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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일 월요일 오후 1시 30분~ 2시 30분 최정향 어르신 만남
문화예술회관 서예전시전에서 만남.
나이 86세
1934년 태어남
1954년 결혼 (19세에 결혼)
자녀는 아들 셋 (첫째, 셋째는 황지 둘째는 서울 삼)
가족 이야기
집에 경북 대구 봉덕이였어. 대구에서 중학교까지 다녔어. 아버지가 교편생활 했거든.
교장선생님이셨어. 아버지는 60년대 전에 그만 뒀지. 내 나이보다 30살이 많았어.
옛날에는 늦은 거야. 공부하느라 늦게 장가 간 거지, 5남매야.
내가 제일 맏이야. 남동생은 둘이고 여동생은 둘이야 남동생은 둘 다 전사당했어.
한 동생은 월남 파병 때 한 동생은 6.25때 자매들만 남았지.
둘째는 의성에 살고 막내는 서울에 살아.
막내가 76인데 공부 잘했어.
결혼이야기
남편집은 봉화군 재산면이었어. 거기가 남편 고향이야.
시어른들 돌아가시고 시아버지 친구분이 친정아버지랑 알아서
친구 아들이 좋은 사람이 있으니 결혼하면 어떠냐 하셨어.
옛날에 연애도 안하고 부모님끼리 서로 왔다갔다 혼수이야기하고 부모님가라 해서 갔지.
요즘처럼 연애라고 하나 생전에 보지 못한 남자랑 했지.
해방 때 열 살이었는데 전쟁 끝나고 19살에 결혼했지.
6.25도 겪고 6.25때 피난은 가다가 말았지. 가
다가 후퇴하라 해서 미리 간 사람은 폭격으로 죽는 사람이 많았지
우리는 늦게 나갔지.
중간에 나가다가 들어오라 해서 들어왔지. 고생은 별로 안했지.
남편과 나이 차이가 5,6년 차이 났지. 일찍 돌아가셨어.
환갑 전에 폐암으로 돌아가셨어.
규폐는 아니고..
태백 온 이야기
우리는 고향은 태백이 아니지.
60년대 탄광이 활발했지.
교관을 했어.
훈련교관으로 예비군 군인들 제대하고 예비군으로 있을 때 그들을 교육시키는 교관으로 있었지.
장성으로 발령받았다가 해지가 되어서 광업소에 취직을 했지.
광업소에 일하기 위해
탄광촌 사람들은 농사짓기 힘드니깐, 농토가 없으니깐
농촌출신들이 광업소에서 일을 많이했지.
그때는 탄광에 마음대로 못 들어갔어,
혈압 있는 사람 몸에 있는 사람들은 입사를 못했어.
탄광촌에 들어가려면 돈을 집어주고
혈압이 높으면 낮게 어떤 사람들은 소를 팔아서 취직했다고 했어.
탄광촌에 들어가면 돈을 번다고 했거든,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었지.
장성에는 장성광업소 하나 밖에 없었어. 정부에서 운영하잖아.
사택에 살던 이야기
그때는 사는 게 형편없었지. 물도 귀했고. 여러 가지 불편하게 많았지.
사택에서 공동 생활했어.
사택에 있다가 우리가 사는 동이 제일먼저 아파트를 지었어.
화광아파트를 지었지.
옛날에는 관사가 나지막 나지막했어. 방이 2칸, 부엌 하나.. 그때는 연탄을 탰지.
지금 같은 연탄이 아니고 괴탄을 탰지 분탄을 탰어. 사는 게 형편이 없었어.
우리 젊을 때는 고스톱도 없었어.
옛날에 우리 살림할 때 술마시고 고스톱하는 사람 없었어.
애 키우고 밥 해먹고 살았어.
여가시간에 여유가 있나 빨래는 다 손빨래를 해야지
그 당시에는 수돗물이 시간제로 주니깐 시간에 해야 되고
광업소 다니는 분들은 작업복을 집에서 빨아야 했어,
목욕도 동네목욕탕에서 하고 물도 귀하고 춥기는 엄청 추웠지.
