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4년 가해 5월10일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청주] 포기할 수 없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사도 9, 31 - 42
† 복음 : 6, 60ㄴ - 69
★ 베드로는 중풍에 걸려 팔 년 동안 누워 지내던 애네아스를 치유해 주고,
선행과 자선을 많이 베풀고 죽은 여제자 타비타도 살린다. 이러한 일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된다(제1독서).
★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군중은 물론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거부감을 드러내며 떠나는 자들이 많았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도
떠나고 싶은지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대표하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는
주님을 떠날 수 없다고 고백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영원한 생명의 말씀'에 관한 오늘의 복음으로 요한 복음 6장의 묵상을 마치며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거듭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은,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의 기대와 고정 관념을 훨씬 뛰어넘는 표징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철저히 인간적 욕망과 기대 안에서 빵의 표징을 이해하였고,
그러한 관점을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바람을 단절시키시려는
예수님의 뜻을 감지할 때마다 노골적인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이제 그들이 바라는 표징과 예수님의 표징이 더 이상 양립할 수 없음이
명백해집니다. 군중은 계시 앞에 선 것이고, 계시는 각자의 신앙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육적 관점이 영적인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은 계시를 온전히
자신의 고유한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복음은
암시합니다.
복음은 이렇게 전해 줍니다.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에 우리 역시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 속에 그저 익명으로 자리한다면,
그 안에서 아무런 성찰도 없이 피상적으로 계시 말씀을 대한다면 결코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런
표징을 보지 못한 셈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이라는 익명의
피상성에 머무는 대신 자신의 존재 자체를 찾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발걸음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그는 '양심의 부름'에 대한 결단성
있는 따름과 진정한 선택에서만 삶의 의미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예수님의 계시가 던지는 질문에 응답하는 결단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응답을 그 누구도 우리 자신을 위하여 대신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포기할 수 없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5월10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요한 6,60-69)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요한 6,60ㄴ-69
포기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전혀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도 않는 소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기대를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데 전혀 다른 소리를 하면 속이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갖게 됩니다. 누구든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으로 얘기하면 신이 나고 기분 좋아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못마땅해 하고 담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큰 사람은 자기의 기대를
뛰어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거기서 깨우침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듣기에 거북해 하였습니다.
모르면 스승의 가르침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그렇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들 비위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어른 신부님들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본당의 책임을 맡으면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3분의 1이라도 되면 성공이라네. 3분의 1은 관망하는 사람이고
또 3분의1은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그러니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하게.”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니고 사는 신부야 오죽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이 말씀은 결국 ‘떠날 테면 떠나라. 잡지 않겠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던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9)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겠습니다. 너도 떠나겠느냐?
아닙니다. 당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따르다 보면
당신을 알게 되리라 확신하며 그저 따르겠습니다. 훗날 당신을 등질지
모르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당신이 나의 전부입니다.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느끼기까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기적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살과 피를 내 주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당신의 몸을 생명으로 주시지만 합당하게 모시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지금 포기하면 당신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기에 당신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 저희가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2014년 가해 5월10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요한 6,60ㄴ-69
어떤 회의에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어떤 분이 “저분의 생각은 제 생각과
틀립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맞는 표현일까요? ‘틀립니다.’라는 단어가 아닌,
‘다릅니다.’라는 단어를 써야 맞겠지요.
‘틀리다’라는 말은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다르다’라는 말은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틀리다’라는 말에는 어떤 가치 판단이 들어 있지만, ‘다르다’라는
말은 단순히 ‘다름’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실수를 종종 합니다.
물론 국어를 잘못 배워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은연중에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자기 내면에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를 담당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자기편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또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는 것
같다면 아주 자그마한 이유라도 붙여서 그 곁을 떠나려고 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오늘 복음을 보니 이천년 전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지요. 하지만 사실은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떠나겠다는 결심을 했기에 작은
한 가지로도 충분히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신 진리는 듣기 거북한 것이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부귀영화와는 동떨어진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떠나려는 이들에게 무조건
머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의 숫자가 아니라 그들의
성실함이었으니까요.
베드로는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는 주님의 물음에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자신들의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과연 있을 수 있냐는 뜻이지요. 이는 주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주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따르고 싶고, 어떤 때에는 죄라고 말하더라도 세상의 화려함을
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이지요.
그리고 이때 우리들은 아주 작은 이유라도 붙여서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곤
합니다. 마치 이천년 전에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예수님을
떠났던 제자들처럼 말이지요.
저 역시 한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으로 자주 주님을 떠났었음을 반성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의 고백을 본받아서 이렇게 힘주어 고백해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그러나 부족한 저희가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믿음은 걱정이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고 걱정은 믿음이 시작하는 곳에서
끝난다(조지 뮬러).
