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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5. 묵상글 (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 필요한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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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필요한 사람
재의 수요일 다음 토요일-2015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필요한 사람
저는 필요한 사람입니다.
돈이 필요하고,
힘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하고,
영어로 얘기하면 The Person in Need이며
그래서 친구가 필요하고,
구원자 하느님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정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고,
공동체에게까지 꼭 필요한 사람은 못되더라도
한 사람에게라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도 저와 같을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아무 쓸모가 없는 불필요한 사람이기보다는
공동체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말의 진정성과 가능성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
필요한 사람이 될 수는 있는 것인지.
먼저 정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공동체에게나 한 사람에게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나를 내어주어야 하는데 그래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픕니까?
가난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도움이 필요로 하고,
그만큼 더 많은 도움을 줘야 하는데 그래도?
문제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상담이 필요하고,
그만큼 더 많이 내 시간이 뺐길 텐데 그래도?
애정결핍이 심할수록 더 큰 사랑을 필요로 하고,
그만큼 그 한 사람에게 사랑이 쏠리게 되는데 그래도?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 세심한 사랑이 필요하고,
그만큼 더 많은 배려를 해야 하는데도 그래도?
더 말썽꾸러기일수록 나를 성가시게 하고 괴롭게 하고,
그만큼 더 많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데 그래도?
진정 이런 사랑의 바람과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크고 깊고 넓고 높은 사랑,
세심하고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끈질긴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능력 없는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의지도 소중하지만 사랑의 능력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나눠줘도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를 채워줄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며,
이웃 사랑을 위해서 부족함 없는 하느님 사랑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필요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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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3월 5일 토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5,27-28)
세리 레위를 부르시다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돈 욕심이 사납고, 걷잡을 수 없는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자기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에 정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자였습니다. 세리란 본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죄업에 붙잡혀 아무 희망도 없던 그가, 우리 모두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1티모 1,15)라는, 더없이 지혜로운 바오로 사도의 말은 옳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하느님의 외아들 말씀께서 악마의 소생을 어떻게 당신께로 데려오셨는지 아시
겠습니까?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두 개의 동산
한 처음 낙원의 문간에서처럼 하느님은 성경 책들의 동산 문간에 인간을 위해서 하나의 게시판을 설치하셨다: 추구해야 할 동산, 한편 마리아께서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새기어 보존했으므로(루가 2,19 참조) 이 동산은 또한 지켜야 활 동산이기도 하다. 교회 역시 성경의 수호자가 아니던가. 마찬가지로 그 정원은 경작을 해야 하는 곳이다: “사람이 그곳을 일구게 하기 위해서였다”(창셰 2,15). 참다운 독서는 힘든 작업이다 ... 하느님이 심으신 에덴 동산은 저녁답의 산들바람, 샘 그리고 동산을 보살피던 인간의 노력이 서로 협력할 때만 꽃필 수 있었다. 이처럼 신적 문자들의 동산도 우리가 저녁 산들바람 속에 머물 때, 즉 성령께서 불어와 주십사 간청할 때 이 성령은 바람이요 동시에 샘이시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도 해야 할 노력을 다할 때. 그때라야만 꽃을 피울 것이다. 정원사가 정원을 애써 가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음들이 꽃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으랴 ...
북녘 바람일어라,
남풍아오라!
내 동산에 건듯 불어
그 향기 떨쳐다오!(아가 4,16)
(88)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2월 성령 열매성월 4주간 사랑 / 평화 ✝️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9-12장
✝️ 1토요일 이웃 종교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
야훼(여호와)라는 신 이름의 의미
그렇다면도대체 ‘야훼' 혹은 ‘여호와'라는 신명이 지니고 있뎐 본래적 의미와 그 능력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전문가들의 견해, 특히 히브리어의 어원 분석과 그 언어학적 분석을 통해서 실펴볼 수밖에 없다. 이미 실펴본 대로 호렙산이 멀리 내다보이는 미디안 광야의 변방 어느 황량한 들판에서 모세가 경험한 ‘불타는 떨기나무'의 거룩한 영광의 광휘 속에서 들려온 신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에흐예 아쉘 에흐예'(스스로 있는 자)였다. 히브리어에 정통한 구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출애굽기 3장 14-15절에 니오는 '야훼'라는 유일신 이름은 히브리어 동사 어근 ‘하야'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데, 그 동사의 본래적 의미는 ‘떨어지다', ‘생기다', ‘되다', ‘생존하다' 등이리고 한다.
특히 ‘야훼'라는 유일신 이름이 히브리어 문법 구조와 히브리어 음운론읕.통해서 보면 미완료 동사형'의 이름이며, 히브리 동사 ‘하야'는 그리스 철학이다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본질 개념'이 아니라 ‘현상적, 기능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성 서학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게시된 모세의 유일신 이름 ‘야훼'를 다움과 같은 몇 가지 매우 의미 깊은 해석으로 풀어낸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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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에페소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난민을 위한 기도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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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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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28)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인 까닭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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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인인체 하는 죄인」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의인인체 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 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교부 사르마타스는 말하였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31,34). "회개하는 것은 살아가는 방법만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까지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요한12,47)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시기 바랍니다.(성 베르나르도)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1,9).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 이스라엘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모세, 왕 중의 왕이라고 했던 다윗,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주님의 으뜸제자인 베드로에 이르기까지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허물을 인정하였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으며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우리도 그 행복을 차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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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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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우리의 영혼은 건강한가?
