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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나오는 인물)
리오폴드 블룸 : 1866년생, 아버지는 1886년에 자살, 1888년 마리언과 결혼, 딸 밀리와 아들 루디 가 있었으나 아들은 어려서 죽음. 신문사 광고모집인.
스티븐 데덜러스 : 1882년생, 가톨릭학교와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공부함, 더블린 외곽의 초등학교 선생으로 문학가를 꿈꾼다.
마리언 블룸 : 1870년생, 트위디 소령의 딸로 어머니는 스페인계 유대인. 소프라노 가수로 애칭은 몰리. 수많은 남성들과 관계를 가짐
휴 블레이지스 보일런 : 마리언의 현재 애인, 멋만 부리는 비열한.
마사 클리퍼드 : 타이피스트. 블룸의 펜팔 상대
율리시스는 영문학 사상 가장 독특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이 소설은 스티븐 더덜로스와 레오폴드 볼륨이라는 두 주인공이 더블린에서 하루 동안 겪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위에 삶, 죽음, 섹스 같은 보편적인 주제부터 아일랜드 시대 상황과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이르는 온가 주제에 대한 관념의 흐름을 올려 놓으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또한 이 책은 율리시스의 방황을 다룬 원조격인 호머의 오딧세이를 수 차례 원용하기 까지 한다. 이런 원용은 때로는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스티븐과 볼륨의 시간은 마구 잡아먹으면서 그들의 그들의 야망과 목적을 흐트려뜨리려고 사소한 지저분한 화제를 일부러 삽입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더블린을 세밀하게 현실화하고 있지만 사실은 내부의 세세한 면에서는 틀렸거나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도 있다. 이들은 단순히 마음의 내면 활동을 탐구하기 위한 배경으로 쓰일 뿐이다. 마음이란 것 역시 고전 철학처럼 단정적이고 확실함을 거부한다. 조이스는 생각 자체가 매우 드문 길을 재현하려 한다. 인생에 확실학 곧고 바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율리시스는 소설쓰기를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한 작품이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도덕 규범들은 사실은 우연이거나 사고이거나, 우리의 마음의 색깔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아일랜드만의 상황인지, 전세계의 보편적인 것인지는 본명하지 않다.
또 다른 주인공인 볼륨은 유대인이다. 스티븐은 고향이라고 여기는 이 도시에서 그는 이방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꼭 읽어야 할 1001편의 소설에서)
<<율리시스 읽기>>
이들 두 사람의 이야기에 얽힌 공통점은 무엇을까.(두 사람은 프루스트와 조이스를 말한다.) 결국 둘 모두 공교롭게도 '서로의 작품을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는 1922년 2월 2일에 파리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프루스트는 결국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1922년 11월 18일에 영면했다.) 당시 두 사람은 모두 파리에서 살았고, 그들이 발표한 걸작들이 당연히 온통 '파리의 화제'였을 터인데도 왜 그들은 상대방의 걸작을 읽지 않았을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야기를 다시 오늘날로 되돌려 보자.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 이들 두 작가들을 두고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공통점은 어떤 게 있을까. 문학 고전에 얼마쯤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세 가지 정도는 쉽게 떠올릴 수 있으리라. 첫째, 둘 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소설을 썼다는 점. 둘째, 두 작품 모두 그 어떤 작품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분량을 지닌 소설이라는 점, 셋째, 두 작품 모두 읽기 힘든 작품이어서 아무에게나 쉽게 읽히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
나도 여태껏 두 작가의 걸작들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비로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부터 읽기 시작했다. 과연 익히 알려진 그대로였다. 벼르고 별러서 집어든 책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읽기 어려운 책이었다. 어느 독서 대가의 충고대로, 나는 이 책을 읽기에 앞서『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더블린 사람들』을 먼저 읽었고 그 직후에 곧바로 『율리시스』속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하지만 독서 대가의 충고가 무색하리만치 '제임스 조이스의 앞선 두 작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율리시스』는 '너무나 방대하고도 난해한' 책이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천재성이 이토록 놀랍고도 비상(非常)한 것이었던가를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나 할까.
도대체『율리시스』읽기의 난해함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이유들은 대략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겠지 싶다. 우선, 이른바 에피파니로 불리는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른 서술 방식이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에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 혹은 '하루 종일 의식을 적시고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아무 데서나 작가가 불쑥불쑥 꺼내 놓기 때문에, 등장 인물들의 '의식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 보지 못하는 독자들로서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는 수많은 다른 작품 속에 담긴 내용들에 대한 '인유' 때문에 겪는 난해함이다. 사실 제임스 조이스는 '독자의 평균적인 독서 형편'을 거의 또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니 이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숱한 문학작품들이나 음악(주로 오페라 또는 민요)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부족한 독자들이 겪을 고충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중될 게 뻔하다.
