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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7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부활절 마지막 주일)
염려 없는 삶
행1:6~14; 벧전4:12~14; 5:6~11; 요17:1~11
오늘은 부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일곱 주간의 부활 시기를 보냈습니다. 우리 삶은 보이는 것이 전부인, 평평한, 단층의 삶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우리의 신체도 보이는 피부가 전부가 아니지요. 그 안에 살이 있고, 뼈가 있고, 내장이 있습니다. 핏줄이 있고, 신경 줄이 있고, 그것이 모여 생명이 되고, 더 깊이에 보이지 않는 정신과 마음이 있고, 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보이지 않는 깊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층의 삶을 경험하게 되는데, 부활은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층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 궁극적인 것까지 찾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같은 절망에도, 삶의 모든 희망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마른 뼈와 같은 상황 속에도, 심지어는 냄새나는 무덤 앞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옛적에 마리아에게,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도마에게, 스데반에게, 바울에게,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살리신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육신의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라는,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 아우구스티누스도 부활시기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곳에서 안심하고 노래할 수 있도록, 아직은 걱정 많은 이 세상에서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아직은 걱정 많은 이 세상에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걱정 많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매년 부활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광야 같은 삶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몇 주 전에 보았던 요한복음의 말씀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 마지막 고별 만찬 때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유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베드로전서는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라고 권고합니다.
이런 말씀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아직은 걱정 많은 이 세상에서” 고군분투할, 우리네 같은 사람들을 향한 말씀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부활의 승리를 말하고, 부활의 능력을 말하더라도, 걱정과 염려로 가득한 삶이라면, 부활의 승리나 부활의 능력은 우리의 현실이 되지 못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매 순간이 새로우며, 반복되는 순간이란 없다”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또 “생각을 가게 놔두는 단순하고 벌거벗은 자유”라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이것은 “염려 없는 삶”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걱정과 염려가 우리 삶을 얼마나 많이 갉아먹는지도 제대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글은, 토마스 머튼이 쓴 <장자의 도>(The Way of Chuang Ztu)라는 책에서 따온 글입니다. <장자의 도>는 머튼이 장자의 글을 시의 형식으로 서구인들에게 소개하는 책입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활을 쏘면 / 재능을 한껏 발휘하지만/ 놋쇠고리를 바라고 활을 쏘면 / 이미 긴장한다. / 금상을 걸고 활을 쏘면 / 눈이 흐려져 / 과녁이 두 개로 보이니 / 이미 제 정신이 아니다!
그의 기교는 변함이 없지만 / 상(償)이 그의 마음을 갈라놓는다. / 근심에 싸인 궁수(弓手)는 / 활쏘기 자체보다는 / 상을 타는 것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그래서 이기려 애쓰니/ 그것이 그의 힘을 빼앗는다.
머튼은 “염려하는 삶”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갉아먹고 있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머튼은 “염려 없는 삶”이 수도원적 삶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았고, 일반 그리스도인도 “염려 없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필수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모든 염려를 치워버리고, 염려 없이 살며, 염려하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 이것이 수도 생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염려 없이 산다는 것이 책임감 없이 살아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염려 없이 산다는 말은, 책임감이 염려를 새끼 치게(breed) 하는 것을 거절한다는 의미입니다. “염려 없이 산다”는 말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무 신경 쓰지 않을래.”라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염려 없이 사는 것은, 모든 것에 사로잡히고, 모든 것에 매료되고, 모든 것에 놀라움을 느끼는 삶입니다. 다만,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때, 어떻게 하면 내게 유리할까, 어떻게 나의 목적대로 이용할까를 조종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나를 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궁수의 실력은 변함없지만, 상이 그를 갈라놓습니다. 한마디로, 그가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말처럼,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활을 쏘면 과녁을 정확하게 맞추는 궁수가, 동메달을 바라고, 금상을 바라고 활을 쏘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를 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 저는 이 말이,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고,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사도바울이 했던 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와 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오늘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아버지,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말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우리가 거기 있다는 것을 잊을 때에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어! 나의 필요, 나의 요구, 나의 바람을 꼭 채워야 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멈출 때만,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염려할 누군가가 더 이상 거기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염려할 누군가가 없다면,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머튼은 말년에 은수처로 떠나면서, 자기가 수련시키던 수련수사들에게 마지막 강연을 하는데,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처럼 자신과 수련수사들이 소명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기쁨과 행복으로 들떠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른 세상의 신비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보기 위해,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 보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진정 살아계시며 그분이 진정한 주님이심을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여기 주님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신체적인 눈으로 본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리적인 눈으로 본다는 말도 아닙니다. 기분 좋을 때는 보는 것 같다가, 우울하고 기분 나쁠 때는 보이지 않는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눈”으로 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믿어지지도 않는데, 그냥 “믿습니다!” 눈 질끈 감고 말하면,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본다는 말은, 억지로 “믿습니다!”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가짜나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진짜인체 보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앞에 놓은 순간은 언제나 똑같은 순간이다” “매 순간이 새로우며, 반복되는 순간이란 없다”는 말을 참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이 얼마나 환상 속에서 사는지, 상상 속에서 사는지 이해하십니까? “내가 눈으로 봤는데? 내가 눈으로 확인했어!” 여기서 만일 “내가”를 힘주어 강조한다면, 그는 환상을 보았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맞고 너는 틀렸어~”라고 말한다면 그 확률이 높아질 확률은 배가 됩니다. 그리고 이 환상과 상상 속에서 숱한 “염려”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고별 설교를 시작한다고 말씀드렸지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모네/모네스)이 많다”라고 하시며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여기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라는 말은, “너희 마음이 요동치지 않게(뒤흔들리지 않게) 하여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방, 머물러 살 곳)이 많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저는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 집은 어떤 물리적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식”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상시의 요동치고 흔들리는, 그래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좁고 왜곡된 마음이 아니라, 광활한 마음, 아버지의 넓은 “품”입니다. 광활한 공간, 아버지의 넓은 품은 “생각을 가게 놔두는 단순하고 벌거벗은 자유”가 있는 곳입니다.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것도 품을 수 있는 곳입니다. 전체가 되는 곳이요,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호불호가 있는 시냇가 돌 틈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조화되는 높은 곳에서 바라본 시냇가의 풍경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 17장은 14장에서 시작한 설교를 마치시고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요한복음 17장을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의식, 광활한 마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승천 이야기는 바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징적으로(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화적으로) 말해주는 본문입니다.
