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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구약성서는 누가 언제 썼나?
윤병남 (글로발 아이티 연구원 -Global IT Research Institute-)
http://blog.daum.net/tomayoon/5137729
-2007.10.16.-
[모든 종교는 한 시점에서의 완성된 고정적 모습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1세기의 예수교나 4세기의 예수교나 16세기의 예수교나 21세기의 예수교가 다 동등한 자격을 지닌다. 예수교 (예수의 가르침)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역사적 예수 (Historical Jesus)가 과연 누구인지 모든 신학자의 견해가 분분하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 (The New Testament)도 2000여 년을 거쳐 형성되어 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의 정본은 어느 곳에도 없다. 오늘의 27서 체제 신약성경은 4세기 후반에나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지만 4세기의 성경이나, 오늘날 성경은 똑같은 자격을 지니는 성서의 다른 판본일 뿐이다.
신학자들이 정본의 기준으로 삼는 희랍어 성경도 그 자체가 19세기 말에나 겨우 구비된 모습을 갖춘 것이다. 예수는 희랍어가 아닌 아람어 (Aramaic)라는 갈릴리 토속 말을 한 사람이었다. 20세기는 인류 사상 가장 위대한 고고학 발굴 성과의 시기였다. 그 중 성서와 관련된 두 개의 발굴이 있다. 하나는 구약과 관련된 사해 부근의 쿰란 공동체 동굴 라이브러리 문서의 발견이고, 하나는 신약과 관련된 나일강 중류 나그함마디 체노보스키온 문서의 발견이다.
후자의 문서는 외경으로 가볍게 처리될 그런 문서가 아니라 성경 자체의 이해를 풍요롭게 만드는 진본일 뿐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하는 위대한, 아니 가히 혁명적이라 말할 수 있는 문헌임이 밝혀지고 있다. 이에 따른 신학 논쟁도 날로 깊어지고 있다.
성서를 성령의 강림이라고만 믿고 있는 많은 사람도 이 한 가지 사실만은 알아야 한다. 성령도 반드시 시간 속에, 우리의 삶의 역사 속에 강림하는 것이다. 이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자! 모든 종교나 진리는 형성 중에 있다 (All religion is in the making). 완결은 죽음이다. 새로운 형성을 향한 발돋움이 예수교와 우리 사회를 보다 생명력 있고, 보다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1945년 12월의 사건이었다. 이 엘카스르 동네의 어린아이들이 일곱 명 떼 지어 낙타를 타고 사바크를 캐러 원정을 떠났다. 12월은 날씨도 선선하고 땅이 물러 사바크를 캐기도 좋고 그때가 마침 나일강 유역이 경작기라서 비료를 줄 시기인 것이다. 엘카스르에서 3㎞ 정도 떨어진 곳에 게벨 알 타리프 (Gebel al-Tarif)라는 기암절벽 산이 있다. 그 기슭에 사바크는 무진장 있다. 한 아이가 곡괭이질을 해대는데 파각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심상치 않은 공명 소리에 곡괭이를 멈추었다. 사바크 (sabakh)!
그것은 바위산 절벽 밑에서 캘 수 있는 층층비늘처럼 쌓인 암석층인데 쉽게 부스러진다. 겉은 누르스름하지만 쇠 절구로 빻으면 하얀 석회처럼 고운 가루가 된다. 질소를 풍부히 함유한 천연비료가 되는 것이다. 큰 바위 밑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니 거대한 붉은색 토기 항아리가 자태를 드러냈다. 아가리와 밑동은 좁고 중간은 불룩하다. 목 네 귀퉁이로 손잡이 고리가 달려 있고, 아가리는 사발로 덮여 있었는데, 가장자리는 천연 아스팔트 역청으로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한 아이는 15세의 아부 알 마지드 (Abu al-Majd)였다. 이 아이는 겁이 덜컥 나 그 사실을 같이 간 큰 형에게 알렸다. 형 무하마드 알리 (Muhammad Ali al-Samman)는 26세로 사바크 원정대의 팀장 격이었다. 알리는 높이 70㎝가량의 이 신비로운 항아리를 개봉하기를 매우 두려워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스토리에도 나오듯이 이집트인의 관념에는 대개 이런 항아리 속에는 진 (jinn)이라는 사기 (邪氣)가 들어 있다고 믿었다. 잘못 뜯었다간 그 사기가 빠져나와 거대한 사람이나 동물 형상의 귀신이 되어 사람을 해한다는 액운의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삼만 족속의 이 무하마드 알리는 흑인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와 이름은 같지만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지렁이 촌놈이었다. 불행하게도 찬란한 이집트 고대문명의 성과가 이들 후예에게는 전혀 전달되어 있질 않았다. 알리는 진에 대한 공포도 있었지만 퍼뜩 불순한 탐욕에 사로잡힌다. 그래! 이런 마법의 항아리 속에 찬란한 파라오의 금은보화가 가득 차 있을 수도 있다. 용기가 솟았다. 순간 알리는 곡괭이를 들어 힘차게 내리쳤다.
학계의 추산으로 따지면 정확하게 1578년 동안 이 항아리의 흑암 속에 갇혀 있었던 인류문명의 한 거대한 보고가 인간세의 광명으로 드러나는 그런 위대한 순간이었다. 항아리는 산산조각 났다. 어찌 되었을까? 그 순간 알리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정말 번쩍이는 금은보화가 가득 차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금가루의 진이 하늘을 수놓는 듯 허공이 빛났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그의 발아래 드러난 것은 파피루스 (papyrus) 다발을 가죽으로 정중하게 포장하고 묶은 13개의 코우덱스 (codex)였다. 아마도 이 코우덱스 겉가죽이 금박으로 장식되었을 수도 있다. 순간 그 금가루들이 증발했을 것이다. 김이 팍 샜다. 우선 돈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파피루스 파편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고문명의 후예들이 아닌 것이다.
기원 전후 시기에 책은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양피지 (parchment)라는 것인데, 양이나 염소ㆍ소가죽을 재료로 쓴 것이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가 보는 족자 형태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이것은 볼룸 (volume)으로 센다. 또 하나는 파피루스인데 이것은 나일강 하류 델타 지역에서 페니키아 일대에 자생하는 4~5m가량의 갈대풀인데 이것을 잘라 엮어 편편한 바위로 눌러 놓으면 저절로 풀 성분이 나와 접착되어 종이처럼 된다. 파피루스는 1~2세기께는 꼭 요즈음 책 (冊)처럼 한쪽으로 묶어 제본을 했다. 그 제본된 책을 가죽 보자기로 싸고 네 귀퉁이에 묶인 끈으로 둘러 묶는다. 이것을 우리는 코우덱스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하나의 코우덱스 속에는 대여섯 개의 책이 같이 제본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알리가 깬 항아리에서 나온 13개의 코우덱스 속에는 필경 60여 개의 책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신약성경보다 많은 분량이다. 사바크 절벽 비탈에 나둥그러진 이 지저분한 가죽 코우덱스를 바라보던 아이들은 모두 재수 없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렇다고 항아리를 깨고 얻은 전리품을 혼자 독식하는 것도 별로 체면이 서지 않았다. 알리는 그 코우덱스를 북북 찢어 일곱 명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코우덱스를 북북 찢는 그 장면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파피루스를 손에 든 아이들은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우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알리가 나누어 주는 품새가 뭔가 내키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아이들은 곧 파피루스를 모두 알리에게 되돌려주었다. 우린 담배도 안 피운다. 너나 팔아 담배 몇 개비라도 얻어 먹어라! 썅. 그나마 그것을 알리에게 돌려준 아이들의 푸념의 심정이라도 하나님께서 내려주시지 않았더라면 21세기 정신혁명의 한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이 위대한 발견이 흔적 없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알리는 아이들이 돌려준 코우덱스를 터번을 풀어 두루루 말아 등에 메고 어깨를 둘러 가슴에 잡아맸다. 그리고 낙타에 올라타 터덜터덜 다시 알카스르로 향했다. 그 순간 알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알리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등에 메고 있었던 파피루스 코우덱스를 쇠죽 쑤는 곳간 방 지푸라기 더미 위에 내던져버렸다. 너무도 끔찍한 참변이었다. 사실 1578년간 밀폐된 옹기의 고요한 암흑 속에서 일체의 빛이나 신선한 공기의 흐름에 노출된 적이 없는 유물은, 갑자기 환경변화에 노출되면 변색ㆍ퇴색하거나 바스러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파피루스 위에 쓰여진 물감은 용케 새 환경을 견디었던 모양이다.
