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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정리(情理)의 사슬 2
우여곡절이 있긴 하였지만 마침내 하얼빈으로 되돌아왔다. 어른 아이 모두 물 적신 솜뭉치처럼 축 처져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하얼빈은 죽어가는 도시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음울(陰鬱)하였고 사람들은 언제 발발할지 모를 새로운 전쟁의 위기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곤은 즉시 후우잔텡 거리의 예라이샹을 찾아갔다. 넓은 하얼빈에 갈 곳이 있다면 거기뿐이다. 예라이샹의 주인이자 하얼빈에서 가장 잘 조직된 비밀조직의 총수 패천웅이 분명 반겨줄 것이다.
예라이샹 앞에 다다르자 소기가 먼저 안으로 쪼르르 달려 들어가고, 잠시 뒤 소기의 손을 잡고 화닥닥 모습을 나타낸 패천웅노인이 화안(和顔) 가득하여,
“장사 어서 오시구려. 이 늙은이 목을 빼고 기다렸소이다. 노부가 비록 이곳에 갇혀 지내고 있지만 장사의 거보(巨步)는 빠짐없이 전해 들었기에 나의 일처럼 훤히 알고 있었소이다.”
패천웅 노인이 쌍수를 흔들며 곤을 환영한다.
관동군총사령관이나 만주국황제 부의도 어둠의 세에서 만큼은 패천웅을 능가할 수 없는 지하조직의 무서운 일인자이다.
“대인께서 예나 다름없이 저를 환대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하기 이를 곳 없습니다.”
“할아버지! 소기는 배가 너무 고파 말할 힘도 없어요.”
“오냐. 오냐. 장사께서 이런 녀석을 여기까지 무사히 데려오시느라 그 노고가 짐작되고도 남는군요.”
“제가 오히려 도움을 받기까지 하였답니다. 정말 대단한 아이입니다.”
“소기는 늙은이에게 맡겨 두시고 전에 묵었던 그 방으로 모실 테니 몸을 풀며 편히 쉬고 계십시오.”
“고맙습니다.”
한번 머물러 지냈던 방이다. 낯선 느낌 없이 쉬고 있는데 오래지 않아 패천웅노인이 모습을 보였다.
“장사께서 조선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꼭 한번 들러주기를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하얼빈으로 돌아오는 시일이 너무 오래 걸려 혹 도중에 예기치 않은 변이라도 당하였는지 염려하였습니다. 이제라도 장사의 무사한 얼굴을 대하니 늙은이가 괜한 걱정을 하였나보오. 하하핫!”
“마땅히 찾아갈 곳이 없기에 염치불구 이번에도 또 한 번 신세지고자 찾아왔습니다. 폐가 아니 될지 모르겠습니다.”
“노부가 듣기에 서운하군요. 이 예라이샹은 장사의 집이나 다름없소이다. 장사께서는 우리 일족이나 같으니 계시고 싶을 때까지 마음 푹 놓아 지내시구려. 그리고 떠나고자할 때는 언제이건 말없이 떠나셔도 섭섭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나누는 담소는 곤의 지난 행적이 주제가 되었다.
“장사께서는 참으로 천난만고(千難萬苦)의 일을 겪었구려. 누구도 감당치 못할 무용담이오이다. 이 노부도 율리비치엽사와 친분을 유지하고 지냈던 사이였지요. 그분에게 닥친 화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차오라는 사람과 함께 우리의 숲을 구하고 돌아오셨군요. 노부는 장사에게 진정감사와 경의를 표하오이다.”
패천웅은 곤을 극구 칭양한 뒤,
“자금루라는 곳은 하얼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규모가 크고 잘 알려진 술집이지요. 온갖 인종과 별의별 인간들이 다 모여드는 곳이라오. 게다가 각국의 정보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드러내놓고 드나드는 첩자의 소굴이랍니다.”
곤은 패천웅노인이 자기에게 무엇인가 언질을 주려는 것이라 여겨 조용히 청취하였다.
“그곳의 밀실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많은 음모와 계략이 끊임없이 일어날 뿐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여도 화를 당하여 남몰래 죽어서나가는 모략의 소굴이라오. 하오니 장사께서는 이 늙은이를 믿어 시간을 조금 주시면 그런 쪽에 능한 사람을 풀어 그자의 행적을 밝혀드리리다.”
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제게 베푸시는 환대만하여도 감지덕지한데 염치없이 그런 위험한 일에 대인을 끌어들이다니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이 노부를 걱정하시는 말씀이라면 조금도 염려치 마십시오. 노부는 하얼빈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외다.”
“하오나 대인 어르신께 저의 위태로운 일을 안겨드릴 수 없습니다.”
패천웅의 숨겨진 또 다른 측면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늘에 맹세하였던 일입니다. 하얼빈이 저에게 낯선 곳이라 하지만, 하얼빈의 모든 술집을 다 뒤져서라도 기필코 놈은 제 손으로 찾아내 율리비치님의 단검으로 놈을 처단한 뒤 떠날 것입니다.”
“어헛 참! 고집도 정말 대단하오이다.”
곤이 패천웅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비밀결사조직을 몰래 운영하는 패천웅은 사실 때에 따라 다른 이면도 돌출해 보이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얼빈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조직을 관리하는 밤의 권력자이며, 마음만 먹으면 관동군이나 만주국의 고급관료 한두 명쯤은 귀신도 모르게 언제든 제거해버릴 수 있었다.
이 패천웅이 야노프스키의 행방을 알려고 한다면 속된말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곤에게 드러내놓고 나서지 못하는 비밀스러움이 그에게 있음이다.
하여튼 오랜만에 만난 패천웅과 곤은 그날 밤 늦게까지 자리를 마주 앉아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소기를 예라이샹에 맡겨놓고 곤은 저녁 일찍부터 자금루의 구석진 자리하나를 턱 차지하고 앉았다.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세심하게 살피며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야노프스키의 출현을 손꼽아 기다리며.
