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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확실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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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뉴스 및 기타 뉴스 등 스크랩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서..
알로에김 추천 0 조회 486 05.09.05 14:0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나라와 개신교(개혁신교 ; Protestant)

 

  

 

1. 복음의 씨앗을 받다

 

불과 1세기만에 한국교회는 5만 교회와 1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했다.한국교회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질적인 발전을 꾀하며,소망이 가득한 21세기를 위해 제2의 성장을 꿈꾸고 있다.희망찬 미래는 과거를 철저히 분석해 오늘에 적용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데서 얻어진다.

 

한국갤럽이 97년을 기준으로 `한국인의 종교실태와 종교의식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처음으로 개신교인의 비율이 타종교인의 비율을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개신교인의 비율은 20.3%이며 불교와 천주교는 각각 18.3%와 7.4%였다.선교가 시작된 지 1백12년만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다.

 

기독교가 성장 발전한 것은 선배 신앙인들의 피와 땀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누구에 의해 한반도에 기독교가 최초로 전해졌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많은 종교 역사학자들은 기독교의 전래를 중국과 일본의 기독교 역사와 연관지어 추정할 뿐이다.서양 종교학자들은 대부분 팔레스타인에서 소아시아로,소아시아에서 로마로,로마에서 유럽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다고 보고 있다.

 

최근 베일에 가려져있던 기독교의 동방전래 과정이 구전차원을 넘어 차츰 문헌과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새롭게 증명되는 자료를 통해 복음의 역사는 그 뿌리가 점점 깊어지고 있다.예수의 12제자 중 도마와 바돌로매가 인도와 중국을 선교했다는 설이 있으며 보다 실증적인 복음의 동방전래는 네스토리우스파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한 종파를 형성한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 근처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428년 동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감독에 임명됐으나 교리논쟁에 휩싸였다.네스토리우스파는 교리논쟁에서 알렉산드리아학파에 패배해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렸다.

 

네스토리우스파가 서방교회와 단절되는 순간이었다.네스토리우스파는 몸을 추스르고 독자적인 교회 전통을 수립해 나갔다.페르시아를 기반으로 7세기 초부터 인도와 아라비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고 이 물결은 비단길을 따라 중국까지 이르렀다.

 

알로펜을 중심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의 선교단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635년 당 태종 때였다.이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였다.당 태종은 재상 방현령을 통해 네스토리우스파의 선교단을 맞이했고 장안(長安)에 머물면서 경전을 번역하도록 했다.네스토리우스파는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나 경교로 널리 알려졌다.그리고 3년 뒤 경교는 조정의 인정을 받아 포교활동을 허락받았다.

 

경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1세기 이상 융성하다 당 말기에 이르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특히 경교는 845년 무종에 의해 탄압받고 875년 황소의 난으로 신도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등 핍박을 받아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원대에 다시 일어났다.

 

일부 종교 역사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와 몽고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던 고려시대에 경교가 우리나라에 어떤 경로로든 전래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한국기독교사연구회가 1989년 펴낸 `한국기독교의 역사Ⅰ"에 의하면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고든이 이같은 가능성을 제일 먼저 제시했다.

 

고든은 한일합방 무렵 한국에 4년간 머물면서 불교사찰을 관찰한 뒤 경교가 한국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즉 그는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의 신장과 관음상 나한상 제석천상 등에서 페르시아의 경교적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래된 시기는 1832년으로 봐야 할 것 같다.이때 로드 암허스트호의 선의(船醫)이며 통역관인 칼 귀츨라프가 지금의 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 2리 고대도에 와서 성서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 문화유적을 발굴하고 있는 교회사가 전택부장로가 귀츨라프의 항해기를 입수해 공개한 적이 있다.이 자료에 따르면 귀츨라프가 조선 국왕에게 성서를 권유했고 왕은 이를 거절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고대도 주민들은 성서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당시 귀츨라프는 고대도에 상당기간 체류하면서 주민들에게 감자 재배법을 가르쳐주고 감기를 앓고 있는 노인에게 약도 지어주었다.선장 린제이의 항해기에는 귀츨라프가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이를 다시 한국인 양이가 조선말로 받아적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뒤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 제물포에 첫 발을 내디뎠다.한국 교회는 현재 이를 개신교의 첫 전래로 보고 있다.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행사도 이를 기준으로 지난 95년에 열렸다.

