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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廻向(회향)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화엄경은 이 한마디 말을 이해시키려고 열권반 이나 되는 경을 설하였습니다.
불교는 오직 이 회향이라는 한마디가 전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자신이 닦은 모든 선근 공덕을 회향한다.” 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華嚴行者(화엄행자) 모두는 일체를 널리 회향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모은 재산과
내가 가진 권세와
내가 쌓은 공덕과
내가 닦은 수행과
내가 배운 지식과
내가 얻은 깨달음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합시다.
부처님이 이루신 菩提(보리)에 회향합시다.
진리인 實際(실제)에 회향합시다.
三處(삼처)에 회향하는 일이 모두모두 원만하여지기를 간절히 서원합시다. 그 서원대로 생활합시다.
세상은 온통 결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배려하는 마음이 결핍되어 신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결핍되어 신음하고,
베푸는 마음이 결핍되어 신음합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로 회향합시다.
따뜻한 마음 한 자락으로 회향합시다.
따뜻한 몸 짓 한 번으로 회향합시다.
회향이 살 길이며
회향이 佛法(불법)입니다.
순간순간 들이마신 공기를 내뿜듯이 그렇게 회향하며 삽시다. 먹은 음식물을 배설하듯이 그렇게 회향하며 삽시다.
재삼 단언하건대 회향만이 진정한 佛法입니다.
회향만이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회향만이 참사람의 소리이며,
참마음의 소리이며,
참 나의 소리입니다.
부디 회향하며 삽시다.
2015년 3월 15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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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廻向(십회향).
그 뜻은 간단하지만, ‘왜 열권 반이나 되는 아주 장황한
설법을 하셨는가?’ 이것을 낱낱이 번역하고 해설하고,
또 음미하고 하면서 세뇌가 된 것이 있습니다.
洗腦(세뇌). 그래서 반복해서 우리가 하는
그 어떤 수행법이 바로 그래서 반복하게 하는구나!
우리도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지장보살을 부르는 일도,
관세음보살을 몰라서 부르는 것도 아니고,
잘 알지만 반복해서 함으로 해서,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또 지혜가 우리 몸에 무르녹도록,
그래서 자연스럽게 체화가 되어서
밖으로 표현이 되도록 하는 그런 작용이지요.
그런 작용 때문에 우리가 반복해서
불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고,
또 이 회향이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반복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입시키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겠나?
저는 십회향품 공부를 하면서 그렇게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느낀 바를 서문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회향을 가만히 알고 보니까,
세상만사가 전부 회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돌아가고 있는 이치를 표현하면,
그대로 廻ㆍ向입니다.
숨 들이마시는 것은 廻요, 내뿜는 것은 向입니다.
전부가 회향으로 되어있습니다.
여기 왔다가 돌아가는 것도 회향이고,
어디 볼일 보러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회향이고,
회ㆍ향, 회ㆍ향, 끊임없는 회향입니다.
숨 마시는 것에서 부터 내뿜는 것,
일체가 회향 아닌 것이 없습니다.
회향의 원리대로 살면 참 잘 사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곧 보살행이 됩니다.
보살행은 없는 일을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화엄경에서는 어떤 위대한 보살행도
“본래 우리가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을 우리가 어떤 경계를 만나서
그것을 꺼내서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억지로 성불하고
억지로 보살행하고, 억지로 선행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바라밀ㆍ사섭법ㆍ사무량심ㆍ십선←이런 모든 행위들,
심지어 忍義禮智(인의예지) 사단(四端)에 이르기까지
일체가 다 우리 마음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을, 예를 들어서
땅속에 새순의 씨앗이 있습니다. 또 나무에도,
겨울에 보면 딱딱해서 어떤 싹도 나올 것같지 않지만,
봄이 되면 거기에 저절로 새순이 돋아납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새순이 나무 속에 본래 있다는
뜻입니다. 따뜻한 봄이라고 하는 경계를 만나니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우리 보살행도 똑 같습니다.
육바라밀 실천하기가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아닙니다.
경계를 만나면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육바라밀을 행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TV 같은 것을 틀면 저~~ 기 아프리카
난민들 구호하자, 유니세프니, 세이브더칠드런이니 등등,
보기 아주 불쌍한 그런 모습들을 방영해서,
소위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화주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꾸 보다보면 참 애처롭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거든요.
저절로 같이 동참하게 된다고요. 왜냐? 우리 마음속에
이미 동참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갖추어져 있어서
그래요. 그런데 그것을 표현할만한 경계를 만나지 못해서
육바라밀이 실천이 되지 않는 겁니다.
육바라밀이 실천이 쉽게 안 된다고 걱정할 것 없습니다.
어떤 기회가 되면 저절로 육바라밀을 실천하게 되어
있다고요. 忍義禮智도 마찬 가지입니다.
사섭법ㆍ사무량심도 전부 마찬 가지입니다.
선근회향도 역시 그래요. 선근회향도 어떤 계기가
되면... 오늘 법공양한다고 하면서 봉투 내놓는 사람이
상당히 여러분 계셨습니다. 우리 법회 할 때마다
혹은 한분ㆍ두 분ㆍ세분ㆍ네 분,
성의껏 마음에 닿는대로 그렇게 하는데요.
달라는 소리 한번 한적 없고,
누가 내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저절로 내고 싶어져요.
가르쳐서 내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저절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내게 되더라고요. 본래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그런 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자비희사가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참 마음을 보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참 마음자리를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말 무량공덕이
다 갖추어져 있는 그런, 사실 어마어마한 보물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석가모니부처님도 언제 그렇게 수행할 그런 체질을
타고난 것도 아닙니다. 어떤 계기가 되니까 수행자가
된 겁니다. 그래서 깨닫게 된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마치 자연의 이치와 똑 같습니다.
새봄이 되면 우리가 그런 것을 느끼기가 쉽지요.
그 딱딱한 흙 밑에서 새순이 그 딱딱한 것을 어떻게
뚫고 올라오는가? 우리가 괭이나 호미로 흙을 판다해도
사실 파기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딱딱한 흙을 뚫고 올라 오거든요.
올라오는 새순이 강해서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만져보면 천하의 아주 여리디 여린 새순입니다.
조금만 힘주어서 만지면 그냥 상처를 받을
그런 새순인 데도, 그 딱딱한 흙을 뚫고 올라오는 것.
어째서 그럴 수 있을까?
나뭇가지를 뚫고 올라오는 새싹도 마찬가지지요.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고, 신문이나 뉴스같은 것을 보면,세상이 말세라 온갖 험악한 그런 뉴스 투성이지만,
그러나그런 험하고, 나무로 치면 딱딱한 껍질과 같은
그런 세상이지만 우리 종교인들은,
특히 부처님제자들은 그래도 끝까지 사람의 본성을
믿고, 佛性이라고 하니까, 眞如佛性이라고 했으니까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정말 보살행이
저절로 이 세상을 다 뒤덮게 될 것이다.
보살로써 이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하는
그런 기대감으로 사는 것입니다.
十廻向品을 읽으면 그런 마음이 저절로 납니다.