확 바뀐 모습은 전과 완전 딴판이다. 밀림을 활보하던 때와 달리 최신 유행하는 모자와 서양복장으로 말쑥하게 차려입고 출현했다.
자금루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는 것이 주위의 이목을 끌지 않고 동정을 살피기 수월하다는 패천웅노인의 권유에 따른 변용(變容)이다.
이왕 시작하는 것 최신유행으로 잔뜩 멋을 부려 자금루에 나타났다. 이른 시간임에도 심상찮은 사람들이 제법 들랑거린다.
어디서 무엇 하던 자들인지 모르지만 곤의 눈에 밤벌레로 비치는 인간들이 찬란한 샹들리에 휘황찬란한 불빛 아래로 슬금 모여들기 시작한다.
무대 앞 중앙부에서 악사들이 흥겨운 음악도 연주하고 있다.
음악에 홀린 듯 유럽풍 멋들어진 드레스로 감싼 여왕벌 같은 미색(美色)의 여인들이 하나 둘 뭇 사내의 손에 이끌려 홀 중앙으로 들어서더니, 모호한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곤이 난생처음 보는 우아한 동작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햐! 진시황의 아방궁을 여기로 옮겨놓은 것 같구나.”
눈에 비친 자금루의 호화로운 분위기는 곤을 별천지에 데려다 앉힌 환각마저 일으키게 한다. 어디에도 여기보다 더 사치스런 곳은 없을 것이다.
음침한 군국의 색조로 변조되어 모든 것이 통제된 도시다. 하지만 자금루만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바깥세상과 담을 쌓은 듯 완전히 딴판이었다.
관동군사령부나 만주국실정자들이 무슨 속셈을 숨겨 있는지 몰라도 하얼빈에 이와 비슷한 업소를 여러 곳 방치해 두고 있는데 자금루의 규모가 가장 크고 호화롭다고 패천웅에게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품는 담배연기, 술 냄새, 여자들의 향수냄새가 점점 짙어진다.
“오호홋! 전 너무 어지러워요.”
요염한 여인들의 교성에 무르익는 북국도시의 자금루!
바깥 위난(危難)과는 일체 담을 쌓고 숨겨진 허와 음모를 태연히 감싸 안고 흥청이고 있다.
“..?”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곤에게 눈길을 던지며 관심을 보이던 어느 여급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손님은 자금루에 처음 오신 분이시군요. 낯선 모습이기에 지켜보았더니 술을 시켜놓고도 한 모금도 마시질 않으시네요. 혼자 오신분이라면 제가 잠시 옆에 앉아 한잔 쯤 권유해드려도 괜찮으시겠죠?”
여성적 빛깔이 빼어나고 몸매가 가냘픈 한 젊은 여급이 은근슬쩍 말을 붙여오기에 곤은 귀찮은 표정을 감추지 않고,
“당신 말대로 혼자인 것은 분명하오만 나는 지금 이대로가 편합니다. 사양하게 되어 미안하오.”
갑작스런 여자의 출현으로 혹 다른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킬까봐 한 마디로 거절하였다.
그런데 이 여자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곤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바짝 붙여 앉더니,
“어머나! 겉으로 보기엔 박정하신 분으로 느껴지지 않는데 매우 몰인정하게 여자의 청촉을 단번 뿌리치는군요.”
입가에 방글방글 교기(嬌氣) 가득한 미소까지 흘리며 곤이 뭐라 따지기도 전에,
“놀라는 것을 보니 마치 시골에서 방금 온 촌사람 같군요. 이곳에 적응하시면 자금루에 어울리는 신사다움도 보여주셔야 해요.”
“어허라! 이 무슨 시비꺼리요?”
곤이 성가신 표정으로 쳐다보니 그녀 또한 질세라 곤을 빤히 겨누어보며,
“저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당신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당신이 누군가와 밀약하였거나 사람을 수탐한다는 것을 즉각 알아버릴 것이에요.”
“그렇더라도 남의 일에 아가씨가 무슨 상관이오?”
“이 자금루에서 손님처럼 그런 모습으로 앉아 계신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마 잘 모르시는 모양 같군요.”
샐쭉하게 핀잔하는 여자의 말에 집히는 바가 통 없지는 아니하였다.
“혼자 우두커니 앉아 계시면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여 의혹과 경계심을 사고 말 것이에요. 그렇게 되면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될 뿐 아니라 남모르는 위기가 닥칠 수도 있어요.”
곤이 조금 수긍하는 표정을 짓자 말이 먹혀든 것을 알고 여자가 해맑게 웃는다.
“촌사람치고 말귀 알아듣는 분별력은 명석하시네요.”
갑자기 파고들듯 붙어 앉더니 육감적인 풍요한 가슴으로 곤의 신체를 슬몃 눌리기에 계면쩍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관심 있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다.
여자는 맹랑하게 막무가내에다 애교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촌스럽게 행동하지 말아요. 제가 이러는 것이 이곳에선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랍니다. 염려 마셔요. 예라이샹에서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야노프스키는 제가 찾아 드릴 테니 당신은 시키는 데로만 하셔요.”
예라이샹이라는 말에 곤은 품고 있던 경계심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런데 찰싹 붙어 앉아 치근치근 교태부리며 귀찮게 하니 민망하고 불편하여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여자는 얼굴까지 붉히는 곤을 아이 나무라듯 따진다.
“제 말을 못 알아들으신 모양이군요. 시골뜨기라고 표내면 당장 쫓겨나고 말아요. 저에게 은근히 치근거려야 해요. 싫던 좋던 당신 목적이 분명하다면요.”
