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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로이 목마, 영화 <트로이>에서...
[ 트로이로 가는 길 ]
고전고대(古典古代)의 세계로 가는 길은 경치도 없이 현대극(現代劇)의 세트처럼 무미(無味)합니다. 이스탄불에서 새벽에 떠난 시외급행버스가 이 무풍경(無風景) 속을 졸며졸며 달려 정오께야 되어서야 다다넬즈 해협에 닿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해협을 페리로 건넙니다.
대안(對岸)의 항구가 해협의 문을 지키는 차나칼레. 여기서 트로이까지는 마이크로 버스가 정시(定時)도 없이 손님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왕복합니다. 차나칼레-트로이간(間)의 30km는 길 옆이 온통 소나무밭입니다. TRUVA(트루와, 터키사람들은 트로이를 이렇게 부릅니다)라고 쓰인 표지판이 안내하는 길은 역사(歷史)를 거슬러 올라가듯 자꾸 오르기만 합니다.
차는 히살리크 언덕의 펑퍼짐한 고지대(高地帶)에서 멎습니다. 한쪽 가에는 한 맹자(盲者)의 석상(石像)이 퀭한 눈을 허공에 박고 서 있습니다.
* 트로이 가는 길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옛 이름)의 아들, 시인(詩人)의 아버지-호메로스>
여기가 호메로스의 웅심장대(雄心壯大)한 영웅서사시(英雄敍事詩)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의 트로이입니다. 바로 세계문학사(世界文學史)의 첫 장에 온 것입니다.
트로이 성(城)의 유지(유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거대한 목마(木馬)가 서서 앞을 가립니다. 관광객들이 목마의 배 밑에 난 사다리를 타고 안으로 올라가 옆구리에 뚫린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손을 흔듭니다.
<오딧세이>의 트로이 성은 결국 그리스군의 목마의 계략에 함락되어 전쟁이 끝납니다. 뱃속에 그리스군의 병사를 잔뜩 채운 목마를 트로이군은 멋모르고 성문을 열어 모셔들였던 것이죠. 그 <트로이 목마>가 3천년 만에 옛 전쟁터에 되살아 난 것입니다.
터키정부는 1975년 부근의 아이다 산(山)에서 가장 질(質) 고운 소나무를 베어다가 높이 12m의 목마를 만들어 성문자리 앞에 세웠습니다. 새 목마는 트로이의 상징이자 유적지를 조망하는 전망대의 구실도 합니다.
옆에는 성지(城地)에서 출토된 토기(土器)들을 모아다가 소박물관(小博物館)을 꾸며 놓았습니다. 인근에 인가(人家)라고는 몇몇 기념품 가게들뿐입니다.
* 유적지
트로이의 성지(城址)는 무성한 잡초로 덮여있습니다. 듬성듬성 선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사이사이에 빨간 개양귀비꽃과 자줏빛 아네모네꽃들이 피어있습니다. 발굴된 유적은 기원 전 3200년부터 기원 후 500년까지 트로이가 한자리에서 9번 일어섰다 망한 역사를 층(層)마다 다른 석질(石質)의 성벽(城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전이 섰던 터에 오르면 서북쪽 저 아래로 광활한 벌판이 훤하게 펼쳐집니다. 언덕을 타고 내려간 한줄기 들바람이 휭하고 말발굽소리를 내면서 지나가는 듯한 허허한 평원(平原)입니다.
* 유적지에서 바라보는 벌판, 저기에 10만의 그리스군대가...
호메로스가 읊은 대로 가히 <바람이 황량한>, <경승(景勝)의 땅> 답습니다. 트로이 전쟁 10년의 싸움터가 바로 이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리스의 용장(勇將) 아킬레우스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와의 마지막 일전(一戰)을 트로이의 노왕(老王)은 이 성(城)에서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멀리 6km 너머 들판의 끝은 바다. 10만의 그리스군이 1천척의 전선(戰船)을 몰고와 새까맣게 갖다 댔던, 호메로스가 헬레스폰테 바다라고 부른 다다넬즈 해협 입구입니다.
* 트로이에 상륙하는 그리스군, 영화 <트로이>에서...
