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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5. 성탄일축복예배설교문【성탄절】
제목: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는 비결.
본문: 디도서2:11~15절
11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5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아멘.
찬 양: 111장(통 111장) – 귀중한 보배합을,
112장(통 112장) – 그 맑고 환한 밤중에,
118장(통 118장) – 영광 나라 천사들아,
120장(통 120장) – 오 베들레헴 작은 골,
123장(통 123장) – 저 들 밖에 한 밤중에,
126장(통 126장) – 천사 찬송하기를.
할렐루야!!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은총이 교회 공동체여러분과 교회 공동체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교회 공동체여러분의 사업과 가정 위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문:
누군가가 이 세상에는 3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일이 일어나게 만드는 사람,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갖고 있지 않는 사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3번째 유형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교회 공동체 대부분의 공동체들은 앞서 말한 3가지 부류에 모두 속하는 것 같습니다.
매년 교회 공동체들은 크리스마스라는 날을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탄절을 계획하고 미리 휴가 때 할 일들을 자서 준비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또한 성경 이야기와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메시지를 알리는 찬송가와 캐럴을 부르며 성탄절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공동체는 참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샌스터 씨는 결혼 피로연에 초대받은 개인적인 경험을 들려줌으로써 이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 늦게 도착을 하였고 자기를 초대해준 친구 외에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이들이 크게 흥겨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춤을 추며 큰 소리로 말하고, 노래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게임과 갖가지 오락에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홀은 장식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종이로 만든 캡슐을 들고 다녔습니다. 외관상 모든 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녁때가 다 되었을 때 그는 구석에 홀로 외로이 앉아 있는 한 젊은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즐겁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매우 기쁘게 웃었으나 약간 경시 당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샌스터 씨는 자기 친구에게 “저 구석에 있는 젊은 아가씨는 누구야?”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지 친구는 다소 놀라며 “자네 몰라? 내가 자네를 그녀한테 진작 소개했어야 했는데... 바로 저 아가씨가 신부야?”라고 대답했습니다.
교회 공동체여러분은 교회 공동체여러분 자신이 결혼 피로연에서 홀로 방치되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상황을 마음에 그려볼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분명 주님께서 성탄절에 느끼시는 서은함이실 것입니다.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대부분의 의식들이 그분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건 주님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게 또한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행하신 일과 교회 공동체가 그분을 위해해야할 일을 깨달아야만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낼 수 있습니다. 디도라는 젊은 문하생에게 편지를 써 보낸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기 위해 노력할 때 교회 공동체에게 필요한 실례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2번에 걸친 강림과 그것들과 교회 공동체의 현 시대와의 관련성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과거, 현재, 그리고 3차원에 적절히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면 그것은 교회 공동체가 성탄절을 의미 있게 보내는데 커다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한 지혜의 말씀을 살펴볼 때 교회 공동체는 성탄절에 대해 4가지 통찰력을 얻게 되는데 그것들은 교회 공동체가 성탄절의 의미를 알고 이날을 뜻 깊게 보내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려면 과거를 잘 회상해야합니다(11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성탄절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 죄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 갑자기 임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전체 대본이 구현되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은혜’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좋은 말입니다. 이 말은 본래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예수님 그리스도의 인격을 입으시고 일하셨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만일 교회 공동체가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라면 은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11절에서 표현한 ‘나타났다’는 말씀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그 말이 문자적으로 ‘백일하에 드러내다’,‘명백해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출현’(epiphany)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화되신 하나님의 은총이십니다. 그는 하늘 보좌를 떠나 교회 공동체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절). 불신자 선생님 한 분에 대한 옛날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불신자인 것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던지 그는 자기 제자들 또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성탄절이 가까워진 어느 날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있게 되자 그는 한 학생을 칠판 앞에 내보내 “하나님은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다(God is no where)”라는 말을 쓰게 했습니다.
그 학생은 자기 선생님이 시키는 대호 했으나 부주의해서 글자를 나누어 썼습니다. ‘w’와 ‘no’자를 나란히 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now here)”라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절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지금 여기에 계신 것입니다.
그분의 의도는 죄인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여러분이 아 사실을 이해하기까지는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실 수 없습니다.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려면 현재 헌신된 삶을 살아야합니다(12절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이 구절에서 불신자의 세계에서 신자가 될 때에 요구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조언과 부정적인 조언의 말씀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는 ‘경건치 않은 것’과 ‘세상 정욕’을 부인해야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부인하다’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명령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부정을 실행해야합니다.
