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1장 한을 품고 죽다 ③ |
순덕이 청년에게 닥친 變故(변고)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69년 7월26일, 무죄 확정 판결 다음날 김기철 씨가 대구교도소의 문을 나서는 장면을 <국제신보> 기자가 찍은 것이다. 일 년 두 달 스무하루 만에 다시 창살 바깥세상으로 첫발을 내딛는 청년, 셔츠 바람, 허리띠 없는 바지, 검은 운동화, 왼손엔 세터와 흰 종이가방을 들었다. 그 종이가방엔 연옥 같았던 447일 동안의 手記(수기)와 재판 기록이 담겨 있었다.
김 씨를 마중 나온 것은 그를 ‘살인귀’, ‘불량배’, ‘해병대의 특수교육 경험을 살려 하수인에게 살인 방법을 가르쳐준 國卒(국졸)의 실업자’로 불렀던 기자들이었다. 김기철 씨는 그들에게 웃어 보였다. 그 수줍어하는, 앳된 순진한 웃음이 카메라에 잡혔다. 김 씨는 “사회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기자의 멍청한 질문을 받고 ”양심대로 살아가면 누명은 언젠가 벗겨질 것이다“고 대범하게 대답했다. 다만 그를 이 사건에 물고 들어간 친구 김금식에게는 원망을 돌렸다.
이날에는 김기철 씨 스스로도 이것이 시련의 끝이 될 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다.
김기철 씨는 1938년 5월24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났다. 아버지 김우근 씨는 키는 작지만 당차게 생겼고 어머니 김필선 씨는 보통남자만큼이나 허우대가 컸다. 밀양군 무안면이 고향인 김우근 씨는 기철 씨 출생 몇 해 전 부산으로 이사, 해방 뒤엔 한국석유저장회사(코스코)의 사상 저유소에 들어가 줄곧 노조 분회장으로 일했다.
김기철 씨는 4남 1녀 가운데 셋째였다. 기철 씨 형제는 ‘장사 형제’로 불릴 정도로 모두 건장하고 주먹 힘도 세었다. 특히 큰형 김이만 씨는 자유당 시대 주먹 하나로 초량, 범천동 일대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다. 기철 씨도 천부의 건장한 몸집을 갖고 있었으나 말수가 적고 부끄럼을 잘 타는 ‘순덕이’였다고 그의 어릴 적 친구들과 가족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여자 서너 명만 있어도 얼굴을 못 드는 아이였다”고 형 이만씨는 말했다.
기철 씨는 야간 중학교를 졸업한 뒤 집에서 놀다가 나이 열여덟에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다. 가난한 집안에 더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또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하려고 일찌감치 군 복무를 자원한 것이었다. 기철 씨가 제대한 3년 뒤인 1963년 그의 가족은 초량에서 부산진구 범천2동 高地帶(고지대)로 이사했다. 기철 씨가 자기보다 세 살이 더 많은 김금식 씨와 운명적인 인연을 갖게 된 것도 이때였다. 금식 씨는 기철 씨 옆집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기철 씨는 범천2동에 가자마자 친구가 가진 棋院(기원)의 관리 책임자로 취직, 기원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자립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장기와 바둑을 잘 두었는데 바둑은 초단 실력이었다.
1967년 9월 기철 씨는 어느 시내버스회사의 配車員(배차원)으로 취직, 부산진구 개금동 주차장에서 일하게 됐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 직장다운 직장으로는 처음 가져보는 일자리였다. 워낙 성실한 기철 씨는 얼마 안 가서 결혼 자금에 보탤 만한 목돈을 모았다. 그러나 이 돈을 친구에게 빌려 주었다가 떼어버렸다. 기철 씨는 그러나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키 173센티미터, 몸무게 76킬로그램의 당당한 대장부로 성장해 있었다. 너무 어진 것이 흠이긴 했지만 자신의 몸 하나는 어떤 逆境(역경) 속에서도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앞길이 창창할 것 같은 그에게 운명의 손길이 뻗쳐온 것은 1968년 5월4일 오후 9시쯤이었다.