*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
호메로스의 서사시(敍事詩)는 한 소년의 몽상이 아니었더라면 끝내 한 시인의 픽션에 그칠 뻔했습니다. 북부 독일 출신의 슐리만은 어릴 때 트로이 낙성(落城)의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소년은 이것을 사실로 믿었고요. 언젠가는 트로이의 고토(故土)를 찾아내고 말리라는 꿈을 키웠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상업에 손을 대어 거부(巨富)가 되었습니다.
40여 년 후인 1869년 소아시아 일대를 처음 탐사했습니다. 1871년 호메로스의 시귀(詩句)를 길잡이로 하여 그때까지 황폐한 고대(高臺)에 지나지 않았던 히살리크 언덕에 삽을 꽂았습니다. 트로이는 땅 밑에 있었습니다. 전설(傳說)은 사실(事實)이었던 것입니다.
흙은 역사(歷史)를 묻고 시(詩)는 역사를 캐 낸 것입니다.
* 호메로스와 <일리어드>, <오딧세이>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시인 호메로스(혹은 호머)의 생몰(生沒) 연대와 출생지에 대해서는 정설(定說)이 없습니다. 기원전 9세기경 소아시아의 스미르나(현재의 터키 이즈밀) 부근에서 태어났다기도 하나 키오스 등 다른 7군데가 그의 탄생지의 영예를 놓고 다툽니다.
호메로스는 눈이 먼 채 하아프를 뜯으며 음유시인으로 전해집니다. 그의 작품으로 믿어져 오는 2대 서사시(敍事詩)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는 세계문학의 원류를 이루는 인류 최고(最古)의 위대한 문학적 유산입니다.
<일리어드>는 기원 전 1200년 경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빼앗아 간 것이 발단이 되어 미케네 왕 아가멤논을 총수로 한 그리스군이 트로이를 공략함으로써 시작된 트로이 전쟁 10년의 무용담입니다.
<오딧세이>는 트로이 성(城)이 함락된 후 귀환하던 영우 오딧세이가 풍랑을 만나 10년의 표류 끝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오는 모험담입니다.
* 영화 <트로이>에서...
[ 콘스탄티노플 공략전 ]
* 공략전 시작
근 천년이 넘는 세월을 동로마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서기 1453년 역사상 세 번째로 이슬람군의 공격을 받습니다. 674년 첫 전투와 717년 두 번째 전투 모두, 성을 포위한 이슬람군을 개박살 냈던 동로마 제국군에게도 이 세 번째 전투만큼은 쉽지 않았습니다.
비록 당대 최강의 난공불락의 도시라고 일컬어지고 있었지만 연이은 전쟁과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방위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1451년 19세의 나이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 즉위한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 정벌을 위한 준비에 올인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의 뿌리, 동로마를 한방에 끝장내 버린다면 선왕들도 이루지 못한 대업을 달성하는 것이자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위해 서유럽으로 진출하는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심에 부풀었던 메메드 2세는 즉위 3년째가 되던 1453년 4월, 드디어 수백 척의 전함과 8만이 넘는 대군을 휘몰아 기독교 문명의 자존심,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바야흐로 기독교 문명의 종가집과 이슬람 문명의 신흥 명문가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세기적 대결의 장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슬람군에겐 막강한 병력이 있었고, 기독교군에겐 역사상 단 한 번밖에(같은 기독교도인 4차 십자군에게 점령당함) 뚫린 적이 없는 전설적 삼중 성벽이 있었습니다.
비록 콘스탄티노플 수비대가 7천명에 불과했지만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기독교 지원군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이슬람 대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 터키 영화 <페티1453>에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 다음 차례는 자기들이라는 걸 잘 아는 유럽국가들이 지원군 요청을 무시하지 못하리란 기대 하에 황제는 이들에게 사절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지원군은 수십 명 혹은 수백 명 단위로 찔끔찔끔 보내올 뿐이었습니다. 극심한 전력차속에서 그는 힘겨운 싸움을 맞게 되었습니다.
성벽 앞에 진을 친 21세의 젊은 술탄, 메메드 2세는 불세출의 전략가였습니다. 젊은 왕은 조심성이 부족하고, 늙은 왕은 과감성이 부족한 법이지만 그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두 번이나 이슬람 침공을 무력화시킨 이 난공불락의 도시를 함락하기 위해 그는 신중히 준비했고 과감하게 공격했습니다. 그가 준비한 공성장비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길이 8미터, 무게 300kg에 달하는 초대형 슈퍼건 우르반 대포였습니다.
