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4월27일(수)맑음
<선불교는 상사도로 나아가야 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자각해탈, 자기완성이다. 그래서 선불교는 자기해탈을 지향하는 中士道(아라한 도)이다. 上士道가 아니다. 선을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일단 깨닫고 나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스스로 알게 된다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그건 그럴 거라는 믿음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엇을 위한 깨달음인가, 왜 깨달으려 하는가? 나의 깨달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깨달은 사람이 세상 사는 방식은 어떻게 다른가? 소위 깨달음을 향한 수행 이전에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만 그 수행이 진정성을 갖게 된다. 깨달았다면 깨달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도 세상 가운데서 세상 사람과 함께 하면서 말이다. 이런 까닭에 “應無所住 而生其心,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본심의 자리에서 마땅히 마음을 일으킨다.”라고 하였으니 깨달은 자는 깨달음 자리에 죽치고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활동을 해야한다. 보리심을 일으켜 보리행을 실천해야 한다. 깨달아서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얻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을 바란다면 그건 수행이 아니라 거래다. 그렇기에 선불교로 입문하여 깨달은 사람은 다시 상사도에 입문하여 보살도를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사도에 머물고 만다.
<연암 박지원의 유언과 정조의 개혁봉쇄>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영조13)~1805(순조5))은 죽을 때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因循姑息 苟且彌縫(인순고식 구차미봉. 인습을 못 벗어나서, 눈앞의 편안함만 쫓아서 땜질하는 태도). 천하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된다.” 연암은 청을 통해 전해진 서양의 문물에 영감을 받아 조선체제를 개혁하려는 계책을 마련하였으나 정조(正祖, 1752∼1800)의 개혁봉쇄정책으로 인해 뜻을 펴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와 교류하였던 개혁 선비들을 북학파, 혹은 백탑파라 한다. 그의 문집 <연암집>은 사후 95년 후에 간행되었으니, 아, 조선은 개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다. 계몽군주, 개혁군주로 잘못 알려진 정조는 유교적 절대군주를 지향했고 진보적 지식인들의 사상과 언론을 통제하여 개혁의 길을 막았다. 정조는 국왕으로서 조선의 체제를 개혁하여 자주적으로 근대화의 문을 열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문명의 문을 닫았으며 동시에 보수반동-세도정치라는 몰락의 문을 열었다. 조선의 망국은 정조로부터 시작되었다.
2022년4월28일(목)맑음
Forgiveness means giving up all hope for a better past. Forgiveness is a way to move on. Forgiveness is understood as a way to end suffering, to bring dignity and harmony to our life. Forgiveness is fundamentally for our own sake, for our own mental health. It is a way to let go of the pain we carry. -Jack Kornfield
용서란 더 잘했어야 했는데...라는 과거에 대한 모든 희망을 완전히 포기함을 의미한다. 용서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용서란 고통을 끝내고 삶에 고귀함과 조화를 가져오는 길이란 걸 이해해야 한다. 용서란 근본적으로 자신을 위하고,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고통을 끌고 다니는 일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잭 콘필드
Sangha should “have few desires and be content.” Being content implies that we have the ability to distinguish between what we desire and what we need. Often we think we need what we really do not. If we cannot tell the difference between desire and need, we will have a hard time being content.
-17th Karmapa Orgyen Thinley Dorje
승가는 소욕지족, 적게 욕망함으로써 자족함을 알라. 만족한다는 것은 우리가 욕망하는 것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걸 의미한다. 우리가 욕망과 욕구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자족하는 게 힘들 것이다.
-제17대 카르마파 오겐 틴레이 도르제
2022년4월29일(금)흐림
As Shantideva said, look upon yourself as a utensil and think:
I have offered my body to the Buddha, Dharma and Sangha.
May I be a guard for those who are protector-less.
A guide for those who journey on the road.
For those who wish to go across the water
May I be a boat, a raft, a bridge.
샨티데바 존자가 말씀하셨듯, 자신을 그릇으로 여기면서 생각하라.
나는 불, 법, 승 삼보께 내 몸을 바칩니다.
내가 보호자가 없는 사람들에게 보호자가 되고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안내자가 되며
물을 건너려 하는 사람들에게
배가 되고, 뗏목이 되고, 다리가 되기를!
하동 회문재숲길을 드라이브하고 섬진강변길을 걷다.
2022년4월30일(토)흐림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다.
되돌아오는 것은 오로지 극단적이고 과잉성을 띤 것, 다른 것으로 이행하면서 동일한 것으로 생성하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회귀는 힘의 의지의 변신과 가면들로 연출되는 연극적 세계를 통해 언명된다. 영원회귀가 언명되는 무대는 이 의지의 순수한 강도들이 드러나는 연극적 세계이다. 영원회귀는 존재의 일의성이며 그런 일의성의 실제적 실현이다. 영원회귀 한에서 일의적 존재는 단지 사우되고 긍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실현된다. 영원회귀의 바퀴는 차이에서 출발하여 반복을 산출하는 동시에 반복에서 출발하여 차이를 선별한다. -들뢰즈
첫댓글 우리가 욕망과 욕구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자족하는 게 힘들 것이다.!?
욕망 &욕구 ? 비교 설명 가능한가요? 부탁드립니다.._()_
욕망 . 욕구 . 넘치지 아니하고 .알맞게 쓰면 된다!?
욕구-요구=욕망. 욕구는 몸이 생존하고자 외치는 속삭임. 먹고 마시고 안정을 구하고 섹스하는 그 정도. 그 사회가 용인하는 한 최소한의 요구는 만족시켜줘야 한다.
요구는 나의 욕구를 타자(아빠, 엄마, 친구, 배우자 등)에게 말로서 달라고,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 자신의 요구를 상대가 알아듣게 말로서 조리있게 말하여 만족을 얻는 과정이 관계맺음이 아닌가?
욕망은 말로 다 드러내지 못하여 내면에 숨은 무의식적 욕구.나의 욕구는 타자의 시선으로 부터 숨기도 싶은 것도 있고, 자기도 모르게 변덕을 부리면서 충동적으로 작동하기에 '알아차리거나, 자각이 없는' 한 제멋대로 튀어나와 자기와 타인을 놀래키거나 해를 끼쳐 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다고 욕망을 억누른다면 내면의 그늘로 숨어서 망을 보다가 기회다 싶으면 바깥으로 투사하여 온갖 드라마를 연출한다. 억누른 것은 반드시 튀어나온다.
욕망을 리비도, 혹은 갈애, 渴愛라 한다. 자기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고, 어느 정도까지 만족하고 어느 선에서 그만둘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욕망 알아차리기. 자기절제 이것을 sila실라, 戒라고 한다. 보통 少欲知足이라 한다. 욕망을 적게 함으로써 만족함을 알라.
욕망을 적게 함으로써 만족함을 알라.
.욕망을 알아차리고 욕구를 줄여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_()_
마 하 반 야 바 라 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