옛날에 눈치우느라 난리였어.
겨울에도 뜨슨 물에 씻어서 냇가에 얼음 깨서 헹궈 빨래가 팍팍 얼어.
냇가에서 빨래를 했지, 집에서는 못해요.
수돗물 사먹었어.
그때 수돗물은 시간제로 주니깐 시간을 가게를 보니깐 그 시간에 물을 못 받잖아.
물 길어주고 3만원 주고, 빨래도 넘 시키고 물 길러주는 아줌마
이불빨래도 빨아서 풀해서 다래서 줬지. 그 아줌마가 다 해줬지.
목욕탕 하나밖에 없었어.
목욕탕이 처음에는 없었어.
일년에 명절 때나 목욕하지 얼굴만 닦고 살았지. 그때는 없었어.
광업소 직원목욕탕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빌려서 썼어.
아는 줄로 빌렸지. 빌릴 때는 돈 안내고 지인으로 했지.
나중에 명절에 양말이라도 사서 선물하고 엄청 고생했어.
덕구온천 처음 개발할 때 조그만한 지어놓고 그 밑에 본 건물이 조그만했어,
빨래 가져가서 자고 목욕하고 아침에 왔어. 빨래하기가 힘들어가지고..
버스로 가기도 하고 그때는 울진가는 버스타고 갔지.
그 때는 시내버스가 있었어. 덕구온천 버스가 있었어.
예전에 살던 집터는 남아 있어. 물건 넣을 창고로 사용하고 있지.
그 집은 우리 남편이 광업소에 근무할 때 사택에 있었거든.
아파트에 살다가 퇴직하고 그 집을 사 갖고 왔지.
미조양장점이야기
남편 일할 때는 가정에 아이들 키우고 조금 크고 난 뒤에 가게를 봤지.
한 20년 했지.
양장점을 하게 된 것은 그때는 잘 모르겠는데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하게 되었어.
가게는 미조양장점, 아름다운 새지.
양점점이란게 서울 가서 물건 가져와서 고급 옷을 판매했지.
양점점이라고 옷 만드는 곳이 아니지, 미조 양품점이라 했지.
친목계를 하니 단골손님이 많았어.
술집도 많았지만 우리는 술집손님은 없고 지역유지분들이 많았어.
여자 옷을 팔았지. 보통 막 가정에 있는 옷을 파는 게 아니라 비싼 옷을 팔았어.
그 시절 광업소 경기가 좋았어. 광업소에 기관장들, 서장부인, 이런 사람들을 상대한 거야.
보통 광업소 종업원 부인들은 못 사 입었어. 비쌌어. 꽤나 비쌌어.
그때 옷이 5천원이라면 우리는 3배씩 비싸.
싼 옷을 갖다 놓으면 안되거든.
일반사람들은 구경을 하지만 자기들도 사고 싶은데 가격이 비싸서 못 사지.
더러 돈 있는 사람들이 샀지.
옷이 비싸면 외상을 많이 했어.
할부는 그때는 없고, 월급이 일정하지 않았거든,
석 달에 한번 월급이 밀려서 나오고 그랬어.
월급 나오면 주기도 하고 단골로 다니니깐 아는 사람들이 옷 가져가고 못 받는 돈이 많지.
달라달라 해도 안 주면 어떡해. 이사 가기도 하고. 떼이는 것도 많았지.
다른 양장점은 시대사라고 양장점이 있었어.
두 집 밖에 없었어. 딴 기성복 가게들은 많았지.
고급양장점이 두 곳이야.
그 당시에 맘보바지(1950년대 말)가 유행했어.
나팔바지랑은 좀 달라. 윗옷은 딱 붙게..
마로 된 천으로 풍성하게 나오는 옷들 유행했지.
마로 된 거 실크 같은 거 비쌌어.
옷을 사러 남대문까지 가려면 철암에서 댕기지.
그때는 태백에 역이 없었거든.