우리가 여기서 강의하는 것은 강의하는 것이고,
또 강설을 통해서, 또 읽어서, 또 더욱 더 분명하게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강의는 아직 십회향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다음 시간에 십회향품에 들어갈
차례입니다. 지금은 십회향품을 설하기 전에 서론격으로
도솔천궁에 올라가는 이야기가 한 품 있었고,
그 다음에 도솔궁중에서 부처님을 게송으로 찬탄하는
그런 과정입니다.
지금은 북방의 광명당보살이 10개의 게송으로써
부처님을 찬탄하는데요. 교화의 작용이 방대하다하는
뜻을 표현합니다. 참 그것, 제가 읽고ㆍ읽고ㆍ또 읽고,
저는 하루의 강의를 위해서 몇 번 보고ㆍ또 보고합니다.
볼 때마다 게송이 참 아름답고, 의미심장하고,
최상승불법의 이치를 그대로 다 여기에 쏟아 부었구나!
하는 것을 아주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십회향품 두 번째 제24권이
이렇게 우리 손에 들어왔다.서문을 읽어서 이 책을 점안하도록 하겠다.
서문
회향(廻向)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화엄경은 이 한마디 말을 이해시키려고
열 권 반이나 되는 경을 설하였습니다.
불교는 오직 이 회향이라는 한마디가 전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자신이 닦은 모든 선근 공덕을 회향한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화엄행자(華嚴行者) 모두는 일체를 널리 회향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모은 재산과 내가 가진 권세와 내가 쌓은 공덕과 내가 닦은 수행과
내가 배운 지식과 내가 얻은 깨달음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합시다.
부처님이 이루신 보리(菩提)에 회향합시다.
진리인 실제(實際)에 회향합시다.
삼처(三處)에 회향하는 일이
모두모두 원만하여지기를 간절히 서원합시다. 그 서원대로 생활합시다.
세상은 온통 결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배려하는 마음이 결핍되어 신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결핍되어 신음하고, 베푸는 마음이 결핍되어 신음합니다.따뜻한 말 한마디로 회향합시다.
따뜻한 마음 한 자락으로 회향합시다.
따뜻한 몸짓 한 번으로 회향합시다.
회향이 살 길이며 회향이 불법(佛法)입니다.
순간순간 들이마신 공기를 내뿜듯이 그렇게 회향하며 삽시다.
먹은 음식물을 배설하듯이 그렇게 회향하며 삽시다.
재삼 단언하건대 회향만이 진정한 불법입니다.
회향만이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회향만이 참사람의 소리이며, 참마음의 소리이며, 참나의 소리입니다.
부디 회향하며 삽시다
2015년 3월 15일
신라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회향의 뜻은 간단하지만
화엄경에서 왜 열권 반이나 되는 장황한 설법을 하셨는가?
십회향품(十廻向品)을 내가 낱낱이 번역하고 해설하고 음미하면서
세뇌가 된 것이 있다. 세뇌(洗腦).
우리가 하는 수행법이
‘바로 그래서 반복하게 하는구나’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불자들이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지장보살을 부르는 일도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몰라서 부르는 것이 아니다.
잘 알지만 반복해서 부름으로써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지혜가 우리 몸에 무르녹아서
자연스럽게 체화(體化) 되어 밖으로 표현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런 작용이기 때문에 우리가 반복해서 불보살의 이름을 부른다.
회향이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반복해서 끊임없이 주입시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을 나는 십회향품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느낀 바를 이렇게 서문으로 이야기 했다.
가만히 알고 보니, 세상만사가 전부 회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미 돌아가고 있는 이치를 표현하자면 그대로가 회향이다.
숨을 들어 마시는 것은 회(廻)이고, 내뿜는 것은 향(向)이다.
여기 왔다가 돌아가는 것도 회향이고,
어디 볼일 보러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회향이다.
숨마시는 것부터 내뿜는 것 일체가 회향 아닌 것이 없다.
끊임없는 회향이다. 우리가 삶을 회향의 원리대로 살면 참 잘 사는 일이고 그것이 곧 보살행이다. 화엄경에서의 보살행은
없는 일을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위대한 보살행도 본래 우리가 다 갖추고 있다.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 어떤 경계를 만나면 꺼내어 표현되어지는 것이다.
억지로 성불하고 억지로 보살행 하고 억지로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 사섭법(四攝法) 사무량심(四無量心) 십선(十善)
이런 모든 행위들 심지어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四端)에 이르기 까지
일체가 다 마음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서 땅 속에 새순의 씨앗이 있다.
또 겨울에 나무를 보면 그 줄기가 딱딱해서
어떤 싹도 날 것 같지 않은데 봄만 되면 저절로 새순이 돋아난다.
신기한 일이다. 나무속에 본래 새순이 있다가
따뜻한 봄이라고 하는 경계를 만나니까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보살행도 똑같다.
육바라밀을 실천하기가 어렵고 힘들다고 하지만 아니다.
우리도 경계를 만나면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육바라밀을 행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요즘 티비(TV) 같은 것을 틀면
‘아프리카 난민들을 구호하자’‘유니세프’니 ‘세이브 더 칠드런’이니 등등
아주 보기 불쌍한 모습들을 방영해서
소위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화주를 한다.
그러한 이유도 우리들 마음속에
이미 동참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꾸 보다 보면 애처롭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저절로 같이 동참하게 된다. 다 갖추어져 있지만
표현할만한 경계를 만나지 못해서 육바라밀이 실천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육바라밀이 쉽게 실천 안된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기회가 되면 저절로 육바라밀을 실천하게 되어 있다.
인의예지도 마찬가지고 사섭법 사무량심도 전부 마찬가지다.
선근회향도 역시 그렇다. 어떤 계기가 되면 실천하게 되어있다.
오늘 스님들 중에 법공양을 한다고
나에게 봉투를 내놓는 분이 상당히 여러 분 계셨다.
법회를 할 때마다 한 분 두 분 혹은 세 분 네 분 성의껏 마음에 닿는 대로
법공양을 하는데 내가 한 번 달라소리 한 적이 없고 누가 내라고
한 적도 없다. 그런데 시절 인연이 도래하면 저절로 내고 싶어진다.
가르쳐서 내는 것이 절대 아니다. 저절로 자연스럽게 내게 되는 것은
본래 모든 마음 속에 그런 자비희사가 다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참마음을 보물이라고 한다.
참마음 자리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량공덕이 다 갖추어져 있는 어마어마한 보물이다.
그러한 것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수행할 체질을 타고난 것이 아니다.
어떤 계기가 되니까 수행자가 되고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와 똑같다.
새 봄이 되면 그런 이치도 느끼기 쉽다.
어찌 저렇게 여린 새순이 그 딱딱한 흙을 뚫고 올라오는가?
괭이나 호미로 흙을 판다해도 파기가 쉽지 않은데,
만져보면 천하에 여리디 여린 새순이 그 딱딱한 흙을 뚫고 올라온다.
새싹이 강해서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힘주어서 만지면 그냥 상처를 받을 새순인데도
그 딱딱한 흙을 뚫고 올라오는 것은 무엇이 들었기 때문인가.
세상이 어지럽고 신문이나 뉴스 같은 것을 보면 말세다.
