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톨릭 교리] 중독과 자유
중독을 다룬 짧은 애니메이션 <Nuggets(너겟)>에는 한 마리의 새가 등장합니다. 길을 걷던 새는 우연히 노란 액체 한 방울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맛을 봅니다. 그러자 몸이 가볍게 떠오르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황홀한 경험을 합니다. 그렇게 다시 길을 걸어가다가, 또다시 노란 액체를 발견하자 주저 없이 맛을 봅니다. 이후 같은 황홀함을 느끼기 위해 점점 더 자주 그것을 찾게 되고, 황홀한 순간은 짧아지는 반면 다시 땅으로 떨어졌을 때의 세상은 점점 더 어둡고 고통스러워집니다. 마침내 새는 더 이상 처음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기 위해 노란 액체를 찾게 됩니다.
불과 몇 분짜리인 이 영상은 중독이 무엇인지를 인상적으로 보여 줍니다. 중독은 처음에는 작은 행복과 위안을 약속하며 다가옵니다. 술은 불안과 긴장을 잠시 잊게 하는 듯 보이고, 도박은 한순간에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합니다. 스마트폰의 짧은 영상들은 외로움과 무료함을 끊임없는 자극으로 채워 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중독이 깊어질수록 처음에 느꼈던 즐거움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그것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자유롭게 선택했던 것이 어느새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의학은, 중독이 인간의 뇌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자신의 의지만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상태를 만들어 낸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중독 중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보다는 적절한 치료와 적극적인 도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기에, “중독에 빠진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다시 자유로워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추가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갈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중독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매일 무언가를 욕망하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돈과 인정, 더 자극적인 즐거움과 아름다움, 스마트폰의 새로운 알림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그것들을 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자유란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이렇듯 그리스도교의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지를 알고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것은 곧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때로는 당장의 즐거움을 내려놓고 더 큰 선을 선택할 힘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특별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지금 나를 구속하고 있는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다시 세상을 사랑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해방입니다. 저도 오늘만큼은 프로야구 중계와 잠시 거리를 두어야겠습니다.
[교회의 언어] Martyr(순교자, 영어)
순교자(martyr)는 증인이라는 그리스말(마르튀스)에서 나왔습니다. 순교자들은 단순히 박해의 희생자가 아니라 삶과 죽음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거한 증인(witness)입니다. 순교자들 가운데 시복(beatification)되신 분은 복자(blessed), 시성(canonization)되신 분은 성인(saint)이라 불립니다. 순교라는 말을 죽음이나 고통의 미화, 생명 경시 혹은 극단적인 영웅주의의 형태로 알아들어서는 안 됩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순교는 성령의 선물이며 가장 뛰어난 덕행 가운데 하나로 굳셈(fortitude)의 탁월한 모범입니다.
순교를 앞두고 얼마나 겸허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는지 초대 교회 순교자들의 기록이 보여줍니다. “주님, 저를 그날과 그 시간에 합당한 자격이 있는 자로, 당신의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 들 만한 자로 여겨주셨으니 당신께 찬미 드립니다.”(폴리카르포 순교록)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분을 나는 찾으며,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그분을 나는 원합니다. 그분 안에서 내가 태어나게 될 때가 가까웠습니다.”(이냐시오의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때로 우리는 사소한 자존심 하나 버리기 힘들어합니다. 어쩌면 일상 가운데 겸허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우리 시대의 순교는 아닐지요.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70) 예수님의 죽음과 승천 후의 마리아, 「교회헌장」 제58항 후반부 제59항
「교회헌장」 제58항 후반부는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아드님과 결합하면서 특별히 어머니께서 걸으셔야 했던 고통의 길을 언급합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신앙의 나그넷길을 걸으셨고, 십자가 아래 이르기까지 아드님과의 깊은 결합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십자가 곁에 서 계시어 아드님과 함께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요한 19,25 참조). 나아가 당신에게서 태어나시어 희생 제물이 되신 아드님과 사랑으로 일치하셨습니다. 아드님의 희생 제사에 어머니의 마음으로 당신 자신을 온전히 결합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라고 말씀하시며 제자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맡겨 주셨습니다. 이로써 마리아와 교회 공동체 사이에 깊은 관계가 맺어지게 됩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삶이 신앙의 나그넷길로 표현되는 것은, 당신께서 아드님과 최고의 결합을 이루셨음에도 그 안에는 끊임없는 고통과 인간적 몰이해도 함께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묵상하는 성모칠고(聖母七苦)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제59항은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 공동체와 함께하신 성모님의 삶을 다룹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교회를 세우셨지만,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시기 전까지 구원의 성사인 교회는 아직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사도 1,14)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도 당신의 몸에서 주님께서 탄생하시리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당신에게 내리셨던 그 성령의 은혜를 다시금 기도로 청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어머니가 오롯이 성령의 강림을 기도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가 역사 속에 등장하기를 간절히 청했음을 의미합니다.