‘경건치 않은 것’과 ‘세상 정욕’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잊어버리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삶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고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법칙에 완전히 대조되는 생활방식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라면 그러한 생활방식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도록 교회 공동체를 교육하며 훈련합니다. ‘근신함’이란 말은 문자적으로 ‘절제하며’라는 뜻입니다. 교회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는 절제의 삶, 훈련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은 물론 성령님의 주도 하에 행해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교회 공동체는 ‘의롭게’살아야합니다.
‘의로운’이란 말은 어떻게 교회 공동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처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교회 공동체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다른 이에게 불친절하거나 비평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야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증오심을 품지 않습니다. 이것은 특히 분주한 성탄절 기간 동안에 꼭 필요한 조언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의 긍정적인 말씀은 ‘경건함’이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근본적으로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처럼 살아야한다는 의미입니다. 경건해지는 것은 하나님께 불변의 헌신자세를 유지하여 그분과 계속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기 위해 교회 공동체는 지금 헌신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 가운데 한 사람인 데마에 대한 사도 바울의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렸노라”라고 한 슬픈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려면 현재 헌신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려면 미래의 약속을 주시해야합니다(13절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제 과거와 현재에서 방향을 바꾸어 사도 바울 은 교회 공동체의 관심을 미래를 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성탄절을 맞아 사도 바울은 “복스러운 소망과 교회 공동체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도록” 교회 공동체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복스러운 소망’이라는 용어가 매우 낙관적입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무력하게 행위를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보증과 확신의 삶임을 교회 공동체에게 상기시켜줍니다. 기독교 메시지는 소망적입니다. 그것은 계속 교회 공동체를 우울함과 절망 속에 빠져들게 하는 염세철학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은 강렬하고 열렬하게 소망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 그리스도의 재림은 절망이 아닌 소망의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 은 예수님 그리스도의 두 번째 강림 즉 재림을 ‘영광이 나타나심’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타나심’이란 단어가 본문 11절에 언급된 예수님 그리스도의 초림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와 같음을 유의하시기 기도합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3절“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1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에는 그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베들레헴에 한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대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차이가 어떤 것입니까? 초림 때에 그분은 조용히 오셨습니다.
그분의 탄생 소식은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졌었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영접했습니다. 재림 때에는 주님께서 굴욕과 수치보다는 오히려 영광중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왕 중의 왕, 주님 중의 주님으로 그를 알아보는 방식을 빌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초림 때에 그분은 구원하러 오셨으나 재림 때에는 다스리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초림에는 죽으러 오셨으나 재림에는 그를 영접한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초림 때엔 가난하게 오셨으나 재림 때엔 능력 중에 오실 것입니다. 초림 때에는 그분께 가시 면류관이 주어졌으나 재림 때에는 영광의 면류관을 쓰실 것입니다. 그것이 분명 ‘영광이 나타남’인 것입니다.
뉴 오렌스 침례교 신학교 학장을 지낸 로랜드 리벨씨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파리 YMCA에서 봉사했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동안 그는 영국의 왕 조지 5세가 정해진 날에 파리를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진짜 왕을 보게 된다는 바로 그 생각으로 인해 소년 리벨은 매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오는 날 동틀 무렵에 그는 왕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는 좋은 자리를 확보하려고 노력하며 많은 대중들 속에서 챔프스 엘리시스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무한히 왕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몇 시간 후 그는 “왕이 오고 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모여든 많은 나라들이 너도나도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리벨은 거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가 가장 흥분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행렬이 움직이자 그는 자기가 진짜 왕을 본 것을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어떻게 말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왕을 태운 마차가 지나가자 가장 예절바른 태도로 그는 경외를 표하며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되돌아섰을 때 그는 자기가 기대한 것과는 다른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왜 자기가 이 역사적인 특권에 대해 그토록 공허한 마음과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는지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감정을 보다 세밀하게 분석해 보았을 때 그는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이유는 그가 나의 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이름을 알지도 못하고 그는 자기 백성인 나에게 아무런 선물도 주지 않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안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교회 공동체의 이름을 아십니다.