 

그런데 서울로 들어선 언더우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이미 한글로 번역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

즉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전래는 언더우드 등 외국 선교사가 오기 전,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자주적으로 전파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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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독교의 자주적 수용

 

최초의 한글성경 1882년 간행된 한글성경 "예수셩교 누가복음". 개정 그리스어성경을 기초로 했다. 서북방언으로 번역이 시작됐고 1882년부터 서울출신 학자들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응찬과 백홍준 서상륜 등이 주도적으로 번역했다.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뎠다.상주(常駐) 선교사로 파송된 것.아펜젤러 목사는 부인의 건강 때문에 곧 돌아갔다.하지만 독신인 언더우드 목사는 서울로 향했다.마음 속에는 이 복음의 불모지를 갈아 씨를 뿌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기대가 가득차 있었다.그런데 서울로 들어선 언더우드 목사는 깜짝 놀랐다.이미 한글로 번역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기 때문이었다자신도 입국하기 전 우리말로 번역된 마가복음을 한국인으로부터 전해받아 놀라고 있던 터였다.선교사들에 의해 전도가 시작되기 전 피선교국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된 사례는 선교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언더우드가 입국 2년 뒤 첫 교회를 조직할 때도 그 구성원은 이미 서울에 있던 신앙공동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언더우드 목사는 `씨를 뿌려야 할 때 이미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언더우드 목사 등이 한국에 입국하기 6년 전

1879년 만주.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성경번역자가 세례를 받은 데 이어 백홍준과 이응찬,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응찬의 친척이 거의 같은 시기에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소속 존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백홍준은 도(道)를 배울 목적으로 스스로 로스목사를 찾아가 세례 전 3,4개월 동안이나 성경을 배웠다.이응찬은 1876년부터 존 로스목사의 어학(語學)선생으로 활동하다 수세(受洗)를 결심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북중국에 파견되었던 로스 목사는 한국사람을 처음 만난 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오늘 이상한 민족을 만났다. 중국이들과도 다른 이 민족은 흰 망또를 걸쳤고, 머리에는 연통같은 것을 쓰고 있다. 나는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사명을 느낀다"

이렇게 해서 로스 목사는 이응찬 등에게서 한글을 배우고 한글성경 번역작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성경번역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미 1880년 신앙공동체를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매킨타이어 선교사의 1880년 보고서에 따르면 1879년 10월 이전에 8명 이상이 모이는 한국인 저녁집회가 있었다.이 집회는 한국인이 주관했다.매킨타이어 선교사는 이 집회의 방청인에 불과했다.

 

서상륜. 권서인으로서 한국에 성서 배포의 뿌리를 심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82년에는 성경인쇄 실무를 맡았던 김청송과,상인으로 만주에 왔다가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서상륜이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쯤 성경번역도 마무리됐다.1879년 신약성서 로마서까지의 원고가 마련됐고 1882년 `예수셩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인쇄하기 이르렀다.

 

성경 인쇄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로스 목사는 첫 수세자들을 파송했다.1882년 김청송이 서간도지역에 파송된 데 이어 서상륜이 대영성서공회 최초의 한국 권서인 자격으로 서울지역에 파송됐다.김청송은 중국 즙안(輯安)을 중심으로 활동해 수십명의 개종자를 얻었다.존 로스 목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1884년 말 수세자 1백명,남자 세례 요청자들이 6백여명에 이르렀다.즙안의 가정교회들은 1885년 중국인 지주에 의한 한인마을 해산 사건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의 압록강 인근 산간으로 돌아와 가정교회 형태의 신앙공동체를 이뤘다.

 

김청송과는 달리 서상륜은 한반도의 중심 서울로 향했다.서상륜은 서울로 오면서 3개월 동안 의주와 황해도(송천지역, 한국최초의 개신교회 소래교회 설립 1884년) 지역에서 전도했다.

1883년 초 서울에 도착한 서상륜은 서울 남대문 안쪽에 거처를 정하고 활동해 여러명의 개종자를 얻었다.서상륜은 중국의 로스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서울에 와서 13명의 개종자들에게 세례줄 것을 요청했다.그러나 로스 목사의 입국은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불가능했다.결국 이들은 1885년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83년 서울과 북부지방에서 전도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일본에서도 세례를 받는 사람이 나타났다.이수정.민비를 구출한 공로를 인정받아 박영효의 수신사 일행에 포함돼 일본유학을 가게된 인물이다.그는 1883년 5월 도쿄에서 열린 `전국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우리말로 기도하고 한문으로된 신앙고백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수정은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1884년 한문성경에 토를 붙인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1885년 한글로 마가복음서를 번역했다.언더우드 목사가 1885년 4월 제물포항에 내릴 때 손에 들고있던 성경이 바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었다.그는 또 도쿄에서 유학생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조직했다.미국 선교사 헨리 루미스의 1883년 보고서에 따르면 이때 12명 이상의 개종자가 있었고,주일학교도 시작됐다.그러나 만주의 기독교인들과 달리 일본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지속되지 못한 듯하다.