곤은 알아들은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떡였다. 미목수려한 여인이 불쑥 나타나 야노프스키를 찾아 주겠다는 말에야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넓은 홀의 구석진 자리마다 여급들의 자지러지는 교성과 알아들을 수 없는 온갖 언어들이 귀를 자극하니, 자금루가 하얼빈이 국제도시라는 명성에 걸맞은 곳임에는 분명한 모양이다.
“호호홋! 그 사람들도 참! 오신다는 분이 이렇게 매력적이고 멋지신 분이라 한마디 귀띔이나 좀 해주지 않고서.”
곤에게 잔 가득 맥주를 따라 입술로 가져오며,
“한잔 쯤 마셔요.”
다시 쩔쩔매는 곤의 모양이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는다.
“오호홋! 순진도 하시네. 당신이 아무리 번쩍번쩍 차려입고 왔어도 이런 곳이 처음이라는 것은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정말 내가 촌뜨기처럼 그렇게 보이시오?”
“물어보나 마나지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여자를 사로잡는 마력같은 것이 어딘가에 있군요. 오호홋! 하여튼 사람 찾는 일은 저에게 맡겨 두고 잔이나 비우며 재미있는 이야기나 나누어요. 저는 주홍련이라고 한답니다.”
“뭐엇! 당신이?”
주홍련이라면 한번 들어보았던 이름이었다.
“왜 그리 놀라요? 저를 알고 있었어요? 갑자기 그런 표정을 하시게. 누가 나에 관한 욕이라도 하였던가요?”
“아니오. 이상하게 넘겨 집지 마시오.”
그제야 관심을 두고 여자를 유심히 살펴보며 속으로,
“아하! 그자가 말하던 주홍련이 바로 이 여자였구나.”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붙잡은 느낌이다.
“저는 당신이 예라이샹에서 언질을 던져준 김 곤이라는 조선인임을 한눈에 알아보았어요.”
곤은 패천웅노인이 자기의 안전을 걱정해준 보살핌이라고 고맙게 생각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붙들려 앉아 꼭 심문당하는 사람처럼 고분고분 여자가 묻는 말에 답한다.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여자 같은데 나이마저 서로 비슷하게 보인다.
곤이 어정쩡하게 주홍련의 말장난에 시달리고 있을 때다.
화려한 긴 드레스차림의 미모와 몸매가 빼어난 한 러시아여인이 주홍련에게 다가와 무언가 속삭이고 갔다.
곤이 긴장하며 경계하자,
“걱정 마셔요. 저 여자는 자금루의 첫째 마담인 카타리나에요. 나를 찾는 지명손님이 왔다며 알려주러 온 것이에요. 만약 야노프스키라면 붙들어놓고 곧바로 연락드릴 테니 염려 말고 가만 계시면 금방 돌아오겠어요.”
그녀가 자리를 뜨자 홀가분해진 곤은 비로소 주변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한패의 중국인들이 여자들과 뒤섞여 떠들고 있다. 그리고 홀 중앙무대 앞에 몇 쌍의 남녀들이 멋들어진 서양 춤을 선보였는데 그 춤꾼들 속에 주홍련도 보인다.
뚱뚱하고 부유해 보이는 중국인사내 품에서 미끄러지듯 빙글빙글 춤을 추다 곤과 눈길이 마주치니 남몰래 윙크를 한다. 음악이 몇 번 바뀌자 곤의 옆자리로 되돌아와서,
“어때요! 저랑 한 곡 추실래요?”
“나는 그동안 말로만 듣던 서양 춤을 오늘 처음 구경한 것이오.”
“호호! 오만하게 말하는 잡벌들 보다는 났군요.”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더니,
“저에게도 한잔 주시면 누가 뭐라나요.”
곤이 따라 주는 맥주잔을 단번에 비울 줄 알았는데 그저 입술만 살짝 적셔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카타리나라는 저 러시아인 마담은 관동군의 밀정이에요. 어쩌면 교묘한 이중첩자인지도 알 수 없어요. 만약 그녀가 당신에게 수작을 걸어오면 여하튼 조심하여야 해요. 험한 꼴로 죽어나가기 싫으면 말이에요. 여기 드나드는 여자들 대부분 다 그래요.”
보통 사람이라면 꺼려지는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험악하지 않다.
곤은 여자가 세상 험한 일을 많이 보고 겪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야노프스키란 자가 아직 눈에 띄지 않는군요. 그러고 보니 그자가 요 며칠간은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어요.”
“...?”
“걱정하지 말아요. 설마 한들 눈치 채서 달아난 것은 아닐 테니까요. 지갑이 두툼한 걸 보았으니 틀림없이 어디선가 젊은 여자를 끼고 빈둥거리고 있을 것이에요.”
“문 닫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자금루는 불야성(不夜城)이에요. 돈만 내면 누구라도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며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과 얼마든지 즐길 수 있어요. 당신도 한번 그래 보실래요?”
“나에게 그런 객기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시오?”
“글쎄요. 남자들이란 기회만 있으면 다 똑 같은 늑대지요. 당신이라고 해서 다를 봐 뭐 있겠어요.”
“아하핫! 아가씨께서 말씀을 참 재미있게 하시는군요.”
“어쩌다 일찍 문을 닫을 때도 간혹 있어요. 그런 경우는 안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났거나 사람이 죽어나갈 때지요.”
밤이 늦었어도 야노프스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여자에게 시달리며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어 걱정이 태산 같은데 의외로 주홍련이 곤을 풀어주었다.
“저를 기다리는 손님도 있고 하니 오늘은 이만 예라이샹으로 돌아가셔요. 당신을 이 위험한 곳에 혼자 내버려둘 수도 없고 하니 말이에요.”
“야노프스키가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그는 이렇게 늦게는 잘 나타나지 않아요. 혹시라도 나타나게 되면 내가 붙들고 앉아 예라이샹으로 즉시 사람을 보내겠어요.”
