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회] ‘인의장막’에 갇힌 이승만 부부
독재자 이승만 평전/[11장] 발췌개헌ㆍ사사오입개헌 통해 권력연장 2012/04/29 08:00 김삼웅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이기붕 민의원 의장 가족. 프란체스카 여사(왼쪽에서 두번째) 옆이 이 의장의 장남인 이강석군. ⓒ 연합뉴스
이승만은 3선에 성공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뻔뻔하게도 “이번 선거결과를 보면 친일하는 사람과 용공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고 피력했다. ‘친일’은 신익희 추모표를, ‘용공’은 조봉암 득표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신익희는 자타가 공인하는 독립운동가인데, 반이승만 전선에 설 때부터 이승만 측에서 친일파로 몰았다. 조봉암은 자신이 조각할 때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하고서도, 역시 반이승만 기치를 걸면서부터 ‘용공’으로 몰고, 얼마 뒤에는 ‘사법살인’을 하기까지 하였다.
이승만의 이중성은 ‘친일’ 문제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났다.
대선이 끝난 뒤 선거 주무장관인 내무장관에 이익흥, 치안국장에 김종원을 임명했다. 이익흥은 일제 때 경찰서장을 지내고, 김종원은 여순사건 때 잔인한 학살과 거창민간인 학살은폐 사건의 주범이었다.
이승만은 1954년 5ㆍ20총선을 앞두고 정부와 자유당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 친일파가 많이 섞였다는 여론에 대해 4월 6일 다음과 같은 엉뚱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근래에 와서 친일파 문제로 해서 누가 친일파며 누가 아닌가 하는 것이 민간에서 혼동된 관계가 있으므로 다시 설명하고자 하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왜정시대에 무엇을 하던 것을 가지고 친일이다 아니다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 뭘 했든지간에 그때 친일로 지목됐던 사람이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를 그 사람의 의사와 행동으로 표시되고 안 되고에 친일이다 아니다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가령 이전에 고등관을 지내고 또 일본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한 사적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이 지금 와서는 그 일을 탕척(蕩滌) 받을 만한 사실이 있어가지고 모든 사람이 양해를 받을 만한 일을 해서 진정으로 친일 아니다 하는 것을 증명 받을만 하면 먼저 일은 다 불문하고 애국하는 국민으로 인정하고 대우해 줄 것이다. (주석 18)
이승만의 가치관은 치졸했다. 정사곡직(正邪曲直)의 가치가 뒤섞이거나 전도된다.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가치관을 보여 주는 발언이었다. 아무리 악질적인 친일파라도 자기 밑에서 일하면 애국자이고, 치열한 독립운동가라도 자기에게 반기를 들면 친일파이거나 빨갱이로 몰아치는 가치관었다.
이승만은 정부와 국회, 자유당에 본격적으로 친일파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다시 쓰겠지만, 장경근ㆍ한희석ㆍ이재학ㆍ이익흥ㆍ인태식 등을 각료나 국회의원, 자유당 간부로 발탁하였다. 하나같이 일정강점기 극렬 친일활동을 해온 인물들이었다.
프란체스카는 1946년 3월 26일 한국에 온 이래 이승만의 아내로서, 정부수립 뒤에는 퍼스트레이디로서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한국의 물정도 잘 모르고 정치에는 소양도 없어서 남편의 보필에 그쳤다. 정권이 장기화되면서 주변에 영어 잘하는 사람을 끌어들이고, 이들이 차츰 실세가 되었다. 임병직ㆍ이기붕ㆍ변영태 등이다. 프란체스카는 ‘인의장막’에 가려지고,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는 프란체스카의 수족이 되어 남편의 출세길을 열어주었다. 한때 사상검사로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던 선우종원의 증언이다.
지금에 와서 밝히지만, 당시 우리는 보고서를 영어로 써서 올려야 했다.
때문에 처음에 한글로 쓴 우리 보고서를 영문으로 번역하는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이유는 바로 모든 보고서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거쳐서 전달되는데 영부인이 한글을 모르니, 영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황당하고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이박사의 반공에 대한 업적을 앞으로 내세우며 덮어버렸던 것이다. (주석 19)
다음은 이승만 정권에서 일본주재 특명전권대사를 지낸 유태하가 5ㆍ16 뒤 군사재판에서 증언한 프란체스카 관련 내용이다.
