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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3-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exto del Evangelio (Mt 23,23-26): En aquel tiempo, Jesús dijo: «¡Ay de vosotros, escribas y fariseos hipócritas, que pagáis el diezmo de la menta, del aneto y del comino, y descuidáis lo más importante de la Ley: la justicia, la misericordia y la fe! Esto es lo que había que practicar, aunque sin descuidar aquello. ¡Guías ciegos, que coláis el mosquito y os tragáis el camello! ¡Ay de vosotros, escribas y fariseos hipócritas, que purificáis por fuera la copa y el plato, mientras por dentro están llenos de rapiña y codicia! ¡Fariseo ciego, purifica primero por dentro la copa, para que también por fuera quede pura!».
«Purifica primero por dentro la copa, para que también por fuera quede pura»
Fr. Austin NORRIS
(Mumbai, India)
Hoy tenemos la impresión de “pillar” a Jesús en un arrebato de mal humor —realmente alguien le ha hecho sentir molesto—. Jesucristo se siente incómodo con la falsa religiosidad, las peticiones pomposas y la piedad egoísta. Él ha notado un vacío de amor, a saber, echa en falta «la justicia, la misericordia y la fe» (Mt 23,23) tras las acciones superficiales con las que tratan de cumplir la Ley. Jesús encarna esas cualidades en su persona y ministerio. Él era la justicia, la misericordia y la fe. Sus acciones, milagros, sanaciones y palabras rezumaban estos verdaderos fundamentos, que fluyen de su corazón amoroso. Para Jesucristo no se trataba de una cuestión de “Ley”, sino que era un asunto de corazón…
Incluso en las palabras de castigo vemos en Dios un toque de amor, importante para quienes quieran volver a lo básico: «Se te ha indicado, hombre, qué es lo bueno y qué exige de ti el Señor: nada más que practicar la justicia, amar la fidelidad y caminar humildemente con tu Dios» (Miq 6,8). El Papa Francisco dijo: «Un poco de misericordia hace al mundo menos frío y más justo. Necesitamos comprender bien esta misericordia de Dios, este Padre misericordioso que tiene tanta paciencia... Recordemos al profeta Isaías, cuando afirma que, aunque nuestros pecados fueran rojo escarlata, el Amor de Dios los volverá blancos como la nieve. Es hermoso, esto de la misericordia».
«¡Purifica primero por dentro la copa, para que también por fuera quede pura!» (Mt 23,26). ¡Cuán cierto es eso para cada uno de nosotros! Sabemos cómo la limpieza personal nos hace sentir frescos y vibrantes por dentro y por fuera. Más aun, en el ámbito espiritual y moral nuestro interior, nuestro espíritu, si está limpio y sano brillará en buenas obras y acciones que honren a Dios y le rindan un verdadero homenaje (cf. Jn 5,23). Fijémonos en el marco más grande del amor, de la justicia y de la fe y no nos perdamos en menudencias que consumen nuestro tiempo, nos empequeñecen y nos hacen quisquillosos. ¡Saltemos al vasto océano del Amor de Dios y no nos conformemos con riachuelos de mezquindad!
«Purifica primero por dentro la copa, para que también por fuera quede pura»
Hno. Lluís SERRA i Llançana
(Roma, Italia)
Hoy, Jesús toma una clara actitud de denuncia: «¡Ay de vosotros (...)! ¡Ay de vosotros (...)!» (Mt 23,23.25). Su objetivo son los maestros de la Ley y los fariseos, que representan a las clases poderosas porque ejercen sobre el pueblo un dominio espiritual y moral. ¿Cómo pueden orientar a la gente si son “guías ciegos”? Su ceguera reside en la incoherencia de observar escrupulosamente los pequeños detalles, que tienen su importancia, y dejar de lado las cosas fundamentales, como la justicia, el amor y la fidelidad. Tienen cuidado de su imagen, que no corresponde con su interior, lleno de «rapiña y codicia» (Mt 23,25). Curiosamente, Jesús emplea términos relativos a aspectos económicos.
El Evangelio de hoy constituye una invitación a que las personas y los grupos más relevantes de las comunidades cristianas, es decir, sus guías, hagan un examen de conciencia. ¿Respetamos los valores fundamentales? ¿Valoramos más las normas que a las personas? ¿Imponemos a los demás aquello que no somos capaces de cumplir nosotros mismos? ¿Hablamos desde la suficiencia de nuestras ideas o desde la humildad de nuestro corazón? Como decía Helder Cámara: «Quisiera ser un charco de agua para reflejar el cielo». ¿Ve la gente en sus pastores hombres de Dios, que distinguen lo accesorio de lo fundamental? La debilidad merece comprensión, la hipocresía provoca rechazo.