온갖 험악한 뉴스들이 마치 나무로 치면 딱딱한 겨울 껍질과 같다.
그래도 종교인들은 특히 부처님 제자들은
끝까지 사람의 본성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진여 불성,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보살로서 이 세상이 가득 채워지고
보살행이 저절로 이 세상을 다 뒤덮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종교인들은 그런 기대감으로 사는 것이다.
십회향품을 읽으면 그런 마음이 저절로 든다.
우리가 여기서 강의하는 것도 강의하는 것이지만,
또 이 화엄경강설책을 통해서
이런 사실들을 읽어서 더욱더 분명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우리 강의는 아직 십회향품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음시간 부터 십회향품에 들어갈 차례다.
지금은 십회향품을 설하기 전에
서론격으로 도솔천궁에 올라가는 이야기가 한 품 있었고
도솔궁중에서 부처님을 게송으로 찬탄하는 과정에 있다.
북방의 광명당 보살이 열 개의 게송으로써 부처님을 찬탄하는데
교화의 작용이 광대하다는 뜻을 표현한다.
나는 이 강의를 위해서 이 대목을 읽고 또 읽고 몇 번을 보고 또 보았다.
볼 때마다 게송이 아름답고 의미심장하고
‘최상승 불법의 이치를 그대로 여기에 다 쏟아 부었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4. 北方의 光明幢菩薩
(1) 敎化의 作用이 廣大함
爾時에 光明幢菩薩이 承佛神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人間及天上 一切諸世界에
普見於如來 淸淨妙色身이로다
그때 광명당보살이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인간에서 천상에서
또 모든 세계에서
여래의 청정하고도
미묘한 색신을 보느니라
北方의 光明幢菩薩(북방광명당보살)
敎化의 作用이 廣大(교화작용광대)함
爾時(이시)에, 그 때에
光明幢菩薩(광명당보살)이
承佛神力(승불신력)하사,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서
普觀十方(보관시방)하고, 시방세계를 널리 관찰하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게송으로 설해 말씀하사대,
人間及天上(인간급천상)
一切諸世界(일체제세계)에,
인간세상ㆍ천상세상 일체 모든 세계에
普見於如來(보견어여래) 淸淨妙色身(청정묘색신)이로다.
如來의 淸淨妙色身. 아주 청정.
淸淨이라고 하는 것은 깨끗하다는 뜻도 되지만,
텅 비었다는 뜻도 되고...
普見於如來(보견어여래)
淸淨妙色身(청정묘색신)이로다.
청정하면서 아주 미묘한 색을 가진 그런 부처님의 몸을
널리 다 보게 된다. ←이것 아주 의미 깊습니다.
부처님을 어디서 보느냐?
‘인간세상에서 보고, 천상에서도 보고,
모든 세상에서 다 여래를 본다.’이 뜻입니다.
그야말로 산하대지, 삼라만상, 두두 물물, 산천초목,
그 무엇이든지 그 곳에서 아니 그 사실에서,
그 사실에서 곧 여래를 본다는 뜻입니다.
이 화엄경의 차원은요?
역사적인 석가모니부처님도 아니고,
한마음만 가리키는 그것도 아니고,
이 드넓은 우주안의 모든 존재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는 그런 이치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래의 몸입니다. 진리라는 뜻입니다.
眞理. 여래는 곧 진리 그 자체입니다.
진리는 이 세상 존재하는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有形ㆍ無形.
그 어디에도 그것의 바른 이치. 그 존재의 진실한 모습.
바른 이치가 다 있습니다. 다 있어요.
그것을 여기서는 如來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佛身充滿於法界(불신충만어법계)라고 우리 흔히
화엄경에 있는 이야기하잖아요.
佛身은, 부처님의 몸은 법계에 충만하다.
법계 그대로가 佛身이라는 뜻이지요.
佛身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젊은 스님들은 아마 못 들었을 겁니다.
옛날에 춘성스님이라고, 제가 선지식 복이 많아서
선지식들 회상에 다 다니면서 경전 강의도 많이 들었고,
그 다음에 선방을 운영하는 그 선지식 밑에도 가서
한철씩ㆍ두 철씩 다 살았는데요. 그 많은 훌륭한,
효봉스님 동산스님에서부터 다 살았는데요.
우리나라에 중을 한 사람 딱 꼽으라면
“나는 춘성스님을 꼽겠다.” 그런 말을 아주 당당하게
늘 했습니다. 춘성스님을 보면 참 정말 중다운
그런 모습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무소유ㆍ무소유해도 정말 그 스님같이
무소유가 없습니다. 80객인데 당신 방이 따로 없습니다.
당신 이부자리 따로 없었습니다.
큰 방에서 같이 정진하다가 삼경 딱 치면
어정어정 걸어서 탁자 밑에 가서 탁자 밑을 열고,
거기에서 당신 목침하나 딱 들고 와서
당신 깔고 앉았던 방석 배에 착 걸치면
그대로 주무십니다. 80객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80먹은 노인이 대중들하고 한방에서 목침하나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 깔고 앉았던 방석 딱 배에 걸치면 주무시는
겁니다. 그것도 얼마 주무시지도 않아요.
한 시간쯤 누웠다가 대중들이 다 잠 들었다 싶으면
그때 다시 일어나요.
일어나서 마당에 나간다든지 법당에 올라가서
한 두시까지 정진하다가 대중들이 깨기 전에,
한 시간쯤 전에 다시 내려와서 누웠던 자리에
살며시 들어가서 누워요.
누워서 자는 척하는 겁니다. 한 시간쯤 주무시겠지요.
한 시간이나 한 30분쯤 주무시면 대중들하고 같이
일어나는 겁니다. 평소에 정진 열심히 안하고,
살펴보지 아니한 사람들은 그 스님이
그렇게 생활하시는 줄 몰라요. 몇 몇만 알아요.
몇 몇만 밤새워 정진하던 사람들만 그 사실을 알지요.
그런 정도로 참 탈속하고,
진정 무소유로 살았던 스님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스님의 법문이 그랬습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니까, 봄바람이 코끝을 스치니까
살아있는 석가가 코끝을 스치는구나!
그야말로 春風끝에=봄바람 끝에 석가가 춤을 춘다하는
그런 옛 禪詩와 같이 당신은 그렇게 설법하시더라고요.
설법도 아닙니다. 그냥 앉아서 말하듯이
그렇게 평소에 하는 그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기의 첫째 구절이 그야말로
산하대지, 삼라만상, 산천초목,
두두 물물이 그대로 여래의 법신이다. 하는
그런 내용들이 한 게송만 하더라도
참 의미심장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
북방(北方)의 광명당보살(光明幢菩薩) : 북방의 광명당보살의 찬탄
*
교화(敎化)의 작용(作用)이 광대(廣大)함 :
교화의 작용이 넓음을 찬탄하다
*
이시(爾時)에: 그 때에
광명당보살(光明幢菩薩)이 : 광명당 보살이
승불신력(承佛神力)하사 :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서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 시방 세계를 널리 관찰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게송을 설해 말씀하사대
*
인간급천상일체제세계(人間及天上一切諸世界)에 :
인간세상 천상세상 일체의 모든 세계에
보견어여래(普見於如來) : 보견어 여래의
청정묘색신(淸淨妙色身)이로다 :
텅 비면서 미묘한 색을 가진 부처님의 몸을 널리 다 보게 된다.
