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빛, 그러나 늘 추억과 함께 오는 “가을볕은 금색이다. 도처에서 찬연하게 빛나고, 그 때문에 가을볕 아래서는 누구나 낙관적인 기분이 든다. 금색은 황금색의 준말이다. 황금은 태양을 품은 빛을 띤다. 태양은 세상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뿌린다. 어둠이 끝나고 빛이 세상을 두루 평등하게 덮으니, 만사가 형통하다. 예로부터 황금은 귀한 금속 중 하나였다. 가난하거나 비천한 신분에 속하는 사람은 가질 수 없다. 금색은 귀한 신분의 표상이고, 왕족과 부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금색은 방위로는 동남에 속하며, 해의 신성성을 품는다. 금색은 고진감래(苦盡甘來) 끝에 얻는 영광, 영혼의 풍요, 숨길 수 없는 진실성의 상징이다. 어른들은 일만 하고 시무룩한 얼굴로 어린 것들은 자라지만 종일 햇볕 바른 양지쪽에 장독대만 환했다. 진정 즐거울 것도 없는 구질구질한 살림 진정 고무신짝을 끌며 지루한 하루하루를 어린 것들은 보내지만 종일 장독대에는 햇볕만 환했다. 누구는 재미가 나서 사는 건가 누구는 낙(樂)을 바라고 사는 건가 살다 보니 사는 거지 그렁저렁 사는 거지. 그런 대로 해마다 장맛은 꿀보다 달다. 누가 알 건데, 그렁저렁 사는 대로 살맛도 씀씀하고 그렁저렁 사는 대로 아이들도 쓸모 있고 종일 햇볕 바른 장독대에 장맛은 꿀보다 달다. 어제가 그제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삶! 이 무미한 삶을 시인은 소박하고 담담하게 그려낸다. “누구는 재미가 나서 사는 건가/누구는 낙을 바라고 사는 건가”하는 구절에서 울컥해진다. 주색(酒色)을 탐하는 생활은 덧없고, 깨고 나면 그 흥취는 쓰디쓰다. 대개 장삼이사들은 부귀와 빈천의 불평등도 없고, 국가의 흥망에도 흔들림이 없는 평탄하고 무미한 삶을 산다. 욕심을 비우고 “그렁저렁 사는 거지”. 욕심을 비우니 어떤 수상한 악도 범접하지 못한다. 큰 즐거움이나 보람이 없기에 어둑한 어른들과 시무룩한 아이들뿐이다. 그나마 보람이 아주 없지는 않다. 쑥쑥 잘 자라는 아이들, 무병(無病)한 채 나이가 드는 어르신네들, 장독대에 무료로 쏟아지는 환한 햇볕들! 이게 무미함의 은덕들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금색으로 환하게 타오르는 가을볕이 좋으니 해마다 장맛은 혀에 달다. 반면에 살맛은 씀씀하다. 달디 단 장맛과 씀씀한 살맛은 극적인 대조 속에서 균형을 이룬다. 이 균형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우리 살림은 안락하다. 남은 반생은 이런 마을에서 보내고 싶다! 내 인생의 고비에서 잠시 금색의 찬연한 빛이 깃든 때가 있었다. 가파른 이십 대를 넘어서자마자 믿을 수 없는 행운이 내 생의 앞날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잘 자라고, 수영으로 다져진 건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고, 이른 나이에 겁도 없이 시작한 출판사는 번성했다. 직선 주로를 선두로 내닫는 경주마와 같이 거칠 것 없던 시절이다. 휴일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야구장을 다녀오거나, 아이들과 함께 공중목욕탕을 다녀온 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다가 낮잠을 잤다. 내 생에 끈덕지게 달라붙던 불운과 나쁜 징조들은 사라진 듯 보였다. 내 안에서 타오르던 딱히 대상이 없는 맹렬한 적의와 분노도 어느덧 잠들었다. “낮잠을 깨고 나니 / 슬픔이 없는 것도 속수무책이군 / 비가 내리는데 / 눈썹을 적시며 내리는데 // 서른 살을 넘고 나니 / 옛사랑의 얼굴도 희미해지는군 / 꿈은 빠르고 현실은 더딘 것을 / 깨닫고 / 쓸데없는 희망들을 끊고 나니 / 아아, 편하군 / 이렇게 // 단순하게 / 비가 내리는데 / 눈썹을 적시며 내리는데 / 변두리에 싼 땅이나 몇 평 사둘까 / 오늘은 근사하게 낮술이나 마셔볼까” (졸시, 「서른 살의 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치질과 건망증과 불면증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돈 워리, 비 해피. ‘출판단지’는 작은 출판사들의 요람이고, 출판과 물류의 실체적인 거점이었다. 돌이켜 보면 출판단지가 있던 자리는 번성하는 기운이 충만한 땅이 분명했다. 출판단지라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힘을 키우고 뼈대를 세운 출판사들은 나중에 덩치가 커져 대개는 번듯한 사옥(社屋)을 마련하여 떠났다. 출판단지에 들어설 때마다 경건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래서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바른 자세로 걸음을 옮기곤 했었다. 왜 그랬을까. 존경하는 출판계의 선배들이 있는 그곳은 내게 일종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범접할 수 없는 권능과 위엄이 그들에게서 오로라처럼 뻗어 나왔다. 나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 시절 나는 분명히 예의바른 젊은이였다. “죽음이란 감각적 인상과, 충동에 의한 조종과, 마음의 방황과, 육신에 대한 봉사로부터의 휴식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렇다 하더라도 혈연과 지인의 죽음은 세상을 쓸쓸하게 만든다. 몇 달 전 인사동에서 우연히 마주친 김병익 선생은 중절모에 단장을 짚고 계셨다. 흠, 멋쟁이 노인이군, 하고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출판단지 시절만 해도 젊었던 김병익 선생은 어느덧 머리가 허연 칠순에 이르셔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 『나는 문학이다』, 『일상의 인문학』, 『느림과 비움의 미학』 등의 저서가 있다. 웹진 Switch SHINHAN BANK |
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