“그럼 내일 비슷한 시간에 다시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곤은 주홍련의 마중을 받으며 자금루를 나와 예라이샹으로 돌아왔다.
힘들고 피곤한 날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소기는 잠들어 있었고 기다리던 패천웅노인이 격려차,
“장사! 걱정 마시고 내일을 위해 푹 쉬시지요. 그자는 이미 그물에 걸린 자입니다.”
“감사합니다. 자금루에다 사람을 보내셨더군요.”
“그 여자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음날, 곤은 다리에 불이 난 것처럼 자금루로 쫓아갔다.
주홍련이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 나와 이 층 어느 밀실로 숨기듯 데리고 들어가기에,
“이런 곳에 있으면 놈이 나타나도 그냥 놓쳐버리기 십상이오.”
“쉿! 조용히 해요. 입은 화구만 해가지고. 자금루에는 벽에도 눈과 귀가 있는 곳이에요. 지금도 누군가 남몰래 우리를 감시하며 엿듣고 있는지 몰라요.”
주홍련은 곤을 손을 잡아끌며 소파에 강제로 밀어 앉혔다.
“그자의 얼굴은 저도 알고 있으니 저에게 맡겨 두어요. 만약 그자가 당신을 먼저 발견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어요. 그냥 여기서 술이나 마시며 저를 찾아온 손님처럼 행동해야 별 문제가 생기지 않아요.”
술이 들여지자 주홍련은 주렴을 닫아버렸다.
“자, 마셔요!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세상 어딘가에 털끝 같은 인연이나마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골치 썩이는 세상일일랑 모두 밀어놓고 다정한 속삭임으로 건배라도 하면서 말이에요.”
곤은 하는 수 없이 주홍련의 요구에 응하는데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며,
“우리의 인연이 멋지고 근사하게 끝나기를 건배해요.”
“챙!”
두 개의 유리잔이 부딪히자 공명하는 맑은 소리가 울린다.
주홍련은 곤의 잔이 먼저 비워지기를 지켜봐 기다렸다가 자신의 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당신 엉뚱한 생각으로 잔을 비웠지요?”
“물으나 마나 야노프스키가 빨리 나타나 주길 바라는 것이지, 아니라면 그 무엇이겠소?”
“어머나! 이런 나쁜 사람! 여자와 건배를 하면서 다른 남자를 개입시키다니 당신은 정말 무심한 사람이군요.”
보기보다 까탈스런 성정을 가진 여자다. 실망한 눈으로 쳐다보기에,
“미안하오. 내말을 그대로 새겨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좀 겸연쩍어 그렇게 말했을 뿐 실은 다르오.”
여자의 변덕을 누구 못지않게 경험한 곤이다.
가는 곳마다 왜 별스런 여자들만 만나게 되는지 질리기도 하다.
주홍련이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나와 건배를 하였어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분과 친교를 맺게 해준 이 자금루에 감사하였으며 아가씨와의 교분이 오래 유지되기를 기원하였소.”
곤은 주홍련이 듣기 좋게 말해놓고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오호홋!”
주홍련이 몹시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으며,
“사람이 처음에는 그렇게 아니 보이더니만 이제 보니 완전히 딴판이군요. 누가 들어도 빤한 거짓말을 순식간에 꾸며내다니요. 오호호홋!”
곤은 속으로, ‘하여튼 여자들 속 배알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하며 투덜거리는데,
“호홋! 저는 제발 야노프스키가 천천히 나타나달라고 빌었지요.”
주홍련은 곤을 마음대로 놀리며 즐거워하였다.
오늘 밤에도 야노프스키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저런 며칠이 지나 그새 팔월이 다가선다.
소기는 예라이샹에서 잔일을 돌보고 있고 지쳐버린 곤은 예라이샹에 퍼져 주홍련의 연락만 눈 빠지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저녁은 기다리다 못해 마차를 불러 타고 자금루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손 놓지 못해욧.”
곤이 탄 마차가 어두운 개천 길을 지나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의 고성이 밤을 찢으며 들려왔다.
“누가 좀 도와줘요.”
놀랍게도 다급한 목소리는 주인은 바로 주홍련이다.
곤은 급히 마차를 세우게 하고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달려가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명의 건달패들가 주홍련을 어디로 끌고 있었다.
“이놈들! 무엇 하는 망나니들인지 모르겠으나 당장 그녀를 놓아주고 썩 꺼져라. 나를 화내게 하면 온전치 못할 것이다.”
힐끔 쳐다보는 태도로 보아 갑자기 나타난 방해꾼을 즉석에서 처리할 심산인 모양이다. 한 명이 잭나이프로 돌연 곤의 가슴을 공격했다.
“악! 위험해요.”
놀란 주홍련이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쓰러진 것은 기습적으로 칼을 휘두르던 자다.
“이 나쁜 놈, 주제 없이 꼴값 떨기는.”
주정꾼에 불과한 나머지 한 놈은 동료가 단번 나동그라지자 주춤주춤 몸을 사리며 물러섰다.
곤은 삼류건달꾼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홍련씨, 다친 데는 없습니까?”
“전 괜찮아요. 때마침 잘 나타나주셨어요.”
그 사이에 놈들은 잽싸게 도망을 쳤다.
“어찌하다 저런 하류들에게 봉변을 당하게 되었소?”
대답대신 주홍련이 축 늘어지며 곤의 가슴으로 쓰러져왔는데 살펴보니 그녀를 대해본 중에 가장 많이 취해 있었다.
“이래가지고서 집까지 어떻게 갈 수 있겠소?”
“흥! 이까짓 취기로 길거리에 엎어질 줄로 생각한다면 착각이지요.”
술주정을 얹어 빈정거린다.
“다행이오. 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놓이질 않는군요.”
