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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용봉산 산행 때 땜빵한 산행지가 봉수산이었다. 그 산행기를 이제사 올려본다.
예산군엔 두 개의 봉수산(鳳首山)이 있다.
하나는 아산시와 예산군, 공주시에 걸쳐있는 금북정맥의 봉수산(535m)이고, 다른 하나가 이곳 예산군 대흥면 임존성(任存城)을 품고있는 봉수산(483m)이다.
봉수산(鳳首山)은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예당저수지 서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산 아래엔 봉수산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봉수산은 본읍 서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이 고을의 진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대흥면에 있다 하여 ‘대흥산’이라고도 불렸다.
이 산을 지나는 봉수지맥(鳳首枝脈)은 오서산(791m) 옆 공덕고개 남쪽의 370m봉에서 금북정맥을 북서쪽으로 배웅하고, 봉수지맥은 북동방향으로 분기된다.
이 산줄기는 초롱산(339m), 봉수산, 팔봉산(207.4m)을 지나 예산군 신암면 하평리 삽교천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47.5km의 산줄기이다.
서기 660년 15만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과 웅진성을 차례로 함락시킨다.
의자왕은 신라 태종무열왕과 당나라 소정방에게 술을 따라올린 뒤 당나라로 끌려가면서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백제가 패망한 뒤 왕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 흑치상지 장군 등이 백제 재건운동을 벌리자 3만여 백제 유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백제 부흥운동을 펼친 곳이 바로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에 있는 임존성이다.
처음엔 흑치상지 장군이 지휘한 백제 부흥군이 임존성에서 승리하는 등 백제 전역의 200여개 성을 순식간에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도권 다툼을 벌이던 지도자들의 분열로 끝이나게 되는데, 배신의 아이콘은 바로 처음 공을 세운 흑치상지 장군이다.
그는 당나라에 항복한 뒤 자기의 동족인 임존성을 거꾸로 공격해 함락시켰기 때문이다.
임존성은 봉수산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크고 작은 6개의 봉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성벽은 외벽만 돌로 쌓고 안쪽은 돌과 흙을 다져 쌓았으며 둘레가 약 2.5km에 면적이 55만㎡가 넘는다.
성내에는 문지(門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적대(敵臺)와 치(雉), 배수구와 우물, 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들머리의 ‘의좋은형제공원’은 려말선초(麗末鮮初)의 실존인물로 교과서에도 실린 이성만, 이순 형제의 이야기가 공원으로 꾸며져 있는 곳.
민속 생활용품과 농경문화가 꾸며져 있고, 관아엔 ‘화령옹주 태실’과 ’대원군 척화비‘, 그리고 드라마 촬영을 한 곳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날머리는 근대 개항기의 애국지사인 ‘최익현선생’의 묘소로 잡았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은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가 대마도에 구금되어 단식하다 순국하였다.
묘소는 처음(1907년) 충남 논산시 노성면의 국도변에 마련하였으나 참배객이 끊이지 않자 1910년 일제의 명령으로 이곳에 이장되었다.
코스: 의좋은형제공원-대흥관아-큰비티고재-416봉전망대-봉수산-임존성-우물-남릉-내상산-최익현선생묘-<시내버스이용>-수덕사IC(산악회버스탑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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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km가 채 되지않는 길을 3시간 30분이 걸렸다.
고도표.
봉수지맥
한마음산악회의 용봉산 정기 산행날. 몇 번 다녀온 산이라서 인근의 금북기맥 홍동산(309)과 백월산(398)을 따로 산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덤 님의 적극적 권유에 봉수산을 산행하게 된 것. 전체 인원 9명으로 일 개 분대가 되었다.
봉수산 계획(대중교통 등)은 한덤 님의 꼼꼼한 계획으로 짜여진 것.
용봉산 가는 길과 의좋은 형제공원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신양 IC'에서 빠져나와 예담저수지를 돌아...
의좋은 형제공원 앞에 우리 9명을 내려 놓는다.
안내판을 올려다 본 뒤...
공원안으로 들어가...
