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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1-26절. 조창훈목사강해(칼빈주석에 근거)
출 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하나님의 형상을 고안하는 것은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다
여기에 나오는 말은 단지 인간들이 우리의 눈에 나타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떠한 눈에 보이는 형상에 담으려 하는 것이 나쁘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 있는 것’이란 새 뿐 아니라 일월 성신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 온 세상 어디를 보든 하나님의 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을 밝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우리 눈 앞에 제시하는 것은 그의 영광을 더럽히는 일이요 그의 진리를 거짓말로 흉측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제 이 계명의 두 가지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자. 먼저 이 계명은 새긴 형상이나 어떠한 모습도 세우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는 예배가 이러한 환상이나 허망한 것에게 돌아가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형상을 어떠한 모양으로든 고안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조를 통해서 그의 위엄이 더렵혀지며 그를 실제 그의 모습과 다르게 묘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세는 모든 조각과 그림을 정죄하고 있다는 식으로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의 어리석은 상상 따위는 반박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것을 더럽힐 경향이 있는 모든 상상으로부터 보호할 의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너는 네가 절하기 위해서 새긴 우상을 네게 만들지 말라”하는 식으로 해석 하는데 이것은 절망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도 좋다는 이야기이나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든 하나님의 형상을 고안해 내는 순간 거짓 예배에 빠지고 마는 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경건하고 소박한 생각을 품는 자는 이러한 터무니 없는 일에 빠지지 않으며 우리의 마음에 육적인 상상이 자리잡고 있기 전에는 하나님을 변형시켜 놓으려는 주제 넘은 생각이 잠입할 리 없다. 그러므로 썩어 없어질 재료로 신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손의 작품을 미신적으로 추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생각해 보겠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예배가 우상에게 돌려질 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모양으로든 외적으로 그를 나타내고자 할 때 하나님은 모독을 받는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해야겠다.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서약과 맹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에 마땅한 경의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것이 남용되는 것을, 특별히 서약에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을 금하시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긍정적인 계명, 곧 모든 서약은 하나님 자신의 위엄, 거기에 적절한 영광을 돌리는 참 신앙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맹세할 뿐만 아니라 여기서 명백하게 되는 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고 맹세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언급할 때는 언제고 그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말씀 속에서 그는 자신의 말씀 뿐 아니라 그의 섭리 속에 담겨 있는 성결성을 주장하면서 거기에 대한 모든 멸시를 금하고 있는 것이다.
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안식일- 하나님을 송축하고 신앙의 통일성과 교회의 조화
이 계명의 의도는 신자들이 하나님 예배에 있어서 스스로를 단련하도록 하는데 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및 기타 절기에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안식일 준수와 성전과 절기 그리고 제사장직 그 자체 사이에는 관계가 있지만 절기가 따로따로 지정된 가운데 그러한 도움을 통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신앙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교회의 조화를 받들도록 격려하신 것은 아주 현명한 처사였다. 그와 동시에 성소와 안식일과의 상호 연관성은 우리가 이미 앞에서 설명한 점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것을 유대인들과 이방 민족들 사이에 뚜렷한 상징으로 삼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계명의 특수한 것이 무엇이며 제1계명과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좀 더 잘 설명하는 뜻에서 우리는 모형(type)의 영적 본질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정한 날을 정해서 집회를 갖도록 한 것은 그러한 집회를 통해서 백성들이 제사, 기도, 그리고 그의 이름을 송축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려는 뜻에서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일을 쉬는 것을 성결의 완전성으로 그들 눈앞에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안식일- 의식적인 계명
무엇보다도 먼저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를 그 실체로 하는 것들의 그림자로 부름으로써 이것이 의식적인 계명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골2:17). 그러나 외형적인 안식 의식에 불과했으며 그것의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당시 예표 되었던 것을 실제로 어떻게 드러내셨는가 하는 점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 안식일의 탁월성이 크게 칭송을 받을 필요도 없는 것은 영적 안식이란 참으로 바람직하고 축복된 인간의 죽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죽음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 있으니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자기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들어 자랑한 그대로다(갈2:20). 히브리서의 사도는 진정한 안식은 복음에 의해서 우리에게 안겨지며 불신자들은 그것을 배척하고 있다는 점을 좀더 교묘하게 논하고 있다(히4:3).