진시황릉의 토용들이 뚜껑을 열자마자 그 찬란한 색깔이 곧 신기루처럼 휘발해버린 것에 비하면 파피루스 위에 쓰인 광석 혹은 카본 계열의 물감이나 그 접착제의 강력성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천 년이 넘는 지하분묘나 유적에서 종이유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상상키 어렵다. 그러나 이집트의 파피루스는 수천 년을 견딘다. 파피루스가 더 우수해서일까? 천만에! 사막이라는 건조한 풍토의 덕분인 것이다. 삼천리금수강산과도 같은 옥토에서는 모든 공기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습기 때문에 박테리아의 서식을 막을 길이 없다. 그러나 비극은 결코 이런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그날 밤 알리의 엄마가 화덕 오븐에 불을 지피러 나갔다가 헛간에 파피루스가 보이니까 죽죽 찢어서 지푸라기와 함께 불쏘시개로 썼다는 사실에 있다. 16 세기의 이단 박해를 견디어낸 사막의 코우덱스가 일순간에 엘카스르 농갓집 아궁이로 들어가다니! 하긴 겸재 정선의 화첩 등 소중한 우리 문화재도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어찌 알리 어미만을 탓하리오마는, 다행스럽게 불 지피는 쏘시개로만 썼기 때문에 많은 파피루스가 타지는 않았다. 하여튼 우리의 도마복음서는 불쏘시개 리스트 속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파코미우스는 타벤니스의 수도원에 사람들이 몰려 넘쳐나게 되자, 주변지역에 수도원을 개척했다. 남자를 위해 9개를 지었고, 여자를 위해 2개를 지었다. 그는 이 11개의 수도원을 관할하기 위해 근거지를 타벤니스에서 파바우 (Pabau)로 옮겼다. 파바우에는 파코미우스의 수도원 본부가 자리 잡았던 것이다. 파바우라는 지명은 현재 파우 키블리 (Faw Qibli)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삼위일체 논쟁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삼위일체 논쟁을 거치면서 오히려 아리우스파에게 밀려 기나긴 ‘도바리’ 방랑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기나긴 투쟁 끝에 그는 실세를 장악했다. 그리고 흩어진 성서문헌에 대한 정경화 (Canonization)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니까 그 정경 (正經)의 목록에 들지 못하는 책들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외경 (外經) 신세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AD 367년 3월 말 이곳 파바우 수도원 본부에는 아타나시우스 대주교의 서한이 전달되었다: “외경적 텍스트들은 이단자들의 날조에 불과한 것들이다. 사도의 이름을 팔기도 하고, 마치 고문서인 것처럼 집필시기를 위장하기도 하여 순박한 영혼들을 타락시킨다. 이제 (마태복음으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27서 이외의 문헌은 읽어서도 아니 되며 소장되어서도 아니 된다. 이제 정경과 외경을 확연히 구분하는 신중한 분별심을 가지고 외경은 없애버려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도마복음서는 이 정경 목록에 편입되는 행운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누누이 말하지만 이 AD 367년의 정경화 목록 발표 이전에는 정경과 외경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정경이 없으니 외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파바우 유적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으로 동네 쓰레기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정규 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변하면서 동네 곡마당처럼 말끔히 치워진 모양이었다. 그 지역의 어느 누구도 이곳이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인류 최초의 수도원운동 센터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우람찬 돌기둥들이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면 꽤 훌륭한 수도원이었던 것 같다. 화강암 기둥에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이집트 신전 건물들의 파편들을 재활용한 듯하다. AD 346년에 열병이 휩쓸어 약 100여 명의 수도승이 희생되었는데 파코미우스도 바로 이곳에서 346년 5월 9일 열병 속에 그들과 함께 영면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관할 하에 약 7000명의 남녀 수도승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예수교의 위용을 이 폐허는 간직하고 있었다.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대결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세력 대결
아타나시우스를 지원하던 로마의 콘스탄스 황제가 암살되고 (350년), 그의 형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독존의 황제가 되면서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탄압을 받는다.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대결은 기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세력 대결이기도 했다. 아리우스는 동방교회의 주축 세력이었다. 물론 이집트의 교권도 동방교회에 속해 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동방교회의 느슨한 다원적 사유를 이단으로 휘몰고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를 주축으로 하여 동ㆍ서 교계를 일원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아타나시우스의 아리우스 비판은 아리우스가 예수의 인성만을 고집하고 예수의 신성을 거부했다는 테마에 집중되어 있지만, 아리우스는 예수를 또 하나의 신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전통적 다신론 사유의 아류밖에 안 된다고 보았다. 예수가 인간일 뿐이다 라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를 격하시키려는 음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예수의 인간됨을 통하여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과 합일될 수 있는 신비주의적 가능성을 열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신비주의는 예수가 신적인 권능으로써 인간의 죄악을 대속한다고 하는 구원론적 의미를 약화시키고 예수교적인 독특한 유일신관의 기저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아리우스 편에 서 있는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대주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 북부이집트와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5000명의 로마군단을 동원하여 파로스 등대가 있는 해안에 상륙시키고 완전무장한 채 알렉산드리아 중심가로 신속히 입성시킨다. 356년 2월 어느 날 밤이었다.
당대에까지 전해 내려온 모든 희랍ㆍ유대ㆍ이집트ㆍ인도ㆍ페르시아 기타 모든 아시아 문명권의 소중한 문헌을 50만 권이나 소장했다. 이 도서관 덕분에 기하학의 원조 유클리드, 위대한 수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르키메데스, 네오플라토니즘의 거장 플로티누스, 르네상스시대의 관측을 선구하여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천문학자 에라토스테네스 (Eratosthenes, BC 276~194), 매우 정교한 지구중심설의 천체이론을 수립한 천문ㆍ지리ㆍ수학자 프톨레미 (Ptolemaeus, AD 127~145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와 같은 위대한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출되었고, 성서문헌학의 획기적 저술인 히브리 바이블의 희랍어역 셉츄아진트 (Septuagint)가 성립되었다
셉츄아진트는 보통 ‘70인역’이라고 불리는데 로마숫자 LXX로 기호화한다. 70인역은 정확하게는 72인역이다. 이집트의 왕 프톨레미2세 (PtolemyⅡ, BC 285~246)는 유대인 12지파에서 각각 6명씩을 선발하여 그 72인을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독방에 각기 따로따로 가두어놓고 72일 동안 히브리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하게 했다는 것이다. 72일이 지난 후에 72인의 번역을 맞추어보니 모두 일치했다는 것이다. 이 거짓말 같은 설화는 BC 2세기경에 쓰여진 『아리스테아스書』 (Letter of Aristeas)에 쓰여 있지만, 결코 신빙성이 없는 거짓말은 아닌 것으로 학자들은 추론하고 있다. 그만큼 엄밀한 문헌학적 고증과 다수 학자들의 철저한 대조를 거쳐 성립한 공동번역이었음을 방증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엄밀하게 고증을 해보면 셉츄아진트도 일시에 한꺼번에 성립한 것은 아니다. 모세5경에 해당되는 부분이 제일 먼저 성립했고, 그 후로도 그 모세5경을 포함한 셉츄아진트의 전 체계는 BC 3세기로부터 시작하여 AD 1세기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의 개정을 거친 것으로 사료된다.
이 셉츄아진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립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너무도 중요하다. 첫째, 당시까지만 해도 구약이라는 문헌이 토라 (모세5경)를 제외하고는 각기 개별적 독립 편들로서 산재해 있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체제를 갖추어 한군데 모아진 문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유대교 경전들이 모두 한 책으로 집대성되었다는 사실은 문헌학적으로 최초의 사건이며 그것이 히브리어가 아닌 희랍어로, 더구나 이집트 땅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둘째, 알렉산드리아에서 최초의 구약 집대성인 셉츄아진트가 성립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얼마나 방대한 유대인들의 다이애스포라 (교민집단)가 성립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얼마나 프톨레미 왕조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헬라화 되었는가를 말해준다. 이것은 LA지역에 한국인 다이애스포라 (교포사회)가 광범하게 성립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교포자녀들이 점점 한국말을 모르고 한국인 아이덴티티를 잃어가게 되자, 그곳의 지도층 사람들이 영어만 아는 자녀들을 위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영역했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교민사회 지도자가 아닌, 프톨레미2세 자신이 그 유대교 경전 희랍어 번역 집대성 작업을 주도했다. 그만큼 유대인 사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셋째, 바로 이러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다이애스포라의 사람들에 의하여 초기 예수교의 원형이 성립했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유대인들은 당시 영어인 희랍어를 말하는 헬라화된 개방적 전통의 사람들이었으며, 협애한 율법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문화전통을 흡수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로마군단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마사다 요새에서의 처참한 최후항전(AD 74), 바르 코크바 (Simon Bar Kokhba)가 주도한 독립전쟁의 좌절 (AD 135) 이후, 유대인을 멸절시키려는 듯한 탄압이 강화되자 유대인들은 이미 해방구를 형성하고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의 다이애스포라로 대거 몰려들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예수교화된 유대인들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는 점점 예수교화되어 갔을 뿐 아니라 주변의 헬라화된 이집트 지식인들에게도 기독교는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이 예수교화된 이집트 지식인들이 헬라어의 자모를 이두식으로 빌려 쓰는 최초의 어문일치형의 이집트말 표기법, 콥틱어 (the Coptic language)를 만들었다. 우리의 도마복음서는 바로 이 콥틱어로 쓰여진 것이다. 물론 콥틱어 번역의 원본에 해당되는 희랍어 텍스트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 원본은 극히 일부 이외는 발견되지 않았다.
넷째, 구약에 대한 예수교인의 관념의 형성은 모두 헬라어 구약성경인 셉츄아진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초기 예수교의 구약전승 중시 사상은 모두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립한 셉츄아진트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신약성서에 인용되고 있는 구약성서의 구절은 거의 모두가 히브리성경에서 인용된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립한 셉츄아진트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신약성서 자체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다이애스포라의 문화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 총체적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다섯째, 뿐만 아니라 셉츄아진트의 성립과 그에 따른 예수교인들의 구약에 대한 이해방식의 특수성, 그리고 부수적인 곡해와 왜곡이 바로 역으로 유대교 정통을 고집하는 보수주의적 학자들에 의한 히브리정경 편찬작업을 촉발시켰다는 재미있는 사실도 같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구약의 체제도 희랍어 셉츄아진트가 히브리어 텍스트의 편찬작업을 선구한 것이다.
내친김에 한마디 하자면, 이 초기 예수교의 전승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콥틱 예수교는 아직도 이집트에 엄청난 성세를 유지하고 있다. 로마 교황청에 필적되는 콥틱 본산 교황청이 있으며 그 인구는 이집트 전체인구의 13%나 되는 1000만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집트는 결코 이슬람국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마태복음서가 말하고 있는 헤롯왕의 진노를 피한 예수 성가족,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피난생활로부터 콥틱 예수교의 시원을 잡는다. 헤롯대왕이 BC 4년에 죽을 때까지 예수 가족이 3년 동안 이집트에서 머문 삶의 족적에 모두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저자 성 마가 (St. Mark)가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포교를 했고, 그곳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믿고 있다. 베드로의 순교지에 로마 베드로성당이 세워진 것처럼, 마가의 순교지에 알렉산드리아 마가성당이 치립 (峙立)하고 있다.
마가는 생의 초반에도 이집트에 온 적이 있고, 기나긴 전도여행 끝에 결국 이집트에 안착했다고 한다. 바울 혹은 베드로와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왔다는 설도 있다. 그가 라코티스라는 지방의 돌길을 걷는데 그의 샌들 끈이 끊어졌다. 그때 구두수선공 아니아누스 (Anianus)가 마가의 구두를 꿰매다가 송곳으로 자신의 손을 찔렀다. 그때 피가 솟구치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외쳤다: “아이쿠! 하나님!” 그러자 마가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으시는군요.” 그 순간 피가 멈추었다: “사랑을 전파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으시오.” 아니아누스는 최초의 수세자 (受洗者)가 되었고 그의 집은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마가는 인간평등을 외쳤고 그의 교회신도는 급격히 불어났다. 그러자 이집트의 세라피스신도들과 로마병정은 마가를 잡아 밧줄로 목을 매어 길거리를 질질 끌고 다녔다(AD 68년 부활절사건으로 기술되고 있음).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시신을 태우려 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졌고, 그의 시신은 온전히 보존되었다. 그의 시신은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아니아누스 집으로 모셔져 봉헌되었다.
이 마가의 시신을 AD 828년, 이슬람이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 베니스사람들이 훔쳐갔다. 이슬람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돼지고기로 그 유해를 덮어 갔다고 한다. 이 마가의 유해를 봉헌한 성당이 바로 베니스에 있는 상 마르코성당 (Basilica di San Marco)이다. 상 마르코에 있던 마가의 유해는 1968년 6월 22일 116대 콥틱 교황 키릴로스(Pope Kyrillos Ⅵ of Alexandria)의 끈질긴 노력으로 로마교황 바오로6세에 의하여 원위치로 봉환되었다. 현재 마가는 콥틱 교황청의 제1대 교황으로 모셔지고 있다.
