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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00년 마이애미 한인 장로교회에서 8월 첫번째 일요일 일생에서 가장 큰 감동과 연민으로 울음바다가 되였던
지금도 마음이 서먹한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쿠바에 5년동안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던 대학 서반어과 동기 양원건 장노의(현재 목사) 초청으로 쿠바에서 온
한인 2세 Jeronimo Lim씨가 단상의 마이크와 마주섰다.
(양목사는 남한보다 넓은 쿠바에 100개가 넘는 지하교회를 만들어 놓았다.)
세련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몸속에 전류가 흐르듯 감정이 뜨거워 졌다.
어린시절(1905년) 멕시코에서 쿠바 이민 288명중에 한사람으로 막막한 두번째의 타국 생활 고난과 희망의 삶을
이야기할 때 신화적인 차원의 영감을 받았다.
1921년 멕시코에서 3년계약이 끝났을 때 조국은 이미 일본에 속국이 되여 여권이 무효되무로써 갑자기 국제 미아로 변하여
어느 나라도 조선인들을 반겨주지 않아 Havana 앞바다에 1개월 동안 배 안에 갇혀 두려움과 국제사회로 부터 소외된
민족의 감정을 피력할 때 부터 몸 안에 있던 모든 눈물이 샘솟듯이 흘러내렸다.
그들은 끼니를 걸으면서 3년만에 당시의 화폐가치로 엄청난 금액인 4,000불를 모아 상해의 임시정부에 보냈다.
나라를 빼앗긴 국민의 슬픔을 처음으로 느껴 보았다.
그들의 애국심을 후세 사람들이 알아주기나 할가.
그는 대학 동기인 휘델 카스트로를 도와 공산혁명을 세웠고 산업 장관으로 그 정권에 동참했다.
퇴임후 그는 한인 동포들의 미래를 위해 그들을 가르치고 한국인의 긍지와 희망을 갖도록 모든 정성을 쏟았다.
당시 그의 형제 6명중 3은 서부 캘리포니아 2은 훌로리다에 살고있었는데 그의 막내 여동생은 학교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직업이나 개인적으로 당하는 당신의 Identity가 뭡니까 하는 질문에 항상 곤혹을
치러야 했는데 오라버니의 강의를 듣고 이제 답을 찿앗노라며 목놓아 울어버릴 때에는 전 교회가 들썩일 정도로
울음과 슬픈 흥분속에 잠겨버렸다.
생애속에서 각자의 시간과 운명에게 주어진 인생 드라마 속에서 선택과 사명감을 절감하며 축복과 은혜라는 보답으로
얼마나 신화적이며 신비로운 일생을 살아냈어야 했는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큰 감동과 감화를 받았던 시간 이었다.
쿠바 한인 역사속에 가장 뛰어난 인물 Jeronimo Lim을 소개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감개 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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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70만의 한인 교포들의 디아스포라와 이민의 역사는 노동력의 세계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진정 1902년 하와이를 비롯 1905년의 멕시코 이민의 시작부터였다. 1904년 영국인 John Mayers이 에네껜을 재배하는 유까탄 반도에서 일어났던 극심한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에네껜은 인디오 원주민들이 처음으로 이용한 노끈 이며 밧줄 또는 마포를 만드는 재료인데 유롭인들이 선박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소맥산업이 번창하면서 푸대를 묶는 끈으로 더할 수 없는 필수품으로 바뀌면서 에네껜의 공급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이미 중국 일본인들이 들어와 있엇지만 청나라와 일본은 자국국민들이 혹사당하고 있음을 알고 이민을 전면 금지 시꼇지만 유독 한국은 이민법도 멕시코와 국교도 안되어 있는 상태였다. 일본 이민회사의 부사장 이였던 히나타 떼루마케와 교섭 서울에 대륙 신민 합자회사 출장소를 설치해 한인들을 모았다. 광고 모집에 푸른 황금밭에서 떼돈벌어 4년후 고향에 돌아온다는 사탕발림 약속에 곁드려 어린아이가 7살이되면 국민학교에 입학할수 있다는 달콤하고 현혹된 광고로 전국에서 차출했다. 남자 702면 여자 135명 어린아이 196명 즉 257가족 플러스독신자 196명 총 1033명이 6개월 미만에 서울 평양 수원등 전국 18개 지역에서 보집되었다.
이들과 후예들 288명이 1921년 1월 멕시코를 떠나 큐바로 다시 이민을 했다.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 1937-1945년 까지 조국광복을 위해 그들에게는 엄청난 금액인 1천 4백 89불을 하바나에 있는 중국은행을 통해 중국등 각지로 송금을 보내면서 조국을 향한 사랑과 염원을 보여주었다.