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깨끗하다는 뜻도 되지만 텅 비었다는 뜻도 된다.
이 내용이 아주 의미 깊다. 부처님을 어디서 보느냐?
인간 세상에서 보고, 천상에서도 보고, 모든 세상에서 다 여래를 본다.
그야말로 산하대지 삼라만상 두두물물 산천초목
그 무엇에서든지 여래를 본다.
화엄경에서 ‘여래의 몸’이라고 하는 차원은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도 아니고 한마음만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이 우주 드넓은 존재 안에
모든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이치가 바로 여래의 몸이고 진리다.
여래는 곧 진리 그 자체다.
존재하는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유형 무형
그 어디에도 존재의 진실한 모습과 바른 이치가 다 있다.
그것을 여기서는 ‘여래’라고 표현한다.
흔히 화엄경에서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부처님의 몸은
법계에 충만하다.’고 말한다. 법계 그대로 불신(佛身)이라는 뜻이다.
*
젊은 스님들은 아마 못들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나라에서 중을
한 사람 꼽으라면 춘성스님을 꼽겠다는 말을 당당하게 말하곤 했다.
내가 선지식 복이 많아서 효봉스님 동산스님에서부터
훌륭한 선지식들 회상에 다 다니면서 경전 강의도 많이 들었고,
선방을 운영하는 선지식 밑에 가서 한철씩 두 철씩 다 살았다.
그런데 그 많은 훌륭한 스님들 중에서도
단 한사람만 꼽으라면 춘성스님을 꼽겠다.
무소유, 무소유 해도 춘성스님 같은 무소유가 없다.
춘성스님에게서 정말 중다운 모습을 많이 보았다.
내가 스님을 뵈었을 때 스님은 벌써 80객인데도
당신 방이 따로 없었고 이부자리도 없었다.
큰방에서 대중들과 같이 정진하다가 삼경을 딱 치면 어정어정 탁자 밑으로 걸어가서 문 밑을 딱 열고 거기에 당신 목침하나 놓고 들어가서
하루 종일 깔고 앉았던 당신 방석을 배에 걸치고서 고대로 주무신다.
팔십객이 그렇게 사셨다.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80 먹은 노인이 대중들과 한 방에서 주무시는데 침구라고는 목침하나
뿐이고 당신이 깔고 앉았던 방석을 배에 걸치고 주무시는 것이다.
그것도 어느 날은 주무시지도 않는다.
한시간 쯤 누웠다가 대중들이 다 잠들었다 싶으면
다시 일어나서 마당을 나간다든지 법당을 올라가서 한 두시까지
정진하다가 대중들이 일어나기 한 시간 쯤 전에 다시 또 내려와서
누웠던 자리에 살며시 들어가서 눕는다. 누워서 자는 척 하는 것이다.
아마 한 시간이나 한 시간 삼십분쯤 더 주무시고 나서는
대중들과 다같이 일어나신다.
평소에 정진을 열심히 안하고, 유심히 살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스님이 그렇게 생활하시는지를 모른다.
밤새워 정진 하던 몇 명만 그 사실을 안다.
그런 정도로 탈속하고 진정 무소유로 살았던 스님이 춘성스님이다.
그런데 어느날 봄바람이 불어오니까
‘살아있는 석가가 코끝을 스치는 구나’ 하고 설법을 하셨다.
그야말로 ‘춘풍 끝에 석가가 춤을 춘다’ 하는 옛 선시와 같은 설법이다.
사실 설법도 아니고 그냥 앉아서 평소대로 말씀하시던 모습을 보았다.
여기에 첫째 구절이 ‘산하대지 삼라망상 산천초목 두두물물이
그대로 여래의 법신이다’ 하는 내용이다.
이런 게송하나만 하더라도 의미심장하다.
(2) 敎化의 作用이 甚深함
譬如一心力이 能生種種心인달하야
如是一佛身이 普現一切佛이로다
菩提無二法이며 亦復無諸相이로대
而於二法中에 現相莊嚴身이로다
了法性空寂하사 如幻而生起하시니
所行無有盡이라 導師如是現이로다
三世一切佛이 法身悉淸淨하사대
隨其所應化하야 普現妙色身이로다
如來不念言 我作如是身이라하고
自然而示現하사 未嘗起分別이로다
法界無差別이며 亦無所依止로대
而於世間中에 示現無量身이로다
佛身非變化며 亦復非非化니
於無化法中에 示有變化形이로다
마치 한 마음의 힘으로
가지가지 마음을 내듯이
한 부처님의 몸으로
모든 부처님 나타내시네
보리(菩提)는 두 법이 없고
여러 모양도 없지만
두 가지 법 가운데
장엄한 몸 모양을 나타내고
법의 성품 공적함을 알지만
요술처럼 일어나는 것
행하는 일 다하지 않나니
도사께서 이렇게 나타나
삼세의 모든 부처님
법신이 청정하시니
교화할 중생을 따라
묘한 육신 널리 나타내네
내가 이런 몸 짓는다고
여래는 생각 않지만
자연으로 나타내나
분별을 내는 일 없고
법계는 차별이 없으며
의지한 데도 없지마는
그러나 이 세간에
한량없는 몸을 보이네
부처님의 몸 변화한 것 아니고
변화하지 않음도 아니나
변화가 없는 법에서
변화한 형상이 있네
敎化의 作用이 甚深(교화작용심심)함
73-1에는 교화의 작용이 광대하다.
廣大하다는 말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여래가 없는 곳이 없다. 진리 아님이 없다.’
←이런 뜻이고요. 교화의 작용이 매우 깊다. ←이것은
譬如一心力(비여일심력)이,
비유하자면 한 마음의 힘이
能生種種心(능생종종심)인달하야,
능히 가지가지 마음을 내지요. 그와 같이
如是一佛身(여시일불신)이, 이와 같은 한 부처의 몸이
普現이 一切佛(보현일체불)이로다.
능히 일체 부처를 나타낸다.
이것도 정말 의미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루 종일 마음 쓴 것.
어제ㆍ그제 쓴 것은 그만 두고라도,
작년ㆍ재작년에 쓴 마음은 그만 두고라도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쓴 마음이
무수히 많잖아요. 경계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마음ㆍ새로운 마음,
순간순간 새로운 마음을 일으킵니다.
일으키지 않으려 해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있는 것이 우리마음의 구조입니다.
그 마음의 숫자가 지금 이 시간까지 얼마겠습니까?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가 마음 쓴,
그 마음의 종류 숫자가 얼마겠습니까?
무수히 많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부 한마음의 작용입니다.
한마음에서 그것이 계속 그렇게 여기에
能生種種心이라고 설명했잖아요.
한마음의 힘으로 여러 가지마음을 다 표현하고 있다.
能生, 如是一佛身이. 이와 같이 한 부처의 몸이
일체 부처님을 널리 나타낸다.
