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학동 한유기(閒遊記)
신선이 타고 다녔다는 학이 청학(靑鶴)이다. 동(洞)이란 깊은 골과 마을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청학동하면, 지금 그 터가 과연 옛 도인들이 살았던 그 청학동이냐, 아직도 신선이 있냐고 묻는다.
근세의 도인 행적을 기술한 ‘청학집(靑鶴集)’이란 책부터 살펴보자.
청학상인(靑鶴上人)이란 분은 갑산 사람으로 성은 위(魏)씨고 이름은 한조(漢祚)로, 선조 때 사람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능했고, 울릉도 일본 중국 등 국내외 승지(勝地)를 다 돌아다니며 우리나라 산림의 우두머리가 되어 만년에 청학동에 살았으므로 '청학상인'이라 했다. 편운자(片雲子) 채하자(彩霞子) 계엽자(桂葉子) 등 8명의 도인 제자를 두었다.
이방보(李芳普)란 분이 있는데, 그는 광해군 때 사람으로 지리산에 들어가 정심재(貞心齋)란 재실을 짓고, 도를 닦으며 약초를 캐고 살았다. 삼정환(三精丸) 백복환(百福丸) 경옥고(瓊玉膏) 혼원단(混元丹)을 만들어 선반에 늘어놓고, 조석으로 푸른 기장밥, 생강 김치, 산국화와 구기자로 만든 기국채(杞菊菜), 송화주(松花酒), 꿀 등을 먹었으니, 진실로 신선들의 음식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신선의 족보를 기록한 ‘기수사문록(記壽四聞錄)’이란 책도 있다. 거기에는 구월산의 환인진인(桓因眞人), 설악산에 들어간 신라의 표공(瓢公), 양산 칠점산에서 내려온 가락의 담시선인(仙人), 옥룡자(玉龍子) 도선(道詵)이 금강산에서 만난 물계자(勿稽子), 지리산과 가야산을 오가던 최치원 등 신선이 쭈욱 기록되어 있다. 구월산 설악산 금강산 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은 다 신선이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이런 책은 있다는 사실은 우리 민중의 청담사상과 이상향의 꿈을 말해준다.
지리산을 찾아가 놀았던 지식층으로는 최치원 김종직 김일손 조식과 그밖에 숱한 고승들이 있지만, 그들은 시(詩)로 신선을 논했으되, 정작 신선이 살던 터는 어디라고 찍지못하고 돌아와서 후손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浮世功名是政丞 /뜬 세상 공명은 정승이요
小窓閑味卽山僧 /작은 창가 한가한 맛은 산승의 것이로다
箇中亦有風流處 /그 중에서 역시 풍류처 있는 곳은
一朶梅花點佛燈 /매화 한떨기 불등을 켠 곳.
이암(李嵓)의 시를 뇌이며, 나도 청학동에서 한번 놀아보자고 올라가보았다.
진주서 하동으로 가다가 길이 횡천에서 꼬부라지니, 물은 청암에서부터 산을 돌아 흘러나오고, 산은 우람하게 창공으로 거침없이 솟았다. 갑자기 인간이 왜소해지고 스스로 작아진 느낌을 준다.
요게 진짜 산이다. 나무가 살아있고 물이 살아있고 흙이 살아있다. 정기 서린 첩첩 심학(深壑)은 골마다 물을 우르르 쏟아낸다. 찔끔찔끔 야산에 흐르는 물하고 족보부터 다르다. 온통 물 천지다. 꼬불꼬불 꼬부라진 꼬불길 옆 바위를 타고 내리는 옥수(玉水)는 푸른 이끼 촉촉히 적신다.
간간이 노란 벼이삭 풍요로운 논이 화단처럼 둘러싼 농가가 보이는데, 집안에 선 감나무는 지붕을 홍시(紅柿)로 덮었다. 그림이다. 시퍼런 대밭가는 또랑물이 일년 사철 시도때도 없이 철철 흐르니, 그 산삼 썩은 보약같은 약수가 그냥 흘러감이 아깝기 그지없다. 저 감나무와 산삼 썩은 또랑물이 서울서 얼마나 그립던 것이던가?
청학동에 닿아보니, 갑자기 거기가 어디메던고. 청학서당, 율곡서당, 명심서당 집마다 천지사방 서당이다. 청학동 토종은 영어도 필요없고 수학도 필요없고 댕기머리 핫바지 차림이니 단군임금 시대 백성이다. 도연명이 읊은 '우연히 복사꽃이 둥둥 떠서 흐르는 시내를 몇굽이나 돌아 구름 덮힌 한 곳에 가니, 도화원 사람들이 옛날 진나라 옷을 입고 있더라.’는 '미개진의복(未改秦衣服)'이란 구절 생각난다.
서당마다 대 홈통으로 물을 흘려 돌확에 철철 넘치도록 해놓고 물 마시라고 곁에 표주박 놓아두었다. 추석 후라 인적은 고요하고 동구 안은 온통 쏴르르 쏴르르 물소리로 덮혔는데, 소리 중에 귀를 씻어주는 맑은 소리는 역시 물소리다. 신선은 옛날 이야기로 온데간데 없지만 푸른 물은 여전히 흘러간다.
