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북 신광수의 「방월계초자불우(訪月溪樵者不遇)」
석야 신웅순
김홍도(1745-1806)의 「도강도(渡江圖)」
고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다 高湖春水碧於藍
또렷하게 보이는 건 두 세 마리 백조 白鳥分明見兩三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 柔櫓一聲飛去盡
노을 진 산빛만이 빈 못에 가득하다 夕陽山色滿空潭
- 정초부의 시 「동호범주(東湖泛舟)」
김홍도의 그림「도강도(渡江圖)」화제, 정초부(鄭樵夫1714~1789)의 시 「동호범주(東湖泛舟)」이다. 동호는 팔당대교 옥수동 주변의 한강을 말한다.
원시는 첫구‘동(東)’, 네째구‘서(西)’, 제목‘동호범주(東湖泛舟)’로 되어 있는데, 그림 화제는‘고(高)’,‘석(夕)’, ‘고호범주(高湖泛舟)’로 되어 있다. 뜻에는 별 변화가 없다.
어느 봄날 저녁 강가의 풍경이다. 한 폭의 수묵화요 서정시이다. 그림「도강도(渡江圖)」는 화중유시(畵中有詩), 시의도(詩意圖)요, 시 「동호범주(東湖泛舟)」는 시중유화(詩中有畵), 도의시(圖意詩)이다.
중앙에 강가의 낮은 절벽과 나무가 그려져 있고 그 앞을 작은 배가 지나가고 있다. 사공과 앞모습과 뒷모습의 갓 쓴 선비 두 사람, 나귀 그리고 구종배 한 사람이 타고 있다. 옆에는 짐을 싣고 있다. 왼쪽 하늘엔 백로인 듯 흰 새 두어 마리 날고 있다. 양반의 행차 같다.
정초부(鄭樵夫, 1714-1789)의 본명은 정봉(鄭鳳)이며 정이재(鄭彛載)라고 한다. 초부는 나무꾼을 뜻한다. 그는 정조 때 양평의 명문가 여춘영 (呂春永, 1734-1812) 집안의 노비였다. 양반 자제들이 시를 외우는 것을 보며 어깨너머로 시를 배웠다고 한다. 천재적인 머리에 주인까지 잘 만나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주인 여춘영의 뒷받침이 컸다.
여춘영은 정초부의 시를 양반사회에 널리 알렸다. 정초부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으며 어느덧 자신의 시로 양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양반들의 시회에도 초대 받아 그들과 함께 시를 짓기도 했으며 시재를 알고 찾아오는 양반들에게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강가에 있는 나무꾼 집일뿐
과객을 맞는 여관이 아니라오
내 성명을 알고 싶다면
광릉에 가서 꽃에게나 물으시오
- 정초부의 「과객에게」
초부는 여씨 집안에서 43살 되던 해에 노비문서를 불살라버려 면천되었다. 그 뒤에 월계리 갈대울에서 나무를 해다 팔며 생계를 꾸렸다. 평생을 나무꾼으로 살았다. 남한강 물길로 뗏목을 타고 가면 서울까지 반나절 정도가 걸렸다. 동대문은 조선 후기 당시 상인들로 북적거렸으며 땔감으로 큰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정초부는 양평에서 나무를 해 배로 압구정 맞은편의 옥수동 근처까지 가져온 뒤 다시 동대문 밖까지 가서 그곳 나무전 거리에서 나무를 팔았다.
다 팔고나면 저녁 나절이 되었다. 옥수동 강가에서 다시 배를 타고 양평 월계 갈대울로 돌아갔다. 김홍도의 「도강도(渡江圖)」와 초부의 시 「동호범주(東湖泛舟)」는 그런 저녁 무렵 강가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산세는 진작부터 산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만
관아호적에는 아예 늙은이의 이름이 빠졌구나
큰 창고에 쌓인 쌀을 한 통도 나눠 갖기 어려워
높은 다락에 홀로 오르니 저녁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네
- 정초부의 「늙은이 이름이 없다(無野老名)」
관아에 가서 쌀을 꾸려고 하는데 ‘무야노명(無野老名)’, 호적 대장에 이름이 없다. 빈손으로 돌아왔다. 다락에 오르니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노비 신분은 해방 되었으나 관아에 호적이 없으니 환곡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노비시절은 그래도 세끼 호구는 면했다. 양인은 되었으나 시를 팔아 살 수 없으니 전보다 더 가난에 시달렸다.