1998년 11월 23일 마이아미를 떠나 Costa Rica를 통해 - La Linea Aera Cubana -편으로 11월 26일 Habana에 처음으로 경험하는 사회주의 국가에 도착했읍니다.La Habana, Matanza, Cardenas, Varadero Fuaguey Grande 이렇게 약 1,800 Km의 여행길에 5개의 도시를 방문했으며 특별히 이지역을 관심의 대상 지역으로 선정한 이유는 80년전 우리동포들의 밀집지역으로서 한민족 선교에 우선을 두었기 때문이였읍니다.
전혀 아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 우린 먼저 Cardenas 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가는 사람 걸어가는 사람 가정집을 찿아다니며 혹시 한국인 가정을 아느냐고 물었읍니다. 그중 자전거를 타고가던 한 청년이 알려준 집을 찿아가 보니 그분들은 중국사람들 이였읍니다. 그 부인은 한국인 가정을 알고 있어 저를 안내해 주었읍니다. 그 첫번 만난 부인은 Dora Lee 씨 부인의 집이였읍니다. 처음 만났지만 오래만에 만나는 친척집 같아 서로 반가움으로 상면하며 그 가정이 장로교의 신앙을 갖고 있음을 발견 했읍니다. 이제 그녀의 가정은 우리 선교부의 친정집이 되였읍니다. 그가정을 통해 모든 교포를 만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우리 큐바 선교는 이렇게 시작 되었읍니다.
- 2012.09.30
양원건은 70년대 Columbia에서 대학을 이수하고 바로 Costa Rica로 옮겨
대학원 공부를 하는 동안 학비를 벌기 위해 태권도 도장을 차려 크게 성공했다. 1984년 카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 선수팀을 훈련 참가해 역사상 처음으로
그 나라에 동메달을 안겨 주어 국가 영웅대접을 받았다.
그가 마들어 놓은 고등학교 체육 교본은 지금도 교제로 쓰이고 있다.
도장에서 나오는 충분한 자금으로 부동산에 투자 거기서 생기는 이익금으로
큐바의 선교를 가능하게 만든 동기가 되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남미 24 개국 정복을 이루어 낸 스페인 정부는 마지막으로 재원과 인적 투자를 동원. 새로운 스페인을 큐바에 건설하려고 모든것을 지불해 세운 마지막 나라
였다. 유능한 군의 퇴역 장군들 예술인 경제인 모두가 가고 싶었던 신천지인
스페인의 자부심 이였다. 그러한 민중의 엘리트 의식 때문에 전반적으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던 남미에서 공산주의는 전혀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유독 큐바의 진보된 문화 경제의 온도에 맞아 공산주의가 정착하게 된다.
면적 104,556 평방 킬로 (남한의 99,800 평방 킬로 보다 넓음) 길이 1,250 Km 넓이 191 Km 로 미국남단 Key West에서 90 마일 144 km 남쪽에 위치해 있다.
지난 40 차례의 선교보고서에 의해 역사의 뒷장으로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던 공산권이라는 이유 하나로 대한민국이 방치하고 관심밖에 놓여 있는 이들의
추적을 쫓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땅끝 까지 전도 하는 의로운 선교 활동을
살펴보고 싶다. 우리의 정열 우리의 실력으로 우리의 결단으로 기적의 사역을 감당해 내는 이들의 노고를 감사드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 한다. 대한민국이 이분들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 반드시 오게 될것이다.
1999년 10월 11일 부터 2000년 1월 23일 사이 3번째 사역의 보고서 일부에 이렇게 보고 한다.
"그들의 삶이은 너무나 비참했고 불쌍했읍니다. 그들은 완전히 이 세상에서
잊혀진 인간이 아닌 동물의 세계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읍니다. 정말로 문명이나 발전이나 소망이나 그 무엇도 기대할수 없는 세계였읍니다. 하나님께선 본(우리의) 선교단을 통해 복음과 사랑을 전하게 하셨고 또 그곳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전하여 깨닫게 하시려는 것 그의 계획이였읍니다. 큐바의 많은 한인 교포집들을 방문하던 중 80세의 고령의 노인을 만나보았읍니다. 그분의 이름은 Esstaban이고 한국이름은 "안 남산" 이라 하셨지요. 자신의 집에서 만든 캔디를 매일 거리에 나가 파는 행상인이였는데 이 노인의 마음이 전체 교인들의 실상
이라 생각되기에 그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는 하바나 Vieja의 높은 건물위의 옥상 위에 무허가 판자집에 살고 있었고
우리는 하늘로 치솟는 무너질것 같은 사다리를 조심조심 그의 집까지 도달할 수 있었읍니다. 우리는 미국 마이아미에 있는 한인장노교 교인이며 이곳 교포들을 만나고 싶어 찾아왔다고 소개하며 혹시 신앙을 갖고 계신지 여쭈어 보았읍니다. 할아버지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신앙생활은 하지않지만 매일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 해질 무렵 문앞에서 기도하지요. 오늘도 무사히 집에 돌아올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 합니다."
