊子 外編 第22篇 知北遊篇 第1章(장자 외편 제22편 지북유편 제1장)
[제1장 해석]
지知가 북쪽으로 현수 물가에 놀러 가서 은분隱弅의 언덕에 올랐다가 마침 무위위無爲謂를 만났다. 지가 무위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도를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처신하고 일해야 도에 편안할 수 있으며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말미암아야 도를 터득할 수 있는가?” 하고 세 가지를 물었는데 무위위가 대답하지 않았는데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답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지가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백수의 남쪽으로 돌아가서 호결狐闋 위에 올라서 광굴狂屈을 보았다. 지가 그 이야기를 가지고 광굴狂屈에게 물어보자 광굴이 말했다. “응! 내가 그것을 안다. 너에게 일러 주겠다.” 하고는 말을 막 하려던 중에 말하고자 하던 것을 잊어버렸다.
지가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황제黃帝의 궁궐로 돌아가서 황제를 만나 물어보자 황제가 이렇게 말했다. “생각하지 말고 고민하지 말아야 비로소 도를 알게 되고 처신하지 말고 일하지 말아야 비로소 도에 편안할 수 있고 아무 것도 따르지 말고 말미암지 말아야 비로소 도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가 황제에게 물었다. “나와 당신은 도에 대해서 알고 저 무위위와 광굴은 알지 못하는데 누가 옳은 것일까요?”
황제가 말했다. “저 무위위는 정말 제대로 아는 자이고 광굴은 비슷하게 아는 자이고 나와 당신은 끝내 도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무릇 아는 자는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니 그 때문에 성인은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도는 이르게 할 수 없고 덕은 이를 수 없는 것이지만 인仁은 해볼 수 있는 것이며 의義는 훼손할 수 있는 것이며 예禮는 서로 거짓을 꾸미는 것이다. 그 때문에 ‘도를 잃어버린 뒤에 덕을 말하고 덕을 잃어버린 뒤에 인이 나타나게 되고 인을 잃어버린 뒤에 의를 말하게 되고 의를 잃어버린 뒤에 예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니 예란 도를 거짓으로 꾸민 것이고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으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그래서 ‘도를 추구하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니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함이 없음에 이르니 함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이미 사물이 되어 있으니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함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그런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대인 뿐일 것이다.
삶이란 죽음과 같은 무리이고 죽음이란 삶의 시작이니 누가 그 끝을 아는가. 사람의 삶은 기가 모인 것이니 모이면 태어나고 흩어지면 죽게 되는 것이니 만약 삶과 죽음이 같은 무리임을 안다면 내 또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무릇 만물은 매한가지인데 자기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신기하다 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냄새나고 썩었다고 하지만 냄새나고 썩은 것이 다시 신기한 것으로 바뀌고 신기한 것이 다시 냄새나고 썩은 것으로 바뀐다. 그 때문에 ‘천하를 통틀어 일기一氣일 뿐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니 성인은 그 때문에 하나를 중시한다.”
지知가 황제黃帝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무위위無爲謂에게 물어보았더니 무위위는 나에게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무위위는 나에게 대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꾸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광굴狂屈에게 물어보았더니 광굴이 나에게 일러 주려고 하던 중에 〈잊어버리고〉 나에게 일러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나에게 일러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러 주려고 하던 중에 일러 줄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물어보았더니 당신은 그것을 아는데 무슨 까닭으로 도에 가깝지도 못하다 하시는지요.”
황제黃帝가 말했다. “저 무위위無爲謂가 참된 도를 터득한 것은 알지 못함으로써 이고 저 광굴狂屈이 도와 비슷한 것은 그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며 나와 그대가 끝내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알기 때문이다.”