공의회는 끝으로 마리아의 승천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셨습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교황령(Constitutio Apostolica)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통해 ‘성모 승천’을 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성모 승천은 마리아의 모든 삶이 하느님 안에서 완성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리아의 순종과 헌신, 그리고 그로 인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이 온전히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이셨으며, 성모님께서는 “주님들의 주님”(묵시 19,16)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아드님과 완전히 동화되셨습니다.
[교회상식 더하기] (37) 한국인이 아닌데도 ‘한국’ 순교 성인이다?
국적 달라도 목숨 다해 이 땅을 사랑한 ‘한국 순교자’
한국교회의 순교 성인은 몇 명일까요? 신자에게는 상식일 듯합니다. 103명이죠. 그렇다면 이 중 외국인은 몇 명일까요?
어쩌면 ‘한국의 순교 성인인데 외국인이 있다고?’라고 여기거나, ‘외국인 선교사가 계신 건 아는데... 몇 분이셨지?’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정답을 말씀드리자면 프랑스 출신 선교사 열 명입니다. 주교님 세 분과 신부님 일곱 분이지요.
한국 순교 성인이라는 말에서 ‘한국’은 국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분들에게 한국은 태어난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장소에 해당합니다.
시복시성 절차에 따르면 교구 조사의 관할은 원칙적으로 하느님의 종이 사망한 지역의 주교가 담당합니다. 교황청 시성부는 1983년 공포한 「성인 안건에서 주교들이 시행하는 조사에서 지켜야 할 규범」에서 ‘관할 주교는 원칙적으로 하느님의 종이 최후의 날을 맞은 지역의 주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열 분의 성인 말고도 외국 출신 ‘한국 순교자’는 많습니다. 일단 124위 복자 중 중국인인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님이 있습니다. 또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와 베네딕도회 덕원의 순교자 38위에는 프랑스·아일랜드·미국·독일 출신 선교사와 수도자가 48명입니다.
이분들은 그저 ‘외국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말을 익히고, 우리 풍습과 문화를 배우며 우리나라 신자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범세형(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장경일(베르뇌 시메온 주교)처럼 한국식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지요. 목자로서 신자들과 함께하다 마지막에는 이 땅에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순교자는 아니지만 한국교회와 특별한 인연을 가진 외국인 성직자도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님입니다. 주교님은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조선의 신자들을 위해 선교를 자청하셨고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됐습니다.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긴 여정을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1835년 중국 만주 지역에서 선종했습니다.
앞서 시복시성은 선종한 지역의 교회가 진행한다는 원칙을 말씀드렸는데요. 여기에는 ‘시성부가 승인한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달리 정할 수 있다’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대교구는 시성부로부터 시복 재판 관할권 이전 승인을 받아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시복재판을 진행했습니다.
끝내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목숨이 다할 때까지 예수님과 조선의 신자들을 사랑한 증거자이자 한국교회의 첫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박해가 일어나자 자신들 때문에 신자들이 더 큰 피해를 당할 것을 염려해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나가 순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셨지요. 이번 순교자 성월은 비록 국적은 달랐지만, 목숨을 다해 한국을, 한국 신자들을 크게 사랑했던 ‘한국 순교자’들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신지현의 ‘성서와함께’ 가꾸는 기도의 정원] (18) 글라디올러스
검투사의 칼 닮은 탐스러운 꽃
고대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검투사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 ‘글래디에이터’. 글래디에이터는 ‘검투사’라는 뜻의 라틴어 글라디오토르(gladiator)에서 온 것으로, 이는 당시 로마 병사와 검투사들이 사용하던 칼인 글라디우스(gladius)에서 파생된 단어다.