Al escuchar el Evangelio de hoy podemos caer en una trampa. Jesús dice a los maestros de la Ley y a los fariseos que son hipócritas. También los había sinceros. Nosotros podemos pensar que este texto se puede interpretar actualmente para los obispos y sacerdotes. Ciertamente, como guías de las comunidades cristianas, tienen que estar atentos para no caer en las actitudes que Jesús denuncia, pero hay que recordar que todo creyente —hombre y mujer— puede alojar en su interior un “fariseo ciego”. Jesús nos invita: «Purifica primero por dentro la copa, para que también por fuera quede pura» (Mt 23,26). La espiritualidad tiene las raíces en el interior del corazón.
<위선>
8월 28일의 복음 말씀은,
눈에 보이는 겉모습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속은 그렇지 않은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예수님께서는 의로움, 자비, 신의를 실천하는 일은 ‘더 중요한’ 일이고,
십일조를 내는 일은 ‘덜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은 ‘덜 중요한’ 일만 잘하고, ‘더 중요한’ 일은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를 모르거나, 착각하거나, 오해해서 그럴 수도 있고,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은 하기 싫어하고,
사람들에게 생색내기 쉬운 일만 하려고 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는 일처럼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일은 눈에 잘 보입니다.
잘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잘하는 사람을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만,
자기 자신도 자기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천하는 일은 잘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잘 보이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남들도 그렇지만 자기 자신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착각해서 그렇게 하든지, 어리석어서 그렇게 하든지 간에,
어떻든 보이는 일만 잘하고 안 보이는 일은 소홀히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눈에 보이는 일만 잘하고 안 보이는 일은 무시하는 것은,
사람들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무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미 그런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 6,1).”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3-4).”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면 기분은 좋겠지만,
칭찬에 도취되는 것은 위선자로 전락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내는 일을 ‘덜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는 것이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중요한 일들을 실행한다고 해서,
보이는 일들, 덜 중요한 일들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더 중요한 일이나 덜 중요한 일이나 모두 똑같이 실행해야 합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마태 23,24).”
이 말씀에서 ‘작은 벌레들’은 ‘덜 중요한’ 일을,
‘낙타’는 ‘더 중요한’ 일을 뜻합니다.
그래서 앞의 23절의 말씀과 같은 뜻인데, 조금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서,
‘작은 벌레들’을 ‘일반적이고 작은 죄’(소죄)로,
‘낙타’를 ‘정말로 큰 죄’(대죄)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고해성사 볼 때에 소죄는 성실하게 고백하고 보속하면서,
정말로 큰 죄, 대죄는 감추고 고백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모고해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죄만 고백하고 소죄는 그냥 지나쳐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죄도 습관적으로 반복하면 대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죄든 소죄든 간에 성실하게 회개하고 고백하고 보속해야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5-26).”
이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한데 속은 그렇지 않은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겉은 정말로 깨끗할까?
여기서 ‘깨끗함’을 ‘거룩함’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도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속이 거룩하지 않으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거룩하게 보여도
그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고, 거룩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거룩한 척 하며 연기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깨끗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그릇 속에 쓰레기가 가득 들어 있다면,
그릇의 겉이 깨끗하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그것은 그냥 더러운 그릇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위선’인데, 겉은 진짜고 속은 가짜라는 뜻이 아닙니다.
‘위선’은, 속은 감추어서 보이지 않게 하고, 겉은 가짜 모습으로 속이는 일입니다.)
속이 깨끗하다면 겉은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어도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이 중요하다면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속으로나 겉으로나 경건하고 거룩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위선’과 ‘위악’은 모두 다 나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사랑 실천’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고, 위선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사랑해야 진짜 사랑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사랑한다면서 겉으로는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은?
인간 세상의 연애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척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신앙생활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마음으로도 해야 하고, 겉으로도(행동으로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믿음, 사랑, 희망은 마음속에서도 굳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행동으로도 충실하게 실천해야 하는 덕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빈곤
교회에만 갇히면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를 벗어나 이웃을 볼 줄 알아야 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넓게 보라는 뜻인 줄 압니다.
아침저녁으로 세상의 언론과 방송은 20대 80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은 부유한 사람을 칭하고 80은 가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를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가난보다 더 힘겨운, 빈곤이라는 단어입니다.