 

한국 선교는 서양 선교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먼저 진행됐다.이를 바탕으로 교회도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시작됐다.

 

일부 교회사학자들은 1885년을 선교 시점(始點)으로 잡는데 이견을 갖고 있다.이때가 첫 조직교회가 생긴 때도 아니고 서양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때도 아니기 때문이다.1832년 고대도에 `첫발을 디뎠던" 귀츨라프 목사나 1866년 평양 대동강변의 토마스 목사,1884년에 들어온 `상주 의료선교사" 알렌 등이 모두 1885년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1885년을 선교의 시작으로 보기 힘든 이유는 이때보다 연대적으로 앞선 `밖으로부터의 선교" 행적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우리 민족이 `안에서부터 받아들인 선교"의 자국이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다.만주에서 첫 세례자가 있던 때나 소래에서 첫 신앙공동체(교회)가 세워진 때를 시작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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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첫 신앙공동체와 선교사

 

첫 신앙공동체 소래교회

 

1884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앙공동체 소래교회. 서경조의 사랑채에서 모이다가 자리가 부족해지자 1895년6월 일자형 기와예배당을 지어, 7월3일 봉헌했다.

 

1884년 인천 해관(海關·세관)이 발칵 뒤집혔다.중국 상하이(上海)~제물포를 오가는 기선에 수취인 미상의 금서(禁書),한글복음서와 교리서가 가득 들어있었기 때문이다.해관 관리들은 그 문서의 수취인을 색출해야 한다며 법석을 떨었다.금서를 받을 사람이 국내에 잠입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이때 해관 고문인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한 장의 편지가 도착됐다.

 

“받은 성서와 책들을 서상륜에게 전해 주시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부인이 마침 편지의 내용을 보게 됐고 남편에게 사건이 확대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묄렌도르프부인의 부탁으로 이 사건은 더 이상 크게 확대되지 않았고 책은 서상륜에게 몰래 전달됐다.

 

이미 1883년 서울에 들어온 서상륜은 전도에 힘써 13명의 개종자를 얻은 상태였다.서상륜은 책을 받아들고 동생 경조(상우)를 떠올렸다.그리고 고향인 의주에서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松泉里·소래)로 이주한 그의 동생 경조를 서울로 불러들였다.

 

형에게서 신약전서와 덕혜입문(교리서) 등의 책을 받은 서경조는 집에 돌아와 신약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두세차례 읽었지만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서경조는 이 책 속에 기이한 술법이 숨겨져 있으리라고 믿고 여러번 다시 읽었다.마침내 신약이 말하는 뜻을 알게 됐고 기이한 술법을 얻어보려던 마음은 없어졌다.`예수교"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동시에 서경조는 갈등하게 됐다.

 

예수교를 믿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그는 반년동안 갈등했다.그러다가 로마서를 읽게 됐다.이어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졌던 것을 알게 됐다.결국 서경조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전도를 시작했다.그리고 몇몇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을 모아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했다.첫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로스 목사의 1885년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송천에는 20명의 세례 지원자가 있었다.또 서울에 70명,의주에는 18명이 각각 세례를 받고자 했다.그 무렵 의주에서도 예배처소가 생겼다.

 

서경조는 1887년1월 서울에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그후 그는 성직자의 길을 결심,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목사 7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민초(民草)들을 중심으로 전도가 이뤄지면서 성서를 읽고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무렵의 국내 정국은 매우 어수선했다.1882년 5월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독일 이탈리아 영국 러시아 등과 차례로 개방조약을 맺었다.한·미조약에 따라 미국은 1883년 초대 주한전권공사 푸트를 파견했고 우리나라는 6월 민영익을 단장으로 하는 견미사절단을 파송했다.

 

견미사절단은 미국순방 중 미국 감리회의 가우처 목사를 만나고 가우처 목사는 이를 계기로 일본의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도록 부탁했다.당시 우리나라는 대문 빗장을 풀어놓긴 했지만 선교의 문까지 열진 않았다.

 

한편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이수정은 미국장로교회 녹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개종한 후 일본에서 활발한 전도활동을 벌이고 있었다.1883년 말에는 미국 교회에 편지를 보내 선교사를 파송해달라고 청원하기까지 했다.이 내용이 1884년 초 미국 교계 간행물에 소개됐고 이를 계기로 미국 교회는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준비하기 시작했다.그리고 한국 선교를 자원한 의료선교사 헤론을 일본으로 보내 한국어를 배우도록 했다.