예로부터 알렉산드리아는 그 항구 앞에 있었던 파로스 (Pharos)라는 섬에 세워진 등대로 유명했다. 내전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를 무찌르기 위해 시저가 로마 군단을 상륙시킨 곳도 바로 이 등대섬이었다. 시저의 승세 (勝勢)를 감지한 이집트의 왕 프톨레미 13세는 시저가 파로스섬에 상륙하기 6일 전에 이미 폼페이우스의 모가지를 쳤다. 그리고 파로스섬에 올라오는 시저에게 그 모가지를 바친다. 폼페이우스는 비록 정적이었지만 전우였으며, 사위였으며, 절친한 친구였다. 시저는 그 비운의 모가지를 붙잡고 오열하며 비통한 눈물을 흘린다. 시저의 통곡 소리가 알렉산드리아의 푸른 하늘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시저는 매우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정감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나는 파로스섬에 서서 그 장면을 연상하면서 파란만장한 인간세의 성쇠를 그려보았다. BC 48년 10월 4일의 사건이었다. 시저는 그 자신의 전쟁 기록인 『내전기』 (Commentarii De Bello Civili)에서 파로스 등대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파로스섬에는 경탄할 만한 건축물이자 그 섬의 이름을 따 파로스라 불리는 매우 높은 등대가 서 있다.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 떠 있는 파로스섬은 항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이집트의 선왕들은 이 섬에서 도시까지 약 1.4㎞의 제방을 쌓았다. 섬 위에는 이집트인들의 집과 도시 규모의 주거지가 있는데, 앞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부주의나 궂은 날씨 탓에 조금이라도 길을 잘못 들면 섬 주민들이 마치 해적처럼 달려들어 배를 약탈한다. 또한 섬과 육지 사이의 해협이 워낙 좁아 파로스섬을 지배하는 자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떤 배도 항구로 드나들 수가 없다.”
시저는 친구 폼페이우스의 모가지를 벤 프톨레미 13세를 오히려 실각시키고, 그와 대결하고 있었던 그의 누이 클레오파트라를 왕위에 올린다.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21세의 토실토실한 미녀였다. 벽화를 보아도 그 리얼한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데, 마리아 칼라스를 연상케 하는 시원한 희랍 미녀상과 비옥하고 단단한 나일 강의 검은 흙의 싱그러움이 결합된 그런 모습이다. 하늘로 치솟다시피 한 젖꼭지에서 흐르는 유방의 선율은 이집트 미녀의 강렬한 기력(氣力)을 발산하고 있다. 시원하게 찢어진 눈, 우뚝 솟은 매부리코, 도톰한 입술, 의젓한 바위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은 광대뼈, 마케도니아의 섬세함과 나일 강의 풍요로움이 결합되어 있는 매력적인 모습이다. 시저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포옥 빠져버린다. 그리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유일한 아들인 카이사리온을 낳는다. 그러나 4년 후 아이러니컬하게도 폼페이우스의 거대한 석상 아래서 로마 원로원 배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수십 군데나 찔리고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 최후로 “브루투스 너도냐!”를 외치면서 절명한다.
시저가 죽자 그의 옥좌를 둘러싸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세기의 대결을 벌이지만 결국 악티움 해전이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모든 것은 끝나버린다. 사가들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들만의 세기적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절망 속의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칼을 세우고 가슴을 던진다. 그리고 피 흘리는 몸을 이끌고 자살을 시도하려는 클레오파트라의 능묘로 달려가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라고 권유하면서 숨을 거둔다. 그러나 이미 클레오파트라는 39세, 옥타비아누스의 차가운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능묘 속 죽음의 침상 위에 누운 채 장엄하게 보석으로 치장하고 충직한 시녀로 하여금 그녀의 오른쪽 손목 요골동맥에 날카로운 이집트 독사의 이빨을 물리게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와 합장케 해달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긴다. BC 30년 8월 30일의 사건이었다. 냉혹한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유언을 거룩하게 거행하기는 했지만, 줄리어스 시저의 유일한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가차없이 죽여버린다. 이 옥타비아누스가 바로 누가복음 2:1에 나오는 “가이사 아구스도”이다. 이 모든 영웅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곳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원래 이집트의 해변은 수심이 얕고 숨은 암초가 많아 지중해의 항해사들에게는 악몽이었다. 알렉산드리아를 지중해 물류의 중심항구로 만들기 위하여 프톨레미 1세는 파로스섬에 거대한 등대를 만들게 했다. 설계자는 크니두스의 소스트라투스 (Sostratus of Cnidus)로 알려져 있다. 12년의 공사를 거쳐 BC 283년에 완공되었는데 그 높이가 자그마치 135m에 이른다. 이 파로스 등대를 고대 사가들은 ‘세계 7대 불가사의 (the Seven Wonders of the World)’ 중 하나로 꼽았다. 그 모습은 현재 베니스에 있는 상 마르코 성당의 벽화에 남아 있다.
아마도 처음에는 이 등대는 단순한 표식의 기능만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꼭대기에 알렉산더 대왕 혹은 프톨레미 1세의 석상을 태양신 헬리오스의 모습으로 만들어 올려놓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AD 1세기에 로마인들이 기름횃불을 태우는 봉화대를 만들고 그 배경에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동판을 세워 불빛을 반사시켰다고 한다.
그 뒤로 이 파로스 등대는 모든 등대의 원형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사원의 첨탑인 미나렛이 모두 이 등대를 모델로 해서 발전한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3단의 거대한 기단이 있고 그 위에 4각형의 성채가 있고 그 위에 8각형의 높은 타워가 있고, 그 위에 원통형의 봉화대가 있는데 나선형의 램프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이 장엄한 건물은 모든 풍랑과 해일을 17세기나 견디어냈다. 그러나 1303년 동부 지중해 전역을 뒤흔든 지진으로 무너져버렸다. 아직도 그 잔재가 주변 바다 속에 파묻혀 있다.
1480년 맘룩크 왕조의 술탄인 카이트베이 (the Mamluk sultan Qaitbey)는 그 유적지에 군사목적의 요새 (Fort Qaitbey)를 지었다. 파로스 등대의 석재 적색화강암을 재활용한 흔적을 그 요새의 외벽 기둥에서 찾아볼 수 있다. 1층은 이슬람학교 양식의 모스크, 2층에는 갤러리와 병사들의 막사, 3층에는 무기고와 지휘관들의 집무실이 자리 잡고 있는, 너무도 견고하고 고색창연한 건물이었다. 그 우윳빛 사암이 동굴처럼 갤러리를 이루고 있는 그곳 성채의 아름다운 창문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지중해의 물결은 너무도 찬란했다.
알렉산드리아와 세례요한
알렉산드리아의 석학 아폴로,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
여러분은 이제 신약성서 중에서 초대교회의 선교역사를 다룬 기행문적 기록인 사도행전이라는 한 편을 펼쳐볼 필요가 있다. 18장 23절부터 사도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이 시작되는 초기상황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떠났다”하는 것은 제2차 전도여행을 안티옥 (Antioch: 시리아 지역의 지중해 연안 도시. 현재는 터키 소속의 안타캬 (Antakya)에서 종료하고, 그 안티옥에서 얼마동안 쉬었다가 그곳에서 제3차 전도여행을 떠났다는 뜻이다. 그가 안티옥에서 육로로 간 지역은 갈라디아 (Galatia)와 브리기아 (Phrygia)인데 이곳은 현재 소아시아 터키의 중심부 지역이다. 바울은 1·2차 전도여행을 통해 이 지역에 교회를 세웠고 또 제자들을 심어놓았다.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라는 것은 그 지역에 심어놓은 제자들을 다시 만나 그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심을 굳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다음 구절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폴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폴로라 하는 유대인”에 관한 신약성서의 묘사는 우리가 여태까지 고구(考究)하여온 알렉산드리아의 지적 분위기를 너무도 정확하게 전달해준다. 제우스의 아들이며 델피신전의 주신인 아폴로를 따른 그의 이름(Apollos)이 말해주듯이 그는 헬레니즘 세계에 완벽하게 동화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Alexandrian Jew) 다이애스포라의 지적 거성이었다.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여기 “학문이 많다”는 뜻은 영어개역표준판 (RSV)에서 “an eloquent man”이라 했는데, “지식이 풍부할 뿐 아니라 유창한 웅변가였다”는 뜻이다. 물론 아폴로의 풍요로운 지식은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서 왔다. 그리고 그는 대도시의 지성다웁게 달변의 소유자였으며, 타인을 설득시키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어눌한 변론을 뛰어넘는 힘이었다. 여기 “성경에 능한 자”라 한 것은 바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립한 셉츄아진트 구약성서에 능통한 대학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라" 했는데 여기 우리는 “주의 도(the Way of the Lord)”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동양인들이 말하는 도(道)와 거의 유사한 개념으로 쓰는 “호도스”(길, 행위, 삶의 실천방식)라는 단어가 선택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 도”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이 정확하게 예수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만약 “주의 도”를 예수교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바울이 활약하던 AD 50년대에 이미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사회에 예수교가 성립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이 사도행전의 기록은 초기 예수교의 입장에서 기술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저자의 기술방식은 놀랍게도 편견이 없다.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이 한 문장에서 상반절인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는 별 의미가 없는 진술이다. 그 핵심은 주절인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실상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소아시아의 항구도시인 에베소로 온 아폴로라는 유대인 지식인은 “주의 길”을 선포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주”는 실상 “예수”가 아니라 “세례요한”이었다. 그가 선포하는 “주의 길”, 즉 주님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는 삶의 방식은 다름 아닌 “요한의 세례”였다.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라는 표현에서 “만(only)”이라는 부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알렉산드리아의 석학 아폴로는 실상 예수의 교도가 아니라 세례요한의 교도였던 것이다. 이 사도행전의 정확한 기술에 의하여 우리는 AD 50년경에는 이미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다이애스포라에 세례요한의 종파가 성립해 있었다는 역사적 실제 정황을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세례 새로운 구원의 사상 - 요한
- 율법 (토라)이 규정하는 모든 인간의 죄가 씻겨 사함을 얻는다.
“물의 세례”가 아닌 “불의 세례” 새로운 영성운동 - 예수
- 물리적 죄사함의 논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천국의 논리 선포
공관복음서가 모두 예수가 그의 공생애를 세례요한에게서 세례 받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그 시인은 실상 예수가 현실적으로 세례요한의 제자였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세례 (baptism)라는 것은 유대교 전통에는 부재하였던 전혀 새로운 혁명적 발상이었다. 세례는 오로지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된 뉴에이지 무브먼트 (New Age Movement)였다.