400명의 인력과 60마리의 소가 끌어야 겨우 움직였던 이 특대 사이즈 우르반 대포는 집채만한 포탄을 1.6km까지 날리는 무시무시한 병기였습니다. 제대로 맞으면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아니라 현대식 벙커까지도 한 방에 날려버릴 가공할 무기였습니다.
* 터키 군사박물관에 있는 우르반 대포
사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 해인 1452년 우르반이라는 헝가리 대포 기술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찾아와 특대 사이즈 대포 제작을 제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어마어마한 비용 때문에 안타깝지만 그 제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쫄쫄 굶는 형편에 그런 대포를 제작할 여유가 없었겠지요.
그러자 우르반은 바로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콘스탄티노플의 난공불락의 명성이 자자한 삼중 성벽에 골머리를 앓던 술탄 메메드에게 접근했습니다. 술탄은 우르반이 요구한 액수의 4배까지 지불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지원함으로써 결국 1453년 초에 원하던 대포의 제작에 성공했습니다.
* 삼중 성벽
이 대포는 포신의 길이 8.2m, 구경 0.9m로서 450kg 이상의 돌덩이를 1마일 정도 날려 보냈습니다. 포성이 워낙 커서 발사실험을 할 때 약 19km 떨어진 곳에 있던 임산부가 유산을 했다고 합니다. 이 대포는 사용 중 파열되고 말았으나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작지만 다른 대포들을 동원하여 포격의 위력을 한껏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터키인들은 성벽 가운데 가장 취약한 곳을 골라 6주 동안 쉬지 않고 집중적인 포격을 가했습니다. 대포는 발사 후 식혀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 7회 이상 발사하지 못했습니다. 수비군들은 밤낮 없이 성벽 뒤에 방책과 토루를 쌓아올리며 온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무자비한 포격에 여기저기 성벽이 무너지면서 오스만 터키군들은 그 틈새로 콘스탄티노플로 쏟아져 들어갔던 겁니다. 물론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는 데에는 우르반 대포도 한 몫 했지만 아래에서 설명하는 기발난 아이디어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 당시 전투 진영도, 오른쪽 배를 옮긴 수송로가 보입니다. 가라타지구 앞에 쇠사슬이...
* 산을 넘어간 전투선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전투에선 종종 다른 이유로 배가 산으로 가기도 합니다. 적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방법이 예기치 못한 시간에, 예기치 못한 장소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뛰어난 지휘관들이 가끔 이런 방법을 구사합니다.
이렇게 허를 찔러 적을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이 전략적 역발상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콘스탄티노플 전투에서 등장합니다.
* 전투선을 운반하는 장면, 메메드 2세가 지휘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이 시작되자 메메드 2세의 기대와 달리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준비했던 대포들을 쏘아댔지만 비잔틴군은 신속하게 성벽을 복구했습니다. 대신 땅굴을 파서 성벽을 화약으로 날려 버리려고도 했지만 매번 기독교군의 역습으로 실패하기 일쑤였고, 오스만 해군을 동원한 해상봉쇄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오스만군이 장악하지 못한 Golden Horn(금각만)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전쟁물자를 조달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수비대는 오스만군의 파상공세를 잘 막아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스만군의 피해는 갈수록 커졌고 전선은 교착상태로 흘렀습니다. 개전 초 콘스탄티노플 황제가 보낸 사절마저 사형시키며 승리를 장담하던 메메드 2세는 반대로 자신이 사절을 보낼 정도로 초조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우수한 공성 무기들보다 포위된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의 전의를 잃게 만들 회심의 일격이었습니다. 우르반 대포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바로 사람들의 의지란 걸 간파한 것입니다. 그는 바로 그 의지를 무너뜨릴 해법을 금각만에서 찾아냈습니다.
메메드 2세가 볼 때 금각만을 방어하는 성벽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금각만을 가로지르는 쇠사슬을 쳐서 이슬람 해군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메메드 2세는 과거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유일한 사례(4차 십자군)가 바로 금각만쪽 성채를 돌파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금각만에 오스만 해군을 진입시키고 싶었습니다.
