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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포엠> 아름다운 노래, 금하의 노래
<시네포엠>
영상 시조극
아름다운 노래, 금하의 노래
박구하(시조시인)
<프롤로그>
"가곡은 그 선율이 높이 솟아올라 세계에서 위대한 칸타타 오페라 음악 중에 끼이고, 몬테
베르디 이상의 것으로 숭엄하고 아름다운 천악(天樂)이다."
이는 미국의 작곡가 알렌 호바네스가 '한국음악의 인상'에서 한 말이다. 외국인이 우리 전
통 가곡에 대하여 이 정도로 통찰하고 찬미한 것을 보면 우리 가곡이 얼마나 뛰어나고 소중
한 것인지 절감할 수 있다. 새삼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있음을 부끄러워해
야 할 판이다.
우리 전통음악에는 악가무(樂歌舞)가 있다. 가악중 정가(正歌)는 인간이 내는 소리로서는
가장 균제되고, 화평정대한 중용(中庸)의 소리, 정명(精明)한 혼의 소리이다. 정가는 우리 민
족의 고유한 전통시인 시조에 우리의 전통 오음계(황종, 태주, 중여, 임종, 남여)를 사용하여
5장 형식의 곡을 붙여 만들어낸 명작이다. 대체로 이 정가는 조선조 중기 이후에 완성된 것
으로 시조의 내용에 따라 곡조를 붙인 것으로 작곡자가 알려지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여기
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이 훌륭한 문화유산도 아무런 수고로움이 없이 그냥 유산으로
물려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말 그 정가를 외로운 환경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온전히 전
해주고 가르쳐준 금하(琴下) 하규일(1863-1937) 선생이 없었더라면 올바른 정가의 맥은 영
영 이 땅에서 끊어졌을 지도 모른다.
지금 우면동 국립국악원 뒷뜰에 금하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카메라는 이 동상을 클
로즈업하면서 이 시네포엠을 시작한다.(여기 나오는 시조는 창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옛 표
기에 따르고 구음(口音)위주로 표기함)
#1. 서울 우면동 국립국악원 뒷뜰
(예술의 전당앞 사람과 차들로 혼잡한 10차선 대로를 가로질러 카메라는 국립국악원의 어둑
한 계단을 올라 우면당 뒷뜰로 간다. 동상 몇 점이 늘어서 있다. 신재효 동상을 지나 이윽고
금하 선생의 동상 앞에 멎는다.)
때마침 국악원에서는 고가(古歌)의 선가수(善歌手) 하규일의 기념공연이 열리고 있다. (카
메라는 금하 동상을 한바퀴 돌면서 다음 회고담이 끝날 때쯤 우면당안 공연장으로 간다)
"... 선생님의 성음은 그야말로 굵은 대롱에서 폭포가 쏟아지는 듯 우람하고 힘차, 이 세상
어디에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부드러운 소리, 보드라운 소리,
여리고 나긋한 소리.... 노래의 사의(詞意)와 음조에 따라 비록 천변만화는 아니더라도 정대
한 가곡의 체통에 걸맞는 자유롭고 자재로운 표출이 실로 다양하였다..."
원로국악인 성경린(88세)선생의 낮으나 또박또박한 회고담이 끝나면 금하 선생 생시에 녹
음한 가곡창(歌曲唱) 편락(編樂)이 스피커를 통해 흐른다.
"나무도 바희 돌도 없는 뫼에 매게 휘좇긴 가톨의 안과
대천(大川) 바다 한가운데 일천석 실은 배에
노도 잃고 닻도 끊고 용총(龍 )도 걷고 키도 빠지고
바람 불어 물결치고 안개 뒤섯겨 잦아진 날에
갈 길은 천리만리 남고 사면이 검어 어둑 저뭇 천지
적막 까치놀 떴는데 수적 만난 도사공의 안과
엊그제 임 여읜 나의 안이사 엇다가 가흘 허리오"
(반우반계 "편락" 전문)
#2 우면당안 공연장
금하 가곡의 맥을 잇는 인간문화재 후보 우봉 이동규가 우조(羽調) 초삭대엽(初數大葉)을
부르고 있다. 삼현육각에 단소잽이가 합석하여 반주를 맡은 앞자리에 노란 관복에 사모를
쓰고 단좌한 그의 모습은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다.
(초장) 동차앙이이이이이 바알가아 안느으으으냐
(2장) 노고지리 우지지인다
(3장) 소오치이는 아흐이 노믄 사앙그이 아니 일었느냐
(4장) 자이 너머
(5장) 사라이 기인 바틀 언저이 가알려 하느냐
(남창 평조, 초삭대엽)
첫음, 중여음을 질러내는 우람한 소리가 만장한 고요를 찢으며 객석의 눈들을 단숨에 사로
잡고 청중을 저 조선 중기의 한적한 농가, 단아한 선비의 사랑방으로 안내한다. 중여음(仲呂
音: sol)이 유장하게 이어지다가 갑자기 여울을 만난 듯 꿈틀 용트림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
새 뒷목으로 끌어낸 남여음( 呂音: do)에서 태주(太嗾: fa)로 솟구쳐 올라 마치 물에 빠진
태양을 건져내듯 육중한 성음으로 고지를 점령하고 천군만마를 호령하다 다시 기본음인 황
종(黃鐘: mi)으로 돌아와 굵게 떨다가 급박하게 끊는다. 여기까지가 초장 30박이다.
잠시 2박을 쉬고 호흡을 가다듬어 뇌성벽력이 내려치듯 청황종음(淸黃鐘: 높은 mi)으로 질
러내는 2장에서 청중은 느닷없이 정수리를 얻어맞은 듯 어질어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어느
결에 소리는 임종(林鐘: si)으로 급히 떨어지면서 경직된 마음을 다독이며 스르르 풀어 내린
다. 여기까지 25박.
3장에서 평화로운 소리가 이어지려나 싶었는데 창자는 다시 벽력같은 소리를 질러 조급히
흩어진 마음을 당겼다 놓았다 하면서 이어지다가 별안간 끌어내려 황종에서 묵직하게 흔들
다가 탁임종(濁林鐘: 낮은 si)으로 턱 놓아버린다.
이렇게 36박의 3장이 끝나면 지금까지 뒤따라오던 기악이 일제히 나서서 중여음(中餘音)을
간주(16박자)한다. 그 동안 충분히 숨을 가다듬은 창자(唱者)는 4장 "재 너머" 대목에서 무
려 25박자를 한 두 호흡에 질러내는데 그 소리는 우렁차게 시작하여 차츰 가늘게 쭉 뻗어나
가다 끝부분에서 가볍게 떨면서 약간 반음정을 밀어 올리다가 고개마루에서 미끄러지듯 사
뿐히 꺾어 자연스럽게 풀어 내리는데 듣는 이는 이 모든 과정을 꿈결에서 천상의 소리를 듣
는 듯 착각할 정도가 된다.