"당신들은 무엇을 갖고 왔소? 이곳은 너무 가난학하고 필요한 것이 너무 많고 병든 사람이 너무 많소" 우리는 처음 매우 당황했읍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도움은 못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인 당신들에게 민족의 얼을 찾아드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되찾아 드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읍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일어 서시며 가슴에 두손을 대시며 대답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것 바로 정신적인 그것이요,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찾아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느끼며 그분을 우리는 만났습니다" 라고 하셨다.
"우리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인들인 당신을 만나게 되였고 그 고마움으로 우리 가족은 내일부터 꼭 교회에 나가겠읍니다."
말씀을 하실 때 우리는 서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부등켜 앉고 한 많은 민족사의 슬픔과 그 역사속에서 고난받아온 그들의 삶을 더듬어 보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잊혀졌고 병든 사회지만 아직은 희미하게 남아있는 몇몇의 그리스도의 초롱빛은 다시금 그 사회와 각자의 마음들을 밝혀줄 그소망의 생이 곧 올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 그렇게 되길 도와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며 그곳을 떠나왔습니다.
본 선교회는 큐바의 한인사회를 활성화시켜 한인회를 통한 전 한인선교 공략의 정책을 세워, 1953년 한인회가 없어진 이후 처음 50년 만에 한인회를 소집. 그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음식을 서로 나누며 우리가 누군인지 소개며 우리의 목적은 그들이 두고 온 조상들의 조국에 대한 소식과 현재의 실상을 전할때 그들은 너무나 큰 반응과 흥미를 갖고 청취했다. 언제인가 돈을 벌어 내 고향
고향에 가 묻히겠다 하시던 선조들이 아무도 꿈을 이루신 분이 없었다며 눈물을 쏟을 때 전혀 알 수 없는 조국을 그리며 더 회한 눈물을 감추지 못하시고
그 땅에서 왔다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이와같은 모임은 Habana, Mantanza, Cardenas의 3개 도시에서 똑같이 이루어졌읍니다. 그리고 한인들이 계속 모일수 있도록 그 준비 작업을 할수있는 인물과 장소를 지적하고 교회를 세우도록 보살펴 주고 왔읍니다.
4차 보고서에는 그 결과 큐바의 세 도시에 한민족의 지하교회들이 건강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힘차게 새로운 희망을 앉고 자칫 없어질 위기에 있엇던 민족의 얼 믿음 생활이 21세기 첫해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으며 83-100명이 지하교회와 정규 교회에 참석하고 있읍니다.
1) - Cardenas의 지하교회 -
30여명의 한인동포 매 격주 토요일 오후 2시에 Dionisa 부인집에 모여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며 60여년 만에 다시 민족이 친히 모여 친교하며 "한민족의 혼"을 되찾고 기뻐하고 있으며 마이아미 장노교회의 도움과 관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모임은 지난해 1999년 10월 23일 부터 시작 1월 28일에 우리의 방문으로 특별 모임에 33명이 모였읍니다. 권찰역으로 Dionisa 부인이 맡고 말씀 지도는 Cardenas 장노교회 목사님과 원로 목사님(85세 노인이며 현역 Mantanza 대학의 신학대 교수님)과 이 교회의 성인 성경공부를 지도 하시며 또 반신 불구이신 대학 화학 교수이신 Dr. Jorge씨 세 분이 수고를 해주시고 계셨읍니다.
2) - Mantanza 지하교회 -
30명이상 한민족 동포가 모이고 권찰역에 한인회장의 여동생이며
전 Mantanza 대학의 학장을 지낸 Marta Lim 부인이 맡고 성경 말씀지도는
그곳 감리교 목사님이 맡아 주셨으니다. 저의 방문으로 35명이 뫃여 진지하게 "우리조상들이 이민 초기 보여 주신 신앙과 언어를 배움으로 민족의 혼을 되찾아야 된다" 고 역살하셨으니다. 신앙과 언어를 잃으면 우리와 우리의 후손은
자취를 감출것이니 이제 모두 잊어버린 모국어와 신앙을 되찾기를 호소 했습니다. 그 첫 주 모임이 1월 15일 이였고 매 격주 화요일 2시에 모입니다.