 

알렌이 제의해 1885년 세워진 첫 서양식병원 광혜원(위 왼쪽)과 현재의 세브란스병원 가우처 목사의 편지를 받은 매클레이 선교사는 일본에서 몇번 만난 김옥균의 주선으로 1884년6월24일 서울에 도착했다.김옥균은 기독교를 처음 접했을 때는 탐탁치 않게 여겼었다.그러나 세차례 일본을 방문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알게 됐고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매클레이 선교사의 방한을 선뜻 주선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우리나라에 도착한 매클레이 선교사는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선교에 관한 청원서를 냈다.그러나 직접적인 선교보다는 병원과 학교 사업을 벌이겠다는 내용이었다.그리고 7월3일 고종이 한국에서 병원과 학교사업을 할 수 있도록 윤허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매클레이 선교사는 잠시 서울에 머물면서 선교사가 거주하고 일할 수 있는 선교부 대지를 물색,주한미국공사 푸트에게 공사관 인근 언덕을 매입해 달라고 부탁하고 서울을 떠났다.

 

한편 매클레이 선교사가 내한해 고종에게 선교에 관한 청원서를 내기 직전인 6월8일,중국 상하이에 있던 의료선교사 알렌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에 전보를 보내 한국으로 가겠다고 밝혔다.중국에서 1년간 활동을 벌였으나 그 결과가 신통치 않아서였다.그렇게 해서 일본에서 한국선교를 준비하고 있던 의료선교사 헤론이 있었지만 미 장로교회는 알렌의 한국 입국을 허락한다.알렌은 1884년9월20일 제물포에 외국 공관원들의 공의(公醫) 신분으로 도착했다.선교사임을 밝히지 못했던 것이다.미국공사 푸트는 알렌을 매클레이 선교사가 부탁했던 집에 기거하도록 했다.알렌은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12월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이 열렸다.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개혁파는 이날 보수파의 중심세력을 모두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거사를 단행했다.보수파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고 고종을 이어(移御)해 개혁을 선언하는 등 뜻한대로 성공을 거두는 듯했지만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그런데 민영익의 부상은 알렌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알렌은 밤중에 급히 호출됐다.왕비의 오빠 민영익의 중상을 한의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알렌은 최선을 다해 민영익을 살렸다.3개월 동안 매일 세차례 왕진하며 치료한 결과였다.알렌은 이를 계기로 왕실의 신임을 얻고 자신감을 회복하여 1885년 광혜원 설립을 요청한다.광혜원은 세브란스병원과 연세대학교의 모체가 된다.

 

1884년 우리나라 선교의 행보는 무척 바빴다.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선교를 모색하고 첫 상주(常駐) 의료선교사를 파송,전도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리고 이 나라의 민초들은 이미 성서를 읽고 개종,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예배를 드렸다.초기 신앙의 선배들은 목숨을 걸고 성서를 읽었으며 죽을 각오로 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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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본격 선교와 제중원

 

1885년 상주 선교사들이 속속 입국, 제중원을 거점으로 활동을 준비했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에 왔습니다.이 날에 죽음의 철창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1885년 미 감리교회 연간 선교보고서)

 

일본 유학생 이수정의 편지가 미국에 소개되면서 북장로회는 의료선교사 헤론을 일본에 보내 한국 선교를 준비시키고 자원(自願)한 알렌을 한국에 입국하게 했다.그리고 교육선교사로 언더우드를 선발했다.미 감리회도 일본의 매클레이 선교사를 통해 의료와 교육 사업 허락을 받고 의료선교사 스크랜턴과 교육선교사 아펜젤러를 선발하였다.각기 의사와 교사이면서 언더우드와 스크랜턴,아펜젤러는 모두 목사였다.특이한 점은 북장로회와 감리회가 모두 의료와 교육을 통한 간접선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광철교수(한신대 종교학)는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성향이 강했던 북장로회와 감리회 선교부가 의료·교육을 통한 간접선교를 택한 이유로 가톨릭 선교의 역사적 경험을 들었다.병인교난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가톨릭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그리고 박해를 피하기 위해 소극적 정교분리정책을 사용한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의 두 선교부는 상호불간섭주의를 전제로 한 적극적인 정교분리정책을 사용했다.신교수는 이같은 개신교의 전략은 문명화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하던 조선의 이해와 맞아 떨어져 가톨릭 보다 수월하게 선교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알렌은 선교부의 이같은 간접 선교정책에 충실했다.보수계의 거두 민영익을 살린 알렌은 선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원설립을 건의하기로 했다.그러나 왕실과 보수파의 신뢰를 의식한 알렌은 망설였다.병원을 후원할 조선 내 선교부도 없고,이제 막 문호를 개방한 나라에서 개인적으로 병원을 운영하면서 겪게될 어려움도 예상됐기 때문이다.결국 그는 조선 조정의 지원을 배경 삼아 1885년1월27일 조선의 통리교섭 통상아문(외무부)의 독판 김윤식에게 병원건립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기관이 설립되면 조선 정부(왕실)의 병원이라 부를 것입니다.대군주께서 그 신민들이 병고 속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도록 헤아리신다면 반드시 이를 반갑게 보시게 될 것입니다.이로써 백성들은 그들 왕정에 대한 존애와 충성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또 백성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되리라 확신합니다".그리고 신설될 병원에서 조선 청년들에게 서양의학과 약 사용법,보건위생 등을 가르치겠다고 밝혔다.