“참 다정도 하시지. 어찌나 고마운지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하는군요. 당신 언제 내 걱정을 한 번이나 하여보았어요? 잔말 말고 나를 막아선 길이나 비켜요. 당신이나 이 유령천지 도시의 밤길을 잘 살펴가..요..”
입으로는 가라면서도 매달린 팔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절대로 놓으려 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지나는 마차를 불러 주홍련을 밀어 올리고 옆자리에 앉았다.
주홍련은 혀 꼬부라진 말투로 마부에게 목적지를 말하더니 이내 곤의 어깨에 축 늘어져버렸다.
좁은 길과 건물모퉁이를 돌고 돌아 마차가 반시간 정도를 달렸을 것이다. 좋지 않은 냄새가 나고 바닥 질척한 도랑창을 거슬러 올라가더니 만주인들이 모여 사는 너절한 골목 어느 모퉁이에 멈춰 섰다.
주홍련은 낡은 목조 이층집에 성냥갑만한 방 하나를 빌려 혼자살고 있었다. 곤은 주홍련을 번쩍 안아들고 벽 쪽에 놓인 그녀의 침상 위에 가지런히 눕혔다.
“싸우는 모습이..번개처럼 빠르고 정말 멋졌어요...”
그녀가 잔뜩 취한 상태에서 계속해 무어라 중얼거린다.
“가..지 말아요.”
“걱정 마오. 옆에서 지켜있을 것이오.”
“아! 내 마음을 감동..시켰으니..고맙기도..하군..요.”
“위기에서 구해주었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빈정거리는 이유는 무슨 심통이오?”
“이유야 많지요..당신은 나를..그저 그렇고 그런 여자로..생각하고..있지요..”
침상 위에 엎드린 채 곤에게 빗댄 말만 던진다.
“나는 화내지 않을 것이오. 아가씨께서 어쩌다 화류계로 발을 들였는지 모르지만 한 번도 당신을 속되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 말..믿어도 될까요..?”
“물론이오. 나를 속 얕은 저급한 인간으로 간주하지 마오.”
“하지만..당신은..거짓말을..너무 잘 해요..”
“나 참! 속 뒤집는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하고 잠이나 순하게 청하시오.”
“당신의..해명을 듣기 전에는 잠들지 않을..것이에요.”
“내가 아가씨의 고운 마음씨와 아름다움에 혹하였음은 사실입니다. 단지 너무 고와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것이 아가씨에게 내가 멀리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면 실망스럽더라도 나는 지금 당장 돌아갈 것이오.”
“어머나! 저렇게..말을 잘도 하시는 것으로 보아..당신은 틀림없이 여자를 많이 대해본 사람일 것이에요..지금까지..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를 울려왔지요? 아마..그 여자들이 죽으면..영락없이 모두 귀신이 되어..나타나 당신을 괴롭힐 것이에요..”
술 취한 것을 핑계로 주홍련은 그렇지 않아도 흐린 곤의 심사를 고약하게 유린해들었다. 곤이 좀 따지려 할 때 주홍련이 술기운을 못 이겨 천천히 깊은 잠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녀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니 쓸쓸한 들녘 어느 한 자락에 홀로 핀 흰 산국(山菊)처럼 아름답다.
온갖 뭇 사내들한테 시달리면서도 청순한 아름다움을 잘 지녀 간직하고 있으리라.
곤은 주홍련의 어지르진 잠자리를 살펴주고 그녀의 화장대를 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니 다른 사람으로 여겨진다. 투명한 거울 저편에서 또 하나의 자신이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이 괴상할 뿐이다.
곤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살피며 생각에 잠겨있는 새벽, 날짜로는 1945년 8월 6일이다.
원자폭탄을 싣고 미 제509비행단 소속 B-29 에놀라게이호가 중부 태평양 테니만섬 제20공군 기지를 이륙했다. 총 7기의 B-29로 구성된 혼성비행대의 목적지는 이십사오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히로시마다.
무조건 항복이냐! 아니면 멸망이냐!
히로시마는 일본 츄우코쿠(中國)지방에서 제일 규모 큰 도시로 전쟁 전 인구는 이보다 훨씬 많았지만 분산되었다. 제2육군사령부가 있고 미군의 상륙전에 대비하기 위한 남부본거지였기에 불운의 선택을 받은 도시가 되고 만다. 도시가 그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때가 오전 9시 20분경이었고 주홍련이 잠에서 깨어난 것도 같은 시간이다. 곤이 그녀와 주담 중에 알았던 사실이지만 그녀는 일본군에 의한 남경만행에서 언니 한 명을 제외한 일가족 모두를 잃었다.
그러나 화를 면했던 유일한 혈육인 언니마저도 첩자라는 죄목아래 납치되어 731부대에서 마루타로 희생되고만 것이다.
깊은 수면에서 깨어난 주홍련이 아직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자기를 지켜 앉은 곤을 보고 무척 기뻐한다.
“어머나! 아직도 불편한 의자에 그렇게 앉아 계신 줄은 몰랐어요.”
“아니오. 아주 편안하게 보낸 밤이었습니다.”
“저 때문에 고생하셨군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곁에 계셔주어 정말 고마워요.”
“하핫! 아가씨도 사람을 칭찬할 줄은 아시는 모양이군요.”
주홍련이 가만 웃으며,
“곁에 남자를 두고 잠들다니..하지만 당신이었기에 편히 잠들 수 있었을 것이에요.”
어느 정도 지난밤의 술기운을 밀어낸 주홍련이 듣던 중 가장 반가운 말을 하였다. 야노프스키가 드디어 자금루에 모습을 나타냈다한다.
잔뜩 퍼마시고는 젊은 여급과 어울려 어디론가 나갔다는 것이다.