- 2012.10.01
20세기 정반대의 두개념사이 정치적으로 축복과 좌절의 극심한 경험을
당하고 있어 어느 민족도 경험하지 못하는 고난과 축복을 통해 새로운 민족
으로 재 탄생되어 가는 과정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영감을 떨칠수 없다.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언재까지 공존하게 될것인지 아무도 말할수 없다. 특이한 우리의 경험이 새롭게 펼쳐질 미래와 역사에 미칠 민족적 사명과 그
위치가 어떻게 변할것인가도 누구도 속단하기 어렵다. 그 미래를 위해 우리
정부는 흩어져 있는 우리민족을 찿아 긍정적으로 보호하고 단합시켜 한조상의 한민족이라는 형제와 자매의식을 고취시키는 커다란 노력과 홍보를 대대적으로 감행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위에 홍보한것이 2000년 1월에 일어났던 사건들인데 아무리 간단하게 편집을 할려해도 이들 양목사와 Linda 부부의 전도사역을 다 옮길수 없다. 다만 양목사가 이곳에 오기전에는 50년전에 헤어진 옆동네의 친척도 서로 볼 수 없엇지만 이제는 큐바 전역에 흩어진 모든 한민족의 후예들을 찿아내어 복음으로 감화
시켰고 이제 끝에서 끝까지 100개의 교회를 세워 "모든 큐바인"을 상대로 포교를 하며 이들의 성장과 유지 각자 홀로서기를 전적으로 도와주는 사역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중이다.
양목사는 몽고를 방문하여 옛 정복자 테무진 징기스칸이 어떻게 그 방대한
제국을 다스렸는지 그비밀을 캐러 다녀올 정도로 이사역의 성공을 위해 연구와 공부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이제 30차 보고서에 이런글이 적혀있다. 2009 년 4월 14 - 5월 6일
우리는 기껏해야 한곳에서 하루밤을 세우고 바삐 다니느라 우리의 기도 제목도 잊고 있엇지만 사역지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통해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이끌어주심에 우리는 놀라워 하며 감동하곤 한다. - 중략 -Paulo 선교사의 설교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는다. "우리에게 내일은 신비스러운 시간입니다"
- 내하나 살기도 힘들고 메마른 이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있을수 없는 사랑의 땀들이 진흙과 모래와 세멘트로 벽돌이 올라가고 있엇다. 정부가 임시로 지어준 사람의 키로 제대로 설수 없는 움막에 거하면서 조그마한 새집
을 기다리는 저들의 마음에 어찌 감사의 눈물이 없겟는가! 다음날 한인사역
지역지인 Mantanzas, 늘 빠짐없이 참석하는 반가운 얼굴들 그러나 혈액순환이 잘 안되고 영양실조로 거의 모든 노인들이 다리가 검디 검은 피부 색갈에 마음이 아프다. - Varadero 의 Conchita 가정은 12년전이나 별반 변함이 없는 순
한국인 가정 줄담배를 피우는 Eddie 나 시력을 잃어버린 Armando는 좔좔 외울 정도의 성경 지식을 소유하고 신경쇠약에 늘 휘청거리는 어머니에게 가족을
데리고 얹혀 살고있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Conchita의 아들 David 그나마 식당 종업원 자리를 잃고 누나인 한인 지도자 Cristina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이들 형제 모두 구제 대상자 들이다. 나이가 젊은 그들이지만 그저 생명이 있으니 살아가는 듯한 순 한국인 후예들이다. 다만 Armando의 손녀딸의 남편 Junior 가 유일한 공사장 일일 노동자일 뿐이다. 이글을 쓰면서도 저들의 가엾은 모습이 떠나지 않아 Pen을 멈추고 무릅사이에 머리를 뭍고 있을 때가 많다.
이번 큐바의 선교에서 깨달은 것은 이제 큐바인들은 더이상 세상에 오직 의지할 곳은 하나님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곳곳에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을 찿아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큐바에서만 볼수있는 믿음의 불꽃이 하늘높이 타오르고 있음을 본다. 가난한 저들이 비싼 흰옷 모자와 터분 흰구두 흰양산 으로 흰 소올로 단장하고 다니는 것이 많이 눈에 띈다. 문이 활짝 열리면 온갖 종파들의 각축장이 되지 않을가? 그래서 큐바는 이때가 중요한것 같다.
