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施(서시)
서시가 어떤 여인인지
알아보려면 먼저 臥薪嘗膽(와신상담)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춘추시대에는
越(월) 나라와 吳(오) 나라가 있었다.
삼국지에도 나오는
이 두 나라 중 오나라에는 闔閭(합려)가
왕으로 있었다.
기원전 496년
句踐(구천)이 월왕이 돼 자 오왕 합려는 군사를
이끌고 월나라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합려는
대패하고 오히려 발가락에 독화살을
맞고 죽게 된다.
오나라에는
합려의 아들 夫差(부차)가 왕위를
계승했다.
부 차는
3년 상을 치르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노라 다짐했다.
부차는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아버지의 원한을 되새겼다.
수년 뒤
부차는 월나라를 침략했다.
철저히 준비한
오나라 부차의 군대에 월나라 군대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월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하자 구천은 미인과 뇌물을 오나라 군대의
대장 伯嚭(백비)에게 보내 화평을 청했다.
오왕 부차는
결국 백비의 말을 들어 미인과 뇌물을
받기로 하고 화평을 맺었다.
월왕 구천 은
포로가 되어 오나라로 끌려갔고 월나라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구천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온갖 모욕을
받으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나라 부차가 병으로 자리에 드러눕자 포로로
와있던 그가 자진해 나섰다.
부차의
대변 맛을 보고 건강을 진단하겠다는
것이다.
손으로 변을 찍어 무릎을 꿇은 채
혀로 핥았다.
“곧 병세가 쾌차할 것입니다.
변은 향기가 나면 위험하고 악취가 나면
좋은 것입니다.”
부차는
구천의 정성에 감동했고 월나라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그러나
구천의 속마음을 꿰뚫 어본 伍子胥
(오자서)는 반대했다.
구천이
월나라로 돌아가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라 했으나
부차는 결국 구천을 돌려보냈다.
이렇게
구천은 포로생활을 마치고 3년 만에
돌아오게 되었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이를 악물었다.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며 잠도 자지 않고 쓴 쓸개를 기둥에 매달아 놓고
핥으며 언젠가 이 수모를 갚겠노라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여기서
나온 말이 臥薪嘗膽(와신상담), 즉 ‘땔나무 위에 누워 자고
쓸개를 맛보며 굴욕을 되새긴다’는 성 어이다.
또한 구천은
일반 백성들처럼 절제 있는
생활을 했다.
오나라가
궁 실을 축조하면 인 부와 재목을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부차의
환심을 사는 한편 부차를 무너뜨릴
계책을 세웠 다.
구천의 책사 范蠡(범려)는
부차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진해서 미인을
찾아 나섰다.
범려는 6개월의
노력 끝에 西施(서시)와 鄭旦(정단)을
선발했다.
그는 두 여인에게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 그리기와 가무,
방중술 등을 3년간 가르쳤다.
이렇게 길러진
서시와 정단은 오왕 부차에게 진상되었다.
특히 절세의 미녀 서시를 보고
반해 흠뻑 빠져들었다.
두 여 인이
함께 궁에 들어왔는데 서시만 오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정단은 울화병이 생겨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이다.
부차는 서시를 위해
姑蘇臺(고소대)라는 누각을 짓고 금은으로 장식한
館蛾宮(관아궁)을 지 었다.
그리고
響屧廊(향섭랑)이라는 복도를
만들기도 했다.
이 복도 아래에는
널빤지를 깔아 서 서시가 지나가면 소리가
울려 퍼지게 했다.
정사를 돌보다가도 향섭랑에서 서시 오는
소리가 나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또 관아궁 주변에는
翫花池(완화지)와 翫月池(완월지)라는
연못을 만들고
吳王井(오왕정)이라는
우물을 팠으며 서시의 이름을 따 西施洞(서시 동)
이라는 동굴까지 만들었다.
또 香山(향산)이라고 하여
향나무를 가득 심은 假山(가산)을 인공으로
만들었다.
靑龍舟(청룡주)라는
배를 호수에 띄워 날마다 서시와 타고 즐기며
정사를 소홀히 했다.
서시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한 부차의 행락은 결국 오나라의
멸망을 불러 오게 되었다.
월왕 구천은
잘 정비된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침략했다.
참패했고 구천은 서시를 데리고
월나라로 돌아왔다.
그런데
구천의 부인은 남편이 서시를 데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불안해졌다.
서시가 부차의
넋을 빼놓고 나라를 망하게 한 일을
잘 알기에 남편까지 홀릴까 봐
서시를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고 한다.
[출처] 西施(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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