요단강 강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는 것만으로 율법 (토라)이 규정하는 모든 인간의 죄가 씻겨져 사함을 얻는다는 새로운 구원의 사상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대한 최대의 반역이었다. 이 반역적 세례운동이 당대 로마 학정과 바리새의 형식적 율법주의의 기미 속에서 신음하던 민중의 광범한 지지를 얻고 있을 당시, 예수는 깨달음을 얻은 후 그 요한의 세례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물의 세례”가 아닌 “불의 세례”라는 새로운 영성운동, 즉 물리적 죄사함의 논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천국의 논리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공관복음의 기술은 예수가 세례요한의 추종자였다는 역사적으로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에, 그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그 수세 (受洗)장면의 의미구조를 역전시켜 놓았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 7~8).
그러나 이 사도행전의 기술은 AD 50년대의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사회에 예수종파는 존재하지 않았어도 세례요한종파는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폴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코즈모폴리턴적인 감각을 가지고 세례요한의 “세례구원사상”을 선포하러 다녔고, 에베소에까지 전도여행을 왔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 전도그룹과 맞부닥치게 되었던 것이다.
아폴로는 “담대하게”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회당에서 선포하였다. 그 선포의 내용은 예수의 멧세지가 아닌 세례요한의 멧세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소아시아의 유대인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따라서 아폴로의 무서운 감화력을 감지한 바울파의 사람들은 그를 “예수의 길”로 인도한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행 18:26). 그리고 그를 그의 소망에 따라 고린도교회로 파송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알렉산드리아의 개방적 지적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바울 자신이 그의 고린도서한에서 아폴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아폴로는 결코 바울의 제자로서 예수를 설파하지는 않았다. 아폴로는 바울과 동급의 또 하나의 지적 거성이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 속한다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폴로에게 속한다 하니 너희가 속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리오? 그런즉 아폴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도다. …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로라.”(고전 3:4~9)
신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분위기는 이와 같다. 아랍권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나기브 마푸즈 (Naguib Mahfouz, 1911~2006)도 알렉산드리아 사람이었다. 그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평화공존을 외쳤고, 사회주의, 호모섹스, 신(神) 등 당시 금기시되었던 모든 테마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알렉산드리아와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핵심,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냐 둘이냐? 파로스 등대가 서있는 알렉산드리아의 항구로 들어온 사람들의 이름은 찬란하다. 파로스 등대가 세워지기 이전이긴 하지만 그 리스트는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파로스 등대에 발을 디디자마자 목이 잘린 폼페이우스, 천신만고 끝에 파로스 등대를 장악한 줄리어스 시저,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영접을 받은 안토니우스, 최종의 승자로서 당당하게 군림한 옥타비아누스, 로마를 화염에 휩싸이게 했던 네로 황제, 그 뒤로 동서방의 황제들이 파로스 등대의 빛줄기를 따라 알렉산드리아의 땅을 밟았다. 트라이아누스, 막시무스, 하드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그리고 예수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그리고 동로마제국의 열렬한 기독교 수호천사 유스티니아누스. 그러나 이제 우리는 356년 2월 어느 날 밤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예수교 역사에서 삼위일체 (Trinity)라는 것은 참으로 해괴한 논쟁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삼위일체 따위의 이야기를 그의 입으로 말한 적도 없거니와 (언급이 많았는데..아버지로부터 왔고... 동반자인 성령을 보내주겠다고..나중에 따지자...), 신약성서에서 삼위일체의 논쟁거리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례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예수교 신앙 자체의 문제일 수 없으며, 오로지 초대교회 조직의 역사인 교회사에서 생겨난 신앙외적 교리 문제일 뿐이다. 예를 들면, 구약의 세계에서는 삼위일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생겨날 수가 없다. 오늘날까지도 유대교에서는 삼위일체니 하는 따위의 교리는 일체 배제되고 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일뿐이며, 3위가 존재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그런데 정확하게 초기 예수교의 상황에서 말하자면 초대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생각한 종교는 전통적 여호와 신앙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새로운 말씀 즉 복음을 신앙하는 예수신앙 종교였다. 그것은 여호와교가 아니라 예수교였던 것이다. 만약 그것이 단순한 여호와신앙 종교라고 한다면 전통적 유대교(Judaism)와 다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늘날에도 ‘여호와 증인’ (Jehovah’s Witness)은 예수교의 한 종파로 간주되기 어렵다. 그들의 근원적 신앙체계는 예수의 증인이 아닌,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일차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크리스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단지 “증인”이라고만 부른다.
초대교회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계속 발생되었다. 특히 초대교회를 형성한 유대인그룹 속에서는 새로운 신앙의 대상으로 가슴에 모신 예수라는 역사적 존재, 그 존재를 구원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서 생각할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와 전통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가 매우 궁금한 문제로 부상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냐 둘이냐? 한 몸이냐 따로따로냐? 그 관계가 무엇이냐? 인간 예수가 곧 하나님이란 말이냐? 인간 예수는 하나님에 의하여 파견된 또 하나의 선지자일 뿐이냐? 아니면 그 이상이냐? 게다가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키는 사실은 초대교회에 팽배한 긴박한 재림사상 (Imminent Second Coming)의 기대였다. 곧 예수가 재림할 텐데 그 예수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가 인간의 모습으로 올 것이냐? 그가 오면 이제 이 어둠의 세상은 완전히 끝나버린다는데 그가 곧 하나님이냐? 이러한 초대교회 내의 논쟁이 필연적으로 삼위일체라는 문제를 유발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복음서의 입장은 매우 간결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즉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예수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주제를 고도의 추상적인 철학적 담론으로 승화시켰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해소될 길이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냐? 둘이냐? 그것이 그냥 하나라고 속 시원하게 해버리면 예수교의 특성이 사라지고, 아예 둘이라고 잘라 말해버리면 유일신교의 원칙에서 벗어난다. 여호와와 예수는 제우스와 아폴로 같은 다신론의 두 이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요한복음에서는 재림을 시사 하면서 “보혜사” (파라클레토스: 원래 법정에서 변호사 역할을 맡는 사람. 요 14:15~17, 25~26, 15:26, 16:4~11, 12~15)를 언급하였고, 그 “보혜사”가 의인화된 성령(the Holy Spirit)으로서 해석될 여지를 남겼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예수의 언급이 있었는데...)의 세 존재에 관한 문제는 초대교회의 골칫거리였다. 교인들이 만나면 시도 때도 없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치고받고 하면서 분당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사실 삼위일체 논쟁의 스트럭처는 요한복음의 로고스 예수론 (Logos Christology)에 내장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성부ㆍ성자ㆍ성신의 문제에 있어서 성신(聖神)의 항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논쟁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성부와 성자의 관계설정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예수교를 공인했을 때(AD 313), 즉 그토록 집요하게 로마제국을 위협하던 예수교라는 유일신 사상을 공인함으로써, 오히려 분열되어 가고 있던 로마사회에 새로운 응집력을 도입하고 유일황제신앙을 강화시켜 로마제국을 재건하려는 야심 찬 반전을 시도했을 때, 지중해 연안의 예수교 세계 그 자체는 이 삼위일체 논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논쟁의 센터가 다름 아닌 알렉산드리아였다.
분열된 로마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려는데(콘스탄티누스는 분열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끔찍한 살상의 만행을 계속 자행하여 왔다), 분열된 예수교를 가지고서는 도저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를 열고 그 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까지, 예수교계에 통일된 정론을 세우려 했다.
그의 목표는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정치적인 것이었다. 사실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를 열기 전에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격렬한 논쟁의 두 적대세력인 알렉산더 주교와 아리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각기 보냈다: “그대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충실하게 조사한 결과, 나는 그 원인이 참으로 사소한 것이며 격렬한 쟁점으로서는 너무도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소. … 여가를 오용하여 심심풀이처럼 제기한 논점은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만 제한해야 하며, 대중집회에서 서둘러 발표하거나 경솔하게 대중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 그토록 숭고하고 난해한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오. 실은 이런 질문을 제기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소.”
매우 현명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두 거두가 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현명한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면 오늘의 예수교는 매우 여유로운 예수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양천년(兩千年)의 고통과 분열과 유혈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호소도 종교적 지도자들의 마음에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그리고 드디어 325년 5월 20일 니케아에서 대규모 공의회가 열렸던 것이다. 이 공의회에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주교의 비서로서 따라간 사람이 바로 우리의 주인공 아타나시우스였다
삼위일체의 정치사적 맥락
예수는 하나님인가 인간인가? 니케아 종교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의 대부분은 동방에서 왔다. 서방에서 온 주교들은 6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로 300여 명에 이르는 참석자들은 모두 동방의 주교들이었다. 동방주교들은 대부분 아리우스의 견해에 우호적이었다. 아리우스 (Arius, c. 250~336) 하면, 우리는 후대의 기술 때문에 그를 무조건 안티크리스트의 이단자, 예수인간론의 수호자로 낙인찍고 만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개방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아리우스에게는 예수를 무조건 하나님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불행한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예수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라면, 인간 예수의 모습은 하나님의 가현 (假現)에 불과한 허상이 되어버리고 말 위험성이 있다. 예수를 인간으로 이해할 때만이 오히려 하나님의 유일절대성이 확보되며 다신론의 가능성을 봉쇄할 수 있게 된다. 예수가 인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확실히 보장된다고 그는 보았다. 그리고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당시 유행하던 네오플라토니즘의 영향을 받아, 인간도 신과 합일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엑스타시스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예수를 단지 인간으로 보는 것은 모처럼 공인된 예수교라는 국교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에게 완벽한 신적 권위를 부여해야만 기존의 그레코·로망의 다신교적 다양한 종교형태를 극복하고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설정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였다. 아들에게 아버지와 똑같은 신성을 부여하면 당시의 로마세계에서는 다신론으로 오해될 소지가 많았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은 절대유일하며 창조될 수 없는 (agennetos) 존재라고 주장했다. 반면 예수는 태어났으며 죽었으며 부활했다. 따라서 예수는 분명 생산된(gennetos) 존재이므로 하나님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절묘한 절충안
“아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이다. 황제에게는 이러한 종교적 판결문은 애매할수록 좋고, 해석의 여지가 많을수록 좋다. 해석의 여지가 많을수록 다양한 언설들을 황제의 권위 아래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을 해소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절묘한 절충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아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이다” (homoousion to Patri).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은 겉으로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실체라고 하는 뜻이다.
호모우시온 (homoousion)이라는 말에서 ‘호모’는 동일하다는 뜻이다. ‘우시아(ousia)’는 감각적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는 본질, 실체라는 뜻으로 전통적 희랍철학의 흔한 개념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에 있어서는 동체 (同體)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위 (位, hypostasis)를 갖는다는 것이다. 황제에게는 이러한 종교적 판결문은 애매할수록 좋고, 해석의 여지가 많을수록 좋다. 해석의 여지가 많을수록 다양한 언설들을 황제의 권위 아래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이러한 결정을 많은 사가들이 반 아리우스 파의 논리적 승리처럼 기술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전반적 분위기는 친 아리우스적이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감각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 콘스탄티누스의 이러한 결단은 정치사적으로 보면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향후 서방중심의 예수교 정통론을 수립하는 데 매우 결정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이러한 니케아 종교회의의 결정으로 아리우스는 실각되었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알렉산더 주교와 그의 제자 아타나시우스는 소수파였지만 득의양양하게 개선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잠정적이었을 뿐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알렉산더 주교가 죽고(328) 그를 계승한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오히려 아리우스파의 집요한 탄압 속에서 기나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종교회의의 원래 결정인 “호모우시온” 즉 동체론을 견고하게 정통으로 고집했으며, 그 동체론의 입장에서 아리우스파에 대한 집요한 공격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러한 공격 때문에 그는 계속 실각·도바리의 인생을 살아야 했고, 그러한 피신의 삶 때문에 오히려 이집트 콥틱 기독교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민중의 영웅으로 부상되었다.