“나는 저녁밥을 먹고 집 앞에 서 있었다. 이때 남자 다섯 명이 나타나 다짜고짜 나의 손을 비틀었다. ‘왜 이러십니까’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나의 양팔을 뒤로 젖힌 채 400미터쯤 끌고 갔다. 그들은 나를 지프차에 밀어 넣고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낯선 건물(뒤에 부산지검인 줄 알았다)에서 내려 사무실 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나의 앞에 앉은 사람이 ‘내가 김태현 검사다’고 하더니 대뜸 ‘김금식을 아느냐?’고 물었다. ‘이웃에 살아 잘 압니다’고 대답했다. ‘너 금식이와 함께 1964년 12월께 범천공원에서 아베크 남녀가 가지고 가는 트랜지스터 라디오 한 대를 뺏어간 일이 있지?’라고 그는 물었다. ‘누가 그럽디까?’ 나는 따지고 들었다. ‘금식이가 그러더라’고 검사는 말했다.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으나 검사는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고 호통 쳤다. 나는 시종 ‘그런 일이 없다’고만 되풀이했다. …다음날 아홉시 나는 수갑을 차고 교도소로 갔다. 이것이 몸서리쳐지는 獄苦(옥고)의 첫날이 될 줄이야…”(<부산일보> 1969년 7월29일)
廢人(폐인)으로 변해간 과정
연옥 같았던 447일의 시련을 견디고 살아 돌아온 김기철 씨는 자기 때문에 廢家(폐가)가 되다시피 한 큰형 이만 씨의 집(범천2동 고지대)에 몸을 맡겼다. 어머니 김필선 씨는 기철 씨의 출감 넉 달 전 53세에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셋째 아들이 살인범이란 말을 듣고 기절한 뒤 한 해 가까이 시름시름 앓다가 아들의 無罪(무죄) 확정을 보지도 못하고 끝내 저승으로 가버린 것이었다.
“기철이가 나오고 죽어야지….”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었다.
“재판정에는 한 번도 못 가시게 했지요. 어머니는 매일 드러누워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계셨는데 그일 뒤로는 창피하다고 매일 바다낚시만 다니셨고 사람 만나기를 꺼리셨지요. 기철이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 아이가 닭 모가지도 비틀 줄 모르는 남자라는 것을 알았겠지만 워낙 시끄럽게 신문들이 몰아붙이니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기철이가 살인범이라고 신문들이 너무나 자주 짖어대니 나중엔 친형인 저마저 세뇌를 당했는지 ‘동생이 혹시나…’하는 생각까지 갖게 될 정도였으니까요.”
김이만 씨는 “이웃에서 동정하는 말을 건네는 것조차 싫더라”고 했다. 자꾸만 “아무리 그래도 너의 동생은 사람을 죽인 놈이다”고 이웃의 눈들이 말하는 것 같더란다. 이만 씨는 고물상을 하고 있었는데 동생 뒷바라지에 바빠 장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기철 씨의 형수 박두례 씨는 매일같이 면회를 간다고[당국에선 가족과의 면회까지 금지시켜 私食(사식)만 넣어주고 돌아오곤 했다] 집을 비워 안살림도 엉망이 되어갔다. 동생 수발에 집의 기둥뿌리가 뽑혀버린 이만 씨였지만 동생의 무죄 확정 뒤에도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제기하지 않았다.
“무료 변론해준 변호사님의 충고도 있고 해서 저는 단념했습니다. 살아 나온 것만도 다행이다. 돈은 벌면 된다고 가족들을 진정시켰지요.”
이만 씨는 동생을 여섯 달 동안 자기 집에 꼼짝 못하게 붙들어두고 개고기와 한약을 먹이며 補身(보신) 정양시켰다. 안온한 분위기를 만들어 447일 동안의 모진 진통을 잊게 하려 했다. 그러나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기철 씨는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변화는 먼저 외모에서부터 왔다. 강건했던 체구는 출소 때 벌써 크게 축나 있었는데 보신의 효험도 없이 야위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오른쪽 어깨가 비스듬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목의 근육도 비틀어지고 뻣뻣해져 마음대로 젖히거나 돌릴 수 없게 됐다. 목을 젖히려면 윗몸 전체까지 젖혀야 했다.
보이지 않는 변화는 더 심한 것이었다. 체력이 떨어져 무거운 것을 들거나 질 수 없게 됐다.