얼마 전 최저임금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증언대회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파트 미화원을 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는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한 달에 64만 원 받습니다.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등을 빼면 실수령액은 61만 원인데 빚을 조금씩 갚고
혈압으로 인한 병원비를 쓰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인 남편도 최저임금을 받는데 식구들 의식주 해결도 어렵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정말 최저임금 64만 원으로 한 달 동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미화원 아주머니는 누구에게 묻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미화원 아주머니는 바로 우리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정말 최저임금 64만 원으로
한 달 동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놓아버림으로 얻게 된 참 사랑
올 한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 따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으로 가득 찬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해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신비주의 화가로 이름을 날린 윌리엄 블레이크는
성화에로 나아가는 길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땅 위에 내려와 작은 공간을 차지하면서,
사랑의 빛을 간직하는 법을 배웁니다.”
결국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자아를 내려놓고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성인(聖人)이 한분 계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이웃, 피조물과 하느님에 대한 사무친 성찰 끝에 성인이 되신 특별한 분입니다.
오랜 방황 끝에 아우구스티노는 깨닫습니다.
인간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 중에 큰 이유 하나는,
보잘 것 없는 피조물에게서 피조물이 줄 수 있는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결국 또 다른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하느님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기대를 최종적으로 충족시켜 주실 분,
우리 행복의 근원이요, 전부임을 또한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 위해 우리를 만드셨기에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 쉬기까지 편치 않나이다.”
그의 깨달음은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었습니다.
사랑에도 절제와 책임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깨달음에 무릎을 칩니다.
많이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절제하게 사랑하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사랑이라는 참된 가치에 걸맞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또한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을 보다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으로 승화시켜나가려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또한 깨닫습니다.
이기심은 굶주림을 폭식으로, 사랑을 정욕으로, 애정을 탐욕스런 소유욕으로 변질시키기에,
어떻게서든 우리의 사랑의 그릇을 키워나가는 작업이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참 사랑을 찾고 소유하기 위한 무한 반복의 노력 끝에 아우구스티노는 마침내
오랜 소망을 이뤘습니다. 드디어 평생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모든 피조물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무절제한 사랑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자신의 낡은 자아와 게걸스러운 탐욕을 놓아버림으로써 얻은 선물이었습니다.
놓아버림으로서 그는 자기 자신과 이웃, 세상과 하느님의 참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 대상들은 그에게 지배나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찬미와 감사의 대상으로 다가왔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십일조에 관하여
[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32
2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여러분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4 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마태오 23,23-24)
네 번째 저주가 나오는 오늘 본문은 십일조와 종교적 의무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다룬다. 앙념이나 향료로 쓰이는 박하, 회향, 근채에 대한 말은 과장된 것이다. 율법에는 기름, 포도주, 곡식에만 십일조를 언급하였다.(민수기 18,12; 레위기 27,30; 신명기 14,22-) 랍비들의 성서해설서 모음 미쉬나(Mischna)에는 박하에 대한 부분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유다교 문헌에서는 십일조를 좀더 자세히 심하게 다루었다. 레위인의 십일조(민수기 18,21-32; 느헤미야 10,37-39), 예루살렘 성전 순례 때 바치는 십일조(신명기 14,22-27), 3년에 한 번씩 가난한 사람을 위해 바치는 십일조(신명기14,28-; 26,12-)라는 여러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다.
율법과 성전과 성전 제사가 유다인에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십일조 의무에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십일조 규정이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2세기에 생긴 미쉬나(Mischna)의 자세한 십일조 규정들은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 규정을 지키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갈릴래아 지방 소작농들에게 십일조는 지키려 해도 지키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예수는 갈릴래아 암하레츠(Am ha'araz, 버림받은 하층 계급)에 속했다. 마태오 주석에서 존중받는 개신교 성서학자 루즈(Luz)의 말이다. 예수가 십일조를 폐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예수는 십일조에 대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알고 십일조와 거리를 두었다.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의무는 정의, 자비, 신의다. 이 세 가지는 공동성서에서 함께 나타나지 않지만, 오늘 본문과 가장 가까운 구절은 있다: “사실대로 공정한 재판을 하여라. 동족끼리 서로 신의를 지키고 열렬히 사랑하여라. 과부와 고아, 더부살이와 영세민을 억누르지 말고 동족끼리 해칠 마음을 품지 말아라”(즈가리아 7,9-10) 정의와 자비는 자주 같이 다루어졌다.(이사야 1,17; 예레미아 22,3; 미가 6,8) 크리시스(krisis)는 정의를 뜻한다. 공정한 재판을 우선 가리키는 뜻으로 유다인들은 받아들였다. 23절 말씀의 뜻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정의는 공정한 재판에서 시작된다. 2. 정의와 자비는 언제나 같이 다루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에는 정의와 자비를 분리해서 다루는 잘못된 경향이 있다.