 

주진오교수(상명대 사학과)는 서양식 병원 설립의 배경에서 “조정은 이미 조선 의학의 한계를 극복해 줄 수 있는 수용대상으로 서양의학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1882년 집중적으로 올렸던 개화상소에 서양의학에 대한 관심이 언급돼 있었고,한성순보도 서양의학의 수용과 의학교육의 필요성을 기사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또 보수파도 동도서기론을 주창하며 서양의학을 받아들이려 했다고 덧붙였다.

 

1897년경 구리개에 있던 제중원. 1886년 재동에서 이전했다.

이같은 배경에 따라 광혜원(廣惠院)은 1885년 4월3일 개원을 목표로 빠르게 준비됐다.조정은 역적으로 몰려 타살된 개혁파 홍영식의 재동 집을 병원으로 제공했다.광혜원은 4월10일 첫 진료를 시작한 후 1주일만에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꿨다.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민중을 지향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알렌은 약속대로 의학교육을 시작했다.1886년 3월 의학당을 열고 경쟁시험을 거쳐 16명을 학생으로 받았다.

 

제중원은 알렌의 요청에 따라 2중적 형태로 운영됐다.조선 조정에서 재정과 행정권을 갖고,미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의료권을 가졌다.그러나 육영공원(育英公院)이나 동문학(同文學) 등 다른 합작기관을 주도적으로 운영했던 조선 조정은 제중원에서는 의료행위 뿐아니라 모든 일에 일체 간여하지 않았다.운영에서도 소극적이었다.이것은 미국 선교부의 한국 교두보로써 더할나위없이 좋은 상황으로 작용했다.

 

또 제중원 개원이 상주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시점과 맞아 떨어져 선교사들이 쉽게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제중원이 문을 열기 5일전 제물포에 도착했다.그러나 임신한 부인과 함께 온 아펜젤러는 갑신정변으로 인한 혼란을 이유로 입국을 만류하는 미국공사의 권유 때문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한편 단신으로 입국한 언더우드는 곧바로 제중원 교사로 부임해 우리말을 익혔다.

 

5월30일 입국한 감리교 스크랜턴 선교사도 제중원에서 의사로 1개월동안 일했다.아펜젤러 부부는 6월20일 재입국,제중원 교사 자격으로 활동을 준비했다.6월20일에는 장로교 의료선교사 헤론이 입국,제중원에 들어갔다.제중원 의학당에서 알렌은 화학을,헤론은 의학을,언더우드는 영어를 가르쳤다.

 

서정민교수(연세대 강사)는 제중원을 선교 교두보로써 갖는 의미 외에 간접적이지만 조정이 기독교선교사업에 동참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있다고 평가했다.그리고 제중원은 치료대상을 일부 귀족이나 고관층에 국한하지 않고 일반 백성들로 확대하려고 했으며,보수성이 강한 일반 백성들이 갖고 있던 서구문명과 기독교에 대한 경계심을 타파하는 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특히 의료교육에 관심을 갖고 제중원의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연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하는 근대식 의학교육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공헌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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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의료선교와 근대학교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병원과 학교는 1885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그 기틀은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병원과 학교로 시작된 기독교의 간접 선교방식은 주효했다.

 

의료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고,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출세하려는 사람들이 근대 교육시설로 모였다.1886년 이후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도 만들어졌다.선교사들은 이를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했다.

 

1885년4월 시작된 제중원은 매일 1백여명의 환자를 진료했다.알렌의 1886년 사역보고서에 따르면 고열병 환자 1천1백47명,소화기계통 환자 2천32명,생식기계통 환자 1천9백2명,부인병 환자 1만4백60명 등 1년동안 모두 2만5백29명의 환자를 치료했다.환자들은 왕족과 양반으로부터 거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망라했다.

 

1885년5월 입국한 감리회 의료선교사 스크랜턴도 알렌의 부탁으로 제중원에서 일했다.한달 후 장로회 의료선교사 헤론이 합류했다.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일본에서 만난 박영효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할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우리 백성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교육과 기독교입니다”

 

박영효는 불안한 정치상황과 힘을 잃은 재래종교 상황,백성들이 겪는 고초에 관해 설명했다.갑신정변에 실패하고 망명중이던 박영효의 말은 신뢰할만했다.