저는 우리도 죽을 때 가는 곳이 바로 여기, 아버지의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죽을 때만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 있을 때에도 아버지의 집에 머물기를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하나이게, <히나 오신 헨>) 하여 주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 되게(하나이게) 하여 주십시오.”를 마음으로 묵상하여 보십시오. 이 기도는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임”(oneness)을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이니, 그들도 하나임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임”은 아버지의 집 자체이며, 우리가 포함된 아버지의 품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식”입니다.
어떤 의식입니까? 이 세상을 나뉘어진 조각조각으로 보는 눈이 아니라, 전체로 보는 눈, 하나로 보는 눈입니다. 하나님을 대상으로 보는 눈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한 부분임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고 했지만, 여기서 “아는 주체”는 “작은 내”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 하나인 “큰 나”입니다. 이것이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주님을 본 눈이며, 그래서 전에는 실의와 상실 속에서 떠났으나 다시 기쁨과 행복에 들떠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던 눈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제자들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던 눈입니다.
오늘 베드로전서는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에피립토>위로 던져버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초기 박해 시대, 시련의 불길이 일어나던 시대에 성도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는 그렇게 걱정을 하나님께 던져버릴 수 있는 길도 제시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기서 “정신을 차린다”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네포>라는 말인데, “술 취하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있다”라는 뜻입니다. 동방교회는 여기서 <넵시스>라는 매우 실천적인 영적 수련을 끌어왔습니다. 그것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 마음을 맑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신(mind)만 맑게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heart)입니다. 갈라진 정신, 요동치는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수련입니다. 마음(heart)은 이미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행하는 방법은 “예수의 기도” 즉,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 신앙생활 속에는 수련(수행)이 그렇게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공부 열심히 한다 하지만, 이것이 수행으로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기도는 계속해서 자기 욕구를 투사하는 것이고, 성경공부는 지적인 상태에 머물고 말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수련/수행이란, (아스케시스)라고 하는데, 종종 금욕수련이라는 말로 쓰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본디 운동선수들이 운동장에서 열심히 연습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운동선수들이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면서, 먹을 거 다 먹고 볼 것 다 보고 즐길 거 다 즐기면서 운동연습을 하진 않습니다. 자기 절제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금욕적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사실은 금욕수련이라는 말보다는 그냥 연습을 하는 거였지요.
우리 가운데 기본 프로그램으로 장착된(마틴 레어드는 우리의 하드웨어에 내장된 프로그램이라고 하지요.) 자기중심성, 나는 하나님과 또 이 세상과,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분리의식은, 자기 욕구의 투사나 지적인 공부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욕구를 계속 채우려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에고가 중심이 되는 것이고, 지적인 공부도 결국은 에고가 영광을 차자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성은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고 가게 놔두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어떻게 알아차리고 가게 놔둘까, 이것을 베드로전서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던져버리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알아차리는 일은 일종의 상담이 하는 일일 수 있고, 마음공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내가 하나님과 하나임(oneness)을 잊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은 내가 그분의 품에, 그분의 집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의식”으로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곳에서 안심하고 노래할 수 있도록, 아직은 걱정 많은 이 세상에서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무슨 뜻일까요? 아직은 걱정 많은 이 세상에서, 알렐루야를 노래하는 것은 갈라진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입니다. 알렐루야를 노래하던,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기도하던 상관이 없습니다. 모두 다 마음이 갈라졌을 때(다시 말해, 염려하고 있을 때) 마음을 모으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향”(intention)이라고도 말합니다. 지향을 연습하면, 하나임의 의식이 점점 깨어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잠시동안 고난 받은 우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히 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