일본국 주재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니 피고인(유태하 - 필자)은 이후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은혜에 보답하고 동 임명조치를 막후에서 조종한 동 프란체스카에게 충성을 다할 목적으로 매주 1회씩 진귀한 과실을 동 프란체스카에게 항공편으로 진상하고 프란체스카 및 이승만의 세탁물을 전적으로 인수하여 일본국에서 세탁 역시 항공편으로 전달하였고(58년) 6월 12일의 프란체스카 생일에는 일금 100만 환 상당의 금강석 지환을 선사하는 등 치졸한 노복 노릇을 하는가 하면 외교비밀을 정당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 개인편에 대통령도 아닌 프란체스카에게 보고하고…. (주석 20)
강준만 교수는 프란체스카의 ‘역할’에 대해 외신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마크 클라크도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알게 됐다고 쓰고 있다.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의 모든 서신은 물론 면담까지 직접 챙겼다는 것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53년 3월 9일자도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의 대변인으로서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주석 21)
이승만이 3선에 성공했을 무렵 ‘인의장막’에 쌓인 그가 얼마나 국정에 맹목이었는지, 1956년 프랑스 석간신문 <프랑스 스와르>가 홍콩 주재 프랑스 기자를 지낸 뒤씨앵 보다르가 직접 서울에서 취재한 르포르타주 기사가 잘 보여준다.
필자는 소위 이대통령의 정정순시(政情巡視)에 외국기자들 틈에 끼여 참여한 적이 있다.(…)일행은 쌀가게에 가서, 대통령이 쌀 한 말 값을 물으면, 주인은 시장가격의 반값을 대답한다. 또 모자 가게에 갔다. 대통령이 주인에게 국산이냐고 물었다. 주인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영국상품이었다) 값을 묻는다. 값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싸다.
대통령은 중절모 하나를 사서 머리에 얹더니 “이것보라! 우리나라 국민은 이렇게 기술도 훌륭하고 값도 싸지 않느냐.” 이것이 다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과 경제 안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미소 때문에 눈을 반만 뜨고 외국기자들에게 자랑한다.
그렇다. 그는 보통 때에도 눈을 반만 뜨고 있다. 모든 것을 더 크게, 더 자세하게, 더 밝게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장관들은 이승만이 보지 않고 안 보이는 뒷면에서 모든 어두운 정치흥정을 한다. 그리고 이승만이 보이는 시야에서는 모든 것을 굽신거리고 절대 복종한다. 그 쌀가게에나 모자 가게에도 대통령의 행차 앞에 벌써 몇 사람이 가서 미리 돈을 주고 그렇게 시켜놓은 것을 이승만은 반눈 뜨고 보고 있으니 보려 하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주석 22)
이승만은 3선을 강행하고 영구집권을 획책하면서 ‘국부’가 되는 소중한 기회를 놓쳤다.
‘놓쳤다’기보다 스스로 버렸다. 미국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은 두번째 임기를 앞두고 측근은 물론 독립전쟁의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군부로부터 3선 출마를 권유받았다. 루이스 니콜라 대령 등 장교들은 아예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아메리카의 국왕이 되어 달라”며 구체적 움직임까지 보였다.
워싱턴은 독립전쟁과 건국 초기 8년 동안 아메리카를 잘 통치하여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본인의 결단에 따라서는 죽을 때까지 권력의 정상에서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 연장을 부추기는 사람들을 단호히 배격하면서 임기가 끝나자 멕토맥강 하류 생가의 옛 농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별사>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 행정부를 관리할 한 사람을 새로이 선출할 시기가 임박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제 누구에게 그 막중한 임무를 부여해야 할 것인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 제가 그러한 선출 대상이 될 몇몇 사람 가운데 포함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분에게 명확하게 알려드리는 것이 마땅한 것임은 물론, 특히 국민의 여론이 더 분명히 표출되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석 23)
주석
18> 서중석, 앞의 글, <이승만의 북진통일>, 151쪽.
19> 일월서각 편집부엮음, <4ㆍ19혁명론Ⅱ(자료편)> 314쪽, 일월서각, 1983.
20> 선우종원, <격랑80년, 선우종원회고록>, 143쪽, 인물연구소, 1998.
2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3권>, 173쪽, 재인용.
22>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46쪽, 창작과비평사, 1998, 여기서는 강준만, 앞의 책, 175~176쪽, 재인용.
23> 한국미국사학회, <사료로 읽는 미국사>, 79쪽,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