이런 시도 있다.
한 밤중 다락에 오르는 것은
달빛 구경 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침 세끼 곡기 끊은 것은
신선되려는 것 아닐세
- 정초부의 「무제」
18세기 명사 시인 석북 신광수는 당시 또한 명성이 자자했던 나뭇꾼 시인 정초부를 만나보고 싶어했다.
임오년 1762년 가을 영릉으로 돌아오는 길에 월계 갈대울에 사는 정초부를 찾았다. 만나지 못했다. 나무하러 갔을까. 나무 팔러갔을까. 석북은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여강록에 「방월계초자불우(訪月溪樵者不遇)」시 한 수를 남겼다.
나무꾼이 원래 월계 서편에 사는데
돌부리에 섶 배를 대니 손은 허행을 했고
연기도 안 나는 사립문에 아낙만 혼자였다.
아침에 남풍을 타고 월계를 건넜다네.
아득한 창강 한 길 어느 곳에 가 찾으리
1만 산 즈믄 봉이 남우 어려 희미하다.
다시 갈꽃 읊조리며 배를 돌려 가노니
그대 위해 낚시터에 이끼 쓸고 글을 쓰노라
樵夫本住月溪西(초부본주월계서)
朝趁南風渡月溪(조진남풍도월계)
繫石柴船空到客(계석시선공도객)
無烟蘿屋獨留妻(무연라옥독류처)
滄江一路尋何處(창강일로심하처)
嵐雨千峯望盡迷(남우천봉망진미)
且詠蒹葭回棹去(차영겸가회도거)
爲君磯上掃苔題(위군기상소태제)
- 신광수의 「방월계초자불우(訪月溪樵者不遇)」
사립문에 아낙만 혼자 있었다. 아득한 창강 어느 곳에 가 찾을 것인가. 갈대울을 읊조리며 배를 돌릴 수 밖에 없다.
정초부는 석북보다 2살 아래요, 김홍도는 석북보다 33살이나 아래이다.
김홍도는 어려서부터 안산에 있는 표암 강세황의 집을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 신광수는 안산 15학사의 그룹으로 강세황과는 친구지간이다. 단원 김홍도, 최북 같은 화가들도 이 시회에 빈번히 출입했다고 한다.
안산은 시대를 앞서가는 문인 및 사상가들과 제각기 특출한 개성으로 정신세계를 가꾸고 있는 기인ㆍ명인들이 창조적이며 역동적인 삶을 이뤄내는 조선 후기 문화지도의 중심지였다.
석북집에 최북에 대한 시는 있으나 김홍도에 대한 시는 없다. 나이도 33살이나 아래여서 만날 기회가 없었던 같다.
석북 여강록에 「다시 주다(復贈)」란 시가 있다. 후반부 시이다.
흰머리칼로 타향에서 서로 이별하니,
난간에 떨어지는 햇살이 더욱 가련하구나.
배 타고 지나다 월계의 나무꾼을 찾아,
돛배를 멈추고 동유(東遊)의 시구를 전해준다.
동유의 시구란 월계의 동쪽인 여주 일대에서 쓴 시를 말한다. 시를 통해 넌지시 동쪽 여주를 방문해 같이 어울리기기를 요청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프로포즈에도 후에 정초부를 만나지는 못한 것 같다. 정초부는 당시 명사 시인 석북도 만나보고 싶었으니 양반 사회에서 초부의 명성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석북은 50이 되어서야 영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한산 숭문동에서 반세기나 되는 세월을 은사로 살아왔던 시인이다. 벼슬 없는 초부와 지난날의 벼슬 없는 한사였던 자신과 무엇이 다르랴. 돈만 있으면 양반도 될 수 있는 봉건적 신분질서가 무너져가던 18세기였다. 석북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예술을 사랑했던 포의한사였으니, 가난에 시달렸던 초부와 다를 바가 없는 동병상련 같은 연민의 정은 아니었을까. 예술을 사랑했던 두 거장, 석북과 단원은 초부의 시를 만나 하나는 여강록에 초부의 고달팠던 인생을 읊었고, 하나는 그림에 그의 고달픈 서정시 한편 남겨놓았다. 예인이 예인을 알아보았으니 백아절현, 진정한 예인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리라.
여춘영이 초부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낙엽 같은 시 한 장 지상에 남겨놓았다.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
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내세에는 그런 집에서 태어나시오
-뉴스서천,2024.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