“군대 삼촌이 휴가 오면 그 굵은 팔뚝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기도 했었죠. 그런데 그 억센 힘이 빠지더군요. 팔씨름을 하자고 졸라 손을 잡아보면 아귀힘이 해가 다르게 약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조카 김창식 씨의 말이다. 기철 씨의 바둑 실력도 약해졌다. 질 때마다 정신 집중이 잘 안된다고 투덜댔다. 이것은 그의 정신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퇴영의 한 조짐이었다. 또 다른 가장 불길한 조짐은 그가 외부와의 접촉을 끊기 시작한 점이었다. 조카 창식 씨는 “출소 뒤에는 삼촌이 바깥에 나가 술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일이 끝나면 일찌감치 집에 돌아와 방안에서 홀짝홀짝 혼자 마시는 酒量(주량)이 날로 늘어갔다. 창식 씨의 눈에는 삼촌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비쳤다.
“그 일 뒤에는 친구들도 피하더군요. 골목에서 마주쳐 그 형에게 인사를 해도 외면하곤 해서 서운하게 생각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고생했지요’란 위로의 말조차 듣기에 진절머리가 났었지 않나 짐작합니다.”(기철 씨의 한동네 후배인 이양우 씨의 말)
“신경질을 내기도 하더군요. 형에게 반항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동생인데 가끔 대들기도 하는 거예요. 때로는 좀 멍해져 보이기도 합디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에 절도가 없고 반응이 느려지기 시작했습니다.”(김이만 씨의 말)
큰형에게만은 가끔 연옥 같았던 447일 동안의 기억을 털어놓았다.
“형님, 지금 생각하니 내가 여섯 번 죽었다가 깨났네요.”
“자다가 생각해도 괘씸하다”
원래 말이 느린 기철 씨는 떠듬떠듬 악몽을 되살려갔다. 미리 짜놓은 것 같은 각본의 배역에 기철 씨를 끼워 넣는 우격다짐 수사, 친구의 터무니없는 모함, 결백을 아무리 외쳐도 묵묵부답인 벽 같은 사람들, 자다가 끌려 나가 당한 한밤중의 모진 신문, “저놈 죽여라!”는 현장 검증 구경꾼들의 저주, 생전 얼굴도 모르는 청년이 나타나 “네놈이 이렇게 죽이라고 시켰지 않았느냐?”고 대들던 장면, “너를 재우면 우리가 혼나게 돼 있다”면서 신문을 받고 들어와 꾸벅꾸벅 조는 그를 차고 때리던 감방 동기생들, 믿었던 판사가 자신의 목숨을 요구했을 때의 허무감, “자다가 생각해도 괘씸하다”고 법정에서 호소할 때 자신을 향한 그들의 싸늘한 웃음, 집요하게 그의 死刑(사형)을 요구하던 검사가 패배가 확정되자 던진 선물―“이 사건의 진범은 바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저들이다. 대한민국의 全수사력을 동원한다 해도 다른 진범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는 영원한 의혹의 꼬리표. 이런 소름끼치는 사연들을 큰형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보았자 값싼 동정 이외에 별다른 소득이 없을 것이라고 기철 씨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울화는 입을 통해 배출되지 못하고 안으로 곪을 것이었다.
기철 씨는 형 집에서 몇 달 쉬었다가 여수 뱃머리 근처의 하역회사 검수원으로 취직했다. 공교롭게도 이곳은 근하 군의 시체가 버려진 시청 뒤 해안통과 붙어 있는 곳이었다. 기철 씨가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잊고 싶은 기억들이 망령처럼 되살아나 그를 괴롭히지 않았을까?