* 현재의 가라타(갈라타) 지역, 화살표가 배를 운반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메메드 2세는 해협의 입구를 막고 있는 쇠사슬의 돌파를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역시 잘 알고 있던 콘스탄티노플 수비군 역시 금각만 방어에 악착같이 나섰습니다. 콘스탄티노플 해군과 성벽에서 쏘아대는 화력 때문에 쇠사슬 해체와 돌파는 사실상 불가능했고 메메드 2세는 다른 공격루트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그는 다소 엉뚱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바닷길로 금각만 진입이 불가능하다면 육로로 전함을 끌고 옮기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 침공 19일째, 이슬람군은 술탄의 명령대로 배를 끌고 산을 넘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습니다.
이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하기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해발 60m의 갈라타 언덕을 가로질러 금각만에 이르는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고 엄청난 규모의 목재 통나무가 깔렸습니다. 남는 게 사람이던 터키군은 한 척 한 척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수십 톤에 달하는 전투선을 끌고 밀며 언덕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어둠을 틈타 갈라타 언덕을 넘어간 전선은 70척에 달했고 모두 무사히 금각만에 안착했습니다. 하룻밤 만에 대규모 함대를 금각만으로 이동시킨 오스만군은 이로써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싼 모든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완벽히 차단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비잔틴군과 시민들은 눈이 뒤집힐 정도로 경악했습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텅텅 비어있던 금각만에 느닷없이 오스만의 대규모 함대가 떡 나타난 것입니다.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리고 절망의 그림자가 그들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제국의 결사대가 술탄의 금각만 함대를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은 차분히 최후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패배를 예감한 황제와 시민들은 다함께 마지막 미사를 드렸고 제국의 종말과 자신들의 운명을 슬퍼했습니다. 얼마 안되는 병력을 금각만 성벽에 쪼개는 바람에 북쪽의 성벽 방어가 허술해졌습니다.
드디어 서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맞닿는 꼭지점 부분의 성문이 우르반 대포로 뚫리면서 터키군이 성내로 쏟아져 들어왔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오스만군을 향해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며 장렬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동로마를 접수한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문명의 승리를 기념해서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1923년 오스만 터키 제국을 계승한 터키 공화국이 수도를 앙카라로 옮길 때까지 이 곳은 470년간 위대한 이슬람 세력의 수도로 사용되었습니다.
[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메메드 2세 ]
*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는 메메드 2세, 오른쪽 초상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소피아 대성당 앞에서 말에서 내린 메메드 2세는 흙을 한 줌 집어 자신이 쓴 터번 위에 뿌린 뒤 안으로 들어가 알라신에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황궁으로 간 그는 조용히 페르시아 시구를 읊었습니다. “황제의 궁전에는 거미줄만 무성하고, 아프라시압의 탑에는 부엉이만 우는구나.”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명칭을바꿔 재건했습니다.
피난 간 그리스인과 이탈리아인들을 돌아오게 하고 발칸과 아나톨리아 지역 사람들을 대거 이주시켰으며, 정교회 총대주교구도 복원시켜주었고 이슬람 교육 및 학술 기관을 세우고 상업 시설을 건립했습니다.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20여 년간 발칸 지역, 헝가리, 왈라키아, 몰다비아, 아나톨리아, 로도스 섬, 크리미아, 이탈리아 남부 등으로 출정하여 위세를 떨쳤지만, 각 지역에서 일어난 저항으로 정복지를 전면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하고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의 세력을 지중해 동부와 흑해에서 몰아냄으로써 오스만 터키 제국의 전성기 패권의 기반을 다져놓았습니다.
* 종교적 관용을 베풀고 학문과 교양을 애호한 군주
발칸 지역을 정복한 메메드 2세는 1463년 5월 28일 그곳의 가톨릭 프란체스코회 수도원과 수도사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 칙령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특히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문헌이었습니다.
메메드 2세는 터키어 외에도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 아랍어, 페르시아, 라틴어, 세르비아어 등 많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어로 시를 짓고 다른 언어들로 그 시를 옮겨 풀이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기를 즐겨 읽는 등 고대 인물과 역사에도 밝았습니다. 이렇게 폭넓은 교양을 쌓은 메메드 2세는 다른 문화에 대해서 매우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는 이스탄불에 방문하는 많은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이나 예술가들을 우대했습니다.
* 터키 영화 <페티 145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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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장편의 서사시보다
장엄합니다
전철에서 읽고 있읍니다
흙은 역사를덮고 시는 역사를
캐낸다!!!
정말 황홀해지는 표현
밥굴어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