이윽고 긴 여정의 마무리가 5장에 이어진다. 지금까지의 모든 고행과 희로애락을 반추하면
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내성의 소리가 낮게 낮게 이어진다. 자문자답하듯 고개를 끄떡
이다 웅얼웅얼 웅어리를 풀어내며 어느 새 소리는 지상을 맴돌다가 허공으로 스며들듯 사라
진다. 여기까지 41박 지금까지 소리 뒤를 쭉 따라오던 반주음악도 일시에 멎는다. 갑자기 천
지는 정지하고 잠시 진공의 여운만 남는다.
#3 서울 인왕산 밑 하중곤의 집
당대 명창, 하중곤! 박효관과 쌍벽을 이룬 대가로 가곡은 물론 12가사 및 시조창에 통달하
여 선가(善歌)로 가명을 떨치던 하중곤은 선생의 친삼촌이었다. 선생은 19세가 되어서야 가
곡에 뜻을 두고 남몰래 공부를 하였는데 그 소문이 삼촌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너, 노래 배운다던데 어디 내 앞에서 한번 해 봐라."
대뜸 삼촌에게 덜미를 잡혀 당황하였으나 선생은 체소담대의 성격대로 우조 첫치(초삭대
엽)를 부른다.
"남훈전(南薰殿) 달 밝은 밤에 팔원팔개(八元八凱) 다리시고
오현금탄(五絃琴彈) 일성(一聲)에 해오민지온(解吾民之溫)회로다
우리도 성주 뫼옵고 동락태평 허리라" (남창 평조, 초삭대엽)
당대의 명창은 다 듣고 난 다음 얼굴을 찌푸리며,
"헛수고야, 헛수고. 자고로 일청이조(一淸二調)라고 했느니 잡가도 그렇겠지만 고상한 노래
는 첫째 목이 좋아야 하는 법이야. 타고난 좋은 목에 무한한 공정이지 목이 좋지 않으면 아
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으니 아예 포기하거라"
노래로 대성하리라 꿈을 꾸던 소년에게 삼촌의 이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무너지는 어
깨를 추스르며 소년은 대들 듯 돌아서는 삼촌에게 되물었다.
"도저히 안되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얼마나 노력하면 되겠습니까?"
숙부는 측은한 듯 마지못해,
"글쎄 남이 일독하면 백독, 천독이나 해야 따라갈까?"
소년은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입만 굳게 다물었다.
#4 토혈과 폭포 밑, 독공 이십년
삼촌으로부터 혹독한 평을 받고도 노래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오기에 찬 소년은 당대의
명창 박효관, 최수보, 그들의 제자 등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소리를 배운다. 가곡에 대한
그지없는 동경과 뜨거운 애착과 집념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아니, 청년은 천생으로 그 목을
타고나지 못한 것을 한하며 숱한 회의와 좌절에 빠지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하고 목이 터져
라 부르고 부른다. 결국 심한 통증과 함께 붉은 선혈을 토해냈다. 피가 멎자 비로소 가라앉
은 목에서는 명주 같은 아름다운 성음이 무슨 실꾸러미처럼 풀려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
나 그것도 잠깐 목은 다시 잠겼고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절망 속에 목이 부었다가 터지고
다시 응고된 성혈을 토하기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선생의 목은 금강석처럼 굳어져 갔다.
난공불락 높은 성채 필마로 달려드니
고지가 눈앞인데 닿을 듯 아니 닿네
피칠갑 목이 부러져도 뽑은 칼을 어쩌리
#5 서울 수송동 율방, 송병준의 집
당대의 세도가 송병준은 풍류를 사랑하고 선비를 우대하였다. 당대의 재력가이며 풍류에
뜻이 있는 선비로서 홍긍섭, 한석진, 조이순 등이 송병준의 집에 모여 사죽잽이들을 불러 시
조창을 돌아가며 부른다.
엊그제 벤 솔이 낙락장송 아니런가
적은 덧 두던들 동량재 되리려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 낢이 버티랴
모두 한 수씩 돌아가며 읊은 후에 주안상을 받고 좌정하여 일제의 침탈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과 어지러운 시국담을 주고받다가 이럴 때일수록 우리 소리중 정악과 정가의 보존유지
의 필요성을 거론하고 조선 정악전습소를 만들자는 논의를 한다.
#6 남산과 서울 장안
1910년 치욕의 한일합방, 선생은 진안군수직을 끝으로 관직을 버렸다. 남산에 혼자 올라 수
연히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며 시조 한 수를 읊는다.
우연히 잠두(蠶頭)에 올라 장안을 굽어보니
고전(古殿)은 견폐(堅閉)하고 신옥(新屋)은 층기(層起)로다
다시금 성은을 생각하니 수루불각(垂淚不覺)하여라
관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에 전념하는데 여악분교 교재를 만들기 위해 <악학궤
범>3책을 등인하고 남창. 여창 소리를 일일이 육필로 정간보(井間譜)에 채보하였다. 이것이
우리 정가의 악보화의 최초이다. 이 정간보는 뒤에 제자 이주환에게 전습되어 오늘의 정가
악보가 된다. 다음 가곡창의 정간보를 배경으로 이주환 선생의 노래가 은은히 울려나온다.
" 청석령 지나거다 초하구(草河衢) 어드메오
호풍(胡風)도 차디 찰사 궂은 비는 무삼일고
뉘라서 내 행색 그려다가 님계신데 드리리 (남창 계면, 초삭대엽)
#7 내자동(현 정부청사 건물터), 조선 정악전습소
1911년 10월 어느 날. 오늘은 조선 정악전습소가 개소된 지 반년만에 선생이 학감(學監)으
로 초빙된 첫 부임일, 소장 한석진은 흐뭇한 표정으로 선생을 소개한다.
"우리 전습소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가악을 유지하며 시의에 적응할 사율(詞律)도 이를 증
보하여 사람의 전진하는 용기를 고발(鼓發)하여 교제하는 심정을 창달케 함이 목적인데 오
늘은 정가의 대가이신 금하 선생을 맞이하여 우리 전습소는 명실공히 전과정에 걸쳐 우수한
교사를 확보하게 되어 무한히 기쁩니다. 우리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요부와 음악부의
2부를 두고 이습과와 교수과 둘로 나누어 교습할 것입니다. 학감 금하 선생은 본소의 가요
부와 앞으로 상다동에 부설할 여악 분교실장을 맡아주실 것입니다...
당시교수진은 선생이외에 생황 한진구, 남녀창에 하순일, 이영환, 거문고 김경남, 조이순,
가야금 명완벽, 함화진, 한규우, 양금 백용진, 김상순, 단소 이춘우, 조동석, 서양악과 김인식
등이었다. 개강하면서 남창 가곡 초보곡인 우편(羽編)을 가르친다.