오염이 되기전 우리는 80% 이상의 새로운 사역을 위해 새로운 곳을 찿아가려 한다. 하나님 께서 약속하신 "네가 밟는 땅을 다 네게 주리라." 는 말씀에 의지
하여 우리에게 주실 그영적 가나안 땅 큐바 땅을 더 많이 밟아야 되리라. 모든것 주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갈뿐이다. 우리의 등뒤에 계시며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를 맞보며 가슴 뿌듯한 기쁨을 누린다. 주님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냘픈 건강을 유지 하면서 2-4 주일이 걸리는 60년대에 버려둔
국도. 황폐할대로 버려진 넓은곳 거의 원시시대를 갖 빠져나온 그곳에 하나님
의 사역 잊혀진 우리의 뿌리를 찿아 누군가는 했어야할 그일을 70의 노구에 채찍질을 멈추지 않는 Linda 와 Aquiles 부부에게 한없는사랑과 존경을 표하고자 한다. 한종원 교수님이 양원건에게 대학 일학년때 지어준 스페인식 이름이였다 Aquiles 라는 이름은!. 그는 이사역을 위해 그때서 부터 준비했엇나 보다.
그들이 격는 사역현장의 어려움들을 다음의 보고서에서 엿보게 한다.
한량없는 감동적인 선교의 불길 이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몽매하고 불쌍한
그들과 자유와 해방을 고대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자녀들 이북 동포를 위해
그들을 사단의 손에서 놓아주기를 큰소리로 외쳐보며 이만 정리를 한다.
중심가를 벗어나 가도 가도 끝이없는 산속길 한복판에 꼬리를 틀고 있는 뱀을 치고 가면서 허다한 사람들이 있는 시내를 제쳐놓고 꼭 산속길를 가야 되는가 싶었다. 그 대답은 도시에 교회들이 줄빗하고 복음을 들을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산속에도 주님이 택하시고 찿으시는 주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어찌 우리가 이런 곳을 찿아 오리라 상상이나 했을가! 이제는
트럭도 전연 다니지 않는 가파른 길에 들어선다. 순간 마음속으로 불평을 토해낸다. 이런 길이면 트럭을 아예 타고 오르게 하던지 아니면 말이라도 준비할 것이지. 만약 차가 꼭대기를 오르다 미끄러져 딩굴면 어쩔건가? 차를 버리고
되돌아갈 수도 없고 칼로 자른듯한 돌과 먼지 흙으로 바퀴는 헛돌기 시작하자 Gilermo 목사와 나는 내려서 밀때 흙먼지가 우리를 광야의 느네(광야의 마른
풀이 둥글게 바람에 굴러가는 장면) 처럼 감싼다. 이러기를 몇차례 다시 올라간 차를 타고 시동을 걸고 오를때 차는 그야말로 밑바닥이 박살이 나는 소리를 낸다. 앞에 타고 있는 Guilermo 목사와 나는 동시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나는 당신의 신실한 종" 이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고 나는 그순간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거친 대못으로 못박힐 때 심장이 터져나가는 듯한 그 고통을 맛보는 듯 "나는 너희를 위해 고통을 겪는데"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는것 같아 얼마나 울었는지! 정말로 우리는 엉엉 울고 말았다...Merci!
- 2012.10.02
양원건은 70년대 Columbia에서 대학을 이수하고 바로 Costa Rica로 옮겨
대학원 공부를 하는 동안 학비를 벌기 위해 태권도 도장을 차려 크게 성공했다. 1984년 카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 선수팀을 훈련 참가해 역사상 처음으로
그 나라에 동메달을 안겨 주어 국가 영웅대접을 받았다.
그가 마들어 놓은 고등학교 체육 교본은 지금도 교제로 쓰이고 있다.
도장에서 나오는 충분한 자금으로 부동산에 투자 거기서 생기는 이익금으로
큐바의 선교를 가능하게 만든 동기가 되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남미 24 개국 정복을 이루어 낸 스페인 정부는 마지막으로 재원과 인적 투자를 동원. 새로운 스페인을 큐바에 건설하려고 모든것을 지불해 세운 마지막 나라
였다. 유능한 군의 퇴역 장군들 예술인 경제인 모두가 가고 싶었던 신천지인
스페인의 자부심 이였다. 그러한 민중의 엘리트 의식 때문에 전반적으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던 남미에서 공산주의는 전혀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유독 큐바의 진보된 문화 경제의 온도에 맞아 공산주의가 정착하게 된다.
면적 104,556 평방 킬로 (남한의 99,800 평방 킬로 보다 넓음) 길이 1,250 Km 넓이 191 Km 로 미국남단 Key West에서 90 마일 144 km 남쪽에 위치해 있다.
