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漢詩 한 수] 술잔과의 대화
“술잔아, 너 앞으로 나오너라. 이 늙은이가 오늘 몸을 점검해 봤지. 오래도록 갈증이 심하고 바싹 탄 솥처럼 목구멍이 마르는구나. 지금은 곧잘 졸음이 몰려오고 코골이도 우레 치듯 하지.” 너의 대답. “음주광 유령(劉伶)은 고금을 통틀어 통달한 분이지만, 술 취한 뒤에야 죽는다 한들 땅에 묻히면 그만 아닌가요.” “거 무슨 몹쓸 소리, 너를 지기로 여긴 게 한스럽다. 참으로 박정하구나.” "더구나 가무를 매파로 삼아, 평상시에 공모하여 해독 끼친 셈이로다. 하물며 원한은 크고 작든 간에, 좋아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법이요. 사물은 밉든 곱든, 지나치면 곧 재앙이 된다." “내 너와 약정하건대, 더 이상 머물지 말고 냉큼 물러나라. 내 힘으로 아직은 술잔 널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술잔이 재배하며 말한다. “물러나라시니 바로 가겠지만 부르시면 꼭 돌아옵니다.”
杯汝來前, 老子今朝, 點檢形骸. (배여래전, 노자금조,점검형해)..
甚長年抱渴, 咽如焦釜, 于今喜睡, 氣似奔雷. (심장년포갈, 인여초부, 우금희수, 기사분뢰).
汝劉伶, 古今達者, 醉后何妨死便埋. (여류령, 고금달자, 취후하방사변매).
渾如此, 嘆汝于知己, 眞少恩哉! (혼여차, 탄여우지기, 진소은재)!
更憑歌舞爲媒. (갱빙가무위매).
算合作平居鴆毒猜. (산합작평거짐독시).
況怨無大小, 生于所愛, 物無美惡, 過則爲災. (황원무대소, 생우소애, 물무미악, 과즉위재).
與汝成言, 勿留退退, 吾力猶能肆汝杯. (여여성언, 물류극퇴, 오력유능사여배).
杯再拜道, 麾之卽去, 招則須來. (배재배도, 휘지즉거, 초즉수래).
―‘술을 끊으려고 술잔이 접근치 못하게 경고한다(장지주계주배사물근·將止酒戒酒杯使勿近)’ ‘뜰에 스며드는 봄(심원춘·沁園春)’ 신기질(辛棄疾·1140∼1207)
*沁園春(심원춘) : 뜰에 스며드는 봄. *將止酒(장지주) : 술을 끊어리라. *戒酒杯使勿近(계주배사물근) : 술잔을 경계하니, 접근하지 말라.
*杯汝來前(배여래전) : 술잔아, 너 이리 오너라. *老子今朝(노자금조) : 이 늙은이가 오늘 아침. *點檢形骸(점검형해) : 몸을 점검해 보았느니라. *甚長年抱渴(심장년포갈) : 심히 늙은 나이에 갈증이 나서. *咽如焦釜(열여초부) : 목구멍이 뜨거운 솥 같이 타더니. *于今喜睡(우금희수) : 지금은 또 웬일인지 잠 자고 싶구나. *氣似奔雷(기사분뇌) : 코 고는 소리는 천둥소리 같도다.
*汝劉伶(여류령) : 너 애주가 유령은. *古今達者(고금달자) : 고금의 통달한 사람이라. *醉後何妨死便埋(취후하방사변매) : '취한 뒤에 죽으면 그 자리에 묻어 달라'했다더라. *渾如此(혼여차) : 정말 그렇다면. *嘆汝于知己(탄여우지기) : 아, 너는 친구에게.
*眞少恩哉(진소은재) : 진짜로 인정머리가 없구나! *更憑歌舞爲媒(갱빙가무위매) : 더구나 노래와 춤을 중매쟁이 삼아. *算合作平居鴆毒猜(산합작평거짐독시) : 평상시에 공모하여 독주로 해를 끼쳤구나. *짐독(鴆毒) : 짐새는 중국 남방에 사는 올빼미 비슷한 毒鳥로 그 깃을 술에 담갔다 마시면 사람이 죽는다고 한다. 해독이 매우 심한 경우를 흔히 짐독에 비유한다.
*況怨無大小(황원무대소) : 하물며 원한은 크고 작든. *生于所愛(생우소애) : 좋아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법이요. *物無美惡(물무미악) : 사물은 밉든 곱든. *過則爲災(과칙위재) : 지나치면 곧 재앙이 된다. *與汝成言(여여성언) : 너에게 말하거니. *勿留亟退(물류극퇴) : 머뭇거리지말고 물러가라. *吾力猶能肆汝杯(오력유능사여배) : 내 힘이 아직도 술잔 너 하나는 마음대로 할 수 있도다. *杯再拜道(배재배도) : 술잔이 두 번 절하며 아뢴다. *麾之卽去(휘지즉거) : 가라 하시면 곧 떠나리다. *招則須來(초즉수래) : 부르시면 반드시 또 오리다.
자신의 음주에 술잔의 음모가 개입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애먼 술잔을 희생양으로 삼은 동기가 자못 궁색하다. 시인이 건강을 이유로 단주(斷酒)를 선언하자 술잔이 대꾸한다. 평생 죽림에 묻혀 음주를 즐긴 유령, ‘술맛 품평의 1인자’라는 그도 ‘술 취해 죽어 땅에 묻히면 그만’ 아니던가요. 애주가(愛酒家)라면 이 정도 대범해야지요. 애당초 호응해 줄 걸 기대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술잔의 ‘박정’이 괘씸한 듯 시인이 일갈한다. ‘냉큼 물러나라.’ 한데 왜 하필 마무리가 ‘부르시면 꼭 돌아온다’인가. 금주는 물 건너간 모양이다. 이런 가사는 전통적 운문 행(行) 가르기보다 판소리 사설 조로 읽어야 제맛이 날 듯하다. ‘심원춘(沁園春)’은 곡명.
청대(淸代) 화가 왕석곡(王石谷)의 〈계당가취(溪堂佳趣)〉 (1692年作).
✵신기질(辛棄疾·1140∼1207) : 남송(南宋)의 사인(詞人). 자(字)는 유안(幼安), 호(號)는 가헌(稼軒), 역성(曆城: 今山東 濟南) 사람. 충의군마(忠義軍馬)를 모아 항금단체(抗金團體)에 참가했으나 실패(失敗), 남귀(南歸)하여 여러 지방의 안무사(按撫使)를 역임(歷任)하다가 조정 집권자의 의기(疑忌)를 받아 파출(罷黜), 20여년간의 상요의 촌락에서 한가롭게 지냈다. 그의 사에는 애국사상(愛國思想)과 시대정신(時代精神)이 반영(反映)되어 있다. 사의 격률에 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표출했으며, 문답식의 대화와 경사(經史), 저자백가(諸子百家)의 문장을 사에 인용하였다. 장단구(長短句)에 능하고 비장격열(悲壯激烈)하다. {가헌장단구(稼軒長短句)} 이십권(十二卷)과 {가헌사(稼軒詞)} 4권(四卷)이 있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이준식의 漢詩 한 首(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5년 03월 07일(금)〉,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