마태오 공동체가 아직 유다교의 법적 규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자비는 예수가 자주 언급한 덕목이다.(마태오 9,13; 12,7) 피스티스(pistis, 신의)가 하느님에 대한 것인지 동료 인간에 대한 것인지 뚜렷하진 않다. 하느님에 대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마태오에 8번 나타나는 그 단어는 언제나 하느님과 연관되어 쓰여졌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에게만 해당되는 비판이 아니다. 마태오는 동시에 마태오 공동체의 처신을 겨냥하고 있다.
공동성서에서 말하는 정의는 로마인들이 말하는 형식적 정의가 아니다. ‘모든 시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로마식 명제에는 부자와 권력자가 유리하게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공동성서에서 정의는 약한 자를 보호하고 이롭게 하는데 있다. 정의와 자비는 우리 현대인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사랑하신다’ 라는 표현에서 부자와 권력자에게 유리한 해설이 생길 수 있다. 그런 아름다운 명제 속에 숨어 있는 논리적 허점을 잘 보아야 한다. ‘하느님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사랑하신다’ 보다 ‘하느님은 약자를 우선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 라는 표현이 성서 메시지에 더 걸맞다. 부자나 권력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들에게 요청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사랑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결정이다. 부자들은 하느님과 논쟁하거나 협상할 셈인가.
율법이 금지한 벌레가 음료수에 들어가지 않도록 바리사이들은 음료수를 천으로 걸러내었다. 하루살이처럼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레위기 11,41) 신 포도주를 하루살이는 좋아한다. 하루살이에 비해 낙타는 아주 크고 또한 불결하게 여겨진 짐승이다.(레위 11,4) 큰돈과 더러운 돈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먹는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종교인들이 큰돈을 받아먹거나 더러운, 즉 불의한 돈을 받아먹는 행위는 우리 시대에 없는가. 조용기, 정삼지, 전병욱 같은 사람들이 버젓이 종교인 행세하는 땅이 우리 대한민국이다. 옳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나 종교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대한민국은 대체 어느 시대 나라인가.
‘십일조를 6개월 내지 않으면 교인자격을 박탈한다’고 협박할 것이 아니라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교인자격을 박탈한다’고 말해야 옳지 않을까. 돈이 없는 가난한 신도를 겁주지 말고 돈으로 사기 치는 종교인을 앞장서 처벌해야 옳지 않을까. 예수라면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고 불의 앞에 침묵하는 종교인을 비판할 것이다. “여러분은 박하와 운향과 그 밖의 모든 채소는 십분의 일을 바치면서,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루가 11,44)
종교와 국민의 의무가 통합되던 유다사회와 오늘 한국사회는 그 상황이 아주 다르다. 한국 신자들은 국가에 내는 세금 뿐 아니라 종교에 돈을 따로 내야 한다. 그 이중 고통을 생각하면 가톨릭과 개신교는 헌금에 대한 관행과 실태를 검토하고 반성해야 한다. 신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적게 헌금하는 방향으로 개선하길 바란다. 유럽 개신교에는 십일조 의무가 없다. 십일조를 요구하는 개신교는 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물다. 한국 개신교에서 십일조를 아예 폐지하면 더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개신교를 눈비비고 다시 보리라. 교회와 성당에서 돈 이야기를 적게 했으면 좋겠다. 빚, 실업 등에 고통 받는 많은 신자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전례보다 중요한 하느님 자비
[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33
“25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여러분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습니다. 26 이 눈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으시오. 그래야 겉도 깨끗해질 것입니다.”(마태오 23,25-26)
오늘 본문은 공통년(서기) 50-70년에 예수 추종자들 사이에서 생겨난 이야기를 마태오가 수록한 것이다. 예수가 직접 한 말씀은 아니다. 그릇의 겉과 속의 깨끗함에 대한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 사이의 바리사이파 내부 논쟁이 본문의 배경이다. 그릇의 겉과 속을 구분하는 관행은 바리사이파에서도 1세기 중반에 생겼다. 힐렐 학파가 바리사이 개혁파라면 샴마이 학파는 바리사이 보수파다. 예수를 힐렐 학파로 분류하는 유다교 학자들이 있다.
그릇의 겉이 더러우면 그릇 속의 내용물도 버려야 한다.(레위기 11,33-35; 민수기 19,15) 그러나 그릇의 겉이 더럽더라도 그릇 속의 내용물을 버리지 않도록 랍비들은 차차 그릇의 겉과 속을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힐렐 학파는 잔의 속이 깨끗하면 잔의 겉도 깨끗하다는 입장이다. 잔의 속이 잔의 겉을 결정하지 않으며 겉도 또한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샴마이 학파의 입장이다. 샴마이 학파가 그릇의 속보다 겉을 더 중시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릇의 겉과 속 전체를 신경 썼다. 70년 이후 힐렐 학파의 입장이 유다교에 자리잡았다.