다름을 인정하는 방법
다름을 인정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 중 하나는 바로 귀를 열어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두 개이지요. 말하기보다 듣기를 즐기라는
하느님의 배려이고 뜻인 것입니다. 남의 말을 잘 들으면 어떨까요? 상대를
이해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또한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결국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아서 좋습니다.
귀를 열어두는 삶.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입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로 만드셨음을 기억하면서 말하기보다 듣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분명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의 특징은 말씀과 머물기를 거북해하는 것
2014년 가해 5월10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복음 : 요한 6,60ㄴ-69
<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의 특징은 말씀과 머물기를 거북해하는 것 >
한 신사가 꽃가게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멀리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꽃다발을
보내 달라고 주문을 할 참이었습니다. 신사는 가게로 들어가려다 말고 한
소녀가 길가에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신사는 소녀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아니, 얘야. 왜 여기서 울고 있니?”
소녀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엄마한테 드릴 장미 한 송이를 사고 싶은데, 돈이 모자라요.”
신사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
신사는 소녀의 손을 잡고 꽃가게로 들어가 어머니에게 보낼 꽃다발을 주문한
뒤 소녀에게 장미 한 송이를 사 주었습니다. 소녀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습니다. 가게를 나오면서 신사는 소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정말 데려다 주실 거예요?”
“그럼.”
“그럼, 엄마한테 데려다 주세요. 저... 아저씨, 그런데 엄마 있는 곳이 좀
멀거든요...”
“하하, 이거 내가 너를 괜히 태웠구나.”
신사는 소녀가 안내하는 대로 차를 몰았습니다. 한참을 달려 시내 큰길을
빠져나가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간 곳은 뜻밖에도 공동묘지였습니다. 소녀는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덤가에 꽃을 내려놓았습니다. 한 달 전 돌아가신
엄마 무덤에 장미 한 송이를 바치려고 먼길을 달려왔던 것입니다.
신사는 아이를 집까지 바래다 준 뒤 꽃가게로 돌아가 어머니께 보내기로 한
꽃을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꽃을 한아름 산 뒤 다섯 시간이나 떨어진 어머니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1, 장미 한 송이]
저도 어제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과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조금 일찍
끝났지만 피곤해서 빨리 집에 오고 싶은 마음에 부모님을 내려드리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조금 더 함께 있어 드릴 걸...’ 하는 마음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좋다면, 사랑한다면 함께 머무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거슬려 떠나가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도 끝까지 남아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성체성혈의 신비에 대해 말씀하시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설명해 주셨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거북해 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거북해서는 안 됩니다. 꿀과 같이 달아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배를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그것을
먹으니 입에 꿀처럼 달았다고 합니다(에제 3,3). 요한에게도 천사에게서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는데 입에는 꿀처럼 달았다고 합니다(계시 10,10).
즉 말씀은 꿀같이 단 것입니다. 그 안에 진리의 단 맛이 있고, 그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 복음에서 대부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다 떠나가게 된 것일까요?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육적’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는 관심도
받아들이려고 하는 마음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표징은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과 결합된 것입니다. 표징은 사실 더 완전해지면
성사라고 하는데,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전한 표징이요 성사가 바로
‘성체’입니다. 성체는 육적으로는 밀떡입니다. 그 밀떡만 보는 이들에게는
성체가 빵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육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성체, 즉 구원을
두고도 오려고 하지도 않고 왔다가도 떠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성찬의 전례 앞에 항상 말씀의 전례가 앞섭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가슴이
뜨거워져야 더 영적인 사람이 되어서 그 밀떡 안에 있는 영적인 면, 즉
그리스도의 존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성경을 가슴 뜨겁게 풀이해 준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흥미가 없다면 이미 그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고 그래서 성체를 영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보다는 밀떡을 영해 그에게 아무런 이득도 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내가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보면 됩니다. 말씀이 꿀처럼 달아서 하루라도 말씀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구원을 확신해도
좋습니다. 이미 영적인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 거북하고 어려워서 누구에게 강요받지 않는 이상 억지로 말씀을
찾아 읽고 묵상하고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내 자신이 육적인 인간이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육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에 맛 들여야 합니다.
처음 무엇에 맛 들인다는 것은 조금은 고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오늘 예수님을 떠나간 사람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오늘 복음의
사도들처럼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그 분 안에 진리가 있음을 믿고 끝까지
참고 ‘머물려는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서울] 부활 제3주간 토요일
2014년 가해 5월10일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요한 6,60ㄴ-69
지난 성주간 수요일에 ‘세월호’ 사고가 있었습니다. 어느덧 사고 발생 24일이
되었습니다. 사고의 현장에서 구조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죽은 몸이 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분들이 있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1000여 명에 달했던
실종자 가족들은 많이 떠났고, 지금 사고 현장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기다리는 분들이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 분들을 위해서 매일 미사를 함께
하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남아 있는 분들을 위해서 아직도 차가운 물속으로
들어가는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남아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제 점차 세월호의 소식들은 신문과 방송에서도 적게 보도 될
것입니다. 사람들도 일상의 삶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도 떠나겠습니까?’