"봉황대상봉황유(鳳凰臺上鳳凰遊)러니 봉거대공강자류(鳳去臺空江自流)로다
오궁화초매유경(五宮花草埋幽逕)이요 진대의관성고구(晉代衣冠城固邱)라
삼산반락청천외(三山半落靑天外)요 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洲)로다
총위부운능폐일(總爲浮雲能蔽日)허니 장안(長安)을 불견(不見) 사인수(使人愁)를 허더라"
(남창 평조, 羽編 전문)
#8 다동 큰 기와집, 여악분교실
아침 10시. 아침 햇살이 장짓문을 비집고 힘차게 들어온다. 이난향(14세) 등 내제자 20여명
과 외제자 10여명이 앉아 선생을 기다린다. 선생은 옥색 두루마기를 입고 느지막이 교습실
로 들어와 좌중을 휙 둘러본 후 말없이 장고를 잡는다. 향도의 구령에 맞추어 인사를 받고
나자 선생은 조용히 입을 연다.
"오늘은 소리내는 법에 대해서 공부하겠다. 노래는 맑고 고운 목으로 한아하고 여유 있게
부르다가 장단에 따라 속목(서양음악의 falsetto에 해당), 겉목, 꺾는 목, 조르는 목, 풀어내
리는 목, 뜨는 목 등 오묘한 목을 잘 조화시켜 불러야 한다. 그 중에도 요성(搖聲)이 없는
것이 노래목의 특징이요 노래자체의 체계이다. 노래목을 쓰는 법은 두 손을 번갈아 가며 장
단에 맞춰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손을 옆으로 흔들면 안 된다. 노래는 손의 동작에 따라 부
르게 되므로 손을 옆으로 흔들면 목도 제멋대로 흔들어져서 군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손장단을 무겁게 상하로만 올렸다 내려야 한다. 예를 들면, 시조의 초장 "청산리"에서
"리"자를 부를 때, 시조목의 특징인 치는 목, 출렁이는 목, 가닥 흥을 돋굴 수 있는 군목과,
잡가목의 특징인 굴려 흔드는 방울목, 목이 가는 대로 쓸 수 있는 흥겨운 목, 노래가락에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의 "세"자를 부를 때 목이 써지는 대로 마음껏 흔들어 굴리는 방울
목, 던져서 뿌리는 목 같은 가외목을 쓰면 노래가 제대로 아니 된다..."
#8-1 여창 이삭대엽 수업시간, 다동조합
오늘부터 여창가곡의 기본이 되는 긴 것, "버들은"을 배우기로 한다. 선생의 시창(示唱).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구십삼춘(九十三春)에 짜내느니 나의 시름
누구서 녹음방초를 승화시라 허든고" (여창 우조, 二數大葉)
선생의 소리는 남성임에도 속목을 자유자재로 써서 가늘고 질긴 명주실을 뽑아내듯 단련된
목으로 학이 춤을 추듯 넘실대며 때로는 두부모를 베듯 꺾어 넘기다가 예리한 칼끝처럼 목
을 꺾어 풀어내리니 온 방안이 쥐죽은 듯 고요하다. 다시 강의가 이어진다.
"이삭대엽 '버들은'(모두 11박)을 처음부터 청정한 소리로 긴 장단에 맞추어 불러 목소리를
조르다가 제3박에서 높은 음인 태주음을 그대로 속목으로 단전에 힘을 주어 뽑아내고, 속목
이 나오면 그 속목을 다시 졸라서(서양음악의 vibrato 식으로) 그대로 그 속목을 톡 채어 올
렸다가 내리면 제4박의 음높이가 정확하고 맑은 두성(頭聲)이 합쳐져 나오는데 이 때 비로
소 노래목이 나왔다고 하는 것이다.
"2장 4박 황종에서 겉목을 졸라서 바늘끝 같이 뽀쪽하게 톡 쏘는 듯한 예리한 (마치 말초
신경에서 나오는 듯한) 속목을 냈다가 서서히 명주실 꾸러미를 풀어 내리듯 내리고 4째박
중여에서 6째박 태주로 진행, 7째박 남여에서 장단을 놓을 때 마치 서양음악의 스타카토 식
으로 끊는 듯이 사뿐히 목을 놓아야 한다. 또, 뜨는목이 있는데 속목으로 깊이 뜰수록 노래
의 조화가 오묘해진다.
#9 동관 대궐, 이왕직 아악부
5척 단구에 가죽 반구두를 신은 초로의 유생차림이 인력거를 내린다. 일주일에 두 번씩 인
력거를 타고 다동에서 이왕직 아악부가 있는 동관 대궐 앞까지 출근하는 금하 선생이다. 인
력거에서 내려 잠시 사무실에 들렀다가 바로 가곡방으로 간다. 8, 9평 남짓한 방에서 매기
(每期)마다 4년간 교습을 받는 학생들이 빙 둘러앉아 있다.
"오늘은 숨쉬는 법에 대하여 말하겠다. 숨은 길수록 좋다. 숨을 길게 늘이려면 단전에 힘을
주어 속목을 뽑아내어야 하는데 숨의 길이를 키우는 요령은 그 속목으로 많은 연습을 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 가곡에서 가장 숨이 긴 대목은 이삭(수)대엽의 4장 2두(頭) 5째박(拍)에
서 동 14박까지 10박인데 만약 이를 단숨에 부르는 것이 어려우면 2두 9째 박을 짚고 몰래
잠깐 숨을(이를 '도둑숨'이라 함) 쉬고 곱게 이어나가야 한다. 도둑숨도 아무 데서나 쉬어서
는 안 된다. 숨을 아무 데서나 쉬면 마치 새 옷을 잡아 기워 붙인 것 같이 흉하고 노래가
흩어져서 점잖은 멋이 없어진다. 다시 말하면 가락이 틀어지고 노래 감정이 쭉 뻗을 때 가
서도 뻗어나가지 못하고 힘이 약해져 음정이 떨어지므로 노래의 흥취를 잃게 된다. 책을 읽
을 때도 콤마와 피리어드를 분명히 해야 하듯 노래에는 숨 쉴 때와 멈추는 호흡이 가장 중
요한 것이다..."
수업생 중에는 훗날의 명창 이병성과 국악이론가 장사훈이 보인다. 수업중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소리가 나자 선생은 강의를 잠깐 중지하고 괴춤을 더듬어 애지중지하던 백금 딱
지의 회중시계를 꺼내본다.
"저 오포가 맞지 않는다. 오포는 틀려도 이 시계는 절대로 틀리는 법이 없어." 선생은 회심
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해 한다. 그의 손은 앙징스러울 정도로 작았고 손가락도 무척 짧
았다. 손톱도 길지 않고 둥글넙쩍하여 손톱 끝으로 살이 많이 나온 모양이었다. 선생은 이따
금씩 손가락을 쭉 편 손등을 보이면서,
"손가락이 짧고 손톱이 몽땅한 사람은 재주가 있지" 라고 하며 손가락 자랑을 하곤 했다.
이어서 남창 우조 이삭대엽 "강호에" 수업에 들어간다. 먼저 이병성이 지목 받고 복습한다.