이러한 근거에서 이사야는 위선자들이 외형적인 의식의 안식만을 주장한다는 점을 들어 비난하면서 그들이 안식일에 자신들의 쾌락을 찾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사43:13) 이것은 안식일의 적합한 용법을 자아 부정으로 여겨야 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제기되는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는 제 6일이나 제10일째가 아니라 제7일 째 되는 모든 날을 안식일로 정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6일 간에 걸쳐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신 것은 자신의 일의 완전한 탁월성을 명백히 보여 주려는 뜻에서였으며, 따라서 자신을 우리가 본받을 표본으로 제시하시는 것은 자기 자신의 핵심을 참된 목표인 지복으로 부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제7일을 축복하시고 성별하셨듯이 신자들을 축복해서 성화시켜 주실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핵심은 명령이요 축복에 대한 언급은 순종에 대한 권면이나 다름없다.
안식일- 영적이며, 고차원적 신비에 대한 모형
안식의 규례는 영적이요 더 고차원의 신비에 대한 모형이었으며 따라서 이 계명은 의식적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나의 지적은 그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안식일-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의 아름다움과 탁월성 묵상하도록 우리도 안식일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세계의 창조가 완성되었을 때 제 7일을 자신의 날로 떼어서 거룩하게 하신 것은 자신의 종들로 하여금 모든 염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일의 아름다움, 탁월성 그리고 적합성을 숙고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이런 면에서 우리도 하루를 자유롭게 지내는 가운데 좀 더 잘 배우고 우리의 신앙을 더 잘 증거할 수 있도록 옛날 사람들처럼 안식일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안식일- 휴식의 날, 이것은 부차적인 것
안식일의 셋째 목적 역시 모세가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종들을 위한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하는 부차적인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법칙에 속한 것인 만큼 첫째 돌판에서는 제대로 취급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모세는 우리가 곧 뒤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을 부차적인 혜택으로 덧붙이고 있다.
그는,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여기서 6일간의 수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극진한 친절에 따라서 그들에게, 그들의 시간의 7분의 1만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심으로써 순종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곧 이것은, 너희들이 자발적으로 너희들의 모든 정성을 바쳐 나를 찾는다는 것은, 아니 나에게 조금이라도 산만하지 않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7분의 1만 내 것으로 주장하노라 하는 말씀과 같다.
출 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출 20: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안식일- 공평을 위함이다.
그들도 과거에 종살이를 했던 몸이라는 점을 지시하심으로써 공평을 기하도록 하고 있다.
‘객’은 비록 할례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면서도 안식일에 쉬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경우 객이란 율법에 순종하기로 서약한 외국인들 뿐 아니라 할례 받지 않은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출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두 돌판- 계명의 개수 문제
첫째 두 계명을 하나로 보는 사람들은 마침내 마지막 계명을 갈라 놓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은 3계명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신자들이 3위의 하나님을 섬기도록 곧 3위로 계신 한 분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려는 뜻에서 그렇게 되어 있다면서 구차한 이유를 끄집어 내고 있다.
요세푸스가 계명을 순서 있게 명시한 것은 옳지만 각각 돌판에 다섯 계명씩 짝지워 놓는 것은 잘못이다.
