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과제를 내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과거사를 길게 써낸다. 스무 살 밖에 안 되는 1학년 꼬맹이들이 뭔 과거가 그리도 많은지 어떤 학생은 심지어 10호 글씨로 빽빽하게 A4지 18매를 써내기도 했다. 학생들에 따르면 ‘나는 나의 과거, 혹은 과거의 총체’가 된다. 질문은 철학적인데 답변은 역사적이다. 입장을 바꿔서 누가 50대 중반인 나한테 ‘너는 누구냐’는 고약스런 질문을 던지면 나 역시 일단 내가 살아온 과정을 더듬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나’란 ‘내가 나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엮어서 만든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무수한 사건들과 관찰들 그리고 거기서 받은 느낌들을 소재로 내가 만들어낸 스토리가 바로 ‘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스토리로서의 나’는 확실성 또는 절대성이라는 면에서 결함이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사도 있고, 왜곡해서 기억하는 과거사도 있을 것이다. 동일한 소재라도 관점에 따라 이야기 구성이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
특히 관점은 ‘나’의 내부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 이미 확보되어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관점은 남의 관점인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사회적 학습을 통해서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걸 가지고 ‘나’를 규정하고 평가한다. 가령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스토리로서의 나’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입신양명은 ‘나’의 목표였으며 ‘나’의 청소년기를 좌우했고 ‘나’의 들뜬 보람인 동시에 깊은 상처였으며 ‘나’를 평가하는 잣대였다.
그렇게 규정된 내가 진정한 나일까. 아니, 우리는 진정한 ‘나’를 파악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아니, 진정한 나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출발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토리에 불과하고 그래서 ‘나’는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는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존재다. 스님들은 이 의심을 붙들고 한 걸음 더 성큼 나아간다. ‘나’는 내가 꾸며낼 수 있는 가능한 이야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 이야기들 너머에 있으며, 그 너머에 가서 보면 ‘나’는 없다고 말한다.
있기는 한데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없으니 세상 만물이 다 없는 것이고 그래서 육조대사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서 보고 왔다는 데야 할말이 없지만 나 같은 범속은 그렇게 높은 경지까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여기 이렇게 있고 만물은 저기 저렇게 있다. 스님들은 중생들을 향해 걸핏하면 ‘나’를 버리라고 하지만 내가 물건이냐 버리게. 그러므로 ‘나’에 대한 나의 의심은 ‘불확실한 스토리’ 수준에서 종결된다.
그러나 이 수준의 의심만으로도 우리는 ‘확실하고 절대적인 나’로부터 기인하는 수많은 과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령 비교적 다혈질에 속하는 나는 이 의심을 가지고 분노를 다스린다. 분노는 ‘짧은 광기(short madness)’라고 할 만큼 강렬한 감정이어서 분노의 배경에는 반드시 강력하고 절대적인 ‘나’가 존재한다. 분노를 제어하려면 분노의 기초인 ‘나의 절대성’부터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화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면 도통한 스님의 말투를 흉내 내서 내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화를 내는 것이 누구냐. 네가 화를 내는 것이냐, 네가 쓴 스토리가 화를 내는 것이냐. 화가 네 안에 있느냐 네 밖에 있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