"강호에 기약을 두고 십년을 분주허니
그 모른 백구는 더디 온다 허려니와
성은이 지중허시니 갚고 가려 허노라" (남창 平調, 1分 20井)
#10 내자동, 정악교습소
떠꺼머리 총각, 청년 10여명이 목조건물 방바닥에 빙 둘러앉아 교습을 받고 있다. 중앙에
작달막한 키에 단정한 가리마를 타고 부리부리한 눈을 한 선생이 앉아 있다. 장구는 옆에
둔 채 한 손에 장구채를 잡고 연신 방바닥을 두들기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우리 정가중 가
장 높은 소리를 내는 소용(騷聳)이를 가르치고 있다.
"불아니 때일지라도 절로 익는 솥과
여무죽 아니 먹여도 크고 살져 한걷는 말과 길쌈 잘하는 여기첩과 술샘는 주전자와 양부
로 낳는 검은 암소
평생에 이 다섯 가지를 두량이면 부러울 것이 없어라" (남창 우조, 소용)
수제자 이병성의 선창으로 청년들은 진땀을 흘리며 손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장단점수를
맞추면서 소리를 지른다. 이 때 문을 열고 가람 이병기 선생이 들어온다. 가곡은 배우기가
너무 힘들어 가람은 배우기를 일찍이 포기했으나 가곡이 좋아 자주 이 곳에 들르는 편이다.
오늘도 가람은 멀찍이 앉아서 이들의 가곡교습을 지켜보고 있다. 잠시 휴식시간에 가람선생
은 오늘 학교에 나갔다가 직원들이 바둑들만 두고 있어서 가는 길에 들려보았다고 하며 청
년들에게는 우리 것이니 힘들더라도 하나씩 오래오래 끊이지 말고 익혀 후세에 전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11 상다동 큰 기와집, 기생조합
지금의 서울 광교 근처 상다동에는 큰 기와집이 있었다. 이 집은 송병준의 소유이었는데
정가보급을 위하여 여악 분교실로 빌려줘 교습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큰길에서 내려 약간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아담한 솟을대문이 있고 그 문안으로 조그만 정원이 나타나며
안쪽으로 기역자의 맞배 지붕의 기와집이 보인다. 여기서 기생들과 교습생들이 숙식을 하며
음악과 무용을 배우고 있다. 내제자 겸 양녀인 김진향의 소리.
"산촌에 밤이 드니 먼데 개 짖어온다
시비를 들고 보니 하늘이 차고 달이로다
저 개야 空山 잠든 달을 짖어 무삼허리오" (여창 界面調, 중거)
기생(妓生)은 조선왕조 이래 존속되어온 관기를 말하는데 조선 구악의 관습을 타파하기 위
하여 대한제국 고종 말기에 관기제도를 갑자기 폐지하자 궁중내 약방기생(의녀), 상방기생등
이 물러나와 귀향하거나 서울에 남아 기업(妓業)을 차렸다. 그 중 지아비가 없는 무부기(無
夫妓)를 모아 가무를 가르친 것이 소위 기생조합이다. 이는 뒤에 한일합방 후 권번(券番)으
로 개칭된다.
금하 선생은 정악 전습소에서 부설한 여악 분교실에서 기생들을 모아 이들에게 가무를 가
르쳤으니 이 땅의 기생조합 창시자가 된 셈이다. 결과적으로 기생조합이 우리 가무를 지켜
내었다고 할 수 있으니 부끄럽고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강(楚江) 어부(漁夫)들아 고기 낚아 삶지 마라
굴삼녀충혼(屈三閭忠魂)이 어복리(魚腹裏)에 들었느니
아무리 정확(鼎 )에 삶은들 익을 줄이 있으랴" (남창 계면, 평거)
여창가곡의 명창인 이난향은 선생의 수제자로 13세 때 궁중 진연(進宴)에 뽑혀 평양에서
올라온 동기(童妓)인데 진연에 나가기까지 이 조합에 눌러앉아 대정권번, 조선권번으로 이름
이 바뀔 때까지 소속하여 있었다.
"하선생님과 나는 인연이 꽤 깊었어요.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나는 지금 정부종합청사
에 있는 조선 정악전습소에서 노래와 춤을 배웠는데 그 때도 하선생님이 계셨고 다동조합시
절에도 하선생님으로부터 배웠어요. 선생님은 나를 아껴 장차 이 조합의 주인이 될 것이라
고 하셨는데 훗날 내 나이 25살 때 조선권번의 취체역이 되었으니 말씀대로 된 것이죠."
명월관에서 기명을 드날리던 이난향, 인터뷰 현장에서 70 고령의 눈에 어렴풋이 회고의 눈
이 젖어 있다. 조용히 주렴을 걷으며 슬프고 느린 계면조 "긴 것"을 부른다.
"언약이 늦어 가니 정매화(庭梅花)도 다 지거다
아침에 우든 까치 유신(有信)타 허랴마는
그러나 경중아미(鏡中蛾眉)를 다스려볼가 허노라" (여창 계면, 이삭대엽)
#12 다동 큰 기와집, 다동기생조합
관기(官妓)제도가 폐지되고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강탈해갈 무렵 일본식 권번(券番)이 도
입되어 일본에서 게이샤들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기생은 비속화되었다. 관기제도가 민간에
게 넘어오면서 "대동조합", "대정조합", "한성조합"등 소위 포주가 있는 여기(女妓)들로 된
유뷰기(有夫妓) 조합이 성행한다. 이 여기들은 12세 안팎의 빈민 출신으로 몇 십원의 돈을
주고 사와 조합에 입적시킨 후 양부(養父)겸 남편노릇을 하면서 가무를 가르치고 예쁘게 키
워 15, 6세가 되면 고관대작이나 돈 많은 중인(中人)들 눈에 들면 팔아 몸값을 받고 풀어주
는 인신매매제도나 다름없었다.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말" 이난향의 회고에서) 이난향의
소리.
"간 밤에 부던 바람 만정도화 다 지거다
아희는 비를 들고 쓸으려 허는구나
낙환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허리오" (여창 평조, 이삭대엽)
당시 궁중에서도 제례악만 남겨두고 연회악과 정가를 폐지하여 민간에서도 정악과 정가를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안타까워하던 차에 금하 선생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악(女樂)분실
(分室)을 맡으면서 가무(정가와 춘앵무, 가인전목단, 포구락, 연화대무, 검무, 승무 등)를 전
승할 목적으로 이러한 구악(舊惡)을 일신한 무부기조합을 만들어 배우기를 희망하는 소녀들
을 별도로 모아서 가무를 가르쳤는데 이 소문을 듣고 경향각처에서 기생 희망생들이 모여들
어 "다동조합"은 크게 번성한다. 다동조합은 이듬해인 1914년 "대정권번"으로 개칭하여 정통
가무악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권번(券番)으로 계속 번성하였다. 다시 이난향의 독창.