여기 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기철 씨가 檢數員(검수원) 시절 때 작업 현장에서 찍은 것이다. 교도소를 나온 지 1년쯤 지났을 때였다. 교도소를 나올 때의 사진과 비교하면 5, 6년이 흐른 것 같은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오른쪽 어깨는 축 처져 있고 얼굴에선 1년 전의 그 천진한 웃음이 달아나버렸으며 탄력이 빠진 것 같은 안면 근육은 그를 31세의 한창때 청년답지 않게 無力(무력)하게 보이게 하고 있다. 불과 1년 時差(시차)의 두 사진에서 우리는 중요한 무엇이 그에게서 빠져 달아났음을 感知(감지)할 수 있다. ‘순해빠진’ 이 청년에게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는 운명의 그림자를 그가 눈치 채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정신병원에 입원
근하 삼촌 최형욱 씨는 1년2개월 만에 ‘조카를 죽인 흉악범’의 누명을 벗고 無罪(무죄) 석방되자 곧 부산을 떠났다. 환경을 바꾸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신문기자가 구성한 여동생(근하 어머니)의 手記(수기)라는 것이 ‘나는 오빠를 저주한다’는 제목으로 형욱 씨에 대한 惡談(악담)으로 차 있었지만 그는 동생의 처지를 이해했다고 한다. “그들(동생과 매부)도 나와 같은 피해자란 것을 알고 나왔기 때문에 아무런 유감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몇 신문기자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근하 아버지를 밀수로 致富(치부)한 인물, 형욱 씨를 共犯(공범)이라고 몰아붙였으며 검찰 수사요원들은 근하 아버지와 형욱 씨 사이를 이간질시켰으나 교도소에 있었던 1년 남짓한 세월 동안 형욱 씨는 기자와 수사관들을 ‘믿지 않는 지혜’를 터득했고 근하 가족들도 형욱 씨에 대한 오해를 이미 풀었던 것이다.
형욱 씨는 그러나 부산에서 낯익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싫었다. 상대방이 아는 체를 해도, 안 해도, ‘욕봤다’는 인사를 해도, 안 해도 꺼림칙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뭔가 다르게 보이기만 했다. 破紙(파지) 수집상을 하면서 익혀둔 안면들이 이젠 귀찮기만 했다. 6·25 때 월남하여 한번 失鄕民(실향민)이 됐던 그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낯선 사람들만 있는 他鄕(타향)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젖먹이 딸을 데리고 대구로 이사를 가버렸다.
기철 씨가 검수원으로 취직, 연옥 같았던 그 악몽에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을 때 전경렬 씨에게도 변화가 왔다. 암자에서 정양 중인 그에게 入營(입영) 영장이 나온 것이었다. 그도 도저히 군복무를 할 수 있을 만한 건강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입영 연기를 하지 않고 입대했다. ‘막가는 심정으로’ 이를 악물고 그는 군복을 입었다. 이제 그의 인생행로는 결정적으로 바뀌어버렸음을 그는 알았다. 재수를 한 뒤 다시 국립대학교 入試(입시)에 응시한다는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대학 입학의 꿈은 포기되었다.
그는 훈련 뒤 일선에 배치됐다. 여기서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만났다. 그는 석 달 만에 병이 재발, 광주의 군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두 달 뒤 그는 다시 일선으로 돌아왔다.
“저는 제대될 줄 믿었습니다. 부대 복귀 명령을 받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앞으로 두 해 반을 어떻게 보내나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하더군요. 그러나 결정적으로 군대 생활이 저를 구해주었습니다.”
그는 부대에 돌아온 뒤부터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궂은 일, 사역, 보초 근무를 자원했다. 한밤중에 혼자서 총을 들고 휴전선을 응시하고 있을 때가 그는 가장 좋았다. 서서히 그의 마음이 정돈돼가는 것을 느꼈다. 규칙생활, 단련, 고독이 놀라운 치료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귀신같은 잡념이 물러가고 평화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그의 마음속에 깃들기 시작했다. 그는 많이 건강해진 몸으로 제대를 할 수 있었다. 다만 군에서 무릎을 걷어채어 양쪽 다리에 관절염이 생긴 것이 흠이었는데 이런 육체적 고통에 비할 수도 없는 ‘속골 쑤시는 신경성 아픔’이 많이 가신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제대 뒤 그는 곧 어느 제조업체의 경리사원으로 취직, 자립의 길에 들어섰다.
