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존재론
3.1. 내재성(자연주의)
들뢰즈는 “내재성”의 철학자이며, 이는 “초월
성”과 대비되는 개념이고 초월성은 곧 초자연주
의이므로, 내재성의 철학이란 자연주의를 뜻합니
다. 자연주의란 초자연적인 것은 없다는 주장입
니다. 자연주의를 옹호하는 논변으로 자주 거론
되는 것이 오류가능성 및 오컴의 면도날 원리에
의한 논변과 인과적 폐쇄성의 원리에서 비롯된 논
변입니다.
오컴의 면도날 원리는 불필요한 사건/조건을 추
가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입니다. 반드시 그래야
만 한다고 하기 보단, 그럴수록 전체 진술이 사실
에 부합할 가능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일
종의 확률론적 논증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논
변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모든 진술은 인간 능력의 한계로 인해 오류일
수 있다(오류가능주의).
② 오류 가능한 진술이 참일 확률은 0이상 1미만
이다. (①의 함축)
③ 진술 A, B가 동시에 참일 확률은 A의 확률과 B
의 확률의 곱으로 표현된다.
④ 따라서 A와 B가 동시에 참일 확률은 A만 참일
확률보다 작다.(②와 ③에 의해. 대전제)
⑤ 모든 자연적 사건에 대한 진술의 집합이 A, 초
자연적 존재 진술은 B이다.(소전제)
⑥ A가 참이라면, 그와 동시에 B도 참일 가능성
은 상대적으로 적다.(④와 ⑤의 결론)
따라서 B가 참이라고 섣불리 가정해서는 안 된다
는 결론에 이릅니다.
인과적 폐쇄성이란 물리적 사건의 원인은 물리적
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열역학 제1법칙, 즉 “고립
계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하다”라는 것을 전제로
삼습니다.
① 세계의 물리적 사건은 에너지 작용이다
② 고립계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하다
③ 세계는 고립계이다.
④ 따라서 세계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하다
⑤ 초자연적 개입에 의해 물리적 사건이 일어난
다면 이는 에너지총합을 증대 시킨다
⑥ 초자연적 존재는 세계에 개입할 수 없다.(②
와 ⑤에 의해)결국 초자연적 존재는 설령 존재한다 해도 세계와 무관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세계에 초자연적 존재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
다.
들뢰즈가 니체주의자이고, 니체의 영원회귀가 열
역학법칙과 관련이 깊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쪽
이 들뢰즈의 논증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단, 초월
성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자연주의를 취
한 이상 모든 현상을 초월성의 도움 없이 설명해
내야 합니다. 들뢰즈는 이를 위해 “전체론”의 체
계를 구성합니다.
3.2. 개체화(전체론)
들뢰즈의 개체화 이론은 대상이 하나의 전체로서
그 구성요소들의 상호관계로부터 나타나서 유지
되며, 전체로서 대상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부분
들에게 나름의 힘을 가한다는 것으로서, 이는 곧
“전체론”과 같은 것입니다.
전체론은 “전체는 부분들의 합보다 크다”라는 테
제입니다. 그리고 부분들의 합에서 나타나지 않
는 전체의 새로운 속성이 나타나는 현상을 “창
발”이라 부릅니다. 들뢰즈 본인도 “내가 쓴 모든
것은 생기론적이며 - 적어도 나는 그렇기를 희망
한다
기호 이론을 구성한다”(대담
1972~1990, 단 얀 소바냐르그, 『들뢰즈와 예
술』 p.55에서 재인용)라고 한 바 있습니다. 엄밀
하게 생기론과 창발론이 같은 개념인지에 대해선
견해가 좀 있을 수 있지만, 들뢰즈가 생명에만 특
별한 지위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진 않으므로 창발
론의 의미로 생기론이란 발언을 했다고 보입니
다. 한편 전체는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부분들
에 피드백을 가합니다. 이와 같은 전체론의 테제
를 도식화 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창발한 전체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
째 구성요소들의 역동적인 상호관계로부터 나타
납니다. 따라서 구성요소들을 물리적 기반으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둘째 전체는 구성요
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입니다. 자율적이
란 압력, 스트레스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 정도
의 독립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구성요소들이
변화하더라도 전체가 이를 즉각 반영하여 변화하
진 않습니다. 이는 “구성요소들”이 “전체”에 비
해 상대적으로 유동적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진술
입니다. 들뢰즈는 이와 같은 자율성을 수학의 은
유로 표현했습니다. 즉 자율성은 변화에 반응하
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므로, 변화량 간의 비율
(dy/dx)을 통해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즉 “미분”은 일정 수준 자율적인 전체의 창발을
표현하는 은유입니다. 예를 들면, 세포(부분)는
계속 교체되지만 그때마다 매번 다른 사람(전체)
이 되는 건 아닙니다. 개별 국민(부분)은 출생과
죽음, 귀화 등으로 바뀌지만 그렇다고 국가(전체)
가 새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체
는 부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준안정
적 상태로서 개체화이론에서 이와 같은 준안정적
인 질서의 출현이 곧 개체화입니다.