"한 숨은 바람이 되고 눈물은 세우(細雨) 되어
임(任) 자는 창밖에 불면서 뿌리과저
날 잊고 깊이 든 잠을 깨와 볼가 허노라" (여창 평조, 頭擧)
#13 다동, 대정권번, 수업시간
선생은 수업하다 말고 무언가 혼을 내 줄 모양인지 표정이 굳어지더니 장난감 곤장을 꺼낸
다. 이 "곤장"이란 약 30cm 정도의 길이에 5cm정도 너비의 박달나무로 된 매인데 규칙이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을 때 드는 가장 큰 벌이었다. 다 큰 처녀의 넙쩍다리를 걷게 하
고 제일 나이 어린 제자를 시켜 속살을 치게 하니 아픈 것 보다 수치심을 느끼게 하였다.
오늘은 주산월이 걸렸다. 주산월은 일찍이 한문과 시서화를 배우고 가곡까지 배우다가 15
세에 권번에 들어와 정가를 배우는데 수업에 임하는 자세가 나이보다 숙성하고 품성이 활달
하였다. 선생은 곤장을 칠 듯하다가 팔을 걷게 한다. 가볍게 손가락 멱을 따면서 다시 해보
라고 이른다. (주산월은 훗날 천도교 3대교주 손병희와 결혼, 독립운동에 관여하였고 천도교
대사모님이 되었다.) 평조 중거(中擧)중 틀린 곳을 복창하는 앳된 모습이 진지하고 재미있
다. 주산월의 독창.
"靑鳥야 오도고야 반갑다 님의 소식
弱水 삼천리를 네 어이 건너온다
우리 님 만단정회를 네 다 알까 허노라" (여창 평조, 中擧)
#14 명동, 명월관
조선 제일의 요정 명월관에 불이 밝았다. 인력거들이 대기하고 있는 길을 건너 청사초롱
불을 밝힌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뜨락에 기화요초들이 그득하고 여기 저기 박혀 있는
바위돌을 돌아 먹자갈길을 더듬어 올라가면 디귿 자로 된 기와집에 넓은 대청마루가 있고
긴 회랑을 따라 아자문의 방들이 즐비하다. 중노미들이 댓돌까지 손님을 안내하면 곱게 한
복을 차려입은 기녀들이 이를 받아 예약된 방으로 안내한다. 방에는 황촉불이 몇 개씩 이글
이글 타고 있는데 노란 장판 위에 청,적,황의 보료가 고급스럽게 차려져 있다. 정갈한 차가
나오고 수기생이 찾아와 단골손님에게 사뿐히 방바닥에 손을 대고 머리 숙여 인사하고 함께
온 취체역이 음식을 주문 받는다. 이어 호명 받은 기녀들이 하나씩 들어와 짝을 찾아 앉는
다. 지명되지 않은 기생들은 발치에 앉아 손짓을 기다린다.
오늘은 송병준이 고관들을 모시고 한턱 내는 날이라 명월관의 시선이 이 곳에서 제일 큰
방인 홍매실에 집중되어 있다. 잘하면 머리 얹는 기생이 나올지 모른다. 주안상이 들어오고
술이 몇 순 배 돌고 간간 큰 웃음이 터진다. 거문고 '하현 도드리'가 이어지고 박수소리가
잔잔하다. 이윽고 정가 차례. 주흥이 본격화하기 전에 맑은 정신으로 감상하는 것이 바른 순
서다. 이난향이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버선발로 들어와 사뿐히 오른 무릎을 세우며 인사를
올린다. 반주가 울리면서 가곡을 부른다.
"일소백미생(一笑百媚生)이 태진(太眞)이 여질(麗質)이라
명황(明皇)도 이러므로 만리행촉(萬里行蜀)하였느니
지금에 마외방초(馬 芳草)를 못내 설워 허노라" (여창 우조, 平擧)
옥구슬이 구르는 듯 맑고 청아한 소리에 모두 넋을 잃고 경청하다가 노래가 끝자 좌중은
박수를 치며 덕담한다. 좌중에 한사람이 남창으로 받는다. 질러내는 수리성(聲)이 늠름하다.
"도화 이화 행화 방초들아 일년춘광을 한(恨)치 마라
너희는 그리 허여도 여천지무궁(與天地無窮)이라
우리는 백세뿐이니 그를 설허 허노라" (남창 우조 삼수대엽)
또 한 사람이 반우반계의 남창을 부른다. 낮으나 굵은 노래목이 제법이다.
"삼월삼일 이백(李白) 도홍(桃紅) 구월구일 황국단풍
청렴(靑簾)에 술이 익고 동정호 추월(秋月)인저
백옥배(白玉盃) 죽엽주(竹葉酒) 가지고 완월장취 허리라 (남창 半葉)
다시 난향이 여창 편수대엽으로 받는다. 호흡이 바빠지고 10박의 장고가 흥청거린다.
"모란은 화중왕이요 향일화(向日花)는 충신이로다
연화(蓮花)는 군자요, 행화 소인이라
국화는 은일사(隱逸士)요 매화 한사(寒士)로다
박꽃은 노인이요 석죽화(石竹花)는 소년이라
규화(葵花) 무당이요 해당화는 창녀로다
이 중에 이화(李花) 시객(詩客)이요
홍도벽화(紅桃碧花)삼색도(三色桃)는 풍류랑인가 허노라" (여창 계면 편수대엽)
좌중에서 누군가 "거 좋지 좋아, 풍류랑 좋지." 하는 소리와 함께 노래를 받는다.
" 한송정(寒松亭) 자(잘) 긴 솔을 뷔여 조고마치 배 무어 타고
술이라 안주 거문고, 가얏고, 해금, 비파, 저, 피리, 장고, 무고, 공인과 안암산 차돌 일본
부쇠 노구산 수로(垂露) 취(醉)며 나전대 궤지삼이 강릉 여기(女妓) 삼척 주탕년 다 모아 싣
고 달 밝은 밤에 경포대로 가서
대취(大醉)코 고예승류허여 총석정 금란굴과 영랑호 선유담으로 님거래를 허리라
("남창 계면조, 言編)
술이 거나해지고 좌중의 흥이 익어가면서 난향은 물러가고 가사창(歌詞唱)을 하는 기생이
들어온다. 가곡보다는 속소리가 많고 약간 감정을 드러낸 목소리로 가사 한 곡을 부른다. 주
흥이 무르익는다.
춘면(春眠)을 늦이 깨여 죽창을 반개(半開)허니
정화(庭花)는 작작헌데 가는 나비를 머무는 듯
안류(岸柳)는 의의(依依)허여 성긴 내를 띄었세라
창전(窓前)에 덜 고인 술을 이삼배 먹은 후에
호탕하야 미친 흥을 부절 없이 자아내여
백마금편으로 야유원(夜遊園)을 찾아가니
화향(花香)은 습의허고 월색은 만정헌데
광객(狂客)인 듯 취객인 듯 흥을 겨워 머무는 듯
배회고면(徘徊顧眄)하야 유정(有情)히 섯노라니
취와주란(翠瓦朱欄) 높은 집에 녹의홍상 일미인이
사창(紗窓)을 반개허고 옥안을 잠간 들어 웃는 듯 반기는 듯 (춘면곡 전문)
#15 다동, 조선권번
대정권번은 11년후인 1925년 "조선권번"으로 개칭하여 권력을 등에 업은 "종로권번"의 출
현으로 폐쇄하기까지 12년간 운영된다.