평소와 달리 야노프스키를 유혹하여 오늘 다시 들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놓았다며,
“그자가 나만 보면 그렇게 성가시게 굴더니 오늘밤은 당신에게 혼이 좀 나겠군요. 지난밤 두 건달패를 혼내준 그 장소에 미리와 기다리면 내가 그자를 유인해 내겠어요.”
두 사람은 오늘 하루는 푹 쉬면서 야노프스키가 모습을 드러낼 밤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주홍련의 청을 들어 그녀와 함께 근처 공원으로 나들이 나가 하얼빈의 하루를 즐기기로 하였다.
푸른 물과 숲, 파아란 하늘이 두 젊은 가슴을 파랑새처럼 퍼덕이었다.
“고마워요. 이렇게 즐겁고 근사한 날이 나에게도 있긴 하군요.”
곤은 주홍련의 밝은 얼굴과 낙락해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녀의 작은 소망을 묵살하지 않기 잘 하였다며 흐뭇해하였다.
알고 보면 이날 소풍놀이는 주홍련에게 주어진 많은 날 중 가장 행복한 날의 한때였을 것이다. 놀이 나온 아이처럼 곤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나 이것 사줘. 저것 같이 해봐. 이것은 어때? 어린애처럼 억지 부리며 생떼를 쓰기도 했지만 곤은 짜증내지 않고 그녀가 무엇이건 하자는 대로 다 해주고 다 들어주었다.
어디로 보나 연인이나 다름없는 청춘남녀다. 인력거를 빌려 타고 시내중심가 곳곳을 나돌아 다녔다. 하루해가 다 저물도록 세상 근심은 모두 잊은 채.
주홍련이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는 쓸쓸한 모습으로 기대어오더니,
“아! 오늘처럼만 살 수 있다면..감사드려요. 세상이라고 태어나 이런 날이 있으리라곤 여태 꿈마저 꿔본 적 없었어요.”
“걱정 마오. 아가씨의 앞날에는 이런 날들만 넘쳐날 것이오.”
인생을 놓고 보면 하루란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한 것이지만 주홍련은 서먹한 곤에게 의지하여 세상 고뇌를 잠시나마 잊었던 모양이다.
원자탄인가 뭔가 하는 괴력의 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는 것도 늦게야 떠도는 소문으로 알았다. 진위는 확인할 수 없지만 허둥대는 일본인들 모습에서 심상찮은 징후가 포착되는 것으로 보아 통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에도 무엇 그리 재미있는지 주홍련은 띄우고 있던 화락(和樂)의 표정을 내내 걷어내지 않았다.
이제 시간이 흘러 때가 된 것이다. 주홍련은 이날따라 유난히 화사하고 요염한 옷차림으로 나서며,
“약속된 시간에 만나요.”
“홍련씨, 조심하여야 하오.”
남게된 곤은 가슴에 감추고 있던 한 자루의 손칼을 탁자 위에 올렸다.
율리비치가 늘 지니고 다니던 사냥칼이다. 이 단검을 품고 다니며 율리비치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원한을 깊이 새겨왔다.
곤은 율리비치의 원혼에게 기원하였다.
“어두운 지하에서 아직도 원통한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그리운 나의 벗 율리비치님! 오늘 밤, 드디어 이 단검이 놈의 심장을 도려낼 것입니다. 혼이나마 나의 곁을 지켜봐 주십시오.”
곤은 복수에 불타는 마음을 부여안고 주홍련이 정해준 시간보다 조금 일찍 예정된 장소로 나갔다. 그리고 주변의 여건을 눈에 익혀 놈이 모습을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곤은 전운(戰雲)짙은 하얼빈에 더 이상 지체하여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밤이 으쓱하였고 초조한 시간이 지나간다.
복수의 화신이 되어 어둠에 숨어있는 곤의 귀에 술주정하는 주홍련의 혀 꼬부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와 야노프스키로 추측되는 두 개의그림자가 어둠의 저편에서 어른거리며 다가온다.
“...”
곤이 증오가득 묵묵히 길을 막아서자 놈이 엄포를 놓는다.
“무엇 하는 놈이기에 겁 없이 남의 길을 막아서는 게냐. 사람을 잘 택하여 행동해라. 이 바닥에 굴러먹는 놈이라면 내가 누군지 모르지는 않을 것일 텐데.”
야노프스키는 자신을 과장하며 허풍을 떨었다. 만약 옆에 주홍련이 착 달라붙어 있지 않았다면 말보다 먼저 권총을 꺼내 쏘았을 것이다.
“야노프스키 네 이놈! 수천 번을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놈. 이제야 네놈을 만나게 되었구나. 네놈을 찾느라 뼈 깎는 어려움을 수없이 겪었지만 오늘에야 그 숙원을 풀게 되었다.”
지옥의 사신이라도 이처럼 증오의 한을 품어내지 않을 것이다. 사무친 원한으로 노려보는 곤을 보고서 야노프스키는 그제야 기겁을 하며,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비열한 살인자! 나를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네놈의 손에 원통하게 숨져간 율리비치님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여 비명에 쓰러진 율리비치님의 원한을 달래드리고 말 것이다.”
야노프스키는 사태의 전모를 직감하고 주홍련이 자기에게 덫을 놓아 유인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네 이년! 나를 속였구나.”
주홍련은 사전에 곤이 주의시킨 그대로 이미 야노프스키에게서 멀리 떨어져 피해 있었다. 질겁한 야노프스키를 지탱시켜주는 것이 있다면 감추고 있는 권총이다.
“야노프스키 이놈! 이 원한의 단검으로 네놈의 심장을 도려내 구천을 억울하게 떠도는 율리비치님의 원혼을 위해 바치리라.”
야노프스키가 숨겨 다니던 권총을 꺼내들고 곤을 겨누었지만 공격거리를 확보하고 있던 곤의 단도가 더 빨리 야노프스키의 심장을 찔렀다.