글라디우스는 오늘 소개하는 꽃 글라디올러스의 어원이기도 하다. 잎이 날카로운 칼처럼 길고 곧게 뻗어 있고 끝 부분이 뾰족하다고 하여 글라디올러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같은 이유로 영어권에서는 이 꽃을 ‘칼의 백합(sword lily)’이라 부르기도 한다.
칼을 닮은 길쭉한 잎도 시선을 끌지만, 사실 글라디올러스가 정원을 가꾸거나 꽃꽂이를 하는 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것은 화사하고 탐스러운 꽃 덕분이다. 글라디올러스는 한여름부터 초가을 사이에 개화하는 식물로, 요즘 꽃시장에 가면 싱싱한 제철 글라디올러스를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꽃은 흰색·연보라색·분홍색·주황색·연두색 등 색깔이 다채롭고, 꽃잎 질감도 매끈한 것이 있는가 하면 풍성한 드레스 자락처럼 주름진 것도 있다. 큼지막한 꽃은 길쭉하게 뻗은 꽃줄기를 따라 아래에서 위로 꽃차례를 이루며 핀다. 글라디올러스는 꽃꽂이할 때 서너 줄기만 있어도 라인을 표현하거나 길이감을 살리기 좋아 제대 꽃꽂이는 물론 각종 꽃장식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이처럼 예쁜 외모에 쓰임새도 훌륭한데 ‘칼’이라는 상징성까지 지니고 있으니 글라디올러스는 묵상 소재로도 참 적절한 꽃 같다. 칼로 죽음을 맞은 성인과 순교자들, 또는 칼을 들고 적과 맞선 수호성인들은 서양 예술 작품에서 종종 칼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바오로·바르톨로메오·야고보 사도나 미카엘·잔 다르크의 성상이나 회화를 보면 손에 긴 칼 또는 단검을 쥐고 있거나 칼로 무언가를 무찌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조선 박해 시대,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를 포함한 103위 순교자들의 대다수가 칼날 아래 목숨을 잃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들과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바친 다른 모든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이번 달을 순교자 성월로, 오늘(9월 20일)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낸다. 한국에만 있는 이 특별한 대축일, 많은 성당 제대 앞은 순교자의 피와 희생을 상징하는 붉은 꽃으로 장식된다. 꽃들은 침묵 속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은 아름다운 이들이 있었으며, 죽음도 그들을 하느님과 갈라놓지 못했다고.
호교적 대화 (3)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선입견
천주교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에 젖어 있는 타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위하여 가상 대화 형식으로 꾸몄으며, 주로 서한규의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서울, 게쎄마니, 2012)를 참고하였다.
비신자 : 밖에서 보면 개신교 신자들은 선교에 적극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에 비해서 천주교는 좀 소극적인 것처럼 보여요.
천주교인 : 요사이는 선교 운동도 벌이고 거리 선교도 하지요. 개신교의 열렬한 선교 방식을 생각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비신자 : 선교에 소극적인 것이 교육 부족에 있나요?
천주교인 : 그렇지도 않아요. 지금은 교리 지식 습득을 위한 강좌나 신학원 등을 교구마다 체계적으로 개설하고 있고, 또 성경 공부도 어느 때 못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고, 많은 교우가 성경 읽기와 성경 필사에 힘쓰고 있지요.
비신자 : 천주교도 거리 선교를 하나요?
천주교인 : 천주교도 거리 선교를 하지요. 거리 선교단도 있어요. 그러나 열성 개신교 신자들이 하듯이 거리에 나가서 확성기를 들고 하지는 않아요. 거리 선교도 조용히 하는 편입니다.
비신자 : 개인적으로 볼 때 근본적인 문제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천주교인 : 제가 보기에는 신자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선입견 같아요. “개신교 신자들은 성경 구절을 잘 알고 있는데, 나는 잘 모른다.” “성경 구절을 좔좔 외우고 있는 개신교 신자들과 맞닥뜨려서 창피나 당하지 않을까?” “개신교 신자들이 질문을 할 때 내가 잘 대처할 수 있을까?” 또는 “내가 이런 믿음과 지식과 열성을 가지고 말을 꺼낼 수 있나?”라는 기우들이지요.
비신자 : 개신교 신자들은 정말로 성경을 잘 알고 있나요?