버스로 많이 다녔지. 상동으로 5시간 6시간 걸려서 청량리역에 내렸어.
새벽에 가서 옷 샀어. 저녁 늦게 가. 둘째가 서울에 있었거든
새벽 4시에 물건하고 2시에 열차 오면 내려와. 저녁이야.
물건 하러 하루가 걸렸지. 철암에 들어와서는 버스로 왔어.
철암역에 별로 안하고 상인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다녔어.
태백역 생겨서 버스타고 오던지 그때는 물건을 해갖고 부쳤어.
사람 몸만 오는 거지. 기차로 물건을 보냈어.
대한통운 화물이 열차가 오면 거기서 열차 도착하면
철도국에서 버스로 짐차가 와서 집집이 갖다 줬지.
기성복 팔러 가는 분들, 잡화 파는 분들 다양했어.
나는 기차편으로 혼자 다니기도 했어.
2주에 한 번 다녔지. 주문이 있으면 일주일에 한번 있으면 가고.
“누가 사 입었는데 참 좋다” 그 옷을 받아 달라하면 사러 가.
그 때는 전화로 주문 할 수 없으니깐 직접 가야 해 여러 번 다녀왔지.
우리 집 옷가게 옆에는 도배지 장판 파는 집. 옆에는 비단 집,
한복집이야. 이불 같은 것 해서 팔아. 한복천도 팔고,
그 당시에는 큰 일 때 명절 때 한복을 입었지.
시집 장가 보낼 때 한복 맞춰잖아. 한복하면 그 집은 무슨 큰일이 있구나 생각했지.
그 옆에 잡화점 가방, 신발집도 있고, 건물에 여러 가지 섞여서 팔았어.
지금 장성시장에는 양품점자리가 없을 거야.
옛날에는 복도식으로 양쪽에 가게가 있었거든.
지금은 도로변에 문을 다 열어놓고 창고가 되어 있더라구.
우리는 시장 안에서 장사를 했어.
집이랑 가게가 가까웠지,
부인회이야기
장사하면서 애들 키우면서 관광도 다니고
옛날에 시청에서 부인회가 주선해서 38선, 판문점 갔다오고 그랬지.
부인회는 지방에서 가입하고 싶으면 가입하지만 별로 보통사람들은 그런데 가입할 생각을 안해.
활동성이 있고 사회에 활동하는 사람들이
초등학교선생님, 기관장유지. 읍사무소 직원, 간호사 이런 사람들이 주로 했어.
부인회에서는 별로 하던 지방에서 좀 어려운 사람 있으면 도와주고 30명 정도가 참여했지.
나는 장사하느라 가입안했어.
부인회에 놀러갈 때는 주선해서 추천해가지고 간 거지.
내가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은 아니고 부인회회장님이 추천해서 누구누구 그러면 가는 거지.
춤바람, 전파사, 술집이야기
전파사는 우리 동생이 서울에서 내려와 했지.
그때 전축이 부흥이 일어날 때라 춤바람 났을 때 했지,
장성여자들이 춤바람 나서 이혼하는 사람도 많았지.
나이트 클럽도 있었지 시장옆에 목욕탕이 되었더라구 화암동에도 있었지.
황지도 있었고.. 팔도강산, 유머일번지 물랑루즈..
술집도 색시 요리집도 있었어.
옛날에 국회의원 취재광업소 아나운서 기자들이 오면 요리집에 기생들 데리고 가서
술마시고 그랬지. 시장 옆에 있었어. 지금 옛날 감리교 조금 내려오면 거기에 있었어.
그 시절 교육이야기
착하게 산 사람들도 많았어.
애들 잘 키우고 없는 살림에 알뜰하게 사는 사람이 많았어.
공부에 욕심 있는 엄마들도 많았어. 그때는 과외가 없었어.
개방이 된 엄마들은 대학생들을 알음알음 알아서 방학 때 오면 자녀 가리켜 달라는 사람도 있었어. 용돈 줬지. 학생들도 알바하는 것처럼 했어.
