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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8.대민(주일낮)
가난한자를 보살피는 자(시41:1-3) 대민성결교회 이석민 목사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2]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교회의 중요한 사명 가운데 선교와 구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도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할 때 하나님은 더 큰 것으로 돌려주십니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에 대해서 가난한 자와 과부와 객들을 보호하시는 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이런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거룩한 삶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범사에 이런 어려운 사람들을 헤아리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향기 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레위기23장22절에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잠언14장31절에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그리고 신명기 14장에는 삼년에 한번씩은 십일조를 한 번 더 떼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쓰라고 하셨습니다.
구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필수적인 사명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구제가 시행되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하나님의 공동체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행2:45) 이와 같이 성도가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재산을 많이 축척해서 오로지 자기와 가족만을 위해서 소비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없는 이기적인 모습의 죄 입 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가난한 자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밭에서 곡식이나 과일을 추수할 때 고아와 과부와 객의 몫은 남겨두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그들이 이 곳에 와서 그 남은 것을 소유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우리보다 못한 불우한 이웃을 생각하고 구제할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현실의 삶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고아나 과부나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곡식이나 과일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터에서 얻은 소득 중 일부를 떼어서 불우한 이들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고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시편37편26절에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는 삶을 사는 사람이 의인의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데 망할 수도 있으나 아주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이 복을 받아 걸식함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후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불행한 이웃에 대한 태도는 곧 하나님에 대한 자세를 평가하는 시금석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이 주신 물질과 재능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 가난한 자를 위하여 기부하는 자가 가장 복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한자를 보살피는 성도가 되어서 복을 받으시고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1.재앙의 날에 건져 주십니다.(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인생의 길에는 우리의 삶을 피폐케 하는 재앙이 종종 일어납니다.
재앙은 “천변지이(天變地異)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 구앙(咎殃). 앙재(殃災). 적구(謫咎). 화구(禍咎). 화앙(禍殃).” 로 정의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두려운 재앙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91편5-8절에 “[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8]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한밤중에 들이닥치는 도적이나 강도, 갑자기 생긴 고열이나 복통을 동반한 무서운 질병, 대낮의 전쟁 등은 그런 재앙들 중에 속합니다. 이런 재앙들의 날에 성도의 전후좌우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실 것을 믿습니다. 혹시 성도가 그 재앙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부활과 영생을 믿기 때문에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의 죄악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고, 하나님의 심판은 처참한 재앙을 몰고와 사람 세상을 형벌의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한 나라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전 국토의 황폐화로 규정되어 있고, 그것은 심판의 공간적 완벽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판의 공간적 철저성과 완벽성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섯 가지 환난에서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근 때 죽음에서, 전쟁 때 칼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에 능하신 분입니다(욥 5:18~2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때문에 겪는 무수한 시련과 고난은, 사실상 더 큰 하나님의 복을 예고하는 우리 소망과 승리의 전령사(傳令士)가 됩니다. 그래서 성도(聖徒)는 죽음의 고난에서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변절하지 아니하고,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재기의 불사조가 되고 맙니다(잠 24:16).
사실 때로는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재앙과 심판을 내릴 수도 있는 분이지만, 이러한 재앙과 사고와 불행과 질병등이 모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없음에 동의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의 인식과 이해의 범위 안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로마서11장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아무리 잘 나가는 인생이라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재앙의 날에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헛된 신에게 인생을 의지하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전혀 예측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집을 무너지게 하는 요소, 곧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천재지변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내일 일을 장담못하고 살아갑니다.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요동하지 않고 든든하게 버티어 나가게 하는 비결은 만세 반석입니다. 그것이 아닐 때는 재앙의 날에 모래위에 세운 성과 같이 삽시간에 기초부터 무너져 나가고 맙니다.
하지만 본문 1절에는 재앙을 만나면 건지심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즉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푼다면 우리에게 약속되는 자비는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건지리라, 구원하리라 말씀합니다. 최악의 시기를 만난다 해도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습니다. 위험한 곳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불쌍한 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에 대해 동정적인 관심을 가지며, 그들을 구제함에 있어 신중하게 행동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권고 받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복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도 보상을 받습니다.