천주교인 :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시간을 내어 천주교를 비판할 정도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읽는다고 천주교에 대한 비판적인 지식이 자연히 쌓이는 것도 아닙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에 대해 비판적 지식을 갖게 되는 원천은 목회자들의 설교에서라고 생각해요. 천주교에서 떨어져 나간 것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해야 개신교의 존립 근거를 갖게 되기 때문에, 설교에서 많은 경우에 천주교를 비판하게 되니 자연스레 개신교 신자들은 그러한 비판에 익숙해져 있어서 마치 성경 지식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비신자 : 선입견을 지워야겠군요.
천주교인 : 겉으로는 천주교 신자에 비해 성경에 해박한 것처럼 보이는 개신교 신자라도 이야기를 해보면, 실제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성경을 잘 알고 있지도 않고, 그들에게 필요한 구절만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개신교에 불리한 성경 구절은 잘 몰라요.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선입견을 지워야지요(참고, 서한규, 63쪽).
비신자 : 천주교 신자가 오히려 교리나 성경에 더 밝을 수 있겠군요?
천주교인 : 물론이지요. 천주교는 정통이라서 개신교를 비판하지 않아도 정체성에 문제가 없습니다. 개신교를 비판하는 것을 들어보지도 못해서, 비판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개신교가 무엇이 잘못인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전혀 모르니까 대화가 두려운 것이지요.
[생활교리] 세례명에 대한 몇 가지 궁금점?
옛 신자 가정에서는 이름 대신에 세례명을 부르곤 하였다(그러다 보니 어떤 자매님은 초등학교 입학 했을 때, 실제 본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역시도 교회 안에서 호칭은 실제 이름보다는 세례명으로 불리 운다. 그만큼 세례명은 천주교를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심지어 어떤 경우는 세례의 동기가 세례명을 받고 싶어서이다!). 다만 우리는 세례명에 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1. 왜 세례 때 세례명을 받는가요? 아기가 태어나면 고유한 이름을 받는 것처럼,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난 이는 새로운 영적 이름을 부여받는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을 제 이름으로 부르시고 기억하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58 참조).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세례명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주신 영적 이름이자, 소중한 선물이다.
2. 세례명은 어떻게 정해야 하나요? 일반적으로 세례명은 교회에서 성인품에 오른 분들의 이름을 따라 정한다. 이때 일부는 생일과 영명 축일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 생일날짜에 맞추어 세례명을 정하거나, 아니면 예쁜(?) 세례명 혹은 유명인들의 세례명을 따라 짓기도 한다. 다만 세례명을 정하기 이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본인이 정한 성인의 삶과 특징에 대해 먼저 알아보는 일이다. 왜냐면 세례명으로 선택한 성인은 내가 공경하고 본받으려는 주보성인으로서, 삶의 여정 속에 끊임없이 영적 돌봄과 전구를 청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세례명은(한국) 성인 이름(대건 안드레아, 정혜 엘리사벳 등)만이 아니라 복자도 가능하다(단, 성인은 보편교회 안에서, 그리고 복자는 지역교회 안에서 기념). 또한 천사 이름, 그리스도의 신비나 덕행을 뜻하는 호칭들(향주삼덕, 곧 피데스-믿음, 스페스-희망, 카리타스-사랑 등), 그리고 성모님의 여러 이름들(스텔라, 로즈마리 등)로 삼을 수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세례명은 예비자들이 직접 찾기는 어려움이 뒤따른다. 때문에 부모와 대부모 그리고 본당 신부는 그들이 세례명을 정할 때, 그리스도교식에 걸맞은 이름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 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65 참조).
3. 세례명을 바꿀 수 있는가요? 일부는 견진-성사 때 세례명을 바꿀 수 있다고 알고 있지만, 201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사목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세례명의 변경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실 이 땅의 삶에서 사용될 이름을 짓는 일도 신중을 기울이는데, 더욱이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로서 영원히 불리고 기억되는 이름인 세례명은 그만큼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
내 세례명인 토마스 사도는 믿음이 약한 모습도 지녔지만, 주님을 만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란 감동적인 믿음을 드러냈다. 그러면 믿음이 부족한 나 역시 세례명으로 택한 주보성인의 길을 따라 걷는다면 주님을 향한 멋진 신앙고백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금 자문해 본다. ‘나는 얼마나 내 세례명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