그러니까 중생근기따라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별의별 방편을 다 써서 무슨 부처ㆍ무슨 부처ㆍ
무슨 부처, 천 부처ㆍ만 부처*삼천불ㆍ만 불ㆍ십만 불ㆍ
억만 불, 그렇게... 화엄경에 오면 부처의 숫자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부처가 뭐라고요?
한 부처에서 표현된 것이다. 한 부처에서...
예컨대 우리가 장갑을 끼고 ‘사물을 만진다.’할 경우,
무엇을 만지든, 누구의 몸을 만지든지, 책을 만지든지,
옷을 만지든지, 심지어 음식을 만져도
나는 그저 뭘 만져요? 장갑을 만질 뿐입니다.
나는 장갑을 만질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계를 분별하고 이해하고,
거기서 어떤 작용을 하더라도
전부 내 한마음이 들어서 할 뿐이지 다른 것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一切唯心造라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음이 일부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없는 사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내 마음이
인식함으로 해서 비로소 존재하는 겁니다.
내 마음의 세계에서는 내가 인식함으로부터
비로소 존재하는 겁니다. 내 마음이 인식하지 않으면
최소한도 나에게는 없습니다.
각자에게는 있을지 몰라요. 나에게는 최소한도,
내가 저~ 산천초목을 인식함으로부터 있는 겁니다.
그것이 一切唯心造입니다.
한사람이 하루 가운데 가지가지 사람으로 표현하지요.
마음도 그렇지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가운데도 별별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한사람이 여러 사람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여러 사람으로요.
菩提無二法(보리무이법)이며
亦復無諸相(역부무제상)이로대,
여기는 무차별과 차별의 관계입니다.
菩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법이 없어요.
차별이 없는 경계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형상도 없어요.
여러 가지 모습도 없어요. 그러나
而於二法中(이어이법중)에,
두 가지 법 가운데 현상은 또 차별하잖아요.
전부가 차별합니다. 천차만별하지요.
차별하는 가운데 現相莊嚴身(현상장엄신)이로다.
상을 나타내서 몸을 장엄한다. 여러 가지 각양각색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요. 각양각색의 모습을요.
오늘에 나타내는 내 모습 다르고,
내일 나타내는 내 모습 다르고,
어제 나타내는 내 모습 다르고요.
그러나 그것은 유위법.
유차별의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了法性空寂(요법성공적)하사, 법성이 공적해서
如幻而生起(여환이생기)하시니,
환과 같이 生起함을 아시니,
법성은 본래 공적한데 如幻.
환과 같이 生起해요. 환과 같이 일어나요.
그것을 아시니, 所行無有盡(소행무유진)이라.
그 행하는 바가 다 다함이 없음이라.
導師如是現(도사여시현)이로다. 도사 또한,
여래도 또한 이와 같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여래는 법성이 공적한 그 당체입니다.
공적하기만 하고 마느냐? 아니지요.
우리가 늘 잘 쓰는 眞空妙有(진공묘유).
참으로 공한 가운데 미묘하게 있는 것이지요. 또
空寂靈知(공적영지)입니다.
공적해요. 찾아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령스럽게 압니다. 추운지 더운지 다 알고,
해가 뜨는지 지는지 다 알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압니다. 하나도 놓치지 않아요.
그 작용이 얼마나 활발발 합니까? 얼마나 왕성 합니까?
그렇게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실체를 찾아보면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그런 그야말로 渾大有(혼대유)입니다.
이 세상에 꽉 차게 있는 이것을 無我ㆍ무아, 자꾸 無我,
소승불교에서 無我라고 한번 이야기 한 것.
석가모니가 이야기했다고 불교는 無我다. 무아다.
그러는데요. “無我다.” 라고 주장하는 그것은
어떻게 부정하겠느냐? 이겁니다.
無我라고 주장하는 그것은 그 당체는 부정 못하잖아요.
我가 있어서 無我ㆍ無我하는겁니다.
무아ㆍ무아라고 주장하는 그것은 뭐냐? 이 말이지요.
無我는 소승불교에서 하는 주장이지, 불교의 궁극적인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그것 속으면 안 됩니다.
남방불교에서 공부해온 사람들이 그야말로
입에 침을 튀기면서 그냥 無我를 주장하잖아요.
요즘 남방에 가서 공부해온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TV같은 것도, 인터넷 같은 것도
잘 되어 있어서 그런 사람들 공부해서
강의한 것 들으려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대승불교, 소승불교, 또 선불교,
중요한 것이 이 세 가지입니다. 다른 호국불교니
기복불교니 기타 그런 잡스런 불교는 그만 두고라도,
가장 주류를 이루는 것이 근본불교라고도 하고,
상좌부불교라고도 하고, 대승불교 권에서는
또 소승불교라고 하고 그러지요.
그것하고 그것은 상좌부불교라고 이렇게 해줍시다.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유마경 같은 데는 사정없이
소승ㆍ소승 이렇게 하는데, 소승불교 대승불교하고,
그 다음에 선불교, ←보면 이 세 가지가 아주 큰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이 화엄경같은
것을 잘 살펴서 그런 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소승불교에서 無我를 이야기한 것은,
초기에는 무아를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또 자신의 괴로움을 없앤다거나 아니면 잊어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無我觀이 좋습니다.
좋기는 좋아요. 자기의 괴로움을 없애버리는 것.
그것은 무아관이 좋긴 좋아요.
‘내가 없다.’ 라고 이렇게 관찰해버리는 것이 아주
좋은 치료법이긴 합니다. 그러나 無我는 아닙니다.
참 나가 있습니다. 제가 늘 宗旨(종지)로써 밝힌다고
하면서 참 나를 이야기하잖아요.
참사람, 차별 없는 참사람! 임제스님이 주장하는
선불교의 아주 최고봉이라고 하는 임제스님께서도
차별 없는 참사람을 늘 주장하잖아요.
차별이 없는 참사람! 여기도 차별 없는 것과
차별이 있는 것을 이야기했잖아요. 차별 없는 참사람
←이것이 대승불교의 일심ㆍ불성ㆍ진여하고,
차별 없는 참사람이라고 하는 선불교의 주장하고
그것은 아주 일맥상통합니다.
이야기 난 김에, 대승불교에서는요?
석가모니부처님보다 보살들을, 예를 들어서
문수나 보현이나 이런 보살을 더욱 우위에 둡니다.
‘부처의 수업을 다 끝낸 뒤에 비로소 보살이 된다.’ 고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그것 알아야 됩니다. 또 보살행하자고 하는 것이 불교지,
부처로 앉아있자고 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니까요.
보살행하자고 하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보다도 보살을 더 높이 봅니다.
그것이 대승불교에 와서 아주 파다하게 그렇게
그 사상이 퍼지니까 중국에 와서 선불교에서는
그것을 빌려가지고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如來禪위에 祖師禪을 둡니다.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하는
선문들이 아주 허다하지 않습니까?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못 보았다.”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훨씬 높이 있다.’ 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것이 대승불교에서 역사적인 석가모니의 견해보다는,
한 오ㆍ륙백년 이후에 대승불교에서 정립한
보살대승불교가, “보살대승불교가 훨씬 수준이 높은
불교다.” 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선불교에 와서
“여래선보다 조사선이 더 높다.”