부모공경
(카바드)란 하나님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땅한 존경을 표시하다라는 뜻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세 가지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자녀들이 부모를 정중하게 모시는 것이요, 둘째는 자녀들이 부모의 명령을 순종하고 그들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요, 셋째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빚지고 있는 것을 되갚는 가운데 부모를 성심껏 봉양하고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라는 이름은 성스러운 것인데 하나님의 특별한 선하심에 따라 인간들에게 양도되고 있는 만큼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들의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악하고 불경건한 아버지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선약의 구별을 흐리게 하는 것이 될 수 없다고 반대할 수도 있지만 그 해답은 간단한다. 곧 자연의 영구한 법칙은 인간의 죄 때문에 파괴되는 것이 아니요, 그러므로, 어떤 아버지가 제 아무리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다 해도, 그가 아버지인 이상 자녀들에 대한 그의 권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의 권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손상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이다. 왜냐하면 그의 율법이 정죄하는 죄를 무슨 핑계를 내세워 사면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의 이름을 오용해서 죄를 덮어 주는 것이야말로 천박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죄악을 정죄하는 문제에 있어서 참으로 충성된 자식은 하나님의 율법에 내맡길 것이요 부친의 사람됨이야 어떻든 간에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아버지인 만큼, 그를 존경하는 것이 옳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다음은 순종의 문제이다. 물론 이것도 한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바울은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에베소서 6장 1절, 골로새서 3장 20절)하고 말하는데, 그야말로 본 계명의 훌륭한 주석가이다. 그러므로 존경에는 복종이 포함된다. 따라서 자기 아버지의 명예를 벗어 버리고 그의 권위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 하는 자는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다른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녀들은 부모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으며 모든 부자 관계의 근본이신 하나님께서 부모와 자녀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권위 아래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녀들에게 모주건 부모를 순종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다. 이 말은 부모가 불의한 것을 명령할 때는 어느 때고 이것을 거절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과격한 준엄성, 우직성, 심지어 잔학성 마저도 그것이 부당한 것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에게서 그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면 유한한 인간이 견딜 수 있는데 까지 참아야 마땅하다. 한마디로 율법이 자녀들에게서 요구하는 부모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의 권리가 침해 받지 않는 범위에서이다.
셋째는 자녀들이 부모를 보살피는 가운데 그들에 대한 모든 임무를 성심껏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효도를 가리켜 헬라어에서는 (안티펠라르기아)라고 부르는데 황새는 그 어미가 다 늙어 힘이 없을 때 음식을 날라다 줌으로써 우리 인간들에게 은혜에 대한 좋은 교사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모의 헐벗음을 불평하거나 소홀히 다루며 그들의 필요사항을 도와주지 않는 자들의 야만성은 더욱 더 가증스럽다.
부모라는 다정한 이름만으로도 자녀들에게 즉각적인 순종을 유도하는데 있어서 충분하지만 일종의 자극제로서 약속이 덧붙여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이 존경을 바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자녀들이 장수할 것이라는 보상은 이 계명의 준수와 일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은혜를 입은 자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이 세상에서 그의 은총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염려의 기원을 하나님의 저주에서부터 찾을 수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요, 생명 그 자체는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로 보아야 마땅하다. 더구나 제 아무리 불행이 겹쳐도 우리의 생명리라는 제일가는 축복을 파괴할 수는 없다. 곧 인간은 행복한 불멸의 소망을 위해 창조되고 보존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인간들에게 자신을 아버지로서 계시하시는 것은 후에 그들이 그의 영원한 상속을 누리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이 계명에는 말뜻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율법은 불완전하게 될 것이요, 우리에게 의롭고 거룩한 생활에 대한 완전한 규범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된다.
통치자들에게 순종
우리가 통치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점을 자연적인 이치이다. 종들이 주인에게 순종하지 않게 된다면 인간 사회는 완전히 붕괴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위정자들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종들이 주인을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계명은 결코 사소한 의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을 하나님의 율법에서 생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계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계명에서 대유법적인 표현으로 특수한 규칙을 들어서 합법적인 명령은 마땅히 우리의 존경을 사야한다는 일반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다. 모든 점을 명백히 밝히지 않은 것은 간결성을 돋보이게 하는 뜻에서요 또 다른 이유는 조야한 백성을 상대로 이야기할 때는 소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한 백성을 상대로 이야기할 때는 소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다음과 같은 권고가 유래한 것이다. 곧 “왕을 경외하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사환들아......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출 20:13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하나님의 형상이 비취는 인간 존귀한 취급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직 인간들에게서 비취고 있는 자신의 형상의 모습이 계속 존귀한 취급을 받는 가운데 온갖 살인은 하나님에게 죄라는 점을 인간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셨다. 여기서는 그 이유를 밝히시지 않고 있지만 다른 곳에 보면 그의 형상이 망가뜨려지기 때문에 살인을 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창9:6).
살인- 모든 폭력, 증오 등 대유법적 표현
살인이라는 말 속에는 모든 폭력, 구타 및 공격이 대유법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더구나 소위 말하는 부정적인 훈계 속에 들어있는 반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겠다. 그렇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킨 것으로 보면 큰 잘못이다.