3.3. 주름(무한히 많은 단계의 창발)
그런데 창발은 일회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들뢰
즈는 “N차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개체화를 설
명하면서 말미에 제가 붙일 예시만 봐도, 입자-세
포-인간-공동체라는 식으로 단계적 확장이 가능
합니다. 즉 어떤 전체는 더 큰 전체의 구성요소이
기도 합니다. 전체가 부분들의 합보다 크다는 전
체론의 테제를 도식화했듯이, 이러한 단계적인
창발은 아래와 같이 도식화 할 수 있겠습니다.
들뢰즈는 이와 같은 확장에서 “미분”과 “차원”이
라는 수학적 은유를 유지합니다. 수학적 은유를
매개로 아이디어를 확장해간다고 하는 게 더 맞을
지도 모릅니다. N차원 함수를 미분하면 N-1차원
이 나오므로, N차원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서 하위차원을 계속 추가해나갈 있는 거죠. 그
리고 N이 무한에 가깝다면, 위에서 도식화 한 그
림에서 각진 부분은 극한으로 가면서 매끈한 선으
로 보이게 될 겁니다. 아래의 그림처럼 말이죠.
즉 들뢰즈가 말하는 “주름”이란 수없이 많은 단
계의 창발을 통해 나타나는 전체에 대한 개념입니
다.
3.4. 차이와 반복
개체화가 창발이고 주름이 무한히 많은 창발을 뜻
하는 것이라면, 들뢰즈가 개체화의 메커니즘으
로 설명한 “차이와 반복”도 이와 같은 맥락 하에
서 개념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차이부터 보겠습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는
“차이 그 자체”이며 “존재론적 차이”입니다. 이
는 인식론적 차이와 대비됩니다. 인식론적 차이
와 존재론적 차이가 뭔지는 베이트슨의 “정보”
개념을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베이트슨은 정
보란 “차이를 만드는 차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구분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입니다. “차이
를 만드는 차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두 가지 차
이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풀어서
얘기하면, “인식할 수 있는 차이(인식론적 차이)
를 만드는 (존재론적)차이”로 구분됩니다. 즉 인
식론적 차이는 존재론적 차이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인식론적 차이가 훨씬 더 쉽게 보이기 마
련입니다. 가령 “이순신”과 “문어”가 무엇이 어
떻게 다른지를 나열하는 것은 “이순신”과 “원
균”의 차이점들을 나열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철학의 세계
“인식론적 차이”는 비교기준이 필요하고, 기준
없이는 차이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럼 들뢰즈가 말하는 전체론이라는 맥락에서 “존
재론적 차이”란 뭘까요? 자율적인 전체 단위에서
는 파악되지 않는 미세한 변화들입니다. 미세한
변화들이 누적되어 인식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인식론적 차이가 되는 거죠.
한편 들뢰즈는 차이가 반복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고 봅니다. 이 반복은 결국 니체의 영원회귀에서
온 개념이며, 차이와 반복 pp.112~113에 걸쳐
나오는 영원회귀에 대한 설명은 “생성하는 것에
대해 회귀가 그 유일한 같음을 구성”, “생성 자체
의 동일하게-되기”, “회귀는 유일한 동일성”, “회
귀하는 능력이나 영원회귀의 시험을 견뎌내는 능
력에 따라 선별하는 것” 등등입니다. 즉 자기 스
스로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며, 그 과정에서
시험하고 선별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전체론의
도식에서 볼 때, 이는 자기조직화/창발과 피드백
의 루프, 소위 “피드백루프”라고 부르는 것과 일
맥상통한다고 보입니다.
복잡계과학과 흥미로운 접점들이 몇 가지 더 있습
니다.
반복은 거듭제곱이며,이는 X•X•X•X•X•....•X•X=X^n으로 표현할 수있습니다. 거듭제곱은 차원을 의미하고, 이는 더 큰 전체
를 표현한 것입니다. 거듭제곱은 역량으로 일컬
어지기도 하는데, 따라서 높은 차원의 존재일수
록 더 큰 역량이 있습니다. 실제로 복잡계에서 더
큰 스케일의 네트워크는 보다 효율적으로 에너지
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전체로서 존속
할 수 있습니다. 또한 "f(x)=x^n"이라는 형태의
함수는 “척도 없는 함수”로서, 창발이나 자기조
직화 현상과 관련이 깊은 바라바시-알버트의 척
도 없는 네트워크scale-free-network를 표현하
는 형식이기도 합니다. 척도 없는 네트워크는 들
뢰즈의 “리좀”에 가장 가까운 네트워크 유형이기
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