광굴狂屈이 그 이야기를 듣고 황제를 두고 말을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知北遊於玄水之上 登隱弅之丘而適遭無爲謂焉 知謂無爲謂曰
予欲有問乎若 何思何慮則知道 何處何服則安道 何從何道則得道
三問而無爲謂 不答也 非不答 不知答也
(지 북유어현수지상하야 등은분지구이적조무위위언하야 지 위무위위하야 왈
자욕유문호약하노라 하사하려면 즉지도며 하처하복이면 즉안도며 하종하도면 즉득도오
삼문이 무위위 부답야하니 비부답이라 부지답야니라)
지知가 북쪽으로 현수 물가에 놀러 가서 은분隱弅의 언덕에 올랐다가 마침 무위위無爲謂를 만났다. 지가 무위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도를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처신하고 일해야 도에 편안할 수 있으며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말미암아야 도를 터득할 수 있는가?” 하고
세 가지를 물었는데 무위위가 대답하지 않았는데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답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 지知 : 가공의 인명. 인지人知를 의인화하여 우언으로 표현하였다.
☞ 북유어현수지상北遊於玄水之上 : 현수玄水는 물 이름. 아래의 백수白水와 상대되는 표현이다.
☞ 등은분지구이적조무위위언登隱弅之丘而適遭無爲謂焉 : 은분隱弅은 가공의 지명. 분弅은 높은 언덕. 무위위無爲謂는 지知와 마찬가지로 우의寓意를 담은 가공의 인명.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도이다[無爲無謂者 道也].”(임자林自). 적適은 ‘그때 마침’.
☞ 하사하려즉지도何思何慮則知道 하처하복즉안도何處何服則安道 하종하도즉득도何從何道則得道 : 복服은 일하다는 뜻. 하도何道의 도道는 ‘유由(말미암을 유)’의 뜻(奚侗).
☞ 비부답非不答 부지답야不知答也 : 대답하기 싫어서 거절한 것이 아니라 대답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의미로 무위위無爲謂는 이름의 뜻 그대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다.
知不得問 反於白水之南 登狐闋之上而睹狂屈焉
知以之言也 問乎狂屈 狂屈曰
唉 予 知之 將語若 中欲言而忘其所欲言
(지 부득문하야 반어백수지남하야 등호결지상이도광굴언하야
지이지언야로 문호광굴한대 광굴왈
애라 여 지지하노니 장어약호리라 중욕언이망기소욕언하야늘)
지가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백수의 남쪽으로 돌아가서 호결狐闋 위에 올라서 광굴狂屈을 보았다.
지가 그 이야기를 가지고 광굴狂屈에게 물어보자 광굴이 말했다.
“응! 내가 그것을 안다. 너에게 일러 주겠다.” 하고는 말을 막 하려던 중에 말하고자 하던 것을 잊어버렸다.
☞ 반어백수지남反於白水之南 : 반反은 돌아옴. 반返과 같다.
☞ 호결狐闋 : 가공의 언덕 이름. “여우는 의심을 나타내고 결闋은 쉰다는 뜻이다.”(陳景元)
☞ 광굴狂屈 : 역시 가공의 인명. “狂은 망령됨이고 屈은 구부림이다.”(陳景元)
知不得問 反於帝宮 見黃帝而問焉 黃帝曰
無思無慮 始知道 無處無服 始安道 無從無道 始得道
(지 부득문하야 반어제궁하야 견황제이문언한대 황제왈
부사무려라야 시지도하고 무처무복이라야 안지도하고 무종무도라야 시득도하리라)
지가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황제黃帝의 궁궐로 돌아가서 황제를 만나 물어보자 황제가 이렇게 말했다. “생각하지 말고 고민하지 말아야 비로소 도를 알게 되고 처신하지 말고 일하지 말아야 비로소 도에 편안할 수 있고 아무 것도 따르지 말고 말미암지 말아야 비로소 도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 무종무도無從無道 시득도始得道 : 달생達生편에 “마음에 동요動搖가 없고 외물에 끌려가는 일이 없는 것은 기회에 꼭 맞기 때문이다.”라고 한 대목을 참고.