 

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일하면서 조선 왕실의 도움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병원 설립을 계획했다.그러다가 9월에 자신이 미국을 떠나올 때 소포로 보낸 의료기구들을 전달받게 됐다.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나와 9월10일 정동 자신의 집에 진료소를 차렸다.

 

스크랜턴의 진료소에는 평민들이 많이 찾아왔다.그의 보고서에 따르면,환자들중에 극빈자들이 많았고 종종 버림받은 사람들도 돌봐줬다.진료소에는 1885년 말까지 2백50여명의 환자들이 다녀갔다.환자들이 많아지자 자연히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스크랜턴은 우선 이웃해 있는 땅과 집을 더 사들였다.1886년6월 환자대기실과 사무실,약국,수술실,입원실 등을 갖춘 병원을 마련했다.여자들을 위해 별도의 집을 구입,여자입원실도 꾸몄다.이런 일들이 왕실에 알려졌고,고종은 1887년 이 병원에 `시(施)병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하사했다.조선 왕실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스크랜턴은 1894년 더 많은 민중을 만나기 위해 시병원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옮겼다.상동으로 옮긴 시병원은 약국을 개설하면서 전도하기 시작했고,직원들의 예배가 발전해 지금의 상동교회로 성장하게 됐다.시병원은 첫 민간의료시설이었다.

 

`학교 사업이라든가 학생들의 자질,성실성을 종합해볼 때 학교의 효율성과 가치는 교회나 선교회에 보람을 줄 뿐아니라 한국을 복음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샤록스 선교사,1901년 선교보고서)

 

1885년 어느날 정동진료소로 스크랜턴을 찾아온 두 사람이 있었다.그들은 스크랜턴이 제중원에서 일하던 시절에 알게 된 청년들로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었다.이들은 스크랜턴에게 의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물었고,스크랜턴은 이들에게 우선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알려줬다.그리고 이들을 아펜젤러에게 소개했다.

 

아펜젤러는 1885년8월3일 의사를 꿈꾸는 청년 이겸나와 고영필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학교사업을 시작했다.그는 또 1885년11월 미국공사 폴크를 통해 학교설립 허가를 얻었다.

 

학교를 개설하자마자 학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학생들은 모두 벼슬을 얻기 위해 영어를 배우려 했다.1886년6월,6명의 학생이 있었지만 9월에는 단 1명의 학생만 남았다.그런데 10월이 되자 학생들이 몰려왔다.재적인원 20명에 18명이 출석했고,학교는 거의 매일 입학을 신청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오늘 선교부 학교이름을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았다.배재학당이다"(1887년2월21일 아펜젤러의 일기)

 

아펜젤러는 이를 정부의 승인으로 받아들였다.또 국립학교는 아니더라도 공립학교가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배재학당은 1887년9월 새 교사(校舍)의 준공식을 가졌고,기숙사 시설도 갖추게 된다.교훈도 마태복음 20장27~28절에 따라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부림을 받아야 한다)으로 정했다.

 

배재학당의 선교적 역할도 결실을 맺었다.감리회의 첫 수세자가 배재학당 학생이었던 것.1887년7월 박중상이,10월 한용경이 성경을 읽거나 학교 예배에 참석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아펜젤러가 학교사업을 시작할 때 언더우드는 제중원의 영어교육과는 별도로 고아원 형태의 교육사업을 시작했다.언더우드는 1886년5월 정동에 한옥을 구입,수리하고 1명의 학생으로 학교를 시작했다.이 학교는 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다가 1905년 경신학당으로 정착,현재의 경신학교로 발전하게 됐다.

 

1886년5월 스크랜턴 부인은 김씨부인이라는 어느 관리의 첩을 가르치면서 이화학당을 열었다.

 

이같은 의료와 교육사업은 기독교 선교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그후에 들어온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지방에서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면서 선교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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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직교회의 시작

 

각국 공사관과 외교관저들이 있던 서울 정동은 한국 교회의 요람역할을 했다. 이들 초기 교회가 위치했던 서울 정동은 현재 가로정비 사업으로 새 단장을 했다.

 

1887년 9~10월 서울 정동에서 두 개의 초기 교회가 시작됐다.두 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 조직됐지만 선교사들의 열매로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성경을 먼저 읽고 기독교신앙을 갖게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됐다.

 

`서울에 도착한 날 저녁,나는 아주 감명깊은 일을 목격했다.해는 이미 기울어 도시는 캄캄했다.그때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동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넓고 어두침침한 중심가를 지났다.한국사람이 초롱을 들고 우리를 인도했다.조그만 골목길을 지나 넓직한 마당으로 들어섰다.곱게 종이를 바른 문이 열렸다.안으로 들어가니 깨끗한 옷차림에 학식있어 보이는 14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로스 목사의 1887년 보고서).