지난 40 차례의 선교보고서에 의해 역사의 뒷장으로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던 공산권이라는 이유 하나로 대한민국이 방치하고 관심밖에 놓여 있는 이들의
추적을 쫓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땅끝 까지 전도 하는 의로운 선교 활동을
살펴보고 싶다. 우리의 정열 우리의 실력으로 우리의 결단으로 기적의 사역을 감당해 내는 이들의 노고를 감사드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 한다. 대한민국이 이분들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 반드시 오게 될것이다.
1999년 10월 11일 부터 2000년 1월 23일 사이 3번째 사역의 보고서 일부에 이렇게 보고 한다.
"그들의 삶이은 너무나 비참했고 불쌍했읍니다. 그들은 완전히 이 세상에서
잊혀진 인간이 아닌 동물의 세계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읍니다. 정말로 문명이나 발전이나 소망이나 그 무엇도 기대할수 없는 세계였읍니다. 하나님께선 본(우리의) 선교단을 통해 복음과 사랑을 전하게 하셨고 또 그곳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전하여 깨닫게 하시려는 것 그의 계획이였읍니다. 큐바의 많은 한인 교포집들을 방문하던 중 80세의 고령의 노인을 만나보았읍니다. 그분의 이름은 Esstaban이고 한국이름은 "안 남산" 이라 하셨지요. 자신의 집에서 만든 캔디를 매일 거리에 나가 파는 행상인이였는데 이 노인의 마음이 전체 교인들의 실상
이라 생각되기에 그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는 하바나 Vieja의 높은 건물위의 옥상 위에 무허가 판자집에 살고 있었고
우리는 하늘로 치솟는 무너질것 같은 사다리를 조심조심 그의 집까지 도달할 수 있었읍니다. 우리는 미국 마이아미에 있는 한인장노교 교인이며 이곳 교포들을 만나고 싶어 찾아왔다고 소개하며 혹시 신앙을 갖고 계신지 여쭈어 보았읍니다. 할아버지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신앙생활은 하지않지만 매일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 해질 무렵 문앞에서 기도하지요. 오늘도 무사히 집에 돌아올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 합니다."
"당신들은 무엇을 갖고 왔소? 이곳은 너무 가난학하고 필요한 것이 너무 많고 병든 사람이 너무 많소" 우리는 처음 매우 당황했읍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도움은 못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인 당신들에게 민족의 얼을 찾아드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되찾아 드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읍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일어 서시며 가슴에 두손을 대시며 대답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것 바로 정신적인 그것이요,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찾아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느끼며 그분을 우리는 만났습니다" 라고 하셨다.
"우리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인들인 당신을 만나게 되였고 그 고마움으로 우리 가족은 내일부터 꼭 교회에 나가겠읍니다."
말씀을 하실 때 우리는 서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부등켜 앉고 한 많은 민족사의 슬픔과 그 역사속에서 고난받아온 그들의 삶을 더듬어 보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잊혀졌고 병든 사회지만 아직은 희미하게 남아있는 몇몇의 그리스도의 초롱빛은 다시금 그 사회와 각자의 마음들을 밝혀줄 그소망의 생이 곧 올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 그렇게 되길 도와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며 그곳을 떠나왔습니다.
본 선교회는 큐바의 한인사회를 활성화시켜 한인회를 통한 전 한인선교 공략의 정책을 세워, 1953년 한인회가 없어진 이후 처음 50년 만에 한인회를 소집. 그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음식을 서로 나누며 우리가 누군인지 소개며 우리의 목적은 그들이 두고 온 조상들의 조국에 대한 소식과 현재의 실상을 전할때 그들은 너무나 큰 반응과 흥미를 갖고 청취했다. 언제인가 돈을 벌어 내 고향
고향에 가 묻히겠다 하시던 선조들이 아무도 꿈을 이루신 분이 없었다며 눈물을 쏟을 때 전혀 알 수 없는 조국을 그리며 더 회한 눈물을 감추지 못하시고
그 땅에서 왔다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이와같은 모임은 Habana, Mantanza, Cardenas의 3개 도시에서 똑같이 이루어졌읍니다. 그리고 한인들이 계속 모일수 있도록 그 준비 작업을 할수있는 인물과 장소를 지적하고 교회를 세우도록 보살펴 주고 왔읍니다.
4차 보고서에는 그 결과 큐바의 세 도시에 한민족의 지하교회들이 건강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힘차게 새로운 희망을 앉고 자칫 없어질 위기에 있엇던 민족의 얼 믿음 생활이 21세기 첫해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으며 83-100명이 지하교회와 정규 교회에 참석하고 있읍니다.