知問黃帝曰 我與若知之 彼與彼不知也 其孰是邪
黃帝曰 彼無爲謂眞是也 狂屈似之 我與汝終不近也
夫知者不言 言者不知 故 聖人行不言之敎
(지 문황제왈 아여약의 지지와 피여피의 부지야 기숙시야오
황제왈 피무위위는 진시야요 광굴은 사지하고 아여여는 종불근야하니라
부지자는 불언하고 언자는 부지하니 고로 성인은 행불언지교하나니라)
지가 황제에게 물었다. “나와 당신은 도에 대해서 알고 저 무위위와 광굴은 알지 못하는데 누가 옳은 것일까요?”
황제가 말했다. “저 무위위는 정말 제대로 아는 자이고 광굴은 비슷하게 아는 자이고 나와 당신은 끝내 도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무릇 아는 자는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니 그 때문에 성인은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 : 노자老子 제56장에 같은 내용.
☞ 성인행불언지교聖人行不言之敎 : 노자老子 제2장에 같은 내용.
道不可致德不可至 仁可爲也 義可虧也 禮相僞也
故曰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禮者道之華而亂之首也
(도불가치며 덕불가지요 인가위야며 의가휴야며 예상위야니
고로 왈 실도이후에 덕이오 실덕이후에 인이오 실인이후에의오 실의이후에 예니
예자는 도지화이난지수야니라)
도는 이르게 할 수 없고 덕은 이를 수 없는 것이지만 인仁은 해볼 수 있는 것이며 의義는 훼손할 수 있는 것이며 예禮는 서로 거짓을 꾸미는 것이다.
그 때문에 ‘도를 잃어버린 뒤에 덕을 말하고 덕을 잃어버린 뒤에 인이 나타나게 되고 인을 잃어버린 뒤에 의를 말하게 되고 의를 잃어버린 뒤에 예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니
예란 도를 거짓으로 꾸민 것이고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으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 도불가치며 道不可致 : 도는 인지人知로 궁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 치致는 “바로 초치招致의 치致이다. 취하여 배운다는 뜻이다.”(阮毓崧).
☞ 덕불가지德不可至 : 지至는 도到 또는 급及의 뜻으로 도달하다는 뜻. 덕德은 언어로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 인가위야仁可爲也 의가휴야義可虧也 예상위야禮相僞也 : 인, 의, 예는 도와 덕에 비해 인위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
☞ 실도이후덕失道而後德 실덕이후인失德而後仁 실인이후의失仁而後義 실의이후예失義而後禮 예자도지화이난지수야禮者道之華而亂之首也 : 노자老子 제38장에 유사한 내용.
故曰爲道者 日損損之又損之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也
今已爲物也 欲復歸根不亦難乎 其易也其唯大人乎
(고로 왈위도자는 일손이니 손지하고 우손지하야 이지어무위하나니 무위이무불위야니라
금에 이위물야요 욕복귀근이 불역난호아 기역야는 기유대인호인저)
또 그래서 ‘도를 추구하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니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함이 없음에 이르니 함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이미 사물이 되어 있으니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함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그런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대인 뿐일 것이다.
☞ 위도자爲道者 일손日損 손지우손지損之又損之 이지어무위以至於無爲 무위이무불위야無爲而無不爲也 : 노자老子 제48장에 “배우는 일은 날마다 보태지만 도를 닦는 일은 날마다 덜어낸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서 함이 없음에 이르니 함이 없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여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
☞ 금이위물야今已爲物也 욕복귀근欲復歸根 불역난호不亦難乎 : 세상 사람들은 이미 순박한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도로 돌아갈 것을 생각해도 매우 어렵다는 뜻.
☞ 기유대인호其唯大人乎 : 대인은 도를 터득한 사람. 때로 진인眞人, 지인至人, 성인聖人 등으로 표현되는 이상적 인간을 지칭한다.
生也死之徒 死也生之始 孰知其紀
人之生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 若死生爲徒 吾又何患
(생야는 사지도요 사야는 생지시니 숙지기기오
인지생은 기지취야니 취즉위생이오 산즉위사니 약사생위도면 오우하환이리오)
삶이란 죽음과 같은 무리이고 죽음이란 삶의 시작이니 누가 그 끝을 아는가.