교습기간은 15, 6세에서 20세 미만의 소녀들이 우조 이삭대엽 "버들은"을 배우는데 일요일
을 제외하고 매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하루도 빠짐 없이 수련하여야 3-4개월 걸려 겨우
한 곡을 뗀다. 이 기간이 가장 힘든 때로 이 가장 느린 곡을 떼면 비로소 가곡에 입문하였
다고 했다. 여창가곡 한바탕은 모두 15곡인데 일년 정도면 '긴 노래'인 우조 이삭대엽, 우조
두거, 반엽, 계면 이삭대엽, 계면 두거까지 5곡을 배우는데 곧 이어 '잔 노래'인 평롱에 들어
가면서 춘앵전 등 궁중무용을 배운다. 이렇게 2년 정도 수련이 끝나면 배반(杯盤)을 치르는
데 이 배반(杯盤床) 들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담안에 섰는 꽃이 모란인가 해당화인가
해뜻발긋 피어 있어 남의 눈을 놀리는다
두어라 임자 있으랴 나도 꺾어 보리라
다동조합 출신의 여제자들 중에 많은 명인들이 나왔으나 그 중에서도 주산월, 이난향, 김수
정, 서산호주, 훗날 이들 밑에 배운 김화향, 홍부용, 안학선, 김초홍 등이 뛰어났고 춤으로는
역대 춘앵전의 명가 김명옥과 선생의 양녀이자 훗날 시인 백석의 애인이 된 김진향이 있다.
(김진향은 훗날 수 백억원의 재산을 법정스님에게 헌납 서울 성북동에 길상사를 짓는다)
#16 정악연구소, 궁중정재 춘앵무 교습
선생은 정가 이외 정악 춤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실제로 춤 솜씨는 노래보다 더 나은 바가
있었으나 노래만큼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은 그 궁중무용 교습이 있는 날이다. 선생
의 목소리.
"명창 10인이 나와도 명무 1인이 나오기 어렵다. 그 까닭은 춤은 우선 자태용모가 뛰어나
야 하고 기질도 온화하여 그 춤에 맞아야 하니 몸동작이나 춤사위는 배워서 훈련하면 될 수
있어도 자태는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궁중무용 중 춘앵무, 무산향(舞山香) 같은 춤은
독춤이어서 특히 까다롭다.
"옛날에는 춤추는 무희는 물찬 제비 같은 몸매에 외씨버선 같은 발맵씨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발맵씨의 아름다움을 돋보이자면 치마로 발을 가려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단정한 자
태로 반듯이 서서 고개를 약간 다소곳이, 눈은 반쯤 떠서 내리깔고, 두 손을 모아 포개어 놓
고 섰다가 평조 영산회상 상령산(上靈山)의 긴 첫 장단에 정중히 몸을 반쯤 숙여 인사하고
첫 박을 치면 장단 한 배에 맞추어 오금을 천천히 죽였다가 같은 한 배로 오금을 펴는 동시
에 우측 발을 무겁게 들어 엇비슷이 띄어 앞으로 한발자국 사뿐히 내려놓은 다음 좌측 발도
우측과 같이 같은 장단에 같은 한 배여서 같은 모양으로 발을 띄어 놓기를 좌우 2회씩 하여
걸어서 화문석 한가운데까지 나가는데 이 때 발끝이 치켜올려져서 발바닥이 보이지 않도록
평발로 들어서 사뿐히 놓아야 한다..." (영산회상의 합주곡 重光之曲이 화면에 깔린다.)
#17 수송동 숙명여고 앞, 수요회
그 간 정악단체에 대한 왕가의 유지 장려금도 앞서 정악의 궁중연례악 폐지로 지급이 중지
됨에 따라 정악유지회가 와해되자 동호인들끼리 수요회를 결성한다. 초창기멤버는 김윤덕
(거문고), 김영재(거문고), 이수경(거문고), 민완식(양금), 김상순(양금), 지용구(해금), 김계선
(대금), 김수천(장고)등이었다. 이 수요회에는 배반 치른 기생이 둘씩 교대로 참석해서 율객
들의 반주에 맞추어 가곡을 불렀다.
"일각(一刻)이 삼추(三秋)라 허니 열흘이면 몇 삼추요
제 마음 즐겁거니 남의 시름 생각허랴
천리에 임 이별허고 잠 못 닐워 허노라" (여창 우조, 頭擧)
오늘은 선생의 수제자 김수정이 선생과 함께 가곡창을 한다고 하여 특별히 송병준 등 세도
가와 풍류 애호객들이 수요회에 모였다. 김수정은 14세에 권번에 들어가 시집갈 때까지 10
여년간 가곡을 도맡아 불렀는데 타고난 음성이 천부적이었다. 평시 대화할 때에도 청음이
좋았으나 노래할 때는 그야말로 천상선녀가 하강한 듯한 낭랑한 목소리로 선생이 일러준 대
로 속목을 꺾어 넣을 때 삽붓 베듯이 가볍고 곱게 목을 써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미
성, 기성으로 때로 양금소리 같기도, 꾀꼬리소리 같기도 한 것이 스스로 한과 멋에 젖어 듣
는 이를 압도하고 좌중을 흡인하는 전무후무한 가곡 명창이었다.
"잘새는 날아들고 새 달이 돋아 온다
외나무다리로 홀로 가는 저 선사야
네 절이 얼마나 허관데 원종성(遠鐘聲)이 들리느냐" (남창 계면, 이삭대엽, 송순 詞)
선생의 장중한 남창가곡이 낮고 길게 뒤를 잇자 다시 김수정의 여창이 이어진다.
"북두칠성 하나,둘,셋, 넷,다섯,여섯, 일곱분께
민망(憫 )한 발괄 소지(所志) 한 장 아뢰나이다 그리던 님을 만나 情에 말삼 채 못허여
날이 쉬 새니 글로 민망
밤중만 삼태성(三台星) 차사(差使) 놓아 샛별 없이 허소서" (여창 계면, 平弄)
꾀꼬리가 날아온 듯 뽑아 올린 명주실이 얽히고 설켜 듣는 이와 부르는 이가 하나로 뒤엉
킨 듯 좌중은 머리끝이 속소리에 쭈뼛쭈뼛 전율을 느낀다. 곧 선생의 남창이 사죽반주에 맞
춰 이어진다.