시편18편18절에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어느 특정한 날이 아닌 다윗이 자신의 대적들로 인해 극도로 곤궁한 처지에 이르렀던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비록 재앙이 닥쳤다 할지라도 항상 그 재앙으로부터 반드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확고하게 가질 수 있었다는 시인의 고백입니다. 이는 실로 숱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체험한 자만이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주기를 기뻐하지 않고 복을 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향하여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는 것은 재앙의 날에 재앙을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택한자를 머리털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여 재앙의 날에 남은 자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아끼는 심정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재앙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징계도 시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건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당연히 어려운 이웃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길입니다.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바입니다.
의무와 책임으로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구제 사역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구제 사역을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구제를 통해 복음 전파가 더 잘 됩니다. 복음 전파의 용이성을 위해 구제를 하는 것이며, 구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가난한자를 보살피는 자는 재앙의 날에 건저주십니다.
2.이 세상에서 복을 받습니다.(2)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세상에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복에 대한 집착증을 가진 것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열심히 세상에서 일하고 있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 사람의 마음을 한 껍질 벗기면 그 동기가 오래 살고 복을 받으며 살려는 욕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오래 살며 복을 받으며 사는 일을 원하는 사람을 가리켜 형이하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과에 가서 정신위생 상태를 검진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면서 좋은 일을 많이 보고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지는 복을 사모하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는 복의 길을 따르도록 가르치십니다.
동양에서는 5복을 말하고 있는데 “부, 귀, 수, 강령, 고종명”입니다.
즉, 재산이 많고 귀하게 살며 장수하고 건강하고 죽을 때 잘 죽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복이라고 볼 수도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은 복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오래 사는 것이 복이라고 하지만 오래 산다고 반드시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옛말에 ‘수즉다욕’이라고 오래 살면 욕되는 일을 많이 보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해지는 것이 복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복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오히려 허영과 부패함에 빠지게 되어 복이 오히려 화가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귀하게 된다고 반드시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은 하늘에서 별똥별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산신령에게 하듯 교회에서 무작정 복을 빈다고 쏟아지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에서 복 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 세상이라고 하는 사람 사회의 우회경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챙겨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대개 ‘우연’ 이라는 이름의 포장지로 싸여 있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모든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사실, 그리고 세상에는 이유 없는 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 복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나라가 잘 되고, 민족이 잘 되고, 열방이 잘 될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8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심령 가난, 애통, 온유, 의를 사모함, 긍휼, 마음 청결, 화평, 의를 위한 박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복으로 여기기 어려운 것들을 예수님께선 복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나 자신이 이러한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자들이 나로 인하여 이것을 복으로 알고 함께 누릴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팔복은 인생을 왜 살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리고 그 인생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생명력 넘치는 참된 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상 복을 누린 많은 부자들(욥, 아브라함, 요셉, 아가서의 주인공들이 누린 다양한 물질적 복, 보아스, 아리마대 부자 요셉 등)이 있는 것처럼 세상 복을 받는 것도 좋습니다.
성도들의 경우는, 이 세상에서 복을 누릴 뿐 아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크게 칭찬을 받고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중에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복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유업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남을 축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은 기회 있는 대로 잠깐 있다 없어지는 재물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33절에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의복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살며 쓴 돈은 남는 것이 없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세상에 쌓아 둔 재물은 도적맞거나 부도나거나 불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구령사업을 위해 쓰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쓰고 구제를 위해 주의 이름으로 써 둔 것은 하늘에 쌓아둔 것이 되어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세상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분문2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성도들에게 선행에 대한 동기를 유발시키는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가난하거나 어려움에 처한자를 돌보는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당연합니다(갈6:7). 땀을 흘렸으면 그 대가를 거두어야 정상입니다. 더구나 자신도 아닌 가나한 자들을 돌보는 일은 단지 자신만을 위해 땀을 흘리는 차원보다도 훨씬 더 고차원적인 행위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한 땀과 타인을 위해 흘리는 땀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란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사는 보편적인 행위를 초월하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흘린 땀에도 보상이 있다면, 타인을 위해 흘린 땀은 더할 나위 없이 큰 보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다윗도 그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가나한자를 보살피는 자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옥스포드 원어 성경대전]
가난한자를 보살피는 자는 세상에서 복을 받습니다.