25절 파로피스(parophis)는 반찬 또는 반찬을 담는 그릇을 가리킨다. 하르파게(harpage)는 강도 행위 또는 빼앗은 물건을 가리키며 빼앗으려는 욕심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다. 아크라디아스(akradias)는 욕심을 자제하지 못하는 상태, 특히 지나친 성욕과 식탐을 가리킨다. 내가 식욕을 자제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 굶게 된다. 부자와 강대국의 탐욕은 가난한 사람들과 제3세계에 희생을 강요한다. 인간의 탐욕은 환경과 자연을 멍들게 한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고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잠언 30,8-9)
26절에서 마태오는 힐렐 학파를 편드는가. 마태오는 바리사이 학파들 내부의 의견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함께 비판한다. 마태오는 그릇의 겉과 속의 구분이라는 전례 내부의 논쟁을 뛰어 넘어 전례와 윤리의 관계로 옮아간다. 전례에 대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입장은 비슷하다. 1. 전례는 윤리적 요소를 포함한다. 2. 전례적 흠보다 윤리적 흠이 개인과 종교에 더 나쁜 영향을 끼친다.(이사야 1,15-17; 예레미아 33,8; 시편 51,4.9) 전례적 깨끗함을 높이 평가하지만 윤리적 깨끗함을 소홀히 하는 풍조에 대한 비판은 유다교나 그리스도교에서 공통이다.
진정한 깨끗함은 겉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 있다.(예레미아 4,14; 시편 24,4) 독자들에게 산상수훈의 한 구절이 떠오르겠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오 5,8) 예수 당시 유다교는 전례적 깨끗함에 크게 집중하였다. 유다교 문헌 미쉬나(Mischna)에서 가장 많은 비중은 전례적 깨끗함에 대한 것이다. 사제, 에세느파, 바리사이파 모두 마찬가지다.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 피식민지 백성 이스라엘의 지배세력이 전례에 집중하다니, 오늘 우리에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례적 깨끗함에서 거리를 두려는 흐름도 점차 생겨났다. 필로(Philo)를 선두로 한 해외 유다교, 바리사이파가 아닌 랍비 요한 벤 자카이, 예수와 제자들,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 그룹, 에픽테투스가 이런 흐름에 속한다.
그릇이 없으면 그릇이 만드는 공간도 없다. 그릇이 수단이라면 그릇이 만드는 공간은 그릇의 목적이다. 그릇의 속이 겉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릇을 마음으로 비유하는 말씀이다. 본문의 뜻을 요약하자. 1. 예수는 전례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폐지하지는 않았다. 2. 전례와 윤리는 일치한다. 3. 전례보다 윤리가 더 우선이고 중요하다. 그리스도교에서 윤리보다 전례를 강조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전례중심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아직도 있다. 전례중심주의는 성직자중심주의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들은 전례를 강조하여 종교권력을 유지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직자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있지만 성직자 중심주의는 사실 성직자들이 오래도록 신자들에게 강요해온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비판하고 광야에서 요한에게 가르침 받은 예수를 그리스도교는 잊었는가. 예수가 비판한 전례중심주의가 되레 그리스도교에서 더욱 완강해지고 있다. 칼 라너(Karl Rahner)는 가톨릭의 전례중심주의를 한탄하면서 이런 추억을 말했다. 신학교에 다닐 때 사제 서품 3주 전에야 미사 드리는 연습을 처음으로 배웠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당연히 신학공부에 열중하였다. 요즘 겉멋이 든 종교인들이 적지 않다.
교회와 성당에서 바치는 전례는 물론 거룩하고 아름답고 중요하다. 그러나 정성스레 미사를 집전하지만 윤리적으로 흠이 있는 사제는 반성해야 한다. 전례에 충실하지만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종교인은 회개해야 한다. 미사를 바치면 그날 일과는 거의 끝난 셈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사제들에게 오늘 본문은 따끔한 경고다. 전례에 마땅히 쏟는 그 정성으로 불의에 저항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이 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일치하고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는 길거리 미사는 성당의 미사보다 오늘 본문의 정신에 훨씬 더 가깝다.
전례를 통한 깨끗함이 아니라 의롭게 얻은 재산이 사람을 깨끗하게 한다. 매일미사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불의에 가담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불의에 가담한 종교인이 바치는 전례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다. 불의한 세력에 가담하면서 전례에 참석하는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김근수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