"인심(仁心)은 터히 되고 효제충신 기둥되어
예의염치로 가죽이 예였으니
천만년 풍우를 만난들 기울 줄이 있으랴" (남창 우조, 中擧)
장중한 선새의 가락을 맞받아 김수정이 여창을 부른다.
"바람은 地動치듯 불고 궂은 비는 붓듯이 온다
눈 情에 거룬 님을 오늘 밤 서로 만나자 허고 判첩 쳐서 맹서 받았더니 이 우중에 제 어
이 오리
진실로 오기 곧 오량이면 연분인가 허노라" (여창 우조, 羽樂)
잠시 가슴이 오싹할 정도의 가창세계에 빠져 있던 사람들의 근엄한 박수가 절로 나온다.
이윽고 긴 노래 잔 노래가 모두 끝나고 선생과 김수정이 남녀합창으로 태평가를 부른다
"(이랴도) 태평성대 저랴도 (태평) 성대로다
요지일월이요 순지건곤이로다
우리도 태평성대니 놀고놀녀 허노라" (남녀 합창, 계면조)
1분 15정의 박자로 느리게 길게 이어지는 태평가는 암담한 시절에 맞지 않는 곡이지만 역
으로 일제치하를 벗어나 태평성대를 구가하려는 원망을 나타내는 뜻도 있다. 특히 4장 "우
리도"에서 만장같이 한정 없이 이어지는 계면조의 노래가락은 애절하면서도 아득한 요순시
절의 먼 그리움을 상상하게 해준다.
#18 불행한 가정
아서라 사람들아 못할 건 이혼이라
떠나 살다보면 조강지처 제일이라
싫다고 갈라서기 전 생각 다시 하여라
선생은 가정적으로 불행하였다. 어려서 부유하였으나 남의 보증관계로 가산을 패하고 두 번
을 이혼하였고 외아들은 정신질환을 앓아 대화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혼자 있을 때는 먼
산을 쳐다보며 가곡 "언락"과 가사 "상사별곡"을 자주 부르고 난 후 두 손으로 얼굴을 부비
고 한없이 슬퍼하였다.
"벽사창이 어룬어룬커늘 님만 여겨 펄떡 뛰어나가 보니
님은 아니 오고 명월이 만정헌데 벽오동 젖은 잎에 봉황이 와서 긴 목을 후여다가 깃 다
듬는 그림자로다
마초아 밤일서일 망정 행여나 낮이런들 남우일 번 허여라" (남창 우조, 言樂)
집나간 아들은 소식이 없고, 달 밝은 밤이면 이혼한 옛 아내가 그립다. 후년에 맡은 권번
수입으로 생활은 풍족하였으나 말년에 새로 생긴 권력에 빌붙은 업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눈
뜨고 권번을 빼앗기고 상심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이어 선생의 애절한 상사별곡이 이어진
다.
인간 이별 만사 중에 독수공방이 더욱 설다
상사불견 이내 진정을 제 뉘라서 알리
맺힌 시름 이렁저렁이라 흩어러진 근심 다 후루쳐 두고
자나깨나 깨나자나 임을 못 보니 가슴이 답답
어린 양자 고운 소리 암암허고 귀에 쟁쟁
보고지고 임의 얼굴 듣고지고 임의 소리
비나이다 하나님께 임 생기라 하고 비나이다
전생차생이라 무삼 죄로 우리 둘이
삼겨나서 잊지 마자허고 백년기약 만첩산을
들어간들 어느 우리 낭군이 날 찾으리
산은 첩첩허여 고개되고 물은 층층 흘러 소이로다
오동추야 밝은 달에 임 생각이 새로워라
한번 이별하고 돌아가면 다시 오기 어려왜라 (가사, 想思別曲 전문)
곡조 그 자체도 애상적이거니와 쥐어뜯는 듯한 가락으로 흐느끼듯 꺾여 넘어가다가 끝무렵
의 "오동추야 밝은 달에..." 대목에 이르면 목청을 있는 것 높여 쥐어 짜내는 속목이 절정에
치달아 그 비조가 듣는 이의 심금을 무방비로 울린다. 특히 "한번 이별하고 돌아오면 다시
오기 어려왜라"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마치 인생의 종말을 고하는 듯 지금까지 질러대던
비통한 소리의 주인은 간 데 없고 낮고 굵은 소리만 저 혼자 남아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어
더욱 애절한 느낌을 금할 길이 없다. 이미 황혼기에 들어선 그로서는 이 모든 시름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선생의 만년에 지은 다음 시조에도 그런 비감이 묻어 있다.
정월이 돌아오면 사람마다 새해라네
년년세세 새해라니 세세연연 옛해로다
우리도 저 해와 같이 만고불변하리라
#19 교재 가인필휴 편찬
<가인필휴(歌人必携)>는 선생의 유일한 저작인데 주로 여제자를 가르치기 위한 수첩같은
소책자이다. 그 서문을 보면 선생의 음악관의 일단을 헤아릴 수 있는 귀중한 글이다.
나레이터: "천지가 열리고 사람이 생기고 사람이 생긴 후 음악이 생긴지라, 그러므로 세계에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음악이 말에 따라 곡조는 다르나 음계는 같았으니 어찌 천리가 아니
리요. 우리 조선은 단군이래 영가무도가 시작되고 삼국에 와서 음악이 확장되어 악기가 육
십여개, 곡조가 삼백여개에 이르러 세계에 자랑할 만 하고....(중략) ... 임진후에 황실의 연
례와 제례에만 종사하여 가무는 기생에게 전래하니 체모관계로 일반이 포기불문하여 우리
음악은 보통지식도 드문 까닭에 화류계에서 전래하던 것마저 끊어지게 되니 어찌 가석치 않
으리오..."
선생의 독창이 나즈막히 배경으로 흐른다. 담담하고 애잔하다.
"반너머 늙었으니 다시 점든 못허여도
이후란 늙지 말고 매양 이만 허였과저
백발이 제 짐작허여 더디 늘게 허여라" (남창 계면, 평거)
#20 1934년 최후의 배반상
배반(杯盤)이란 일종의 수료식으로서 맨처음 노래를 배워 2, 3년이 지나면 전과정을 통달하
게 되는데 어느 정도 기량이 인정되면 지금껏 배운 것에 대한 학습발표회 성격으로서 거문
고 대금 양금 해금 장고 등 기악을 동반하여 배반을 치르게 하고 배반상을 차려 일종의 피
로연을 겸하였다. 처음 배울 때 2, 30명의 학생이 배반 때가 되면 전번배반 때 탈락자까지
합쳐 10명이 채 못되었다. 배반은 학습이 일정 수준에 못 미치면 절대로 허락되지 않았다.