의좋은 형제공원의 시설 안내판을 카메라에 담는다.
두 형제의 조형물과...
두 형제가 살던 집을 살피며...
달구지와...
작은 연못의 학과...
쟁기질...
물레방아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공원 안내판엔 대흥 동헌(東軒), 관아문(官衙門), 객사(客舍)를 비롯한 여러 안내문이 1~18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홍살문을 빠져나와...
십수 기의 비석들이 줄지어선 도로변으로 나와...
한 비석을 살펴보니...
영의정 김공 육 영세불망비(건립연도 1660년 5월).
예당저수지 수몰지역의 비석들을 옮겨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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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각
비각 안으로 카메라를 밀어넣어 보았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대흥호장 이성만/ 이순 형제의 효(孝)와 의(義)를 후세 사람들에게 모범으로 삼기 위하여 1497년(연산군 3년)에 조정에서 이 비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성만 형제 효제비’는 형은 아우의 볏단에 아우는 형의 볏단에, 밤중에 벼를 나르다 만난다는 내용으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두 형제의 효성을 기린 비다.
원래 가방교(개뱅이다리) 옆에 있었는데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국민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린 그림 그대로 조각상을 만든 것.
대흥관아로 들어 가면서...
임성아문(任城衙門) 현판을 올려다 본다.
정면 6칸, 옆 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의 동헌(東軒) 대청마루에 '나한' 님이 걸터앉아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동헌 뒷뜰로 돌아드니 가지런히 진열된 장독대가 시선을 끈다.
드라마 '산 너머 남촌에는'의 촬영장소란다.
화령옹주 태실비 건너로 덩그러니 선 비석은...
'양이침범비전즉(洋夷侵犯非戰則), 화주화매국(和主和賣國 )'
그 다음 작은 글자로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고 새겨져 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뜻.
필자가 답사한 대원군의 척화비는 가덕도 천가초등학교, 기장 대변초등학교, 함안 상림숲, 창녕 만옥정공원, 예산군 대흥관아까지 다섯 군데인 셈.
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다 실패한 후 천주교를 탄압하고 1866년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한 수천 명의 교도를 처형했다.
이를 구실로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대원군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서 싸울 것과 문호개방을 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쇄국양이정책은 1868년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에서 미국을 물리친 후 척화비가 세워졌다.
영조의 11녀 화령옹주(1752~1821)의 태실은...
일제 강점기에 왕실의 기를 쇠하려는 목적으로 친일파 이왕직을 시켜 파괴시켰으며, 안에 있던 도자기는 일본인이 가져갔다고 한다.
<계유 삼월 초이일 술시 생 옹주 아지씨 태실 건융 18년 5월 진시 장>
느림길 2코스의 안내.
눈이 내려 채 녹지 않은 포장길을 따라 휴양림 방향으로 오르노라니...
길 옆 숲 속에 다 쓰러져 가는 움막. 무덤 뒤 시묘살이를 한 초막인가? 죽은 자와 산 자가 지금은 모두 이승엔 없을 것.
여름이면 짜증스러울 포장길에서...
'Y'갈림길을 만나 우측 큰비티고개를 따르기로 했다....
좌측으론 봉수산자연휴양림 가는 길.
체육시설이 있는 정자쉼터를 지나고...
우측에 기도원인 듯한 곳과...
민가를 지나니...
큰비티고개에 안내판과...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봉수지맥이다.
진행 반대 팔봉산 방향 봉수지맥과...
우리가 진행할 봉수산 방향. 평탄한 곳에서 간단 요기를 한 뒤...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전망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커다란 저수지가 드러난다.
당겨보는 예당저수지.
전망대에서 한동안 산하를 내려다보다...
반대편 월암저수지로 시선을 돌려...
살짝 당겨보니 저수지 위로 홍성추모공원이 보인다.
능선길은 순탄한 솔숲길.
수목원 갈림길을 지나자...
안내판이 있고...
금세 봉수산 정상에 닿는다.
정상의 이정표.