←이렇게까지 발전된 것입니다. 그것이 똑 같은 겁니다.
역사적인 석가모니의 견해보다는, 오*륙백년 이후에
보살들이 주장하는 대승불교가 훨씬 높고,
또 선불교에서는 “여래선보다는 조사선이 더 높다.”
이렇게까지 된 겁니다. 거기에서, 그럼 불자라고 하면서,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보살을 따를 것인가?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조사를 따를 것인가?
←이런 주장이, 이런 시시비비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럴 때, 대승불교 권에서나 조사선 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럼 네는 진리를 따를 것이냐?
사람을 따를 것이냐?” ←이렇게 되묻습니다.
진리를 따를 것이냐? 사람을 따를 것이냐?
“사람을 따른다면 역사적인 석가모니를 따르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진리를 따른다면
당연히 대승불교를 따라야 옳다.” 그러니까 선불교에서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못 보았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이
法身悉淸淨(법신실청정)하사대,
과거부처님이나, 현재부처님이나, 미래부처님이나
모두가 그 법신은 다 텅 비었습니다. 悉淸淨.
청정이라고 하는 것은텅 비었다는 뜻입니다.
텅 비었다고 해서 그냥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眞空妙有입니다. 空寂한 데서 靈知한 것이 淸淨입니다.
텅 비었으면서도 신령스럽게 아는 데 있는 것!
그것이 참 나고ㆍ참사람이고ㆍ참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든지,
깨닫지 못한다든지, 아니면 근본불교를 많이 배워서
그것을 부정 한다든지 이렇게 하는 것은
이해가 부족해서 그럽니다. 法身悉淸淨하사대
隨其所應化(수기소응화)하야,
그 응당히 교화할 바를 따라서,
普現妙色身(보현묘색신)이로다.
묘한 색신을 널리 나타낸다. 형상으로 나타내게 되면 또
형상으로도 나타냅니다. 허망한 형상으로도 나타내요.
허망한 妙色身말고도 우리는 이미 眞空妙有.
참으로 공한 가운데 미묘하게 있어서
온갖 것 다 분별하고, 다 감지하고, 시시비비하고,
춥고 더운 것 다 알고, 내가 손해 보는지 이익 보는지
금방 계산해서 다 알아차리고, 신기합니다.
신기한 물건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그 말을 神解(신해)!
신비로울 神ㆍ이해할 解. “신비하게 안다.”그랬습니다.
나한테 손해 보는지 이익 보는지
그냥 계산해서 금방 알아냅니다. 그야말로 神解입니다.
神解하는 한 물건이 있습니다.
如來不念言(여래불념언)
我作如是身(아작여시신)이라하고,
여래는 ‘나는 이와 같은 몸을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며, 念言이라고 하는 것은 속으로...
우리가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 있지요.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 많습니다.
혼자서 속으로 생각하는 것.
생각하면서도 말을 합니다. 그것이 念言입니다.
自然而示現(자연이시현)하사, 저절로 나타내 보이사,
未嘗起分別(미상기분별)이로다.
일찍이 분별을 일으킨 바 없더라.
“나는 이러한 몸을 짓는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말 한적 없어요.
그러면서도 저절로 나타내 보이지만 분별을 짓지 않는다.
法界는 無差別(법계무차별)이며,
진리의 세계, 법의 세계는 차별이 없으며,
亦無所依止(역무소의지)로대, 또한 의지한 바가 없되.
而於世間中(이어세간중)에, 또한 세간가운데
示現無量身(시현무량신)이로다.
한량없는 몸을 나타내 보인다.
法界라고 하는 말이나, 여래라고 하는 말이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리라고 하는 말이나,
법성 = 진여 = 참나. 똑 같은 뜻들 입니다.
佛身非變化(불신비변화)며, 佛身은 변화가 아니며,
亦復非非化(역부비비화)니,
또한 다시 변화 아닌 것도 아니다.
於無化法中(어무화법중)에, 변화가 없는 법 가운데서
示有變化形(시유변화형)이로다.
변화하는 형이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천 백억 화신. 이런 말도 있고,
천변만화.라고 하는 말도 있고 그렇습니다.
이것이 千變萬化性입니다. 우리들 본성은,
우리들 진여자성은 하나인 것 같지만,
그 하나는 천변만화의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변만화의 성질을요. 천변만화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루 가운데 우리가 그 어떤
표현하는 삶의 모습이 여러 가지로 바뀌지요.
또 여러 가지로 바뀌어야 마땅하고요.
그야말로 굳어있으면, 변화가 없으면, 작용이 없으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지요. 아무짝에 쓸모없습니다.
정말 어떤 상황에 맞춰서
제대로 정확하게 변화해야합니다. 그래서
佛身은 변화가 아니고, 변화 아닌 것도 아니다.
변화 없는 법 가운데 천변만화를 나타낸다.
아~ 이고! 우리의 마음의 실체,
참마음의 실체를 잘 표현했지 않습니까?
이런 게송은 길게 설명을 안 해도, 짧은 글자 몇 자에
다 아주 깊은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
교화(敎化)의 작용(作用)이 심심(甚深)함 :
교화의 작용이 깊음을 찬탄하다
*
앞에는 교화의 작용이 광대하다고 하였는데
광대하다는 말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여래가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진리 아님이 없다. 여기는 교화가 심심하다고 했다.
교화의 작용이 매우 깊다.
*
비여일심력(譬如一心力)이 : 비유하자면 한 마음의 힘이
능생종종심(能生種種心)인달하야 : 능히 가지가지 마음을 내어서
여시일불신(如是一佛身)이 : 이와 같은 한 부처의 몸이
보현일체불(普現一切佛)이로다 :
능히 일체 부처를 나타낸다. 이것도 참 의미 있는 말이다.
어제 그저께 썼거나 작년 재작년에 쓴 마음은 그만두고라도
오늘 아침부터 일어나서 이 시간까지
우리가 하루 종일 쓴 마음이 무수히 많다.
경계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마음, 새로운 마음이다.
순간순간 새로운 마음을 일으킨다.
일으키지 않을래랴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오늘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가 쓴 그 마음의 종류와 숫자는 얼마이겠는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그건 전부 한 마음의 작용이다.
한마음에서 능히 가지가지 마음을 내어서
한마음의 힘으로 여러가지 마음을 다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한 부처의 몸이 일체 부처님을 널리 나타낸다.
화엄경에 오면 부처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가.
근기에 따라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별의별 방편을 다 써서
무슨 부처 무슨 부처 천부처 만부처 삼천불 만불 십만불 억만불이 나오는데 그 많은 부처가 결국은 다 한 부처에서 표현된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장갑을 끼고 사물을 만진다면
무엇을 만지든 장갑을 만질 뿐이다.
장갑을 끼고 만졌다면 책을 만지든, 옷을 만지든,
누구를 만지든 심지어 음식을 만져도 그저 나는 장갑을 만질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경계를 분별하고 이해하고
거기서 어떤 작용을 하더라도 내 한 마음이 들어서 할 뿐이지
다른 것이 없다. 그것을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표현한다.