여자도 떠나가고
김기철 씨는 검수원으로 한 해 남짓 일하다가 1971년께 그 자리를 그만두어버렸다. “몸이 아파 드러눕는 날이 많아 결근이 잦았다”고 형 이만 씨는 말한다. 뚜렷한 病名(병명)도 없이 ‘머리가 쑤신다’, ‘목과 가슴이 조인다’고 괴로워했고 그 아픔을 잊으려고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마시곤 했다. 그 뒤로도 기철 씨는 불량주택 철거 공사장의 경비나 건축 공사장의 가벼운 일을 맡아 했으나 안정된 직장을 좀처럼 구할 수 없었다. 기철 씨의 한동네 후배인 강상만 씨는 범천2동 무허가주택 철거 공사장의 경비원으로 일하던 ‘기철 형’을 출소 뒤 처음 만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기가 푹 죽어 있더군요. 옛날에도 결코 빠리빠리하지는 않았으나 듬직한 체구에 저력이 있어 보였는데 사람이 작아진 것 같고 야간 경비도 제대로 감당 못할 만큼 쇠약해 있었습니다. 몸이 완전히 갔더군요.”
이즈음, 그러니 1972년 무렵 기철 씨는 한 여자와 만나게 된다. ‘규원이(가명) 엄마’라는 이웃집 과부였다. 규원이 엄마는 기철 씨보다 나이가 여섯쯤 많았다. 그녀의 죽은 남편은 형 이만 씨의 친구였다. 이 여자와 기철 씨는 가깝게 지내다가 동거를 시작했다. 기철 씨의 가족들은 나이 차이와 그 과부가 죽은 남편 사이에서 난 남자아이를 데리고 사는 점을 들어 동거를 말렸으나 기철 씨는 막무가내였다. 기철 씨는 범천2동 산동네에 구멍가게를 펴놓고 있던 과부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기철 씨는 5년간의 동거 끝에 이 여자와 헤어졌다. 여자가 먼저 서울로 이사를 가는 행동으로 헤어지자는 뜻을 나타냈다. 기철 씨는 두서너 번 서울로 따라가 계속 같이 살자고 졸랐으나 거절당했다.
왜 두 남녀가 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김이만 씨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사이가 매우 좋았는데 차츰 벌어지더군요. 그 이유는 아마도 기철이나 그 모진 신문을 받은 뒤로는 그것을 못 쓰게 된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낳아본 여자와 5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출산이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도 모두 그놈들 때문이죠. 기철이가 술에 빠지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술 말고는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
기철 씨의 불능설은 옛 친구들 사이에도 쫙 퍼져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원인이 연옥 같았던 447일 동안의 고통 때문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동거 생활을 청산한 기철 씨는 1978년 무렵 산 중턱에서 다시 범천2동 33통 산 꼭대기 부근으로 거처를 옮겼다. 부산에서 주거지의 高度(고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곧 생활 정도가 고도에 반비례하여 낮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기철 씨가 이사 간 곳은 ‘안창 마을’로 불리는 유명한 빈민 동네였다. 오륙도와 아치섬, 영도 및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해발 200미터 가량의 산기슭에 성냥갑들처럼 무허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은 마을이다. 기철 씨가 15만원에 산 2평짜리 집은 이 마을에서도 맨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멘트를 조잡하게 이겨 붙여 벽을 만들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온통 회색 칠의 단칸방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거의가 공사장 노무자, 신발 공장 노동자, 행상, 외판원들이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 병든 사람, 파산한 사람들도 많아 낮에 이곳을 지나면 잠옷 차림의 病色(병색) 짙은 남자들이 거리에 나앉아 있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눈에 뜨인다.
기철 씨는 이곳으로 옮긴 뒤 동래구 거제동에 있는 봉제공장의 경비원으로 취직했다. 안창 마을에 사는 정 모 씨를 그 공장에 소개, 두 사람은 경비원으로 함께 일하게 됐다.
1978년 기철 씨는 큰형에게 “아들을 하나 달라”고 했다. 아이를 만들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그렇게 졸랐다. 이만 씨는 “골라 가라”고 했다. 기철 씨는 평소부터 점찍어 두었던 듯 이만 씨의 둘째 아들인 창식 씨를 선택했다.
‘내가 죽으면 제사라도 지낼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라고 기철 씨는 중얼거렸다. 그의 입에서 죽음이란 말이 나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창식 씨는 친아버지 집에서 살면서 자주 양아버지가 된 삼촌을 찾아뵙고 말동무가 되어주곤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