오늘은 여창 배반을 치르는 날이다. 학습 기녀들은 남치마, 저고리는 옥색, 백색, 연분홍,
황연두, 궁중나인과 기생들은 남치마만을 입은 관복으로 치르는데 여창가곡 15곡 중에서 우
조 중거, 평거와 계면 중거, 평거, 환계락을 제외한 10곡을 발표한다. 즉 우조 이수대엽, 두
거, 우락, 반엽, 계면 이수대엽, 두거, 평롱, 계락, (남창 편락), 계면 편수대엽, 태평가의 순이
다. 즉, 먼저 우조 초수대엽부터 부르는데 향수(香首)기생이 한 소절을 수창하면 다른 동반
생들이 다음을 이어 부르는 식이다. 우조 이삭대엽 "버들은", 중거 "청조야", 평거 "일소백
미", 두거 "일각이", 우락 "바람은"을 연이어 부르고 나서,
"남하여 편지 傳치 말고 당신이 제오 되어
남이 남의 일을 못 일과저 허랴마는
남하여 傳헌 편지니 알동말동 허여라" (여창 半葉)
반우반계인 위 반엽을 부른 뒤 계면으로 들어간다. 학습기생들은 계면조 제창순서에 따라
이삭대엽 "언약이", 중거 "산촌에", 평거 "초강어부", 다음 두거 "임술지"를 부른다.
"임술지 추칠월 기망에 배를 타고 금릉에 나려
손조 고기 낙가 고기 주고 술을 사니
지금에 소동파 없으니 놀 리 적어 허노라" (여창 계면, 두거)
잇달아 평롱 "북두칠성"을 돌려 부른 뒤 다음 계락을 부른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라도 절로절로
산 절로절로 수 절로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절로
우리도 절로절로 자란몸이니 늙기도 절로절로 허리라" (여창 계면, 界樂)
이어서 선생의 편락이 이어지고 이에 제자들이 다시 화답하여 편수대엽 "모란은"을 합창하
고 곧바로 선생과 제자들의 혼창으로 태평가가 이어지면서 가곡은 끝이 나고 약 한시간 정
도의 휴식을 가진 뒤 미리 준비된 배반상이 나온다. 이는 선생의 가르침에 대한 생도들의
사은상에 해당한다. 배반상이 들어오면 향수기생 선창으로 제자 기생들이 권주가를 부른다.
불로초로 술을 빚어 만년배에 가득 부어
잡으신 잔마다 비나이다 南山壽를
이 잔 곧 잡으시오면 만수무강 하오리다
선생이 철철 넘치는 잔을 받아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려 단숨에 죽 들이키면 모두 박수로
환호한다. 기분이 좋아진 선생이 다시 잔을 잡고 우람한 목소리로 독창한다.
"이태백의 주량은 긔 어떠허여 일일(一日) 수경(須傾) 삼백배(三百盃)허고
두목지(杜牧之) 풍채(風采)는 긔 어떠허여 취과양주귤만차(醉過楊州橘滿車)런고
아마도 이 둘의 풍도(風度)는 못 미츨가 허노라" (남창 계면, 言弄)
독창을 끝낸 선생이 다시 잔을 비우자 향수기생이 주전자로 다시 잔을 채우며 독창으로 장
진주(將進酒)가를 부른다.
"한잔 먹사이다 또 한잔 먹사이다 곳 것거 산을 놓고 무진무진 먹사이다
이 몸 죽은 후에 지게 우희 거적 덮어 쥐뿌두혀 메여가나
유소보장에 백부시마(百服 麻) 울어예나 어욱새 더욱새 개나무 백양나무숲에
가기곧 갈작시면 누른 해 흰 달과 굵은 눈 가는 비에 소소리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하리 하물며 무덤 우희 잔나비 파람헐 제 뉘우친들 미치리" (정철 作)
이렇게 하여 노래배반이 완전히 끝이 나면 배반상을 물리고 이어 춤배반이 이루어진다. 춤
은 궁중무용인 춘앵무, 연화대무, 포구락, 쌍검무, 승무 등인데 특히 춘앵전은 한국무용의 기
본으로서 배우고 익히기가 어려워 한해에 한 두 명 나올까 말까 하였으며 춤동작도 그러하
지만 춤추는 자의 용모자태가 출중해야 춤이 살아난다. 오늘의 춤배반은 김진향이다.
#21 종로통, 종로권번
금하가 경영하던 조선권번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 순사 출신의 포주가 종로통에 새 권번을
내고 권력층에 작용하여 기생들을 빼어감에 따라 점점 쇠퇴하여 갔다. 얼마 남지 않은 기생
들에게 남창가곡 계면 편수대엽을 가르치는 선생의 얼굴표정이 피로하게 보인다.
"진국명산 만장봉이 청천삭출 금부용이라
거벽은 흘립허여 북주 삼각이요
기암은 두기허여 남안 잠두이로다
좌룡 낙상 우호 인왕 서색은 반공응상궐이요
숙기는 종영출인걸허니 미재라 아 동산하지고여
성대의관 태평문물이 만만세지 금탕이로다
년풍코 국태민안허여 구추황국 단풍절에
인유이 봉무커늘 면악등림허여 취포반환허오면서 감격 국은이샷다"
#22 망우리 공동묘지
구슬픈 만가소리. 간 밤 12시까지 후학을 가르쳤는데 익일 아침에(1937.5.21) 갑자기 심장마
비를 일으켜 별세하니 참으로 허망하다. 돌아온 정신병자 아들은 제 아비 상인 줄도 모르고
출상일에 어딘가에 갈 데가 있다면서 나가 버리고 상주 없는 국악인장 영결식(1937.5.25)은
장안의 전 인력거가 총동원된 가운데 동묘 앞에서 거행되었고 낙양춘의 구슬픈 장송곡이 연
주되는 가운데 상여는 망우리로 향한다. 서러운 만가소리에 이어 선생의 육성이 들린다.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허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덮어 무삼허리오" (남창 우조 평거 이존오 詞)
<에필로그>
나레이터: 금하 하규일 선생은 철종 14년 서울에서 나서 18세부터 가곡을 배웠으며, 31세에
관계로 진출, 1901년 한성소윤 겸 한성재판소 판사를 거쳐 진안군수를 하다가 한일합방 후
관직을 그만 두고 음악에 전념하였다. 조선 정악전습소 학감과 동소 상다동(上茶洞) 여악분
교실장을 역임하고 다동조합, 대정권번을 창립, 1926년 이왕직 아악부 촉탁으로 임명되어 가
곡과 가사, 시조를 전수했다. 현재 남창 가곡 89곡과 여창가곡 71곡 가사 8곡, 시조창 등이
전승되고 있으며 1937년 향년 75세로 별세했다.
이 시네포엠은 오늘날 우리 시조를 쓰는 시조시인들이 최소한도 시조의 음악적, 창사적(唱
詞的) 기능정도는 알고 있어야겠다는 필자 나름의 요량으로 우리 고시조에 음악성이 어떻게
구현되어 있으며 고시조를 우리 선인들은 어떻게 제창하였고 또, 그것이 어떤 경로로 오늘
날 우리 국악의 일부로 살아남아 전승되고 있는지 보이고자 하는 의도로 창작한 것임을 밝
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