마음이 우정 어떤 사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세계에서 그 사물을 인식함으로 해서
사물은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인식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는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나에게는 없다.
산천초목도 내가 인식함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체유심조다.
한사람이 하루 가운데 가지가지 여러 사람으로 표현된다.
마음도 그렇지만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루 가운데서도 한 사람이 여러 사람으로 별별 사람을 표현하며 나타난다.
*
보리무이법(菩提無二法)이며 : 이 대목은 무차별과 차별의 관계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두가지 법이 없다. 차별이 없는 경계이고
역부무제상(亦復無諸相)이로대 :
또한 여러가지 형상, 여러 가지 모습도 없다.
이어이법중(而於二法中)에 : 그러나 두 가지 법 가운데
현상장엄신(現相莊嚴身)이로다 :
현상은 또 차별한다. 상을 나타내서 몸을 장엄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각양각색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각양각색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다.
한 사람이라고 해도 오늘 나타내는 내 모습이 다르고
내일 나타내는 내 모습이 다르고 어제 나타내는 내 모습이 다르다.
그런데 그것은 무차별의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차별이다.
*
요법성공적(了法性空寂)하사 : 법성이 공적해서
여환이생기(如幻而生起)하시니 :
환과 같이 생기함을 아시니. 법성은 본래 공적한데 환과 같이 일어난다.
소행무유진(所行無有盡)이라 : 그 행하는 바가 다함이 없음이라.
도사여시현(導師如是現)이로다 : 또한 여래도 이와 같이 나타난다.
여래는 법성이 공적한 그 당체다.
공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늘 잘쓰는 대로 진공묘유(眞空妙有)로써 존재한다.
참으로 공한 가운데 미묘하게 있는 것이다.
또 공적영지(空寂靈知)다. 찾아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신령스럽게 안다.
추운지 더운지 다 알고 해가 뜨는지 지는지 다 알고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그 작용이 얼마나 활발발 하고 왕성한가.
그야말로 혼대유(渾大有)하다. 이 세상에 꽉 차게 있다.
그러나 그 실체를 찾아보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무시하고 소승불교에서는 자꾸 무아(無我)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이야기 했다고 ‘불교는 무아다’라고 하는데
그 ‘무아라고 주장하는 당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무아라고 주장하는 당체는 부정하지 못한다.
무아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아(我)가 들어서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아는 소승불교에서 하는 주장이지
불교의 궁극적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것에 대해 속으면 안된다. 남방불교에서 공부해온 사람들이 그야말로
입에 침을 튀기면서 무아를 주장하는데 불교계에 요즘 남방에 가서
공부해 온 사람들이 많다. TV나 인터넷 같은 데서 그런 사람들이
공부해서 강의하는 것을 들으려면 얼마든지 들을 수가 있다.
한국불교에서 호국불교니 기복불교니 무슨 기타 잡스러운 불교는
그만두고라도 가장 주류를 이루는 불교는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불교다.
대승불교권에서는 소승불교라고 하지만,
소승불교를 근본불교 혹은 상좌부 불교라고도 한다.
대승불교인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유마경 같은 데는
사정없이 소승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 화엄경 같은 데를 잘 살펴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소승불교에서 무아를 이야기 하는 것처럼
불교 초기에는 무아를 많이 이야기 했다.
자신의 괴로움을 없앤다거나 잊어버릴 수 있는 방법으로써
무아관은 좋기는 좋다.
괴로움을 없애버리기 위해 무아관(無我觀)을 해서
‘내가 없다’라고 관찰해 버리는 것이 아주 좋은 치료법이다.
그러나 무아는 진리가 아니다. 참나가 있다.
내가 늘 종지로써 밝힌다고 하면서
참나를 이야기 하고 참사람을 이야기 한다.
선불교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임제스님께서도
‘차별없는 참사람’을 늘 주장한다.
여기도 차별이 있는 것과 차별없는 것을 이야기 했다.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차별없는 참사람이
대승불교의 일심(一心) 불성(佛性) 진여(眞如) 와 일맥상통한다.
이야기 난 김에 말하자면
대승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보다 보살들을 더 위에 두었다.
예를들어 문수나 보현 같은 보살은
부처의 수업을 다 끝낸 뒤에 비로소 보살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보살행하자고 하는 것이 불교지
부처로 앉아있자고 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다.
대승불교에는 보살행 하자고 하는 것을 불교로 본다.
그래서 부처보다 보살을 더 높이 본다.
대승불교에 와서 그런 사상이 파다하게 퍼지니까
중국 선불교에 와서는 그것을 빌려서 여래선 위에 조사선을 두었다.
‘여래선(如來禪)은 보았지만 조사선(祖師禪)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 선문들이 허다하다.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못 보았다는 말은
결국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훨씬 높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역사적인 석가모니의 견해보다는 오 육백년 이후에 나타나서
대승불교에서 정립한 보살대승불교가 훨씬 수준이 높은 불교다.
이런 주장이 선불교에 와서는
‘여래선 보다 조사선이 더 높다’라고 까지 발전된 것이다.
이것은 결국 똑같은 주장이다.
그러면 불자들은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보살을 따를 것인가.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조사를 따를 것인가.’
이런 시시비비에 봉착하게 된다.
이럴 때 대승불교권에서나 조사선에서는
‘너는 진리를 따를 것이냐, 사람을 따를 것이냐?’ 이렇게 되묻는다.
진리를 따를 것이냐 사람을 따를 것이냐
사람을 따른다면 역사적인 석가모니를 따르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진리를 따른다면 당연히 대승불교를 따르는 것이 옳다.
그래서 선불교에서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못보았다’라고
한다. 이야기가 너무 비약이 되었다. 다시 본문을 보겠다.
*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이 :
과거 부처님이나 현재부처님이나 미래부처님이 모두가
법신실청정(法身悉淸淨)하사대 :
그 법신은 다 텅 비었다. 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텅비었다고 하는 뜻이다.
텅비었다고 해서 그냥 없다는 뜻이 아니다. 진공묘유다.
공적영지하는 것이 청정이다. 텅비었으면서도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
참나이고 참사람이고 참마음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든지
깨닫지 못한다든지 근본불교를 많이 배워서 그것을 부정한다면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수기소응화(隨其所應化)하야 : 그 응당히 교화할 바를 따라서
보현묘색신(普現妙色身)이로다 : 묘한 색신을 널리 나타낸다.
형상으로 나타내게 되면 또 허망한 형상으로도 나타낸다.
허망한 묘색신 말고도 이미 우리는 참으로 공한 가운데 미묘하게 있어서
온갖 것을 다 분별하고 감지하고 시시비비하고 있다.
춥고 더운 것을 다 알고 내가 손해보는지 이익보는지
금방 계산해서 다 알아차린다. 신기하다.
이 신기한 물건이 들어있음을 원효스님은 신해(神解)라고 하였다.
신비로울 신(神)자, 이해할 해(解)자를 써서 신비하게 안다고 하였다.
나한테 손해보는지 이익보는지 그냥 계산해서 알아낸다.
우리 모두에게 그야말로 신해하는 한 물건이 있다.