3.병을 고쳐 주십니다.(3)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인류역사 이래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질병입니다. 질병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합니다. 질병도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질병도 발전합니다. 과학의 발전만큼이나 질병도 발전해 왔습니다. 점점 강해집니다. 사실은 인간의 질병에 대한 치료약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 해결하면 또 다른 질병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인생의 길에는 질병이 끊이지 않게 일어납니다.
질병의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사람에게 특별한 죄가 없이도 질병에 걸릴 수 있는데, 욥의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질병은 죄에 대한 징계로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질병에 걸리는 원인은 여러 가지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많은 질병에 시달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듯 연약한 사람은 누구라도 쉽게 질병에 걸려 고생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질병과 고통이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한 가지 방식임을 깨닫고, 육체의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의심 없이 하나님만을 바라며 그분의 도움을 간구해야 합니다.
건강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병자가 치유 받는다는 것은 인생과 세상을 새로 얻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려고 질병을 통하여 징계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때에 성도는 모든 질병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회개할 바를 회개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질병으로 고통 당할 때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병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질병과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에 불치의 병도 치유받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이러한 치유의 역사는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라파” 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하여 치유사역을 행하셨으며, 질병의 예방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치유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표현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종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표적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는 것을,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과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으로 같이 묶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23절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예수님의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도 보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그랬는데 실제적으로 예수님은 모든 병자를 다 고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복음 전파와 질병고치는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뿐입니다. 즉 병고침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15장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병자들을 고칠 때 바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친 것을볼 때 병고침의 확신은 병을 이기고 승리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72-1231]↖3『
야고보서5장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고 육신의 병도 고침 받아서 영육간에 건강과 장수의 복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리다가 응답받기를 바랍니다.
병의 치료는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기만 한다면, 못고칠 질병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들었을 때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긍휼을 구할 것밖에 없습니다.
본문3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하나님은 환자를 돕던 내가 어느 날 질병을 앓는 환자가 되어질 때 병상에서 낙망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더 나아가 아픈 질병을 고쳐주십니다. 고치심의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치료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는 말이지만 하나님이 환자를 보살피는 자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 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플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아십니다. 하나님이 건져주십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십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사람들이 다 나를 버리고 가까운 일가친척이 다 떠나고 홀로 밤을 새워 울더라도 견딜 수 있습니다. 외롭고 힘들고 아파도 소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질병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불행해 하고 괴로워하는데서부터 하나님을 새롭게 부르고 가까이 하는 기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병들을 죽게 된 자라는 자각으로부터 오히려 영혼이 깨어 일어나게 되고 예배가 달라지고 기도가 달라지고 새로운 삶, 보람 있는 삶을 준비하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모든 약함을 극복해 가야 합니다. 질병과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신유의 은사를 받은 성도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질병을 치유하는 역사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치유의 역사와 질적으로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권세로 직접 질병에게 명하여 치유하셨으나 은사받은 자의 치유 역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님께서 질병을 제거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주셨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질병의 권세를 물리친다는 면에서는 동일한 역사입니다.
세상의 의술로도 병을 고칠 수 있지만 특별히 이러한 은사를 통하여 치유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적으로 증거하고 복음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한자를 보살피는 자는 병 들었을 때 고치심을 받습니다.
1.재앙의 날에 건져 주십니다.(1)
2.이 세상에서 복을 받습니다.(2)
3.병을 고쳐 주십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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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난한 자들을 보살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주님 말씀을 행할 수 있는 성도가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난자를 보살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받고 건강하게 주어진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