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어떤 표현은 너무 자주 반복돼서 그 의미와 힘이 퇴색된다. 한국 영화의 위기라는 담론이 그러하다. 한창 한국 영화의 경기가 끝없이 오르던 2002년, 삼성 경제 연구소가 <한국 영화 산업 발전 전략>이라는 보고서에서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상황으로 한국 영화의 위기를 언급한 이후, 영화 산업의 경기가 안 좋아질 때마다, 충무로 기대작이 엎어질 때마다 이 담론이 소환됐다. 그리고 다시 산업이 회복세에 들어서고 천만 히트작이 나올 때마다 이 담론은 슬그머니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말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영화는 위기다. 여름 성수기를 노린 기대작들인 <우는 남자>, <하이힐>, <황제를 위하여>는 제작비 대비 참혹한 박스오피스 성적도 성적이지만, 작품의 완성도나 개연성에서도 극악한 평가를 받아야 했다. 평단과 박스오피스 모두의 지지를 받던 봉준호,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커녕, <신라의 달밤>이나 <공공의 적>처럼 패기 있게 밀어붙이는 오락 영화도 보기 어려워졌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그 들끓던 창작의 에너지와 뚝심은 어디로 갔을까. 단순히 천재가 더는 나오지 않는 것인가, 인재가 성장할 수 없는 건가, 제작 시스템의 문제인가. 이 현상의 좀 더 근원적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씨네 21>, <필름 2.0>을 거쳐 현재 명지대학교 영화·뮤지컬학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김영진 교수에게 왜 한국 영화에서 황금세대 이후는 등장하지 않는지에 대한 글을 부탁했다. 그저 요즘 한국 영화는 재미없다거나, 한국 영화의 위기라는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기보다는, 정말 이 위기를 위기로 바라보고 그 뿌리의 염증을 찾아낼 때 위기 담론은 비로소 가치를 회복할 것이다.]
2003년 4월 초 봉준호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 시사회가 서울극장에서 열렸다. 기자, 평론가, 영화관계자들의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작품성은 뛰어나지만 흥행 전망은 어두워 보인다고 그들 대다수는 삼삼오오 모여 하마평을 했다. 당시 이 영화의 제작사인 싸이더스는 한 달 전 개봉한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가 흥행 참패하는 바람에 부도설마저 돌고 있었다. 영화관계자들이 <살인의 추억> 흥행을 비관적으로 본 이유는 간단했다. 범인이 잡히지 않는 범죄 스릴러 영화를 관객이 용서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살인의 추억>은 시나리오가 충무로에 돌아다닐 때부터 줄곧 비슷한 반응을 얻었다. 짜임새가 좋지만 결말이 없는 영화, <플란다스의 개>로 재기를 보였지만 뭔가 영화광 취향에 갇힌 봉준호의 작가 영화 지향이 흠결인 영화. 결과는 잘 알려진대로다. <살인의 추억>은 흥행에 크게 성공했으며 봉준호는 2000년대 한국영화계가 배출한 가장 중요한 감독이 되었다.
2000년대 초반의 한국영화계는 무모한 블록버스터와 조폭 코미디가 양산되고 있었지만 젊은 제작자와 감독들의 모험정신이 돋보이는 영화들도 곧잘 만들어졌다. 시네마 서비스의 강우석, 싸이더스의 차승재, 명필름의 심재명 등의 제작자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영화인들이었다. 제작자 겸 감독이었던 강우석은 누가 봐도 흥행 전망이 어려운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과 같은 영화에 순제작비 60억 원을 투자하는 만용을 부렸다. 차승재가 만드는 영화들은 흥행 여부에 상관없이 한국영화의 수준을 지켜주는 웰메이드 영화라는 믿음을 주었다. 심재명이 제작한 <공동경비구역 JSA>와 같은 영화는 한국 대중영화의 지평을 한뼘쯤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쨌든 좋은 시절이었다. 류승완 감독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란 저예산 독립영화로 데뷔한 후 곧바로 <피도 눈물도 없이>라는 유혈낭자한 블랙코미디를 두 번째 영화로 찍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류승완은 그 후로도 딱히 메가 히트작이 없었지만 <아라한 장풍대작전>, <짝패>, <주먹이 운다> 등의 영화로 자기 색깔을 지키는 감독으로 명성을 얻었고 차츰 중견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재기에 성공한 박찬욱 감독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미니멀리즘 걸작 <복수는 나의 것>을 연출해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누구보다 실력 있는 감독이라는 걸 입증했다. 당시 이 영화에 열광한 봉준호, 류승완, 김지운 등의 감독은 일종의 우정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1970년대의 할리우드에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스필버그 등의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류 영화산업에서 젊은 미학적 기세로 꼭대기에 오를 기세였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한국영화의 모험정신이 절정에 올랐음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그걸 보기 좋게 성공시킨 좋은 사례였다. <복수는 나의 것>이 흥행 실패한 뒤 <올드보이> 제작에 들어가자 충무로에선 박찬욱 감독이 B무비 영화를 좋아하는 자기 취향을 고집해 정신을 못 차리고 결국 영화계의 패자로 남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많았다.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가 상업영화의 표준이 될 것이라며 자신을 보였고 그의 신념은 현실로 입증됐다. 근친상간 모티브에 축을 둔 이 대담한 비극은 한국의 극장가에서 대성공을 거뒀고 심지어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국내 개봉한 상태에서 칸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초청되는 행운을 누린 데다 심사위원 대상까지 받는 쾌거를 이뤘다.
