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이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
무상無常이란?
불교 용어로는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무상無常’은 온갖 것은 항상 변화하는 과정에 있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무상無常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큰 오해가 있는 듯싶습니다.
무상無常을 ‘허무하다.’고 하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무상無常은 허무한 것만은 아닙니다.
‘변한다.’고 하는 이 현실 가운데는
무한한 가능성이 내포 되어 있습니다.
이 무상無常의 도리를 깨달으면
우주의 근본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고,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발다경薩鉢多經》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들은 잘 들으라.
온갖 현상은 무상하여
생겨서는 없어지는 성질의 겻이다.
견고하지 않고 실체가 없으니
이는 절대적인 경지가 아니며,
즐길 것이 못 된다.
너희들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해탈을 구해야 할 것이니라.”- 살발다경 -
또 《초분설경初分說經》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육근六根이 무상無常하며,
육식六識이 무상無常하며,
삼독三毒의 불이 무상無常하며,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우비憂悲,
고뇌苦惱가 다 무상無常하다.
너희 필추苾芻는 마땅히 알라.
온갖 존재存在가 모두 무상無常하다는 것을......”-초분설경初分說經-
변화는 있어도 결코 종말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불생불멸이요, 불증불감’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의 온갖 존재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물질만이 아니라 사회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변화의 물결에
얼마만큼 잘 적응하느냐 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습니다.
아무리 괴로운 현실이라도 이를 잘 참고 견디면
보다 밝은 미래가 찾아오기 마련이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권력이라도
언젠가는 추풍낙엽이 되므로
이에 잡착하다 보면 서글픈 종말을 맞아하게 됩니다.
설법은 단지 스님들이나
유명한 법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존재가 법사요,
포교사입니다.
단지 우리네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를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밤이 길면 낮이 짧고,
낮이 길면 밤이 짧으면 법입니다.
밤은 어둠입니다.
그 어둠을 몰아내는 일이
우리 불자들의 신앙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반야般若’라는 밝음입니다.
우리는 그 반야般若를 찾아내어 부처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중생 노릇을 하는 까닭은 즉,
부처가 되지 못하고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까닭은
그 근본원인이 무명無明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서 빨리
그 무명을 우선 제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고
육바라밀행六波羅蜜行을 실천實踐하는 것도
모두가 이 무명無明으로 부터 탈피脫皮하여
반야광명般若光明을 회복回復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반야광명을 회복하고
무명으로부터 탈피하야 해탈을 성취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앞서 말씀드린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고
육바라밀행六波羅蜜行을 하든지
염불念佛, 기도祈禱를 열심히 한다든지 하는
모든 불자들의 수행修行이 무명無明을 제거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오늘 한문 글자가 많이 나오는군요.
그렇지만 어렵게 읽지 않아도 될 겁니다.
승은 늘 한문에는 한글을 넣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낮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거기에 대한 해답은
불자님들께서 덧글로 적어 주십시오.
이것이 오늘 드리는 따끈따끈한 일이다.
2024년 07월 18일 오전 06:11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운월야인雲月野人 진각珍覺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