“으흑!”
야노프스키도 전문가였기에 자신의 실력을 웬만큼 확신하고 있었을 터이나 곤의 공격이 전광석화처럼 빠른 줄이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야노프스키가 율리비치의 단도에 찔려 외마디 비명으로 바닥에 쓰러지자 곤은 이를 차디차게 내려 보며 율리비치의 명복을 빌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원혼으로 떠돌고 계실 율리비치님! 여기 당신의 단검으로 야노프스키의 피를 뿌려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코자 하였으니 부디 맺힌 한을 풀어 지하에서나마 편히 지내십시오.”
그리고 벌벌 떨고 서있는 주홍련을 돌아보며,
“주홍련아가씨! 나를 도와주어서 무어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일이 알려지면 아가씨에게 위험이 닥칠 수 있습니다. 뒷일은 나에게 맡기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 계십시오. 하얼빈을 떠나기 전에 꼭 찾아 들리리다.”
막상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넘어지는 것을 본 주홍련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 말씀은 꼭 지켜야 돼요.”
“약속드립니다. 속히 이 자리를 피하시오.”
“그럼 나중에 뵙겠어요.”
주홍련을 돌려보낸 곤은 미리 보아둔 장소에 야노프스키의 시체를 처리하고 패천웅이 미리 대기시켜준 인력거를 타고 예라이샹으로 돌아왔다.
“장사! 결국 처리하셨군요.”
“대인어른의 도움이 계셨기에 무사히 일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곤은 놈의 피로 더렵혀진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 준비된 옷으로 말끔히 갈아입었다.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시오.”
“응당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제 마음 놓고 하얼빈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고 보아왔지만 장사같은 사람은 처음이외다. 동북이 암흑에 덮이더라도 장사의 명성과 무용담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극찬의 말씀이십니다. 신의와 도리를 지키고자 한 것뿐입니다.”
곤은 이때에 패천웅노인의 입을 통해서 히로시마에 투하된 그 무서운 원폭에 대한 실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처럼 가공할 폭탄도 다 있군요. 생각만 해도 인류의 미래에 등골이 오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경지대에 소련군이 전진 배치되며 증강일로에 있다는 정보를 받았소이다. 소문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벌써 밀려들었을지도 모르지요.”
패천웅은 길이 막힐 것을 염려하며 지체 없이 소기를 데리고 조선으로 떠날 것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장사님의 것입니다.”
패천웅이 돈지갑으로 모이는 것을 쓱 내민다.
“...?”
“강진이가 나에게 맡겼던 물건을 처분한 것이지요.”
곤은 조금 망설이다 그것을 받았다.
“쓰일 데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도 드리고 갈 것이 있습니다.”
곤은 차오가 준 선물 중 녹용을 패천웅에게 건넸다.
“저를 돌봐주신 작은 성의입니다. 거절치 말아 주십시오.”
“오! 장사, 이 귀한 것을 선뜻 내주시다니 그럼 정리로 거두겠습니다.”
“소기에게 떠날 차비를 시켜주십시오. 저는 잠깐 들릴 곳이 있습니다.”
“마차를 불러 드리지요.”
곤은 패천옹에게 말하지 많았지만 하얼빈을 떠나기 전 무라가와대좌를 만나보아야 하였기에 헌병대로 급히 마차를 몰았다.
긴장감이 감도는 헌병사령부의 분위기도 매우 침울하였다.
무라가와가 전출되었다는 짤막한 소식뿐 별 소득이 없었지만, 오끼나와에서 전사하여 세상 사람이 아닌 무라가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사실 모르는 곤은 자기를 돌봐준 무라가와에게 무심할 수 없었다.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무라가와의 사저가 있던 일본인개척마을로 다시 마차를 달려갔다. 그러나 집은 비워져 있고 중년의 하녀도 행방을 알 수 없다. 무라가와의 난초들만이 빈집에서 메말라가고 있을 뿐.
뿐만 아니다. 개척마을의 일본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짐 보따리를 단단히 꾸려놓고 만약에 대비하며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긴박히 서두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밝은 미래를 꿈꾸며 활기 넘치던 일본인들 개척마을이다. 그랬는데 지금은 공포감만 팽배하였고 죽음이 덮칠 유령마을처럼 음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곤은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를 떠나면서 극도의 긴박감을 느꼈다. 일본인들은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듯하다.
만주에 기반이 별로 없는 일본인들은 벌써 많은 수가 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아직도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요행을 바라는 일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곳에 자신들의 모든 재산을 투자하였기에 마땅히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다.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소련군만은 제발 대일전에 참전치 않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무사하기를 그들의 전쟁신에게 두 손 모아 빌고 빌었다.
일본인들은 말할 것 없고 이해관계가 얽힌 동북 여러 계층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던 일이 아무래도 들이닥친 듯하다.
1945년 8월 8일을 기하여 동북은 결국 새로운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려든다. 하얼빈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고 소용돌이의 중심에 휘말린 사람들은 너나없이 전율했다.
동북 어느 종족보다도 소련의 참전을 두려워하던 일본인들의 우려가 현실로 이어진 것이다.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이 모든 전선을 돌파하여 거침없이 휩쓸고 내려왔다.
한때 적이 없을 것처럼 위세를 자랑하던 관동군이지만 물살 터진 둑처럼 볼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들려오는 풍설(風說)도 일본인들에게는 몸서리치는 소문의 연속뿐이다.
청진으로 허겁지겁 몰려간 일본인들이 용케 일본으로 떠나는 배편을 마련하였지만 블라디보스톡에서 출항한 소련함정에 의해 모두 나포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갈 귀국로가 차단되었다는 것을 암중 의미하였다.