우리는 안 하고 동생이 학교 다닐 때 였거든, 방학 때면 우리 집 와서 아이들 가르쳐줬어.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같이 살았거든. 영어도 가르쳐주셨어.
막내는 서울이모한테 배웠지
유학 보내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드물었어.
스스로 찾아 나선 배움 이야기
서울에서는 서예를 못 했어.
서예도 하고 등공예, 박공예, 매듭도 했어.
박은 판화로 해. 지금은 없어졌는데 옛날에는 엄청 유명했어,
박에다가 그림을 그려놓고 파가지고 벽걸이도 하고 여러 가지 작품을 했어.
등공예는 의자 만들고 책장 만들고 등나무로 만든거야.
매듭도 하고.. 옛날에 다해서 잊어버렸지. 애들 다해주고 없지.
내가 스스로 배우는 곳 있다고 해서 찾아갔지.
강사들이 서울서 와가지고 돈벌이하러 왔어.
지방에 부녀자들 모집해서 알려줬지 수강료는 별로 없고 재료비를 냈어.
누군가에 지원 받는 게 없고 재료비만 내면 되었지. 뜨개질 가르쳐주고 재료비만 해서 돈을 번거야.
장소는 자기들이 얻은 방에서 했어. 집을 얻어서 하기도 했어. 기간은 대중없어.
일 년 만에 가기도 하고 오래 오래 하지는 않았어.
기초만 배우면 재료들을사서 자기가 집에서 했지.
재료필요하면 강사들한테 연락하면 사다 줘. 집에서 자기 취미생활로 했어.
물건을 판다는 거 그런 것 없었어. 가정에 필요한 것을 자기가 했지.
우리 나이에 배운 사람은 없었어.
젊은 사람들이 배우지 나는 뭐 배우면 제일 나이가 많아.
여기서도 나이가 제일 많아.
서예 배운 이야기.
옛날에 서예모임이 있었어요. 장성에 있었지
40년 전에 했지.
오래전에 했어요. 하다 말다가 쭈욱 한 것은 아니야.
서울에서 한 30년 살다가 다시 태백으로 왔어. 다시 내려온 것은 올해 7년 되었어.
나는 손녀들 공부하느라고 서울에 있었지.
태백에 다시 와서 서예하러 들어왔어. 우리모임에서 서예를 알려줘요,
회장님이 계시지. 서예실에 주로 있는데 일 년에 한번 서예전하거든.
일주일은 당번하고 여기에 있어.
모임 회비는 월에 3만원이야.
문이 열려 있어서 아무 때나 가서 연습하면 돼.
몇 해는 강원대학교에서 수묵화를 배웠어요.
(내 작품은) 천자문에 있는 글을 글귀 좋은 글을 뽑아서 했어요.
나라에 충성하고 여자로서 정조를 지키고 가장으로서
가정을 훌륭하게 다스리라는 이야기였어요.
부모를 섬길 때는 어떻게 하고 여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어.
서예는 시작했으니깐 하는 거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깐 늙어서 취미생활 한 가지 하면 좋아요.
집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뭐해요.
첫댓글 물 기를 시간이 없어서....돈주고 길었다는 이야기....그게 수돗물을 돈주고 사먹었다는 이야기로 ^^
참 팍팍하게 살았던 우리네 엄마 아버지 이야기들인데...그래도 탄광촌엔 돈이 많아
풍족했다는 이야기들...................너무 급하게 성장한 대한민국, 태백, 그리고 장성
이젠 급하게 기울고 있는게 보인다. 어르신들의 삶이 한페이지에 고스란히 살았고
마무리도 그페이지에 고스란히 담는듯....
나이들어 집에만 있으면 뭐해....ㅎㅎ 그래서 나도 서예를 배운다.
우리는 서울로 배움을 하러 가는 현실인데 그 때는 오히려 서울에서 장성으로 가르치러 강사들이 오는 상황 있었네요~ 과연 그 활황이 짐작이 가네요 ~ 긴 글, 여운이 있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