1) - Cardenas의 지하교회 -
30여명의 한인동포 매 격주 토요일 오후 2시에 Dionisa 부인집에 모여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며 60여년 만에 다시 민족이 친히 모여 친교하며 "한민족의 혼"을 되찾고 기뻐하고 있으며 마이아미 장노교회의 도움과 관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모임은 지난해 1999년 10월 23일 부터 시작 1월 28일에 우리의 방문으로 특별 모임에 33명이 모였읍니다. 권찰역으로 Dionisa 부인이 맡고 말씀 지도는 Cardenas 장노교회 목사님과 원로 목사님(85세 노인이며 현역 Mantanza 대학의 신학대 교수님)과 이 교회의 성인 성경공부를 지도 하시며 또 반신 불구이신 대학 화학 교수이신 Dr. Jorge씨 세 분이 수고를 해주시고 계셨읍니다.
2) - Mantanza 지하교회 -
30명이상 한민족 동포가 모이고 권찰역에 한인회장의 여동생이며
전 Mantanza 대학의 학장을 지낸 Marta Lim 부인이 맡고 성경 말씀지도는
그곳 감리교 목사님이 맡아 주셨으니다. 저의 방문으로 35명이 뫃여 진지하게 "우리조상들이 이민 초기 보여 주신 신앙과 언어를 배움으로 민족의 혼을 되찾아야 된다" 고 역살하셨으니다. 신앙과 언어를 잃으면 우리와 우리의 후손은
자취를 감출것이니 이제 모두 잊어버린 모국어와 신앙을 되찾기를 호소 했습니다. 그 첫 주 모임이 1월 15일 이였고 매 격주 화요일 2시에 모입니다.
- 2012.10.01
20세기 정반대의 두개념사이 정치적으로 축복과 좌절의 극심한 경험을
당하고 있어 어느 민족도 경험하지 못하는 고난과 축복을 통해 새로운 민족
으로 재 탄생되어 가는 과정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영감을 떨칠수 없다.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언재까지 공존하게 될것인지 아무도 말할수 없다. 특이한 우리의 경험이 새롭게 펼쳐질 미래와 역사에 미칠 민족적 사명과 그
위치가 어떻게 변할것인가도 누구도 속단하기 어렵다. 그 미래를 위해 우리
정부는 흩어져 있는 우리민족을 찿아 긍정적으로 보호하고 단합시켜 한조상의 한민족이라는 형제와 자매의식을 고취시키는 커다란 노력과 홍보를 대대적으로 감행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위에 홍보한것이 2000년 1월에 일어났던 사건들인데 아무리 간단하게 편집을 할려해도 이들 양목사와 Linda 부부의 전도사역을 다 옮길수 없다. 다만 양목사가 이곳에 오기전에는 50년전에 헤어진 옆동네의 친척도 서로 볼 수 없엇지만 이제는 큐바 전역에 흩어진 모든 한민족의 후예들을 찿아내어 복음으로 감화
시켰고 이제 끝에서 끝까지 100개의 교회를 세워 "모든 큐바인"을 상대로 포교를 하며 이들의 성장과 유지 각자 홀로서기를 전적으로 도와주는 사역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중이다.
양목사는 몽고를 방문하여 옛 정복자 테무진 징기스칸이 어떻게 그 방대한
제국을 다스렸는지 그비밀을 캐러 다녀올 정도로 이사역의 성공을 위해 연구와 공부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이제 30차 보고서에 이런글이 적혀있다. 2009 년 4월 14 - 5월 6일
우리는 기껏해야 한곳에서 하루밤을 세우고 바삐 다니느라 우리의 기도 제목도 잊고 있엇지만 사역지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통해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이끌어주심에 우리는 놀라워 하며 감동하곤 한다. - 중략 -Paulo 선교사의 설교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는다. "우리에게 내일은 신비스러운 시간입니다"
- 내하나 살기도 힘들고 메마른 이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있을수 없는 사랑의 땀들이 진흙과 모래와 세멘트로 벽돌이 올라가고 있엇다. 정부가 임시로 지어준 사람의 키로 제대로 설수 없는 움막에 거하면서 조그마한 새집
을 기다리는 저들의 마음에 어찌 감사의 눈물이 없겟는가! 다음날 한인사역
지역지인 Mantanzas, 늘 빠짐없이 참석하는 반가운 얼굴들 그러나 혈액순환이 잘 안되고 영양실조로 거의 모든 노인들이 다리가 검디 검은 피부 색갈에 마음이 아프다. - Varadero 의 Conchita 가정은 12년전이나 별반 변함이 없는 순
한국인 가정 줄담배를 피우는 Eddie 나 시력을 잃어버린 Armando는 좔좔 외울 정도의 성경 지식을 소유하고 신경쇠약에 늘 휘청거리는 어머니에게 가족을
데리고 얹혀 살고있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Conchita의 아들 David 그나마 식당 종업원 자리를 잃고 누나인 한인 지도자 Cristina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이들 형제 모두 구제 대상자 들이다. 나이가 젊은 그들이지만 그저 생명이 있으니 살아가는 듯한 순 한국인 후예들이다. 다만 Armando의 손녀딸의 남편 Junior 가 유일한 공사장 일일 노동자일 뿐이다. 이글을 쓰면서도 저들의 가엾은 모습이 떠나지 않아 Pen을 멈추고 무릅사이에 머리를 뭍고 있을 때가 많다.