삼각점과 표석이 있는 널따란 정상부위엔 잔디가 곱게 깔려있고 햇살도 따스히 내려앉아 있다..
인증샷을 한 뒤...
산길을 이어간다.
정상에선 역시 예당저수지가 조망되고...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예당저수지.
임존성 방향 이정표를 따라 진행하다...
돌아보는 봉수산 고스락.
내내 눈길을 빼앗는 예당저수지.
이 길은 '내포문화숲길'.
멀리 우리 산악회가 간 용봉산(?)인가 싶어...
살짝 당겨보았다.
흩어진 돌들은 성돌로...
우리들은 무너진 성곽을 따르는 것.
도드라진 능선...
끄트머리에 솟은 봉우리는 내상산.
갑자기 시야가 훤히 트이며 복원된 성곽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곽은 능선의 8부 산자락을 에돌며...
등고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임존성 백제 복국운동 기념비가 있는 제법 너른 평지에는...
이정표와...
우물이 있어...
청소를 한다면 지금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 뵌다.
우물 옆 비석엔 '백제임존성청수(百濟任存城淸水)'라고 새겨져 있다.
내상산이 바라뵈는 성곽 모롱이에 언젠가 접했던 전설이 안내되어 있다.
전설을 각색하여 스토리 텔링화한 이야기는...
성곽에 돌출된 바위와 관련된 묘순이 바위의 전설이다. 영문 번역엔 묘순이를 '걸 레비트'라고 적어 놓았으니 '묘'자가 토끼(卯)를 말하는 토끼소녀인가 보다.
바니걸이라고 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
전설은 남아선호사상에 기인하여 억지로 꿰맞춘 이야기.
성곽을 따르다...
커다란 바위를 지나...
돌아보면 산허리 8부지점으로 구불구불 휘어져 있다.
대련사 갈림길 이정표가 내상산 터닝 포인터.
안내판이 있는 흩어진 성돌 사이가 내상산 가는 길.
아직 복원이 되지 않은 나머지 성곽.
임존성은 사적 제90호.
무너져 나딩구는 성돌들.
내상산을 지나...
찾는이가 적어 산길은 거칠지만 능선을 고수.
묵묘를 지나고...
간벌지구와 임도를 건너 휘어지는 무한천이 내려다 보인다.
임도인 듯한 길을 가로질러...
무덤 한 기를 지나면...
다시 자갈이 깔린 임도를 만나 역시 가로질러 능선을 고수...
앞서간 일행들은 능선 우측으로 휘어져 가버리고, 필자는 방향만 잡고 내려서서 무덤을 만나게 된다.
무덤 이후 하산길은 훨씬 좋아지면서...
룰루랄라 내려서니...
좌측으로 농가와 승용차가 보인다. 농가쪽으로 내려 갈려다가 다시 능선을 고수...
반듯한 길을 따르니...
대숲 아래로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 잘 꾸며진 무덤.
능선에는 무덤들이 나란히 있어...
비석을 확인하니 대부분 밀양 박씨 묘.
더 아래 무덤도...
밀양 박씨.
제일 아래 무덤도...
역시 밀양 박 씨.
대숲을 빠져나오자 비닐하우스와...
폐가가 된 민가가 있다.
골목길을 돌아 나오자 최익현선생 묘.
입구엔 홍살문이 보인다.
이수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서로 희롱하고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면암최익현선생춘추대의비(勉庵崔益鉉先生春秋大義碑).
글쓴이는 국전서예심사위원장을 지낸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1909~2000) 선생.
안내판.
면암최익현선생춘추대의비 우측으로 두 채의 기와집은 최익현 선생 재실이다.
1909년 논산에 있던 면암선생의 묘소를 이장할 때 민가를 매입하였기 때문에 전통가옥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예산 최익현선생 재실 안내판.
내려서서 올려다 보는 춘추대의비.
홍살문이 있는 입구로 나와 하산길을 짚어본 뒤...
도로에 세워진 안내판도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곤 곧장 내려간 일행들이 돌아온 뒤...
