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남(韓福男)은 본명이 한영순(韓榮淳)이다. 1919년 6월 25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평안남도
안주에서 일광 양복점을 운영하다가 1942년 이동연예대에 입단하여 연예계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6년 월남한 뒤 1947년 KPK악극단 무대에서 직접 작사·작곡한 「빈대떡 신사」와 「저무는 충무로」를
부르다가 이 노래들이 히트하자 1948년 취입하여 가수로 데뷔하였다.
1951년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온 뒤 생계를 위하여 양복점 재봉틀을 내다팔아야 할 큼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1·4 후퇴 후 부산 국제 시장에서 축음기 부속품과 유성기 바늘 장사로 모은 자금으로
지금의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에 방 한 칸을 마련하여 가족을 지켰다. 당시 국제 시장에 처음으로
녹음기가 선보였다. 한복남은 다양한 미국 제품 녹음기를 사들여 레코드 녹음에 활용하였다. 특유의
인화력으로 동회 사무실을 빌려 국제 시장에서 구입한 미군 담요와 쌀가마니로 벽을 막아 녹음실을
만들었다.
첫 취입 곡이 「홍콩 아가씨」[금사향 노래], 「물레방아 도는 내력」[박재홍 노래]이었다. 이 레코드를
악기점에 내다 팔면서 ‘도미도레코드사’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녹음 기술은 마련되었으나 녹음할 노래가
없었다. 한복남은 손노원의 「신라의 칼」, 「에레나가 된 순이」 등 두 편의 가사에 직접 곡을 붙여 녹음
하기도 하였다. 레코드 판매가 많아지면서 사업에 자신을 얻은 한복남은 「페루샤 왕자」, 「백마강」을
작곡하여 신인 가수 허민을 스타로 만들었다.
한복남의 신곡 발표와 신인 가수 허민의 열창이라는 「페루샤 왕자」의 선전 포스터가 부산 시내를 대중
가요의 세계로 몰아갔다. 이후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인 「처녀 뱃사공」, 「오동동 타령」 등을 황정자에게
부르게 하여 성공하였다. 금사향, 한정무, 손인호, 현인, 김정애, 황금심, 박재홍, 황정자, 남백송, 심연옥
등 1950년대를 대표하는 인기 가수들이 도미도레코드사를 통해 배출되었다. 그렇게 하여 「한 많은
대동강」에 이어 「불국사의 밤」, 「처녀 뱃사공」 등 600여 곡에 달하는 히트곡을 작곡하였다.
이어 「엽전 열닷 냥」, 「나그네 밤거리」 등은 직접 노래까지 불러 큰 인기를 얻었다.
한복남의 도미도레코드사가 세인의 주목을 받자 임정수는 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에 미도파레코드사를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는 지구레코드사로 발전하였다. 한편 한복남은 도미도레코드, 라라레코드, 아세아
레코드, 오아시스레코드 등에서 작곡가로 활동하였다. 1956년 대한레코드작가협회 창설 당시 경남지
부장을 지냈다. 1970년대 이후로는 공연과 방송 등에서 말년까지 활동하였다.
1991년 1월 26일 향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엽전 열닷냥
-한복남 -
대장군 잘 있거라 다시 보마 고향산천
과거보러 한양천리 떠나가는 나그네에
내 낭군 알성급제 천번만번 빌고 빌며
청노새 안장위에 실어 주던
아~ 엽전 열닷냥
어젯밤 잠자리에 청룡꿈을 꾸었더라
청노새야 흥겨워라 풍악따라 소리쳐라
금방에 이름걸고 금의환향 그날에는
무엇을 낭자에게 사서 가리아~ 엽전 열닷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