이번 큐바의 선교에서 깨달은 것은 이제 큐바인들은 더이상 세상에 오직 의지할 곳은 하나님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곳곳에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을 찿아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큐바에서만 볼수있는 믿음의 불꽃이 하늘높이 타오르고 있음을 본다. 가난한 저들이 비싼 흰옷 모자와 터분 흰구두 흰양산 으로 흰 소올로 단장하고 다니는 것이 많이 눈에 띈다. 문이 활짝 열리면 온갖 종파들의 각축장이 되지 않을가? 그래서 큐바는 이때가 중요한것 같다.
오염이 되기전 우리는 80% 이상의 새로운 사역을 위해 새로운 곳을 찿아가려 한다. 하나님 께서 약속하신 "네가 밟는 땅을 다 네게 주리라." 는 말씀에 의지
하여 우리에게 주실 그영적 가나안 땅 큐바 땅을 더 많이 밟아야 되리라. 모든것 주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갈뿐이다. 우리의 등뒤에 계시며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를 맞보며 가슴 뿌듯한 기쁨을 누린다. 주님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냘픈 건강을 유지 하면서 2-4 주일이 걸리는 60년대에 버려둔
국도. 황폐할대로 버려진 넓은곳 거의 원시시대를 갖 빠져나온 그곳에 하나님
의 사역 잊혀진 우리의 뿌리를 찿아 누군가는 했어야할 그일을 70의 노구에 채찍질을 멈추지 않는 Linda 와 Aquiles 부부에게 한없는사랑과 존경을 표하고자 한다. 한종원 교수님이 양원건에게 대학 일학년때 지어준 스페인식 이름이였다 Aquiles 라는 이름은!. 그는 이사역을 위해 그때서 부터 준비했엇나 보다.
그들이 격는 사역현장의 어려움들을 다음의 보고서에서 엿보게 한다.
한량없는 감동적인 선교의 불길 이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몽매하고 불쌍한
그들과 자유와 해방을 고대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자녀들 이북 동포를 위해
그들을 사단의 손에서 놓아주기를 큰소리로 외쳐보며 이만 정리를 한다.
중심가를 벗어나 가도 가도 끝이없는 산속길 한복판에 꼬리를 틀고 있는 뱀을 치고 가면서 허다한 사람들이 있는 시내를 제쳐놓고 꼭 산속길를 가야 되는가 싶었다. 그 대답은 도시에 교회들이 줄빗하고 복음을 들을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산속에도 주님이 택하시고 찿으시는 주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어찌 우리가 이런 곳을 찿아 오리라 상상이나 했을가! 이제는
트럭도 전연 다니지 않는 가파른 길에 들어선다. 순간 마음속으로 불평을 토해낸다. 이런 길이면 트럭을 아예 타고 오르게 하던지 아니면 말이라도 준비할 것이지. 만약 차가 꼭대기를 오르다 미끄러져 딩굴면 어쩔건가? 차를 버리고
되돌아갈 수도 없고 칼로 자른듯한 돌과 먼지 흙으로 바퀴는 헛돌기 시작하자 Gilermo 목사와 나는 내려서 밀때 흙먼지가 우리를 광야의 느네(광야의 마른
풀이 둥글게 바람에 굴러가는 장면) 처럼 감싼다. 이러기를 몇차례 다시 올라간 차를 타고 시동을 걸고 오를때 차는 그야말로 밑바닥이 박살이 나는 소리를 낸다. 앞에 타고 있는 Guilermo 목사와 나는 동시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나는 당신의 신실한 종" 이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고 나는 그순간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거친 대못으로 못박힐 때 심장이 터져나가는 듯한 그 고통을 맛보는 듯 "나는 너희를 위해 고통을 겪는데"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는것 같아 얼마나 울었는지! 정말로 우리는 엉엉 울고 말았다...Merci!
- 2012.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