사람의 삶은 기가 모인 것이니 모이면 태어나고 흩어지면 죽게 되는 것이니 만약 삶과 죽음이 같은 무리임을 안다면 내 또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 숙지기기孰知其紀 : 기紀는 궁극窮極의 뜻(方勇‧陸永品).
故萬物一也 是其所美者爲神奇 其所惡者爲臭腐
臭腐復化爲神奇 神奇復化爲臭腐 故曰通天下一氣耳
聖人故貴一
(고로 만물이 일야어늘 시기소미자를 위신기오 기소오자를 위취부언마는
취부 복화위신기하며 신기 복화위취부하나니 고로 왈 통천하히 일기이라하니
성인이 고로 귀일하나니라)
무릇 만물은 매한가지인데 자기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신기하다 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냄새나고 썩었다고 하지만
냄새나고 썩은 것이 다시 신기한 것으로 바뀌고 신기한 것이 다시 냄새나고 썩은 것으로 바뀐다. 그 때문에 ‘천하를 통틀어 일기一氣일 뿐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니
성인은 그 때문에 하나를 중시한다.”
☞ 시기소미자是其所美者 위신기爲神奇 기소오자其所惡者 위취부爲臭腐 : 세상 사람들이 열생오사悅生惡死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 취부臭腐 복화위신기復化爲神奇 신기神奇 복화위취부復化爲臭腐 :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순환 반복함을 비유한 표현이다.
☞ 통천하일기이通天下一氣耳 : 통通은 관통貫通의 뜻. 취부臭腐와 신기神奇가 모두 일기一氣임을 지적한 내용이다.
知謂黃帝曰 吾問無爲謂 無爲謂不應我 非不我應不知應我也
吾問狂屈 狂屈中欲告我而不我告 非不我告中欲告而忘之也
今予問乎若 若知之 奚故不近
(지 위황제왈 오문무위위호니 무위위 ㅂㄹ응아하니 비불아응이라 부지응아야니라
오문광굴호니 광굴이 중욕고아이불아고하니 비불아고라 중욕고이망지야니라
금여 문호약호니 약이 지지하니 해고로 불근고)
지知가 황제黃帝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무위위無爲謂에게 물어보았더니 무위위는 나에게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무위위는 나에게 대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꾸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광굴狂屈에게 물어보았더니 광굴이 나에게 일러 주려고 하던 중에 〈잊어버리고〉 나에게 일러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나에게 일러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러 주려고 하던 중에 일러 줄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물어보았더니 당신은 그것을 아는데 무슨 까닭으로 도에 가깝지도 못하다 하시는지요.”
黃帝曰 彼其眞是也 以其不知也 此其似之也 以其忘之也
予與若 終不近也 以其知之也 狂屈聞之 以黃帝爲知言
(황제왈 피기진시야는 이기부지야라 차기사지야는 이기망지야라
여여약이 종불근야는 이기지지야니라 광굴이 문지하고 이황제로 위지언이라하다)
황제黃帝가 말했다. “저 무위위無爲謂가 참된 도를 터득한 것은 알지 못함으로써 이고 저 광굴狂屈이 도와 비슷한 것은 그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며
나와 그대가 끝내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알기 때문이다.”
광굴狂屈이 그 이야기를 듣고 황제를 두고 말을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 피기진시야彼其眞是也 이기부지야以其不知也 차기사지야此其似之也 이기망지야以其忘之也 : 피彼는 무위위無爲謂를 지칭하고 차此는 광굴狂屈을 지칭한다.
☞ 광굴문지狂屈聞之 이황제위지언以黃帝爲知言 : 지언知言의 수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황제를 두고 겨우 말귀 정도는 알아듣는 사람’이라고 제한적으로 평가한 것이라는 이해도 가능하고, ‘황제야말로 참으로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통찰을 가진 사람’이라는 칭송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견해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