*
여래불념언(如來不念言) : 여래는
아작여시신(我作如是身)이라하고 :
나는 이와 같은 몸을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염언이라고 하는 것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이 많다.
혼자 생각하면서 그것을 속엣말로도 한다. 그것이 염언이다.
자연이시현(自然而示現)하사 : 저절로 나타내 보이사
미상기분별(未嘗起分別)이로다 : 일찍이 분별을 일으킨 바 없더라.
나는 이러한 몸을 짓는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나타내 보인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면서도 나타내 보인다. 그런데 분별을 짓지 않는다.
*
법계무차별(法界無差別)이며 : 진리의 세계, 법의 세계는 차별이 없으며
역무소의지(亦無所依止)로대 : 또한 의지한 바가 없되
이어세간중(而於世間中)에 : 또한 세간가운데
시현무량신(示現無量身)이로다 : 한량없는 몸을 나타내 보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법계, 여래, 진리,법성, 진여, 참나가
다 똑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
불신비변화(佛身非變化)며 : 불신은 변화가 아니며
역부비비화(亦復非非化)니 : 또한 다시 변화가 아닌 것도 아니다.
어무화법중(於無化法中)에 : 변화가 없는 법 가운데서
시유변화형(示有變化形)이로다 : 변화하는 형이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라는 말도 있고
천변만화(千變萬化)라고 하는 말도 있다.
우리들 본성인 진여자성은 하나인 것 같지만
그 하나는 천변만화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천변만화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루 가운데서도 우리가 표현한 삶의 모습이 여러가지로 바뀐다.
또 여러 가지로 바뀌어야 마땅하다.
그야말로 굳어서 변화가 없고 작용이 없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상황에 맞춰서 제대로 정확하게 변화해야 한다.
그래서 불신은 변화가 아니고 변화가 아닌 것도 아니다.
변화없는 법 가운데 천변만화를 나타낸다.
우리의 마음의 실체, 참마음의 실체를 잘 표현했다.
이런 게송은 길게 설명 하지 않아도
그 짧은 글자 몇 자에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3) 敎化의 作用이 深廣함
正覺不可量이라 法界虛空等하야
深廣無涯底하니 言語道悉絶이로다
如來善通達하사 一切處行道하시니
法界衆國土에 所往皆無碍으로다
정각은 헤아릴 수 없어
법계와 허공과 평등해
깊고 넓어 끝간 데 없으매
말로 형용하지 못하리
온갖 곳에 행하는 길
여래는 잘 통달하시매
법계의 모든 국토에
걸림없이 다니시나니
敎化의 作用이 深廣(교화작용심광)함.
교화의 작용이 깊고 넓다.
正覺不可量(정각불가량)이라.
바른 깨달음은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
正覺을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우리가 조금 뭘 아는 것, 중생들이 조금 뭘 아는 것도
그 앎의 양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큰 깨달음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 양을 헤아릴 수가 없지요.
法界虛空等(법계허공등)하야,
법계와 허공과 같다. 법계와 허공과 혼연일체가 됩니다.
혼연일체가 되니까 그 양이 법계와 같고, 허공과 같지요.
深廣無涯底(심광무애저)하니,
깊고 넓어서 涯底가 없으니, 변두리가 없다.
또 밑이 없다. 가가없고 밑이 없으니
言語道悉絶(언어도실절)이로다.
우리가 言語道斷하고 心行處滅(언어도단심행처멸)이다.
그 말을 곧잘 쓰잖아요. 불법에 대해서 아니면
마음에 대해서, 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제일 아주 윽박지르고, 윽박지르면서 말하자면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지요.
“아니 언어도단인데 뭘 자꾸 지껄이느냐?”
여기 되어있네요. 言語道가 悉絶이라. 그랬습니다.
言語道가 다 끊어졌다.
말로 표현이 안 되지요. 그러나 음성교체라고 해서
어떤 이치를 표현하는데, 언어가 제일입니다.
언어가 교화의 체입니다. 音聲敎體.
그것이 불합리하지만 그래도 제일 근사한 것,
제일 가까운 것이 언어입니다.
꽃 한 송이 들고ㆍ손가락 한 번 세우는 것도
좋은 표현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것 다...
拈華示衆(염화시중) 하는 것은 뒤에 선불교에서
그런 것도 만든 이야기지요.
如來善通達(여래선통달)하사, 여래께서 잘 통달해서
一切處에 行道(일체처행도)하시니,
일체 처에서 도를 행하시니
法界衆國土(법계중국토)에, 온갖 여러 가지 국토에서
所往皆無碍(소왕개무애)으로다.
가는 바가 하나도 걸림이 없더라.
*
교화(敎化)의 작용(作用)이 심광(深廣)함 :
교화의 작용이 깊고 넓음을 찬탄하다
*
정각불가량(正覺不可量)이라 :
바른 깨달음은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 정각을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중생들이 조금 뭘 아는 것도 그 앎의 양을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큰 깨달음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 양을 헤아릴 수가 없다.
법계허공등(法界虛空等)하야 :
법계와 허공과 같다. 법계와 허공과 혼연일체가 된다.
혼연일체가 되니까 그 양이 법계와 같고 허공과 같다.
심광무애저(深廣無涯底)하니 :
깊고 넓어서 그 변두리가 없고 밑이 없으니
언어도실절(言語道悉絶)이로다 :
언어도가 다 끊어졌다. 말로 표현이 안된다.
우리가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行處滅)’이라는 말을 곧잘 쓴다.
불법에 대해서 아니면 마음이나 도에 대해서 제일 윽박지르듯 말할 수
있는 것이 ‘언어도단인데 뭘 자꾸 지껄여쌌느냐’ 하는 소리다.
여기도 언어도가 실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음성교체(音聲敎體)라는 말도 있다. 언어가 교화의 체다.
어떤 이치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언어가 제일이다.
불합리하지만 그래도 제일 가까운 것은 언어다.
염화시중(拈華示衆)이니 하면서 꽃 한송이 들고 손가락 한 번 세우는 것도 좋은 표현이긴 하지만 사실 그것은 선불교에서 뒤에 만든 이야기다.
부처님은 그런 적이 없다.
*
여래선통달(如來善通達)하사 : 여래께서 잘 통달하사
일체처행도(一切處行道)하시니 : 일체처에서 도를 행하시니
법계중국토(法界衆國土)에 : 법계의 온갖 여러가지 국토에서
소왕개무애(所往皆無碍)으로다 : 가는 바가 하나도 걸림이 없더라.
첫댓글 북방(北方)의 광명당보살(光明幢菩薩) : 북방의 광명당보살의 찬탄
교화(敎化)의 작용(作用)이 광대(廣大)함 : 교화의 작용이 넓음을 찬탄하다
교화(敎化)의 작용(作用)이 심심(甚深)함 :
교화의 작용이 깊음을 찬탄하다
앞에는 교화의 작용이 광대하다고 하였는데
광대하다는 말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여래가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진리 아님이 없다. 여기는 교화가 심심하다고 했다.
교화의 작용이 매우 깊다.
교화(敎化)의 작용(作用)이 심광(深廣)함 : 교화의 작용이 깊고 넓음을 찬탄하다_()_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