삼위일체론
단순한 문제에서 유발된 것. 이러한 삼위일체론에 대한 집요한 싸움을 우리는 매우 난해한 신학적인 논쟁인 것처럼 착각하지만 그 실상인즉슨 보다 단순한 문제에서 유발된 것이다. 우리는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지정학적 위치가 차지하는 경제사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일강의 대평원은 삼모작이 가능한 엄청난 곡창지대였다. 5만㎢에 이르는 이 곡창지대의 소출의 70%가 당시 로마로 갔다. 매년 30만t에 이르는 곡물이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로마로 갔다. 알렉산드리아는 “살찐 로마 거인을 먹여 살리는 암소”라고 불렸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의 정치적 안정은 로마의 하부구조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런데 당시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대결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대결구도에 대해 황제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판세는 바뀌게 마련이다. 대체적으로 본다면 아리우스파는 동방중심이었고 아타나시우스는 서방 중심이었다. 아타나시우스의 궁극적 승리는 예수교 세계가 서방 로마예수교 중심으로 재편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타나시우스는 파란만장의 생애를 살았고, 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나일강 주변의 콥틱 수도사들과 깊은 우정을 맺었다. 그는 주교가 되자마자 나그함마디 주변으로 성세를 누리고 있었던 수도승 파코미우스를 방문하여 깊은 우정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고난 후(337년), 그를 이은 황제는 다섯 명이나 되었다. 대제의 세 아들과 두 조카였다. 이들 사이에선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계속된다. 결국 둘째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모두를 죽이고 유일한 황제로 등극한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친아리우스적 정책을 펴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에게 수모를 당한 적까지 있었다.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직에 머물러 있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파들의 저항은 완강했다. 황제라도 교권의 질서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가 없었다. 『로마제국쇠망사』를 쓴 기번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평어를 적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 콘스탄티우스야말로 세속적 권력의 가장 격렬한 발휘조차도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는 종교적 명분의 원리의 힘을 체험해야 했던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행정당국은 아타나시우스를 주교의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설득하거나 강요할 힘이 없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이집트의 총독 시리아누스에게 명하여 알렉산드리아 시내 중심가로 북부 이집트와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었던 5000명의 로마군단을 이동시켰다. 356년 2월 어느 날 밤 12시쯤, 위기상황을 감지한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휘하의 성직자와 백성들과 함께 야간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성 테오나스(St. Theonas) 교회를 덮쳤던 것이다. 맹렬한 공격으로 성당 문이 열리고 끔찍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성처녀들이 발가벗겨지고 채찍질 당하고 거친 병사들의 욕망의 분출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아타나시우스의 도바리
“삼위일체의 정통론을 고집하는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와 타협 없이 대결했고, 아리우스파를 지지하는 로마황제들의 탄압을 받았다. 기나긴 사막의 도바리 생활을 지켜준 사람들이 바로 수도승 파코미우스의 제자들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결국 승리했다. 그리고 367년 부활절 메시지에서 27서 정경체제를 발표한다.”
성 테오나스 교회가 시리아누스 군대에게 습격받아 피살자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교회당에 쌓이게 되는 그날 밤, 아타나시우스는 대주교의 의자에 앉아서 침착·담대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함과 비명 때문에 예배를 계속 진행할 수 없게 되자, 벌벌 떨고 있는 회중에게 ‘이스라엘 하나님’의 승리를 찬양하는 다윗의 시편 136편을 암송토록 독려했다. 마침내 빗장이 뻐개지고 문이 열리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군인들이 칼을 뽑아들고 성소로 몰려갔고, 제단 주위의 촛불에 반사되어 로마군인들의 갑옷이 번쩍거렸다. 아타나시우스는 사제들의 간청을 뿌리친 채 회중의 마지막 한 사람이 안전하게 나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밤의 어둠과 소란이 그의 탈출을 도왔다. 허둥대는 인파에 밀려 넘어진 채 의식과 행동력을 잃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불굴의 용기를 되찾아 자신의 대가리를 값진 선물로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바치려는 아리우스파 앞잡이들의 지시를 받은 군인들의 수색을 용케 벗어났다. 이때부터 아타나시우스는 모습을 감추고 6년이 넘도록 벽지에 숨어 살았다.
황제의 칙령에 따라 전 군민이 그를 추적했고, 산 채로나 죽은 채로 그를 잡아오는 사람에게는 후한 보상금이 지급된다는 방문이 여기저기 나붙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국가의 적이었으며 그를 숨겨주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고 발표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를 보호해준 것은 체노보스키온 근처, 테베사막에 산재해 있었던 파코미우스의 수도원과 그에 소속된 수도승 집단들이었다. 파코미우스는 이미 저승에 가고 없었지만 사막의 수도승들은 자기들의 헤구멘인 파코미우스와 젊은 날 우정을 맺었던 아타나시우스 주교를 자기들의 교부로서 받아들였다. 인내심과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들의 엄격한 제도를 준수하는 아타나시우스를 존경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영험스럽게 수용했다. 기도, 금식, 철야예배보다도 그의 무고함을 입증하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더 위대한 봉사라는 생각을 가지고 매진했다. 성스러운 뿔피리로 나팔을 불면 수천 명의 건장하고 신념에 찬 수도승들이 모여 아타나시우스를 보호했다. 그들 대부분이 이 근처의 순박한 농민출신들이었으며 자기들이 존경하는 스승을 위해 기꺼이 목을 내밀면서 사형집행인의 팔만 아프게 했다. 어떠한 고문을 통해서도 이 훈련된 수도승들의 자백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신속히 여기저기로 몸을 숨겨 다닐 수 있었다.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에는 다음과 같은 매혹적인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빈 큰 수조에 숨어 살다가 여자 노예의 배반으로 발각되기 직전에 간신히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기상천외의 은신처에 몸을 숨기기도 했는데, 그곳은 섬세한 미모로 온 도시에서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20세의 소문난 처녀의 집이었다. 몇 년 후에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한밤중에 거의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황망히 문을 두드린 대주교의 모습에 그녀는 경악했다. 대주교는 감싸주는 그녀의 지붕 아래서 거처를 구하라는 하늘의 계시에 인도되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하면서 보호해줄 것을 간구했다. 이 신앙심 깊은 처녀는 자기를 믿고 찾아온 이 성스러운 인질을 받아들이고 보호했으며, 용기와 신중함으로 신의 계시에 보답했다. 그녀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즉시 아타나시우스를 그녀의 가장 비밀스러운 체임버로 안내하여 다정한 친구처럼, 그리고 부지런한 하녀처럼 그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그녀는 위험이 계속되는 동안 그에게 책과 음식을 가져다주고, 발을 씻어주고, 서신연락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 간의 너무도 친근하고 고독한 교제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도록 매우 적절하게 은폐시켰다. 한 사람은 흠집 없는 순결을 생명으로 하는 성자였고, 한 사람은 열화 같은 위험한 감정을 도발시킬 수 있는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6년간의 박해와 추방생활 중에서 여러 차례 이 아름답고 성실한 동반자를 찾아갔다.”
아타나시우스는 생애를 통하여 이 6년간의 추방생활 외에도 대여섯 차례의 도바리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소신에 따라 아리우스파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며, 콘스탄티우스를 겁약하고 간악한 군주, 음험한 자기 가족의 살인마, 제국의 폭군, 그리고 안티크리스트라고 매도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율리아누스와의 싸움에서 결국 과로 끝에 병사하고 만다.
아타나시우스는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당당히 알렉산드리아로 입성하였고, 362년에는 알렉산드리아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삼위일체론을 정론으로 확립한다. 그리고 예수교회사에서 흔히 “배교자” (Apostate)라고 매도하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종교 간 평등정책으로 일시 또다시 도바리 생활을 해야 했지만, 363년 6월 26일 율리아누스가 사망하자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입성했고, 365년에는 아리우스파를 옹호하는 발렌스 황제에 의해 다시 추방되었지만 곧 복권되었다.
366년 2월 1일 마지막으로 화려한 입성을 한다. 그리고 다음해 부활절 메시지에서 27서 정경안을 권위롭게 발표하기에 이른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37년 만에야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서의 모습이 최초로 역사의 지평 위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 한다. 367년 이전에는 예수교에는 “신약성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과 그에 관한 사도들의 구전과 편지와 개별적 전기자료(복음서)들만 산재해 있었을 뿐이다. 이 산재한 문헌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일절 정경과 외경의 구분을 논구할 수 없다. 정경이 없는데 어찌 외경이 있을 수 있으리오?
2007년 7월 10일, 2년 전 새로 취임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 이외의 다른 예수교종파는 결함이 있거나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가톨릭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선포함으로써 전 세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기독교 교파 내의 통합과 다양한 인류의 종교들 간의 화합을 도모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합의에 역행하는 해석을 내리면서 동방정교회와 개신교를 진정한 교회로 볼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로마가톨릭 정통주의의 우월성과 분열정책을 표방한 것이다. 가히 소아병 증세 (infantile disease)의 발로라 해야 옳다.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65년)를 통하여 비 가톨릭적인 사고에 대하여 보다 개방적이고 탄력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세를 넓혀왔다. 베네딕토 16세는 당초에는 공의회의 입장을 수용했으나 그 이후의 삶의 역정을 통하여 공의회의 결정에 심한 회의감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교황이 됐다고 해서 그 반세기의 대세를 역행한다는 것은 새로운 분열를 양산하는 결과밖에는 초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톨릭 자내 (自內)의 분열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교황의 메시지가 아닌 예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타나시우스의 정경목록신약
27서는 어떻게 생겨났나?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AD 367년에 발표된 그 유명한 아타나시우스의 역사적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외경적 (apocryphal)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책들을 가지고 근사하게 장난질을 쳐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는 성서와 혼동시키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간증되고 우리에게 전승되어 온 정경 (the Canon)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책들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구약의 목록을 전부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 또다시 여러분에게 신약 (the New Testament)의 책들을 열거하여 말하는 것이 결코 지루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선 4개의 복음서가 있는데, 그것은 마태·마가·누가·요한에 의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사도행전이 있고, 또 가톨릭 (보편교회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7개의 서한이 있다. 그 7개는 야고보의 편지 하나, 베드로의 편지 둘, 요한의 편지 셋, 그리고 유다의 편지 하나이다. 이에 덧붙여 바울의 14서한이 있다. 그것은 다음의 순서대로 쓰인 것이다. 제일 먼저가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다음으로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두 편지가 있다. 이 두 편지 다음에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다음에 에베소 사람들에게, 다음에 빌립보 사람들에게, 그 다음에 골로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이것들 다음에 데살로니카 사람들에게 보낸 두 개의 편지가 있고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그것들 다음에 디모데에게 보낸 두 개의 편지, 디도에게 보낸 하나의 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이외로 요한계시록이 있다.”