 

1885년 입국한 선교사들은 거의 1년동안 의료와 교육사업을 시작하는 데 주력했다.종교집회는 여전히 제한되고 있었다.선교사들은 한국인을 만나기 위해 병원과 학교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1885년 말 노도사(魯道士)로 알려진 노춘경이란 사람이 헤론의 어학선생을 찾아왔다.서울 근교에서 기독교를 배척하는 문서를 읽고 기독교의 실체를 알기 위해 선교사들에게 접근했던 것이다.헤론의 어학선생은 언더우드를 소개했다.그러나 그는 언더우드의 서재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경계심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도사는 1886년 초 다시 어학선생을 찾았다.하지만 어학선생은 알렌의 통역사로 자리를 옮긴 후였다.어학선생을 만나기 위해 노도사는 알렌의 집으로 찾아갔다.그 집에서 노도사는 한문으로 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발견하고,몰래 집으로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노도사는 쪽 복음서를 읽으면서 기독교의 진리에 점점 빠져들어 갔고,언더우드에게 성경과 교리서를 계속 빌려서 읽었다.선교사들만의 주일예배에도 몇 차례 참석했다.결국 노도사는 기독교신앙을 갖기로 결정,교리문답을 거쳐 1886년 7월18일 세례를 받았다.국내에서는 최초의 세례식이었다.세례식은 언더우드가 집례했고 아펜젤러가 보좌했다.

 

선교사들은 `첫 열매"를 맺은 데 대해 매우 기뻐했다.전도를 해서 얻은 열매가 아니라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더욱 감격했다.게다가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한두명 더 있다는 노도사의 말에 무한한 선교 가능성을 발견했다.선교사들은 제중원과 시병원,배재학당과 고아원에 더욱 정열을 쏟았다.

 

1886년 3월 말에 중국성서공회 총무인 브라이언트 목사가 서울을 방문했다.선교사들은 그에게서 서상륜이란 이름을 들었다.브라이언트 목사는 서상륜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하고 매우 실망해 중국으로 돌아갔다.브라이언트는 중국으로 되돌아간 후에야 언더우드에게 서상륜을 만났다는 편지를 받게 된다.

 

서상륜은 세례지원자 몇 명과 함께 언더우드를 찾아갔다.세례지원자는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이들은 교리문답에서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고백을 했다.서상륜은 언더우드에게 고향인 황해도 소래로 내려가서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그러나 언더우드는 소래로 갈 수 없었다.선교사들이 여행을 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서상륜은 1884년 13명,1885년 79명의 신자를 얻었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데려올테니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말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선교사들은 찾아오는 지원자들에게 계속 세례를 베풀었다.1887년 9월 초까지 모두 11명의 소래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

 

언더우드는 1887년 9월27일 자신의 집에서 최초의 교회를 조직했다.이 자리에는 마침 신약성서 일로 서울을 찾아온 로스 목사도 함께했다.이날 모임에서 두 사람이 장로에 장립됐다.이 교회는 1895년까지 정동교회로 불리다가 1907년 서울 신문로로 옮긴 뒤 `새문안교회"로 불리기 시작했다.서정민씨(연세대 강사)는 새문안교회에 대해 한국장로교회의 모(母)교회로 기독교 사회문화 영역의 중심지이자 민족청년운동의 요람지로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다고 평가했다.

 

로스 목사에 따르면 새문안교회 조직 당시 서울에는 이미 3백여명의 지원자가 있었다.이들은 공개적으로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언더우드의 1888년 보고서에는 `누가 봐도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며 `사방에서 한국인들이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학교일 때문에 갈 수 없다"고 씌어있다.서상륜을 비롯해 만주에서 파송된 성서판매인들과 국내 선교사들이 채용,파송한 성서판매인들의 적극적인 전도 덕분이었다.

 

한편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에서 선교의 가능성을 찾았다.1887년 6월 배재학당 학생들중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배우는 학생들이 있었다.이들중 박중상이란 학생이 1887년 7월24일 아펜젤러에게 세례를 받았다.박중상은 배재학당에 들어오기 전에 일본을 다녀왔고,그 곳에서 기독교를 알았던 것으로 전해졌다.10월2일에는 한용경이란 학생도 세례를 받았다.한용경도 한문성서를 읽어 이미 기독교를 알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10월9일 성경공부를 위해 따로 마련한 건물에서 한국인 교인 4명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리고 베델교회를 시작했다.1주일 뒤에는 성서판매인의 부인에게 세례를 줬다.첫 여성 수세자였다.이 교회는 1897년 서울 정동에 교회당을 건축,`정동제일교회"로 개명하고 발전해 갔다.서정민씨는 정동교회에 대해 “전통적 복음성을 확립하고,그 위에 한국적인 신학,신앙체 참여노선 등 민족신앙적 토대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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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타교파 선교사들 입국

 

1930년 평양여자성경학교에서 열린 연례 장로교 선교사 수련회에 참석한 선교사들. 기독교의 수용은 우리 민족에 의해 자주적으로 이뤄졌지만, 교회의 조직과 틀을 갖추는 일은 선교사들에 의해 갖춰졌다.

