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奇襲南侵
▲南侵의 지휘부는 소련군 대위 출신
-북한군 수뇌부의 주류는 소련군 88여단 출신
-88여단은 滿洲(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활동 →일본 關東軍(관동군)의 토벌을 피해 소 련 입경→ 소련군의 지도로 결성된 게릴라 조직내각수상 김일성(당시 38세·원수),
-민족보위상 최용건(50세·대장),
-전선사령관 김책(47세·대장),
-총참모장 강건(32세·중장),
-공군사령관 왕연(38세·중장) 등
*위 수뇌부는 모두 소련군 대위 출신
-1950년 6월25일 일요일 꼭두새벽, 그때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울 북방의 산야에는 정적이 뒤덮고 있었다.
-오전 4시, 그 정적을 깨고 38선 全域(전역)에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이어 7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을 제1선으로 하는 敵의 남침이 개시되었다.
-戰線(전선) 곳곳에서 국군은 물밀 듯이 내려오는 북한군의 전차에 苦戰(고전)했다.
-戰車(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국군은 敵 전차에 뛰어올라 수류탄과 함께 자폭하는 등 육탄공격으로 대항했다.
-그러나 戰勢(전세)는 절망적이었다.
-25일 오전 10시, 북한군 정찰기가 金浦(김포)와 汝矣島(여의도) 비행장을 정찰했다.
-정오 무렵에는 북한 YAK 전투기 4대가 용산역, 서울 공작창, 陸運局(육운국) 청사 등에 기총소사와, 폭탄을 투하했다.
▲서울 공략 전면의 지휘관
敵 제1군단(중장 金雄, 38세/팔로군 연대장 출신)은 38선 서부지역에
제6사단(소장 方虎山)-개성·문산 정면으로부터,
제1사단(소장 崔光, 32세/소련군 중위출신)을 高浪浦(고랑포) 정면으로부터,
제4사단(소장 李權武/중공군 여단 견습참모)을 동두천 정면으로부터,
제3사단(소장 이영호/소련군 상위출신)을 포천 정면으로부터
*서울을 求心的(구심적)으로 포위하는 형태로 진격
*제1군단에 제105전차여단(柳京洙, 35세 소장/소련군 중위 출신)이 배속
▲敵 제2군단(중장 金光俠/소련군 상위 출신)은 38선 동부지역에
제2사단(소장 李靑松 소장)은 춘천 정면으로부터,
제12사단(소장 전우/중공군 출신)과 제603모터사이클연대는 인제로부터,
제5사단(소장 김창덕/중공군 출신)은 강릉 정면으로부터 진격
*이와는 별도로 유격대인 제766부대(총좌 吳振宇)와 육전대인 제549부대는 강릉 남쪽의 正東津(정동진)과 임원진에 각각 기습 상륙
*그 밖에 소련군 상위 출신으로 제3경비여단장 최현(39세·소장), 제13사단장 최용진(39세·소장) 등, 소련군 중위 출신으로 제15사단장 박성철(38세·소장) 등이었다.
*중공군 출신은 포병사령관 중장 김무정(45세·팔로군 포병단장), 제6사단장 소장 방호산(사단 정치위원),
*병력은 중공군 중 조선계 병력의 투입에 의해 대폭 증강되었다.
즉, 1949년부터 조선계 중공군 4만 명이 무기와 장비 일체를 그대로 보유한 채 압록 강을 건너와 군복만 북한군의 것으로 갈아입고 남침의 제1파로 가세했던 것이다.
북한군 제1파의 병력 10만 명 중 40%가 중공군 출신이었다.
Comment
★6월은 민족사에 길이 기억해야 될 6.25 남침의 달이다.
★6월 25일 미명에 기습 남침은 시작되었고, 이로부터 3년 2개월간,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계속되었다.
★준비된 남침과 방만한 안일의 결과는 기울어진 저울이었다. UN 참전국과 미국의 참전이 없었으면 그때 대한민국은 남해바다에 가라앉았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남북한을 통털어 직간접적으로 6.25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집이 많을 것이다.(이산가족 이외에도)
★휴전 후 68년을 격한 오늘, 남북대화와 전쟁 종결, 그리고 한반도 평화협정이 논의 되고 있다.
★뉘라서 전쟁 종결과 평화를 마다 하겠는가? 그러나 300만 동포가 동포의 손에 죽어간 그 비극의 책임소재를 한번쯤은 공식적으로 짚은 연후 사과를 하는데서 부터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진정성이 결여된 가식적인 화해와 평화는, 자칫 해방 직후의 좌우익 투쟁과 혼란이 다시 야기될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이 아닌지 불안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