세 번째로는 숱한 언어 유희를 포함한 '언어의 창의적 표현 기법'에 적응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여기엔 물론 원작에 쓰인 다양한 언어 유희를 적당한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번역의 근본적인 한계' 또한 포함된다. 이외에도 이 작품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를 몇 가지 더 내세울 수 있겠지만(가령, 숱한 성경 대목에 대한 인유를 통한 다양한 종교적·신학적 문제 제기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에 얽힌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 부족 등) 그런 점들은 어느 작품에서든 흔히 대두될 수 있는 일반적인 문제로 볼 수도 있기에,『율리시스』만의 고유한 난해성으로 언급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간과하는 게 좋을 듯하다.
이런 '다양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여전히 독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주제'가 누구에게라도 예외없이 적용할 수 있는 '인생의 온갖 문제들'을 엄청나게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어쩌면 '우리의 놀랍도록 다채로운 삶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싶다. '인간 삶의 온갖 다양하고 풍요로운 모습들'이 총망라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우리의 삶의 본질을 구성하는 온갖 생리적이고도 심리적인 요소들 가운데 이 소설에서 다루지 않는 주제가 과연 있기나 할까 싶을 만큼 풍성하다. 그러니 제임스 조이스가 그 방대한 '인간 삶의 온갖 요소들'을 이 작품 속에 모조리 쏟아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이 작품 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애를 썼을지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일지 모르겠다.
소설의 외관상의 형식은 어쩌면 극히 단순하다. 주인공인 신문 광고업자 블룸이 1904년 6월 16일 하루(이른바 '블룸스데이') 동안 더블린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겪는 일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뒤따라가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블룸의 하루'가 엄청나게 드라마틱한 것도 아니다. 비록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등장하는 '오뒷세우스의 놀라운 방황과 극적인 귀환'에 그 구조를 빌린 형식이긴 하지만, 블룸의 일상은 영웅 오뒷세우스보다는 훨씬 더 일상적이고 평화스럽고 평범하기만 하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친구의 장례식에 들렀다가, 사회생활(신문 광고업)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만나고, 주점에 들러 술을 마시기도 하고, 해변에서 산책도 하고, 밤늦게 다시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와 아내가 깰까 봐 살며시 침대로 기어들어가 그 옆에 눕는 것으로 블룸의 하루는 끝난다. 거기서 이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유명한 마지막 장이 길게 이어지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그건 바로 블룸의 아내 '몰리의 독백'이다. 몰리가 서서히 잠에 빠져들기 전에 그녀의 '의식' 속에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묘사하는 부분은 구두점 하나 없는 단 하나의 문장이다. Yes로 시작하여 Yes로 끝날 때까지 무려 4만 단어가 끝없이 펼쳐진다. 결국 이 방대한 작품을 통해 제임스 조이스가 마음껏 표현하고자 했던 건 '하루하루의 삶 속에 담긴 놀라운 인생의 풍요 그 자체'였다.
작품 속의 두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과 시인이 되기를 지망하는 스티븐 데덜러스(『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동일 인물이며 작가 자신의 분신)의 '눈'과 '의식'을 통해 들여다보는 세계는 가히 '요지경'이라 부를 만큼 풍성하지만,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던 그런 '삶의 풍요'와 '삶의 다양한 외관과 내면'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물론 앞서서 미리 언급했던 '율리시스 읽기의 난해함'을 끊임없이 극복하기 위해 독자가 끙끙거리며 애를 쓰는 수고가 따를 수밖에 없다. 나도 아직 이 난해하고도 풍성한 소설을 미처 다 읽지 못했지만 여태까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끄적거린 노트 몇 쪽만 보더라도 이 작품이 지닌 방대한 넓이와 깊이에 대해 거듭 감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의식의 흐름)
모더니즘 작가들이 사실주의적 서술 방식을 파괴하려고 접근한 방법 중의 하나가 ‘의식이 흐름’ 기법이다. 소설에서 의식의 흐름은 등장 인물의 생각, 인식, 감정의 흐름을 나타낸다. 새뮤얼 리처드슨의 서간체 소설 ‘파멜라’ 같은 예전의 작품에도 자기 성찰이 담긴 긴 구절을 발견한다.
20세기에 접어드는 시기의 소설들은 더 멀리 나아갔다. 헨리 제임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는 소재와 소재를 다루는 방식과 관련하여 더 주관적인 관점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소설에서 내적 독백이 처음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에두아르 뒤자르댕이 1887년에 출간한 단편소설 ‘월계수들이 베어져 넘어간다’에서 였다. 조이스가 1903년에 파리의 한 철도역 매점에서 그 책을 한 부 산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스타일은 심리학이 과학으로서 부상한 것과 관련지어져 있는데 실제로 의식의 흐름이라는 용어는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이다.)가 ‘심리의 원리’라는 책에서 사용했다
의식의 흐름 작품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큰 작품이 ‘율리시스’이다. 조이스는 등장인물의 마음을 작가의 매개없이 적접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버지니아 울프도 ‘데라웨이 부인(1925)에서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실험했다.
의식적 생각에 거의 무의식적 생각으로 흐르는 내적 심리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종종 은유적인 연상을 따라간다. 그러므로 단어와 문구가 느슨해지기도 한다. 문장을 비문법적 구조로 만들기도 하고, 정관사나 부정관사를 생략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