우리가 신약성서라고 알고 있는 27서 체제의 이토록 명료한 목록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감동적이다. 27서라고 하지만 이것은 크게 보면 5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4복음서가 있다. 복음서는 기본적으로 예수라는 역사적 인간을 중심으로 한 4종류의 전기문학 (biographic literature)이다. 그리고 하나는 초대교회의 성립사를 기술한 역사문학이다. 그리고 초대교회를 성립시키는 데 매우 혁혁한 공을 세운 바울의 14개 편지 (Pauline letters), 그리고 교회와 관련된 사도들의 7개 편지, 그리고 계시록 하나이다
그런데 이 문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시대에 성립한 문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난다. 예수의 전기문학은 당연히 예수의 사후에 성립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이라는 역사문학은 당연히 예수의 사후로부터 시작된 사도들의 전도여행을 기술한 것이다. 바울의 편지와 사도들의 편지도 당연히 AD 50, 60년대 이후의 문헌들이다. 묵시문학인 요한계시록도 교부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에나 성립한 문헌이다
그러니까 예수시대에 성립한 문헌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교에 대한 모독적 발언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교의 원래적 성격을 잘 나타내주며, 그 실상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예수는 원래 지혜로운 사람이었지 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민중도 원래 지적인 민중이 아니라 소외받고 버림받고 수세대상으로서 착취당하는 하층의 군중(오클로스)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도 거개가 지식인이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문맹자들이었다. 어부인 베드로가 문자를 알 리가 없다(행 4:13). 따라서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지적인 언어로 기록해두거나 문서화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 이뿐 아니라 예수도 그들에게 그런 지적 작업을 요구하지 않았다.
예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고 당면한 인간의 구제상황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그가 말한 것을 전하고 가르치고(마 28:20) 설파하라(막 3:14)고 명령했지, 그의 말씀을 써놓으라고 권고한 적이 없다. 한마디로 예수교는 행위의 종교며 구두(말씀)의 종교이다. 경전의 종교도 아니요, 문헌의 종교가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초대교회는 긴박한 예수의 재림에 관한 믿음을 중심으로 모여든 군중의 집단이다. 이들은 곧 예수가 재림하여 이 어두운 세상에 대한 심판을 끝내고 그들 신앙공동체의 사람들을 천국으로 휴거해 가리라고 믿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이 지상에서 무슨 경전을 만들어 두어야 할 하등의 필요성을 느꼈을 리 없다. 어차피 최후의 심판의 날이면 이 세상은 불바다가 되어버릴 판인데 파피루스 쪼가리가 큰 의미를 지닐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경전의 결집을 중심으로 전개된 초기불교의 역사와는 아주 대조를 이루는 역사적 상황이다.
따라서 아타나시우스가 27서 정경체제를 발표했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긴박한 재림(파루시아)의 꿈이 깨져버리고 지상에서의 교회와 교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생겨났다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더구나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으로 인하여 로마제국 내에서의 확고한 세속권력이 확립된 이후의 사건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마태·마가·누가·요한이라는 4복음서는 이미 2세기 말에 타티안 (Tatian, AD 160∼175 활동)이라는 사람에 의하여 디아테사론 (Diatessaron)이라는 이름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아타나시우스의 27서 목록은 그가 임의적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 기나긴 박해상황과 이단의 발호에 대한 디펜스로 성립한 호교론적 역사과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형성된 관념의 총체적 결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27서 체제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편지이다. 이것도 사실 경전의 내용으로 볼 때는 매우 빈곤한 사태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서한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편지는 이미 2세기 중반에 이단으로 몰린 마르시온(Marcion, ?∼160)의 아포스톨리콘 (Apostolikon)에 의하여 그 권위가 확립되어 있었다. 마르시온은 바울의 편지 10개를 정경으로 존숭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시온의 영지주의나 아리우스파의 관용적 태도를 철저히 배격했던 아타나시우스가 사도 바울의 편지를 14개나 정경으로 편입시켰다고 하는 것은 알렉산드리아 교회 전통이 사도 바울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마가의 전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마가가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면서 동방교회들을 세웠다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것은 정경과 외경의 구분에 관한 것이다.
성경이 교회를, 교회가 성경을?
“정경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세 항목이 있었다.
첫째는 사도저작성, 둘째는 신앙의 잣대, 셋째는 교회 내 의견의 일치.” 이제 우리는 아타나시우스의 말을 세밀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외경(外經)이라고 말하면, 우리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뜻 때문에 “밖으로 벗어나버린 경전”이라는 이미지가 머리에 쏘옥 들어온다. “외경”이란 당연히 “내경 (內經)”과 상대를 이루는 말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맥락에서 내·외는 정통과 이단이라는 뜻을 지니지는 않는다. 내경이란 내부적인 사람들만 비밀스럽게, 은밀히 보는 경전이라는 뜻이고, 외경이란 외부적인 사람들도 볼 수 있는 개방적·대중적 경전이라는 뜻이다. 한 대 (漢代)의 의서 (醫書) 중에 『황제내경』이니 『황제외경』이니 하는 경전이 있었는데 모두 그런 뜻이었다. “내”는 “esoteric”으로, “외”는 “exoteric”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가 “외경적”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 원어는 “아포크리팔(apocryphal)”이라는 표현을 선택하고 있다. 본시 “아포크리파(apocrypha)”라는 것은 “숨겨진 것들 (things hidden away)”이라는 뜻인데, 우리 전통적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외경”보다는 “내경”의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포크리파로 분류된 경서들이 결코 당시에 숨겨진 책이거나 비밀스러운 책들은 아니었다. 실제로 아포크리파라는 말은 “신앙의 척도가 되기에는 부차적인 경전”이라는 뜻으로, “듀터로캐노니칼 (deuterocanonical)”이라고 불릴 정도의 의미맥락에서 쓰인 말이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증되고 전승되어 온 정경”이라는 표현에서 “정경”의 언어는 “카논(kanon)”인데, 이 카논이라는 말은 원래 “갈대” “지팡이” “막대기 자”라는 뜻으로 “기준”이나 “규범”의 의미를 지닌다. 카논은 정경이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신앙의 잣대가 되는 경전”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경 (經)이라는 것도 위 (緯)에 대비되는 것이다. 천을 짤 때 먼저 경을 세워놓고 거기에 위를 접속시키기 때문에 경이 위보다는 항상 더 근본적인 것이다. 경 (經)은 만물의 길 (徑)이며, 항상 그러한 것 (常)이며,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법 (法)이다. 그래서 경서 (經書)니 위서 (緯書)니 하는 표현이 있게 되었다. 경 (經)과 카논 (Canon)은 상통하는 표현들이다.
경(經) 카논을 규정하는 기준(criteria of canonicity)
1) 사도저작성 (apostolicity)
2) 신앙의 잣대 (the rule of faith)
3) 교회 내의 의견일치 (the consensus of the churches).
대체적으로 카논을 규정하는 기준 (criteria of canonicity)으로서 다음의 세 항목을 꼽는다. 1) 사도저작성 (apostolicity) 2) 신앙의 잣대 (the rule of faith) 3) 교회 내의 의견일치 (the consensus of the churches). 이 세 항목 중에서 첫째의 사도저작성은 온당한 기준이 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1세기로부터 4세기에 걸쳐 모든 경서의 저작자들이 사도의 저작을 가칭 (假稱)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위서(僞書)나 표절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에는 너무도 당연시된 공적 행위였다. 베드로니 바울이니 요한이니 하는 이름들은 “철수”처럼 매우 흔한 보편적 이름들이었으며, 그러한 사도 중의 한 이름을 책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저작 그 자체를 영예롭게 하는 고귀한 행동이었다. 그러한 위작의 방식은 당연시된 한 양식적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사도저작성의 기준만으로 외경과 정경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두 번째 신앙의 잣대 (regula fidei)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구현체이며 계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어느 저작이 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인지를 가리는 것도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에 속한다. 이 문제를 놓고도 초대교회에서는 논란이 매우 많았다. 히브리서 1장 1절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는 방식 자체가 매우 다양하고 많아서 (in many and various ways) 과연 무엇이 참된 계시인지를 인간으로서는 가리기가 어렵다. 그 종국적인 기준은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하여 계시된 말씀일 것이나, 예수의 말씀조차 당대에 기록된 것이 없고, 결국 인간의 언어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카논 저작자들의 주관적 의도가 적극적으로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빠진 객관적이고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은 인간의 언어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초대교회에서 논증되고 있었다.
결국 정경과 외경의 구분으로서 가장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지니는 기준은 제3의 항목이 될 수밖에 없다. 교회 내의 의견의 일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정경을 성립시킨 것은 교회였다. 정경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27서 정경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오늘날 시중의 큰 건물 속에 들어앉아 연보나 받고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정경을 형성시켜 간 교회” 즉 에클레시아 (ekklsia)이며, 그것은 선택받은 인간들의 모임 즉 그리스도에 의하여 규정되는 휴먼 네트워크이다. 이 에클레시아는 디모데전서 3:15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 (the pillar and bulwark of the truth)이다. 정경은 바로 이 에클레시아에 속한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교회의 권위가 정경의 권위를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는 궁극적으로 그 교회에 임재하는 성령의 권위에 의하여 확보된다고 그들은 믿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러나 교회가 인간 공동체인 이상, 교회 내에도 내분이 있게 마련이고 다시 정통과 이단의 싸움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싸움에서 정통과 이단을 가를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찾아내기란 극히 어렵다. 이런 문제는 초대교회 내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했으며 바울 서한의 대부분이 이런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 결국 정통과 이단의 쌈박질에서 우리가 흔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이다: “목소리 센 놈이 정통이다.” 목소리 센 놈이라니 그놈이 세다는 것은 무엇으로 아는가? 목소리 세다는 것은 목소리 약한 놈에 비해 지지자를 더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결국 정통과 이단은 다수 (majority)와 소수 (minority)의 문제로 결착 나는 것일까? 다수파에 밀려 소수파가 떨어져나가 새롭게 교회를 개척하는 상황도 비일비재하지만 초대교회의 문제는 결코 이러한 숫자의 문제로 해결될 수는 없다. 시간의 함수를 넣고 본다면 다수가 금방 소수로 바뀔 수도 있고, 소수가 권불십년 (權不十年)이라, 곧 다수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초대교회에서 우리가 정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소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에 비하면 소수였다. 당시는 정통과 이단이 항상 티격태격하면서 공존하는 상황은 있을지라도, 일자가 타자를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그러한 배타적 권위가 부재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오히려 초기예수교의 생명력이었다.