따라서 이 계명에는 두 가지 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아무도 괴롭히거나 억누르거나, 누구와도 불화하지 말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 뿐 아니라 부당하게 눌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할 수 있는 한 도와 주며 악인들이 제 멋대로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을 저지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순수한 의미를 가르치면서 살인자들을 정죄할 뿐 만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나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고 말씀하신다.
제 아무리 은밀한 생각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기에 그는 감취어진 증오를 살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5)라는 요한의 말은 그것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품은 증오심만으로도 정죄받기에 충분하다는 뜻이다.
출 20:14 간음하지 말라
간음- 전반적인 순결
여기에는 한 가지 종류의 부정만 언급되어 있지만, 여기서 신자들에게 전반적으로 순결하기를 권면하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율법을 거룩한 생활의 완전한 규범으로 본다면 간통 한가지만 금하고 다른 간음은 허용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율법의 최고 주석가이다.
제 7계명에 있어서 하나의 종 개념 속에 전체 유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이 축복된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는 점을 그들이 제대로 생각한다면 결혼 이외의 남녀 결합은 저주스럽다는 것을 당장에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하는 말로써 히브리서 저자는 이 둘을 구별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왜 간통이라는 단어를 들어서 모든 불순한 정욕을 정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설명했다.
하나님께서는 고삐 없는 정욕을 정죄할 뿐 아니라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정숙과 순결을 귀하게 여기도록 가르치고 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해야 마땅하다는 이야기이다(고후 7:1). 이것은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살전4:4-5)는 말씀과 마찬가지로 본 7계명에 대한 해설이다.
출 20:15 도둑질하지 말라
도둑질- 사기, 강탈도 포함
사랑의 원칙이라는 각자의 권리가 안전하게 보장되며 아무도,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둑이란 남의 물건을 몰래 훔치는 사람 뿐 아니라 남이 손해 보는 데서 이득을 찾고 불법적인 일로 재산을 모으며 공평보다는 자기 개인의 혜택에만 전념하는 사람 모두를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도둑질이라는 말 속에는 강탈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웃을 도둑질 하는 데 있어서 사기를 쓰거나 폭력을 쓰거나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출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거짓 증거
(엗)은 본래 “증인”이라는 뜻이 있는 만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너는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인의 대답을 하지 말라”가 되겠지만 “......의” 자리에 “...... 로서를 집어 넣는 것이 더 낫다. 히브리어에 있는 호격을 살리면 ”오 거짓 증인이며, 너는 ...... 하지 말라“하는 식이 될 것이다.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탐내지 말라- 율법은 영적
바울은 이 계명에서 모든 “율법은 영적이다”(롬7:7, 14)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정욕에 대한 금지 규정을 통해서 우리의 손과 발만 순종하도록 묶어 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도 그것이 불법적인 것을 욕망하지 못하도록 묶어 놓고 있다는 이야기다.
탐심, 바램이란, 소위 말하는 형식적인 욕망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악한 욕망이란, 의지가 완전히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다 해도, 결코 탐심과 무관하지는 않다.
출 20:18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출 20: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출 20: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출 20:21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출 20: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출 20: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토단- 일시적이며, 미신에 빠지지 않도록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영원한 장소에 대한 선택이 그들에게 제시되기 전에 광야나 다른 곳에서 세워질 제단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 이 제단들이 흙으로 만들어지는 전을 원하신 것은 그들이 떠난 뒤에 저절로 무너지고 자취를 남기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거기에 돌이 사용되었을 경우 하나님께서 그것들이 영구적인 축대로 쌓여지는 것을 금하시고 다듬어지지 않고 조야한 그대로 더미를 이루게 하신 것은 후손들이 그 모습을 보고 미신으로 기울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만약에 제단의 모양이 조금이라도 남게 된다면 당장에 하나님을 엄숙하고 훌륭하게 예배하는 곳은 조상들이 이미 제단을 쌓은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종교적인 쓸데없는 생각이 거기에 덧붙여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타락한 예배 양식이 치솟아 나고 성소의 위엄은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남아있게 될 제단을 금하시면서 흙이나 모양 없는 돌더미로 제단을 쌓아 당분간만 사용하게 하신 것은 이런 악을 예상하셨기 때문이다.
출 20:25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출 20:26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