그분은 교회 공동체의 왕 중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믿고 자기의 나타나심을 선포하는 사람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선물로 가져오실 것입니다. 그것이 재림을 ‘복스러운 소망’과 ‘영광의 나타남’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려면 교회 공동체의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념해야합니다(14~15절 14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5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이 두 구절은 교회 공동체에게 교회 공동체의 삶에 대해 2개의 분명하고 중요한 사실들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교회 공동체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교회 공동체를 구속하시고 교회 공동체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 중요한 사실이 이 성탄절 시즌 동안 관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1985년3월15일 피츠버그에서 온 성공적인 노동 교섭가인 웨인 앤더슨씨가 ‘The Todays Show’에 출현했습니다. 이날이 의미 있었던 것은 그가 2차 세계대전 때 지그프리트 선(Siegfried Line)을 건너 독일로 건너 간 최초의 미군으로 부상당한 40주년 기념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이 전쟁기간 동안에 당한 부상 때문에 그의 머리 안에 영구한 상처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가 당시에 가장 중요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는 자기 생명을 구해준 빨간 머리털을 가진 친구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앤더슨은 한 독일 병사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독일 병은 손에든 수류탄을 앤더슨 앞에 던졌고 앤더슨은 그에게 총을 발사했습니다.
수류탄은 즉시 폭발했고 앤더슨은 땅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서 머리에 부상을 입은 채로 얼굴이 진흙 속에 파묻히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독일 병 진지에서 그를 향해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그는 수류탄에 맞아 죽지는 않았지만 기관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가 그를 넘어뜨려 그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자기 몸을 던져 치명적인 공격 속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는 그를 죽음에서 건져 놓고는 전사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앤더슨은 “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한 그 친구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커다란 빚을 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확하게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가 교회 공동체를 대신 하셨습니다. 그가 교회 공동체 대신 죽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결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분께 커다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습니까? 그분이 그렇게 하신 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교회 공동체를 ‘구속하기 위해’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구속하다’라는 말은 1세기 노예시장에서 사용하던 말로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교회 공동체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를 위한 예수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예수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공동체의 삶 속에 계셔서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의 “선한 행위를 보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마5:16절 이같이 교회 공동체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교회 공동체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교회 공동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방식으로 살게 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저술가이며 목회자이기도 한 폴 파웰씨는 예배 문제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저술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에 자유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있었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영혼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만 주로 설교를 하고 자유주의자들은 ‘선한 행위에 중점을 두어’ 설교를 합니다. 저는 양편이 반쪽 복음만을 가지고 논쟁을 그만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영혼을 구원하는 반쪽 복음만’을 갖고 있고 자유주의자들은 ‘육체를 섬기는 반쪽 복음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조각난 복음을 다시 함께 모아 전체적인 살아있는 복음을 선포해야합니다. 그래서 둘 다 선언해야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속에서 신앙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가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종종 용서받은 백성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인생의 목적에 대해 숙고하기를 게을리 합니다.
자기 인생의 목적에 대해 소심했던 젊은 디도에게 사도 바울은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며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디도와 너무나도 많이 닮았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너무 쉽게 오늘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된 본래의 의도에서 후퇴를 합니다.
교회 공동채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전념함으로 거기에서 기쁨을 발견하시고 그 결과 교회 공동체여러분이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시기를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대영 서인도에서 노예들을 해방시킨 이야기를 크게 감동하며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노예들이 자유인이 되었다고 선포되기 전날 밤 그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을 계곡 밑으로 내려가 사람들은 온밤을 지새운 것입니다. 보초들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산과 언덕 꼭대기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동이 트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해가 떠오를 때 그들은 자유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언덕 위에 서 있던 보초들은 계곡에 있는 사람들이 미처 알기 전에 동이 트는 것을 목격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태양이 떠오르는 소식을 알렸을 때 계곡에 있던 사람들은 해방과 기쁨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만일 교회 공동체여러분과 제가 노예들이 동틀 때 자유인이 되었던 것처럼 성탄절을 지키지 않는다면 교회 공동체는 분명히 성탄절의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죄에서 자유하게 된 노예들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성탄절을 지내시기 기도합니다. *릭 란스/First baptist church의 설교 참조
마침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려면 과거를 잘 회상해야 하고,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하고, 미래의 약속을 주시해야 하고,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념해야하므로, 부르심의 기회를 응답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시어 나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이 나의 주님과 구세주와 그리스도님을 전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시기를 구세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복기도: 지금은 구세주 예수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교회 공동체에게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려면 과거를 잘 회상해야 하고,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하고, 미래의 약속을 주시해야 하고,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념해야하므로, 부르심의 기회를 응답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시어 나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변화되어 예수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과 구세주요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전파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구세주 예수님 그리스도의 은혜와 상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시기를 구세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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