묵시문학의 본색
묵시문학은 배교의 거부였고 순교의 종용이었다.”
“안중근의 모친은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을 면회한 자리에서 이렇게 울부짖었다: ‘일본법제의 틀 속에서 상고하는 것은 일본제국을 인정하는 것이니 차라리 빨리 죽음을 택하라.’ 묵시문학은 배교의 거부였고 순교의 종용이었다.” 정경과 외경을 가르는 궁극적 기준은 다수와 소수의 문제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절대적인 추상적 진리기준을 인간의 언어로 논구하기도 어렵다. 결국 정경과 외경의 실제적 기준이 된 것은 가톨릭이라는 로마교회의 의견이었다. 동방교회는 다양한 사도전통을 포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정통과 이단을 확연하게 배타적으로 가르는 성향이 비교적 미약했다. 그러나 정통주의(Orthodoxy)에 대한 집념은 2세기부터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강렬하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정통”이란 결국 이론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실제적으로 “로마교회의 다수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 예수교의 형태” (the form of Christianity supported by the majority in Rome)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아타나시우스의 27서 정경목록도 4세기 로마교회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지만 아리우스와의 대립으로 박해를 받는 과정을 통하여 로마에서 유학생활을 한 로마통이었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의 27서 정경목록에 제일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이 포함된 것은 미묘한 감상을 자아낸다. 그것은 정경의 대상으로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문학서였다. 그것은 이천 년의 예수교 역사를 영감과 저주의 상반된 색깔로 물들인 문제작이었다. AD 100년 전후의 역사적 상황에서 매우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한 사람에 의하여 집필된 것이 확실시되고 있는 이 문헌은 에베소에서 살았던 순교자 유스틴(Justin Martyr, 100~165년경)이 쓴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 속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우리 중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인 그가 그의 계시록 가운데서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일천 년을 살게 될 것이다.’”
동시대의 마르시온은 이 묵시문학이 유대교적이라는 이유로 정경의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광열한 재림주의와 성령주의와 금욕주의의 야만성을 드러낸 몬타니즘(Montanism)이 요한계시록을 그들 운동의 근거경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러한 묵시문학의 부작용에 대하여 당시 이미 거부감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2세기의 교부 파피아스 (Papias), 이레나에우스 (Irenaeus), 이그나티우스 (Ignatius), 유스틴 (Justin) 등은 계시록의 정경으로서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나섰던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마틴 루터는 요한계시록의 정경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츠빙글리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칼빈은 요한계시록을 그의 주해서에서 빼버렸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가 요한계시록을 27서 정경에 편입시킨 이유는 매우 명료하다. 기원전후 세기는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피세적인 환상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던 극심한 탄압의 격동기였으며, 모든 메시아니즘은 묵시문학적 표현양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BC 250년경부터 AD 200년 사이의 유대인사회는 묵시문학의 시대라고 규정해도 좋을 만큼 많은 계시록이 생산된 세기였다. 현재 구약 속에 편입되어 있는 다니엘서도 이 시대에 성립된 (BC 164년경) 대표적 묵시문학 중의 하나다. 그 외에도 에녹묵시록, 제파니아묵시록, 에스라4서, 바룩묵시록 등 수많은 묵시문학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묵시문학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믿는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요한계시록은 제1장 1절에 명시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라는 점에서 유대교의 묵시문학과 근본적인 성격을 달리한다.
그리고 유대교의 묵시문학은 예언전통과 상통되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묵시문학은 예언문학이나 지혜문학과 그 근원적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당대의 하나님의 자녀들, 즉 당대의 이스라엘민족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묵시라고 하는 것은 당대라는 시간이 아닌, 시간의 종료인 종말의 때에 벌어질 사건에 관한 계시이다. 그러니까 예언은 하나님의 의도를 역사의 지평 속에서 구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묵시는 역사의 지평을 말살하고 역사를 넘어선 하나님의 초자연적·초시간적 영역에로의 회귀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언은 철저히 역사적인 반면 묵시는 철저히 비역사적이다.
묵시란 “아포칼립스” (apocalypse)란 말의 번역어인데, 그것은 “비밀스러운 것이 드러난다”는 희랍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꿈이나 천사나 환상의 매개를 통하여 탁월한 개인에게 계시되는 것이다. 이 계시는 현존하는 세계를 악마나 사탄이나 악의 세상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반드시 선의 세력에 의하여 종료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선·악 이원론의 극렬한 대립이 있으며, 반드시 종말론적이며, 현세와 내세라는 두 개의 세계가 대적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동학이 선천개벽과 후천개벽을 대비시키는 것이나, 원불교가 음세계와 양세계를 대비시키는 것과도 비슷하지만 동학이나 원불교의 선천·후천, 음·양은 모두 역사적 지평 내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종말론적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왜 이러한 종말론적 묵시문학이 당대 그토록 성행하였고, 아타나시우스가 정경 속에 그중 하나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나 하는 문제를 역사적 맥락에서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당시 초대 교회의 가장 큰 위협은 히브리서 6장이 경고하고 있듯이 배교(apostasy)의 문제였다. 로마의 박해 속에서 배교하지 않고 예수교신앙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순교(martyrdom)였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에게 순교란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 공포감을 제거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긴박한 종말의 도래를 선포하고 그 종말의 날에는 순교자가 궁극적으로 승리자로서 부활케 되리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당대의 로마황제교 참배는 우리나라 일제시대의 신사참배와 비슷한 것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이다. 사실 묵시록의 언어는 “일본법제의 틀 속에서 상고하는 것은 일본제국을 인정하는 것이니 차라리 빨리 죽음을 택하라”고 울부짖는, 여순감옥에서의 안중근 모친의 숭고한 애통의 언사와도 같은 것이다. 순교의 종용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주체적 의지보다는 하나님 공의(公義)의 숙명론을 강조한다. 묵시문학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지독한 환난과 박해와 역경을 견디고 헤치어 나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권력과 세력에 항거하는 신앙의 충성과 정절이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박해 상황에서 소아시아의 7 교회에 보낸 낭송문학의 걸작이며, 그 당시에는 매우 구체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로마 관원의 박해의 눈길을 피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이 해독할 수 없는 상징언어가 필요했다. 그 언어를 당시 예수교도들은 소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코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코드가 사라져서 해괴망측한 언어로만 들리게 된 것이다.
더구나 선·악의 종말론적 이원론은 오히려 평화로운 세계를 악마의 지배로 규정하고 저주시하며, 세속적 질서를 왜곡하며, 극악한 전도주의를 조장하며,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마비시키며, 타 종교의 공존을 죄악시하는 성령주의의 파렴치한 질곡 속으로 예수교를 빠뜨리는 비극적 역사를 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축복의 코드일까 저주의 코드일까?
다신론과 유일신론의 문명충돌
기독교 공인 이후 파괴되어간 인류의 문화유산
수메르·이집트 고 문명으로부터 희랍·로마 고문명에 이르는 다신론교 전통은 그 문명의 삶의 모든 양태, 그리고 그 양태와 제식이 발현된 위대한 조각·미술·춤·음악·문학·건축, 이 모든 예술의 축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신교의 부정은 이 모든 예술의 부정을 의미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것은, 물론 기독교도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반갑고 좋은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음지에서 박해만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양지에서 활보하며 대접받는 세상을 맞이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적인 역사의 전환이요, 인간세의 상전벽해다. 그것은 기나긴 핍박과 환난을 견디어온 순교정신의 승리요, 그들이 목숨 걸고 고수해온 신앙의 개가다. 8·15해방! 그날의 감격을 한번 상기해 보라! 일본순사 닛폰토 칼날 아래 신음하던 많은 지사들에게 그토록 기쁜 소식이 어디 있었으랴! 그러나 8·15해방 이후에 전개된 우리 민족의 역사는, 그 감격의 기쁨을 계승하고 발현할 수 있기에는 너무도 암울한 암운에 가려져버리고 만다. 권력의 암투, 이념의 분열, 그 순간을 위해 싸워온 사람들끼리의 내분, 외세의 농간, 동족상잔의 전쟁 … 이토록 비극적 역사만 이어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승인 이후에 전개된 역사 역시 8·15 이후의 난맥상에 못지않게 어지러운 역사였다.
희랍·로마사회는 다원주의를 포용하는 사회다. 통치자도 단일한 리더십보다는 항상 다원적 리더십을 수용했고, 신도 단일한 하나님보다는 다양한 시공의 성격을 대변하는 친근한 다신(多神)을 자연스러운 종교생활의 양태로서 받아들였다. 우리는 종교 하면, 다신론(polytheism)은 유치한 형태의 신관이고, 유일신론(monotheism)이야말로 진화된 고등한 형태의 신관이라는 생각에 암암리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사실 인류 역사를 공평하게 형량하면 그것은 단순한 편견일 수 있다.
다신론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영원히 인류가 저버릴 수 없는 종교적 열정의 발로일 수 있다. 이에 비한다면 유일신론은 매우 비자연적인 특수한 종교관의 강요이다. 대체적으로 유일신론은 지상에서의 권력의 통일과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폴리스 체제하에서 유일신론이 자리잡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신 자체가 다원적 문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유일신론이 정치적 권력의 백업이 없이 인간세에 기승을 부린 유례는 없다.
다신은 자연(自然)이요, 유일신은 당위(當爲)였을 뿐이다.
하여튼 기독교의 공인 이후에 로마사회에서 벌어진 가장 참담한 결과는 다신론과 유일신론의 대결이다. 유일신관을 신념의 기조로 삼는 기독교가 국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신관의 영향하에 ‘유일한 국교’가 될 수밖에 없다.
최초의 ‘공인’의 성격은 타 종교와 대등한 신앙의 대상으로서 인정한다는 것이었으나 결국 기독교는 유일국교의 지위를 보장받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거부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유일국교가 되는 동시에 누천년의 전통을 지닌 다신교들이 모두 타도되어야 할 우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관념적 전락은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수메르·이집트 고문명으로부터 희랍·로마 고문명에 이르는 다신론교 전통은 그것이 단순한 종교적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문명의 삶의 모든 양태, 그리고 그 양태와 제식이 발현된 위대한 조각·미술·춤·음악·문학·건축, 이 모든 예술의 축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신교의 부정은 거리를 가득 메운 이 위대한 예술전통의 부정을 의미한다. 제우스·아폴로·주피터·비너스·오시리스·이시스 등등, 이 모든 신상이 거꾸러지고 그들을 모신 신전은 존재해서는 아니 되어야 할 더러운 우상의 집이 되어버리므로 파괴되어야만 한다. 그 위대한 인류 문명의 모든 축적태가 하루아침에 궤멸되어야 하는 참혹한 운명에 노출되게 된다.