칸영화제를 비롯한 서구 영화제에서 한국영화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박찬욱, 봉준호 외에 이창동, 김기덕, 홍상수 등의 영화가 거센 바람을 일으켰고 무엇보다 서구 영화제와 평단은 하나의 경향으로 모아지지 않는 한국영화의 다양성에 놀랐다. 유행처럼 유럽의 방송국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고 소수지만 씨네필 사이에 팬덤의 규모도 만만치 않게 늘어났다. 이런 흐름은 오래 갈 것 같아 보였다. 박찬욱과 봉준호는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위치의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이창동, 김기덕은 유럽 아트하우스 영화관에서 절대적인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을 잇는 후배 감독들의 기세가 끊이지 않을 듯 보였다.
유감이지만 2007년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의 미학적 모험 추이는 급격히 하향세로 돌아섰다. 금융펀드를 도구삼아 규모의 경제를 꾀하던 영화제작자들과 그들의 회사는 거품 경기를 일으킨 후유증으로 주저앉았고, 그들의 자리를 그동안 뒤에서 투자자로만 만족하던 대기업 실무자들이 꿰어 찼다. 대기업은 투자와 배급과 극장업을 독과점하면서 영화제작자들을 비참한 을의 자리로 강등시켰다. 변화의 폭은 상상하기 힘들만큼 컸다. 한국에서 서너 명의 감독이나 제작자들을 제외하면 대다수 영화인들은 대기업 과장급의 실무자들에게 새 영화 기획 피팅 심사를 받고 심지어 영화 제작 중에도 수시로 불려가 애초 시나리오 초안대로 찍는지 검사를 받는다. 지난 해 이명세 감독이 <스파이>란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가 일주일간의 촬영 분량을 토대로 해고당한 사건은 충무로에 충격을 안겨줬다. 흥행에 부침을 겪었지만 이명세라면 현재의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멋진 화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다. 어느새 한국영화계의 어른 대접을 받게 된 그마저도 대기업의 철저한 제작통제를 이겨내지 못했다.
이제 <지구를 지켜라>만큼 대담한 시도를 해놓고도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낭만적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 투자 실무자들은 영화인이 아니다. 그들은 회계장부와 모니터 시사의 데이터가 영화의 전부라고 믿는다.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관한 감이 없고 그런 감을 오히려 경멸한다. 그래서 영화가 좋아졌는가. 여전히 극장가에는 천만이 넘는 한국영화들이 등장하지만 그런 영화들은 소수일 뿐만 아니라 대개 투자자들로부터 외면 받아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진 결과물들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대기업 투자 심사를 어렵게 통과한 대다수의 영화들이 게으르고 안이하고 상투적인 기성품 조합물이다. 문화라면 가장 잘 만든다는 대기업 CJ에서 만든 영화들은 철저하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베낀 짝퉁 영화들인데 대다수가 흥행 실패했다. 반면에 예전 같으면 충무로에서 소화했을 기획영화들이 지금은 독립영화로 만들어진다. 주류 영화계 내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갈수록 심해진다. 이 와중에 젊은 감독들의 상상력은 갈수록 왜소해지거나 겸손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주류 영화산업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이 산업의 미래가 오래 갈 것 같진 않다. 실은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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