예수님에게 세상의 것들을 원했던 사람들은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권력을 얻으려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재물을 얻으려 했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말을 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두고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을 통해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음을
새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랐던 베드로는,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무서워 떨었지만 다시금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훌륭하게 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을 치유하고, 죽은
사람까지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그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립니다.
슬픔 중에 있는 실종자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방송과 언론도 그들을 떠날
것입니다. 뉴스의 중요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찾았던 정치인들도
떠날 것입니다. 곧 선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란 리본을 함께 달고 슬픔을
나누었던 분들도 떠날 것입니다. 각자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쩌면 그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떠날 것입니까?’ 사고의 원인이 규명 될 때까지, 국가의
배상과 회사의 보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커다란 상처가 아물 때까지 어쩌면
우리가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2014년 가해 5월 10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한 줄 복음 묵상)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4년 가해 5월 10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한 줄 복음묵상
'Choose what is the best for life.
That is the gospel.'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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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最善)을 선택하십시오.
그것이 복음입니다.
生にあって最も善いものを選んでください。
それが福音です。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영적(靈的)인 사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5월10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사도9,31-42 요한6,60ㄴ-69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요한 6,60ㄴ-69
영적(靈的)인 사람
오늘 말씀 중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중심으로 '영적인 사람'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베드로는 영적인 사람의 전형입니다.
어제는 산 좋은 진안(鎭安)에 있는 꽃동산을 방문했습니다.
궂이 찾아가기 보다는 주어진 기회에 순응하는 차원에서의 방문입니다.
완전히 산으로 에워싸여진 계곡이 완전히 개조된 모습이었습니다.
원래의 산에 있던 나무는 거의 없고 꽃잔디에 새롭게 심어 자라난
나무들이었습니다. 10년 넘게 조성되었다는 꽃동산으로 어마어마한
돈이 투입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영혼 없는 사람!‘
순간 떠오른 생각입니다. 외관상 찬란하고 눈부신 5월 신록에다 꽃들 가득한
산 계곡이지만 웬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영혼 없는 화려한 인위적이고 육적인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순교성지를 방문했을 때의 충만한 느낌과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입니다.
순교성인들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영적인 사람을 상징하는 영적인 땅,
순교성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다음 대목에서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이 극명하게 갈림을
봅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6,66).
주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투털대던 육적인 제자들은 다 떠나고 베드로를
위시하여 영적인 제자들만 남은 셈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다음 말씀을 영혼 깊이 깨달았음이 분명합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육의 거부라기 보다는 영의 강조입니다. 영은 생명을 줍니다. 영이며 생명인
주님 말씀과 일치의 정도가 영적인 삶의 판별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보다는 돈 중심의 육적 삶에 치우치다 보니 영적인 안목을
상실해 가는 현대인들입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주님은 열두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묻습니다. 주님을 떠나 육적인
삶을 살 것이냐 주님과 함께 영적인 삶을 살 것이냐 묻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대변한 베드로의 답변이 통쾌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말고 찾아 갈 분은, 찾아 갈 곳은 세상 아무데도 없습니다.
베드로의 선택이 옳고 탁월했음은 사도행전 1독서에서 그대로 입증됩니다.
주님이자 스승이신 주님의 영성을 온통 전수 받은 베드로의 눈부신
활약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된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기적들입니다.
먼저 중풍에 걸려 팔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던 애네아스에게 일어난
기적입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납니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육으로 부활한 애네아스입니다.
이어 베드로는 타비타의 죽음으로 울며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을 향해 명령합니다.
"타비타, 일어나시오.“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 난 도르카스를 보여 줍니다.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통한 기적입니다.
베드로 같은 영적인 사람만이 부활하신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매일 주님의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영적인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시편116,12-13).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믿음의 시련[단상]
2014년 가해 부활 제3주간 토요일(2014년 5월 10일)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요한 6,60ㄴ-69
믿음의 시련
우리는 우리 귀에 좋은 말만 들으려 합니다. 좋은 말은 달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 달콤하지는 않습니다. 만만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 말이 그대들을 걸려넘어지게 합니까? 그대들도 떠나가고 싶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실제로 많은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걸려 넘어져 떠나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는 매일매일 큰 도전이며 산과 같은 걸림돌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여정에서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세월호
참사처럼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를 통해 주님은 어떤 말씀을 해 주시는
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경우가 참 많습니다. 믿음의 시련을 겪습니다.
그럴 때마다 베드로 사도가 답한 것처럼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떠나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고
고백합시다. 이것이 시련 가운데서도 지켜야 할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 마음에 살아갈 희망을 선물하고, 이 희망은 주님과 우리 삶을
참으로 사랑하도록 이끕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수사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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