우리가 서구 문명을 여행할 때 대부분의 유적지가 견고한 석조건축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처참하게 파괴된 폐허로 남아있거나, 박물관의 석상들이 손발이 잘리거나 안면이 손상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단순한 세월의 탓이나 전쟁이라는 재해의 탓이라기보다는 기독교도들의 야만적 파괴로 인한 것이다.
우리는 탈레반이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도 언급되어 있는 세계 최대의 석불이며 예술적으로도 걸작품에 속하는 아름다운 바미얀대불 (the Great Buddha at Bamiyan)을 다이너마이트의 폭음과 동시에 돌가루로 날려버린 그 야만성에 개탄과 분노를 금치 못하지만, 실상 로마제국의 기독교인들은 그 몇 천 배, 몇 만 배의 야만적인 파괴를 일삼았다. 그들은 3세기 동안 감내해야만 했던 박해상황을 타 종교에 그대로 재현시켰으며, 그보다 몇 천 배 더 악랄하게 되갚았다. 문화혁명 (Cultural Revolution)이라는 미명하에 홍위병이 저지른 터무니없는 만행들! 우리가 중국을 여행할 때 위대한 세월을 말해주는 중국 문명의 석비들이 다 금 가고 깨진 모습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우행을 탓하지만, 로마제국 내의 ‘기독교 공인’이라는 문화혁명은 그보다 훨씬 더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유일신관의 존중이 왜 다원주의의 부정을 의미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진정한 유일신론은 종교적 문제를 포함한 삼라만상의 다원성을 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유일신은 오로지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오로지 하나인 신은 전체일 수밖에 없다. 전체가 아니라면 타에 의하여 국한되는 개별자가 되고 만다. 그것은 유일신론이 아닌 단일신론에 불과하다.
“나의 하나님”만을 배타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유일신론이 아닌 저급한 다신론적 세계관 속의 단일신의 권력적 횡포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저주의 개별신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탈레반의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은 그릇 해석된 유일신론의 횡포에 불과하다. 탈레반의 하나님과 한국 대형교회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통괄하는 오직 하나이신 전우주적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이, 편협한 인간의 언어와 가치관으로 해석된 단일한 하나님 상 (像)의 강요는 전도주의적 획일주의의 만행에 불과하다. 그것을 순교의 사명이나 진취적 정신의 개가로서 예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이스탄불에서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가 파견한 한국선교사를 만난 적이 있는데, 10년 선교활동을 하면서 한 명의 개종자를 만들었다고 했다. 물론 그 개종자는 무슬림사회로부터는 아웃캐스트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10년 동안의 선교활동비는 적지 않은 돈일 것이다. 한국 기독교 서민대중의 정성 어린 연보 돈이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을 과연 하나님 땅끝 선교의 위대한 사업이라고 해야 할까? 그보다는 더 절실하게 이 땅의 바로 이웃에서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자들이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AD 367년 부활절, 아타나시우스의 정경목록 발표는 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획기적 의미를 지닌다. 즉 정경의 성립으로, 정경·외경의 구분이 존재할 수 없었던 시절의 방대한 교회문헌들이, 단지 정경목록에 들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루아침에 모조리 외경으로 전락해버리는 수모를 겪게 된다. 아타나시우스의 정경목록 발표가 곧바로 27서 신약성경의 성립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록 발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가 주석한 알렉산드리아교구의 영향권 아래 있는 이집트 콥틱 크리스찬들에게 그 발표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는 구속력을 지니는 것이었다. 즉 수도원에 산적한 외경문서들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까 하는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함라돔의 피’ 그 이후
투탕카멘의 저주, 그리고 예수의 저주
이제 우리의 이야기는 파바우 수도원 본부로 돌아가야 한다. 아타나시우스 대주교가 27서 정경목록을 발표한 바로 그 서한은, AD 367년 3월 말 아타나시우스의 피난생활을 목숨 걸고 지켜주었던 수도승들의 거점인 파바우 수도원 본부에 전달되었다. 그 서한에는 ‘외경적 텍스트를 읽어서도 아니 되며, 소장해서도 아니 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바우 주변으로 약 7000여 명의 남녀 수도승이 있었고 그들의 센터 역할을 했던 파바우 수도원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그 도서관에는 수많은 성경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서가 양피지(소·양 가죽)를 소재로 쓴 것과는 달리, 그 문서들은 대부분이 파피루스 코우덱스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본부 이외의 수도원에도 많은 성경문서들이 있었을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타나시우스의 친구였던 파코미우스 (약간 연상)는 바로 이 수도원 본부에서, 346년 5월 9일 이 지역을 휩쓴 열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스승은 이승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들의 헤구멘 (스승) 파코미우스의 친구며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 아타나시우스의 교지를 그들은 거역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때의 상황은 정확한 문서기술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밀한 재구성이 불가능하다.
물론 갑자기 외경화되어버린 문서들을 불살라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정성을 들여 번역하고 (희랍어에서 콥틱어로), 수집하고, 파피루스에 쓰고, 제본하고, 가죽 포장지로 싼, 그들의 피땀이 서린 소중한 문서들을 단숨에 말살시키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못했다.
분명 그들은 아이코노클래즘 (형상 불인정)이라는 단순한 이념적 명분 때문에 바미얀 대불을 폭파시키는 탈레반 미치광이들보다는 현명한, 무엇보다도 이성적인 수도승들이었다. 초기기독교는 현재의 극단적 유일신론의 세뇌 아래 미치광이 전도주의의 말폐에 빠져버린 그런 세속종교가 아니었다. 그들은 조용히 영적 해탈을 추구하는 수도집단이었고, 문서의 권위에 집착하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 대면을 갈구하는 숭고한 영혼들이었다. 따라서 외경화된 문서에 관하여 보다 관대한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도서관 문서의 처리방안에 관하여 회담을 거듭했다.
역사적 상황은 변할 수도 있다. 그들이 내린 최종 결론은 이 외경문서 코우덱스를 우선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감춰두기로 한 단안이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도 그 많은 문서들이 토벽 속에 숨겨졌던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들은 문화를 존중할 줄 아는 종교인들이었다.
그들이 이 문서들을 숨기기로 한 곳이 바로 게벨 알 타리프 (Gebel-al-Tarif) 절벽 산기슭이었다. 이 절벽산 주변에도 파코미우스의 스승인 팔라몬을 기념하는 수도원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주변으로 토굴에서 수행하는 수도승들도 있었다. 그중 어느 한 승려에게 이 문서의 처리임무가 맡겨졌다. 그는 13개의 코우덱스 문서를 붉은 토기항아리에 넣고 그 아가리를 사발로 덮은 후 가장자리를 천연 아스팔트 역청으로 완벽하게 밀봉했다. 그리고 그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바위 밑에 구덩이를 파고 그 항아리를 묻었다. 묻은 사람은 언젠가 이곳을 다시 찾아와서 그 소중한 문서들을 가져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쿰란 동굴에 저장된 항아리문서와 달리 이 항아리는 흔적도 없이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1945년 12월 무함마드 알리의 동생 마지드의 우연한 곡괭이질에 이 항아리가 걸리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몇 천 년을 더 침묵 속에 보내야 했을지. 아니면 영원한 태허(太虛) 속으로 언어의 형상을 남기지 않은 채 기화(氣化)되어버렸을까?
과연 이 코우덱스는 어떠한 여로를 더듬었을까? 알리 엄마 손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이 코우덱스가 골동품이라는 것 정도는 알리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팔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질 않았다. 우리 돈으로 계산하여 한 만원 정도만 달라고 애걸하였어도 천원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담배 몇 개비와 귤 몇 개와 바꿔치기하여 몇 개는 알리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제3 코우덱스 (Codex Ⅲ)의 경우, 알리는 그것을 동네에 있는 콥틱 크리스찬 교회로 가지고 갔다. 당시 이집트는 영국 보호령이었다. 영국 통치자들은 종교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무슬림 경찰들로 하여금 콥틱 기독교인을 거칠게 다루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콥틱 교회는 안전한 조계 같은 느낌이 있었다. 코우덱스를 어떤 사람에게 보여주었더니 이 문서는 아랍어가 아닌 콥틱어로 쓰였다는 것을 알아보았고, 콥틱 교회에 가면 이 문서가 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던 것이다. 알리는 제3 코우덱스를 안전하게 맡아달라고 교회에 부탁했다. 교회 사제는 이 제3 코우덱스를 중등교사였던 좀 유식한 처남 알키스 (al-Qiss)에게 보여주었다. 알키스는 여러 콥틱학교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치던 순회교사였는데, 그 역시 이 문서를 알아볼 만한 지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콥틱어를 전공하는 게오르기 베이 소브히 (Georgy Bei Sobhy)라는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베이 소브히는 이 코우덱스에 들어있는 요한 비서(The Apocryphon of John), 이집트인 복음서(The Gospel of the Egyptians),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The Sophia of Jesus Christ), 구세주의 대화(The Dialogue of the Savior) 등을 보고 경악했다. 으악! 태고의 문서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니! 해방 후 혼란기에 전설적인 『백제서기』를 발견한 듯한 감격보다 더 짙은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베이 소브히는 공포스러운 나머지 즉각 이 문서를 당국에 신고했다. 당국은 이것을 콥틱 박물관에 조회했고, 알키스는 이 문서를 콥틱 박물관으로 가지고 가야 했다. 박물관은 알키스를 형벌에 처한 것이 아니라 300 이집트 파운드를 주고 정식으로 구입했다. 그리고 박물관에는 50파운드를 세금조로 기증해야 했다.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한 5만원 정도 받고 8000원을 커미션으로 떼어준 셈이다. 4만2000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알키스의 가슴은 그나마 감옥에 안 가고, 다행스럽게 골동품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는 행복감에 두근거렸다. 돈은 혼자 쓱싹해버렸다. 이 매매를 신사적으로 알선한 사람은 카이로 콥틱 박물관의 관장 토고 미나 (Togo Mina)였다.
구입일자는 1946년 10월 4일! 이 사건이 바로 이 문서가 인류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최초의 단서였다. ‘예수의 저주 (The Jesus Curse)’
박물관 관장 미나는 매우 양심적인 인물이었고, 이 체노보스키온 문서의 보존역사에 있어서 유일하게 사심 없이 헌신한 인물이었다. 20세기 이집트학의 최대사건인 그 위대한 투탕카멘 왕릉 발굴에 돈을 댄 카나본 경 (Lord Carnarvon)도 투탕카멘의 뚜껑이 열린 직후 사망했다.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소문이 돌았다.
토고 미나뿐 아니라 이 문서에 손을 댄 많은 사람이 이유 없이 죽어갔다. ‘예수의 저주 (The Jesus Curse)’라는 소문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