 

“선교의 목적은 나라마다 토착적으로 기독교를 세워 민족에 알맞게 순화시키고 그 땅에 적합한 삶의 형태로 성장시키는 데 있다.다시 말하면 사회적으로 그 겨레의 전통에 뿌리박고 생활의 기저에 연결되는 민족교회를 성립하려는 이상을 가져야 한다.이것은 서구의 교파적 교리의 어떤 교권적 조직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R.E.스피어 미국 장로교선교본부 해외총무,1910)

 

미국 북장로회와 감리회가 선교사 파송을 결정하는 동안 영국성공회도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졌다.1884년 중국의 주교들이 성공회 본부에 한국선교부 개설을 요청하기도 했고,1885년 말에는 중국의 성공회 선교회에서 두명의 중국인을 부산에 파송하기도 했다.당시 동아시아를 담당하던 울프 주교는 1887년 우리나라를 방문,부산에서의 선교활동을 시찰한 후 성공회 본부에 선교사 파송을 강력하게 요청했다.이에따라 영국성공회는 1889년 영국 군종사제 출신인 코르프 신부(한국명 고요한)를 초대 한국주교로 서품해 파송했다.코르프 신부는 7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1890년 9월 인천에 도착했다.코르프 신부는 한국 선교에서 토착화 선교정책을 펼쳐 한국의 건축양식을 교회건축에 도입하고,한국 문화를 대폭 수용하는 양태로 나타났다.

 

울프 주교의 편지는 호주에도 전해졌다.이 편지는 호주의 한 선교 잡지에 실렸다.이 글을 읽은 호주장로교회 데이비스 목사와 그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가 한국 선교를 결심,1889년 10월 서울에 도착했다.데이비스 남매는 부산에서 사역하기로 하고 부산으로 가던 중 1890년 4월 데이비스 목사의 병사(病死)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데이비스 목사의 죽음은 호주에서 한국선교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호주 장로교회는 1891년 10월 맥케이,멘지스,파세트,페리 선교사들을 한국선교사로 파송하면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했다.

 

미국 침례회 계통의 선교회인 엘라딩기념선교회는 1895년 폴링과 가들라인 선교사를 파송,부산과 공주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미국의 남장로회와 남감리회도 각각 1892년과 1895년 한국선교를 시작했다.남장로회는 언더우드의 선교보고와 유학 중이던 윤치호의 강연으로,남감리회의 선교는 윤치호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이뤄졌다.

 

캐나다장로회도 1898년 공식적인 선교를 시작했다.그러나 캐나다인의 선교는 1888년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 게일 선교사로부터 시작됐다.1889년 펜윅이,1890년 하디 선교사가 내한했다.1893년에는 맥켄지 선교사가 입국,황해도 소래에서 한국인과 동화돼 선교활동을 하다 1895년 병사했다.

 

소래교인들은 캐나다교회에 후임 선교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캐나다교회는 1898년 그리어슨과 맥레 푸트 선교사들을 공식 파송했다.이 후에도 1907년 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가,1908년 구세군이 각각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내한선교사총람에 따르면 1945년 이전까지 내한해 활동한 선교사 수는 약 1천5백30여명에 달한다.

 

다양한 교파들의 선교는 선교구역 분할원칙인 `교계 예양"과 선교정책인 `네비우스원칙"을 낳게 된다.교회사가들은 이같은 다양한 교파의 선교에 대해 경쟁심을 유발시켜 교회의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그러나 한국 내 정세를 판단하고 선교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개인차에 따른 반목을 보였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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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5.09.06 12:56

    첫댓글 중국을 통해 천주교성경이 이미 번역되어 조선에 있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200년도 훨씬 전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년도는 기억못하네요...

  • 작성자 05.09.06 17:51

    pris형제님~~안녕하세요^^ 제가 올린 글을 기독교(개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과정을 담았습니다. 아마 천주교는 기독교 보다 훨씬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걸로 저도 알고 있습니다. 17세기 정약용, 정약전 형제가 천주교 신자였던 걸로 봐서도 그 이전에 우리나라에 전파 되었겠죠. *^_^* 주님 안에서 성령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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