최익현 선생묘로 올라와...
비석을 살펴본다.
'면암 최선생 익현지묘(勉菴 崔先生 益鉉之墓)'와 '정부인 청주한씨 부좌(貞夫人 淸州韓氏 祔左)'
제일 연장자인 권 선생님의 제안으로 단체 추모의 묵념(默念)을 올렸다.
乙巳條約이 체결되고서 조선왕조가 붕괴하자, ‘魯城 闕里祠에서 先聖에게 고한 글’에서 면암 선생은 이렇게 기술한다.
“崇禎(明毅宗의 연호) 287년, 을사(1905, 광무 9) 12월 초하루, 기해 26일 갑자에 후학 崔益鉉은 통곡하며 先聖 孔夫子께 고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인민도 오래되었고, 순박한 풍속도 오래되었으며, 三皇ㆍ五帝ㆍ三王 같은 표준을 세운 성인도 가신지 오래되었으니, 세대의 치란과 道의 흥망이 氣數의 성쇠로 번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때문에 周의 말엽에 하늘은 집대성한 성인을 내어 春秋의 권한을 빌려, 亂臣賊子를 죄주고 王道를 바르게 했으니, 이것이 곧 우리 夫子의 道가 옛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 주어, 堯舜보다 더 어질게 된 것입니다.
그후 다시 覇道에서 떨어져 오랑캐가 되고, 오랑캐에서 다시 떨어져 짐승이 되었으며, 楊墨(楊朱와 墨翟)은 변하여 老佛(道敎와 佛敎)이 되고, 노불이 다시 변하여 陸王(陸象山과 王陽明)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천하를 변역한 것이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만, 亞聖ㆍ大賢들이 전후에 번갈아 나서, 道를 호위하고 邪說을 막는 책임을 지고, 尊周攘夷의 공을 세운 때문에, 道學이 다 떨어지지 않고 衣裳도 다 찢어지지 않아 중화의 전통을 보전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陽秋(春秋의 별칭)의 한 가닥 맥이 線같이 海東의 한 지방에 오히려 존재해 있었으니, 이는 곧 碩果不食으로 천하의 志士들이 바라던 바입니다.
요사이 서양의 鬼物들이 날뛰어, 利瑪竇 같은 예수[耶蘇]들의 邪說이 점점 물들어 고질이 되었고, 끝내는 동쪽 오랑캐가 몰아 잡아먹어, 인류가 거의 다했습니다.
우리를 비린내 나게 하고, 우리의 머리를 깎고, 목에 쇠사슬을 채워,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우리를 臣妾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鬱鬯酒를 맡던 종주국이 위태로워 종묘ㆍ사직이 폐허가 되었고, 부자의 말씀을 외고 본받던 선비들이 스스로 금지하여, 선비의 복장이 깨끗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道는 전수할 데가 없게 되었고, 聖靈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아, 하늘이여.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이는 실상 저희들이 우매하고 용렬하여서, 禍의 기틀이 싹터 움직일 적에 대책을 세워 막지 못하고, 惡의 불꽃이 치열할 때 성토하고 멸망시키지 못하여, 春秋의 법을 끝내 받들어 행하지 못하였으니, 천지의 죄인인 동시에 부자의 죄인입니다.
경건하게 뵈옵는 마당에, 가슴이 찢어지고 정신이 떨려서, 통곡하고 죽고 싶을 뿐이기에 삼가 고하옵니다.”
- 인문학 여행자 탁양현 작가의 '流配旅行者 勉菴 崔益鉉'에서... -
그리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하여 신대리로 이동.
버스 정류소에서...
시내버스 시간표를 확인하며 기다린다. 이는 한덤 님이 벌써 시간 계획을 짜 두었던것.
정류소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다...
마을 앞 산자락에 비각이 있어...
당겨보니 '증이조참판행사헌부집의/ 밀양박공희승휴정려중수기'다. 펜스를 쳐놓아 접근은 불가하였다.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30분 정도 이동 '예산 수덕사 IC' 입구에서 산악회 버스를 갈아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