천황군대의 능력을 믿고 있던 일본민간인들 처지는 참담하였다. 남의 땅을 차지하여 누리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소련군이 장악한 지역에 갇혀버린 일본인들은 피가 말라붙는 두려움 속에 모든 모욕과 능멸을 감수하고 있었다.
소련군들은 특히 일본인 여자라면 먼저 보는 자가 임자라는 듯 닥치는 대로 겁탈했다. 꼼짝없이 갇혀 당해야 하는 오욕(汚辱)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수밖에 없다.
반항과 저항은 죽음으로 직결되었다. 살아남으려면 모든 치욕과 모멸을 그대로 감수해 넘겨야했다. 처지가 뒤바뀐 일본인들은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일념뿐이다.
굴욕이란 당할수록 더 견뎌내어 살고 싶은 본능을 떠받친다.
일본인들의 딱한 입장을 두고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닌 곤은 마땅한 방법을 찾을 때까지 예라이샹에서 바깥 형편을 살피고 있는데 패천웅노인이 봉천으로 떠나는 특별열차편이 편성된 것을 알려주었다.
11일 오전을 기해 민간인들을 수송하기 위한 열차가 관동군사령부가 있는 봉천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곤은 하얼빈을 벗어나기 전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금루를 다시 찾았 다. 다행이다. 화분에 심어진 화초처럼 주홍련이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자금루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오셨군요. 나는 당신이 자신의 말은 꼭 지키시는 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전과 다름없이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게 흉흉하여 당신을 다신 못 볼 줄 알았어요.”
주홍련이 쓸쓸하게 말한다.
“내가 어찌 홍련아가씨에게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하얼빈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
주홍련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다.
곤은 그녀가 마음을 망실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전처럼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오. 입을 닫아 붙이고 앉아만 있으니 어쩐지 서먹한 것 같지 않으시오?”
그래도 주홍련은 말이 없다.
맥주 한 잔을 건네주며,
“그 동안 고마웠소. 사람의 인연이란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법이라오. 처음에는 아픔이 있기 마련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조금씩 잊어지게 된다오. 당신을 남겨두고 가는 나의 심정도 당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니 그런 우울한 얼굴로 서로의 마음을 속박하지 마시오.”
“누가 그 뭐라 하였던가요? 괜히 혼자서 야단이시네. 나를 두고 가는 당신이 그따위 말을 하는 것부터가 별스런 치장일 뿐이에요.”
“너무 야박하게 몰아붙이지 마오. 서로 감춰진 아픔이 있었더라도 다 잊고 술이나 한잔 마십시다.”
말없이 비우는 술잔!
주홍련의 뺨이 곱게 익어가고 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을 앞에 두고 곤은 무라가와가의 말처럼 세상 모든 술이란 술은 다 마셔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 북국 땅에서 인연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술잔 들며 마음을 바쳤다.
다시 찾아올 수 있을 땅인가!
“주홍련아가씨! 나는 당신의 창망(滄茫)한 앞날에 오직 행운만이 깃들기를 바랄 것이오.”
마침내 주홍련이 눈가에 비치는 눈물을 소매 끝으로 찍는다.
“결국 당신에게서 이별의 말을 듣고야 말았군요. 나는 당신이 그냥 떠나주기만을 기대하였지요. 당신을 기다리는 그 기쁨 한 가지를 안고 거친 세상을 견뎌보려 하였는데 말이에요.”
“홍련아가씨의 앞날에는 분명 좋은 일만 가득 넘쳐날 것입니다.”
“그래요. 이제 당신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나보군요. 비록 만남은 짧았지만 나는 당신의 자취를 영원히 도려내지 못할 테지요.”
주홍련이 말을 다 맺지 못하고 어깨를 떨며 흐느낀다.
침울한 도시 한 귀퉁이에서 치루는 또 하나의 아픈 흔적이다.
“받아주오. 나를 도와준 보답과 정리로 드리는 것이라오.”
곤은 패천웅에게 건네받은 돈지갑과 흑초피를 주홍련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눈물에 가려 불빛마저 처량하게 느껴지는 자금루 한구석에서 아픔으로 채워지는 술잔을 또 비웠다.
주홍련의 눈물 떨어진 잔속에 앉아 태양빛 가득한 대륙에서 맺은 숱한 인연들을 돌아보며. 심심풀리이로 풍걸
첫댓글 이 편을 끝으로 엉소를 마감하고자합니다. 미안죄송.
(언젠가는 하편도 선보일 것입니다.)
손가락 아야 하면서(독수리 타법이라.) 제가 이 강력 남성위주의 엉소를 시작한 연유는 우리 남성들이 진짜 가련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모계사회로 진입된 변화과정에서 남자들은 볼품없이 쪼그라들고 처량토록 나약해짐에 나름 애써 기운 좀 내시라며 시작한 것이지요.
그 동안 저의 얄궂은 엉소를 탐독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일송정님과 OK일베님께. 또 여걸들과 그 누구누구...) 넙죽 넙죽.
빠른 시일안에 2편이 재개되기를 바랍니다
오케일베를 비롯한 지킴이 안젤리나 등등 많은
열렬한 독자들이 기다리고있습니다
엉엉엉 엉소
주루주룩 흐르는
가슴속 찬비
손가락 아파가며 쌓아간 사연 속에
풍걸행님 베푸신 마음에 더욱 감사드려요
하편으로 봄쯤에 돌아오시기를 원합니다
추운곳에서 갖은 열정을 다하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풍걸님
감사드립니다. 악조건 속에서 열심히 올려주신 엉소 잘 읽었습니다.
후속편 았으시다니 기대합니다.
오래 기다리지않게 해주세요.
겨울 건강 잘 챵기시기 바랍니다.
아하! 고정 독자 한명 놓쳤네요.
이쁜손님께서는 주렁주렁 수없이 열린 복을 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