기특하게 집마다 기와를 올리고 황토벽 바르고, 처마는 편액이요 기둥마다 대련(對聯) 글귀다. 마당가 수석 분재 몇 점도 다 좋은데, 한가지 아쉬운 건 이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 같은데 복숭아꽃 없음이 흠이다.
차를 주차하고 패철(佩鐵) 꺼내보니, 향(向)은 해좌사향(亥坐蛇向). 동(東)으로 살짝 돌아선 남향이다. 백두대간이 지리산 천황봉에서 세석평전과 삼신봉 거쳐 정남으로 바다를 보고 똑바로 내려와 끝맺은 맥 아래에 청학동이 있다.
앞은 좌청룡 우백호 네 겹을 갈 지(之)자 그리며 물이 나가고, 끝은 속세와 차단하는 푸른 산이 막아섰다. 터가 오대산 적멸보궁마냥 광활하여, 동구(洞口)가 갑갑하지 않고 햇볕 화창하고 시원히 펼쳐졌다. 이만하면 쏘옥 숨어서 난세를 피할 낙토임에 틀림없다.
산국 흐드러지게 핀 바위 옆에 청옥의 계류가 흐른다. 그 속의 초가는 집이 작아 온통 국화향을 덮어썼다. 한복에 상투 올린 노인 오가는 것이 보이는데 청산과 흰옷의 대비가 기가 막힌다. 도라지꽃 흰빛이 바로 한복의 흰빛이다. 송하(松下)에 설려면 한복이 있어야겠다. 월하(月下)에 거닐려면 한복이 있어야겠다.
우전차 우후차와 선식(仙食) 파는 전통찻집이 있다. ‘안녕하시오?’주인에게 수작 던지고 들어가 남창으로 청산을 대하고 틀어놓은 대금(大笒) 산조 들으며 당귀차 한모금 마셨다. 자연에 들면 역시 국악이 제격이다. 피리소리 구름 속에 스민다.
찻집 주인을 따라온 네살백이 계집아이 하는 짓 보소. 아빠가 시키니, 오른손을 왼손 위에 얌전히 올리고 허리를 굽히며 ‘하라버지 안녕하세요’ 앙징맞은 목소리로 으젖히 인사를 올린다. 혀가 돌아가지않는 꼬맹맹이 발음이다.
‘오냐 니가 참으로 이쁘구나.’
어찌나 기특한지 몇번이고 연거퍼 칭찬해주었다. 이런 예절은 서울에서 멸종된지 오래다. 숲 속 희귀난을 본듯 그 예절 보고 홀딱 반한 객에게 주인은 청학동에는 매년 전국의 어린이 수백명이 찾아와 전통 예절과 한문 배워간다고 알려준다. 어느 날 서울서 스웨덴 왕족의 만찬에 간 적이 있다. 그들은 식사하는 데 격식이 꽤 엄했다. 그들이 아마 이 꼬맹이 예법 보면 부러워서 미쳐버릴 것이다.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사서삼경 다 외우는 청학동 출신이 80여명 쯤 된다고 한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白遍義自見). 백번 읽으면 뜻이 저절로 알아진다고 한다. 그게 한문이다. 청학동 토속품 가게에서 단단한 대나무 뿌리로 만든, 그걸로 맞았다 하면 무지막지 아프게 생긴, 회초리를 보았다. 그게 대학교수보다 더 엄격한 선생이다. 대학교 한문학과 출신 중에 논어 한 권 제대로 외는자 있던가? 여기선 천자문 명심보감 외는 사람 그 맑은 물처럼 흔하다.
속초 송지호 옆에 있는 오봉리란 마을이 있다. 려말(麗末) 두문동 선비 중 일족이 여기로 옮겨 숨어살았던 곳이다. 문화재 관리국이 보조비 지급해 온 동네를 한옥으로 바꾸었다. 지금 청학동에 대한 지원은 어떠한가?
신선사상은 동양 특유의 사상이다. 그러나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나 왕유의 ‘도원행(桃源行)’은 작품 속 유토피아고, 실재하는 신선마을은 지구상에서 청학동이 유일무이한 곳일지도 모른다. 그걸 이렇게 방치해서 될 일인가? 심오한 무위자연의 노장철학까지 읊어볼 동네가 여기 청학동이다. 그 문학적 철학적 잠재적 가치가 썩고있다.
‘내년 산꽃 필 때 꼭 다시 오겠소.’
‘그러시이소. 식사 대접 한번 하겠십니더.’
사람들은 부귀를 구하는데 나는 청산을 구한다. 말꽁지 머리 주인 정중한 인사 등 뒤로 두고 떠났다.
해발 800이니 청학동은 고지대다. 내려오는 길에 고로쇠나무 차나무 산목련 자생하는 숲에 산영(山影) 깃든 호수를 보았다. 지리산 양단수가 무릉도원이라고 우긴 남명선생이 옳다. 마음 속에 신선을 그리는 사람은 다 그런다. 나 역시 청학동은 청학상인이 살던 선경(仙境)이더라고 우겨보고 싶었다.
2002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