우리는 건강 하면 육체의 건강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육체의 건강이 허물어지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건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그냥 이 세상이 다 끝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든지 몸관리를 잘해서 좀 더 오래 건강하게 하루라도 더 살기를 원합니다. 물론 신앙인이라고 해서 이런 기본 속성이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에서는 조금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건강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영혼이 건강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영혼이 얼마나 건강한지가 왜 중요한지 진지하게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육체의 건강 여부는 단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살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육체의 건강도 잘 챙겨야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혼을 건강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반드시 심판이 따른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심판은 우리가 아는 그런 심판의 개념으로만 생각하는 것을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바로 영혼이 건강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바로 심판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혼이 건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영혼이 맑고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간혹 이런 영혼을 봅니다. 영세 때부터 봐온 자매님이신데 예전에는 자주 미사를 가게 되면 같은 시간에 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자매님이 있으십니다. 연세가 아마 지금 여든이 지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분만 그런 게 아니고 그와 같은 분이 몇 분 더 계십니다. 저는 그분을 보면서 재의 수요일에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분명한 확신을 하는 게 있습니다. 그분을 보면 하느님을 아는 세상적인 성경이라든지 신앙지식은 그저 평범하겠지만 흔히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마당만 밟는 신자라고 표현하긴 좀 그렇지만 그것도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치부를 한다고 해도 저는 그분을 볼 때 절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대화나 그냥 얼굴에서 풍겨져나오는 마음을 보면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애 같은 순수한 마음이 느껴지는 분입니다.
아이는 어떤 계산을 하며 자신의 이익 불리를 따지지 않습니다. 단순히 지금 놓여 있는 그 상황만 생각하는 게 아이입니다. 천국은 그런 아이와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방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도 지금은 사순이라 사순 하면 회개가 대명사이겠지만 이 회개의 의미는 회귀입니다. 방향을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방향은 어린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영혼으로 다시 그 본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화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의 원시본연의 그 영혼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지금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진짜 불쌍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육체는 건강할지는 모르지만 그 영혼이 병든 사람입니다. 오히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육체는 병들어도 영혼이 건강하면 그게 더 나을 것입니다. 근데 중요한 사실은 육체의 건강은 잘 구분할 수 있고 인지할 수 있는데 영혼이 병든 것은 잘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냉정하게 보면 이 사람의 영혼이 더 불쌍한 영혼이 될 수 있습니다.
간이 침묵의 장기라고 말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심판대 앞에 서기까지는 스스로가 자기 영혼이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육체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기적을 행하시곤 하셨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그런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의사로서의 역할보다는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로 오신 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당신의 사명이며 본분이십니다. 미친 사람은 자신이 미친 사실을 잘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시고 회개시키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는데 그게 예수님의 본분이라면 과연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영혼이 건강한지 한번 자가진단하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이미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깨끗한 부분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남의 티는 잘 보지만 제 들보를 잘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사용하는 표현 하나가 있습니다.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도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어서는 그 정도까지 되기까지는 우리의 영혼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복원력이 있지만 그 강을 넘어서면 정말 이제는 더 이상 회복할 시간이 영영 없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을 맞고 있습니다. 이번 사순이 그런 회복의 시간이 된다면 정말 의미있는 사순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순이 될 수 있도록 다시 하느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나아가도록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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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2030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일
https://cafe.daum.net/bbadaking/GkzT/27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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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의 정상과 냉담 상태를 가르는 기준이 주일미사 참례가 되어 있습니다. --- 그러니, 십계명의 네 번째에 규정된 바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은 “주일미사에 빠지지 마라.”는 계명으로 축소되어 버린 셈입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자기 일 대신에 하느님의 일을 해서 그분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날을 지키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종교적인 봉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일과 공동선을 위한 봉사까지를 다 포함합니다. 무릇 종교적인 봉사도 원래는 사랑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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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 불평등 추세가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보고 있는 한편, 또한 우리 교회는 중산층화 되어 가는 추세가 ---그냥 쉬는 날이나 노는 날, ---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함으로써 주일을 ‘존귀한 날’로 드높이는 것입니다. ---
<계 속>
그러니까 주일에는 미사 참례를 중심으로, 평소에는 일 때문에 쉽사리 시간을 내어 하기 어려웠던 귀한 일을, 가족과 함께 또는 교우들의 가족들과도 어울려서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다음 날이면 또 일하러 나가야 하니까 너무 무리해서 할 필요는 없고, 매 주일 지속적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그러나 그치지 않고 하시면 되겠지요. --- 이를 함께 나누거나 지켜보는 세상 사람들도 하느님을 믿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차츰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상황에서도 그렇고 실제로 공생활 내내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전하신 방식입니다. 다시 한 번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방식에 대해 간추려 전해 드립니다. 미사 참례를 먼저 하고 나서, 가장 귀한 일을, 가족과 함께, 천천히, 조금씩, 지속적으로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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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nlY/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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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어느 특수 부류의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마음을 돌려 회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삶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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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5.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nlY/432
--- 신앙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 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며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며 받아 주고, 품어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