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우외환>
- 이반 2세의 초상 -
1353년 시메온이 죽자 그의 동생 이반이 이반 2세로써 대공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고 킵차크 칸국에 대항하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꾸어 사라이에 복종하고 리투아니아에 대항했다. 그러나 그는 1359년 겨우 9살 된 아들 드미트리만을 남기고 병사했다. 꼬마 대공이 즉위하자 그동안 모스크바가 승천하는 걸 두눈 뜨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주변 공국들은 이 기회에 모스크바를 손봐주기로 했다.
가장 먼서 나선 것은 수즈달 공국이었다. 수즈달 공작 드미트리는 재빠르게 사라이에 손을 써서 이반이 죽은 직후 자신이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국측도 기민하게 움직였고 결국 1362년 러시아의 대표 격인 블라디미르 대공위는 다시 모스크바 공국으로 돌아갔다. 1366년 그는 수즈달 공국의 드미트리와 화친, 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의 목조 성벽을 돌로 개축하면서 모스크바의 내정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했다.
-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
이는 옳은 결정이었던게 바로 확인됬다. 1368년, 즉 성벽을 돌로 바꾼 이듬해 트베르 공국의 사주를 받은 리투아니아 군대가 모스크바를 공격한 것이다. 이들은 모스크바의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모스크바 주변을 휩쓸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모스크바는 두차례 더 알기르다시의 공격을 직접 받아내야 했다. 더군다나 트베르 공 미하일 2세가 사라이에 로비를 벌여, 1371년 드미트리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블라디미르 대공이 되었다. 그러나 1372년 모스크바에 대한 세번째 공성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리투아니아는 뤼베츠크(1) 근처에서 7년간의 평화협정을 맺고 철수했다. 그러자 끈 떨어진 조롱박 신세로 전락한 미하일 2세도 1375년 블라디미르 대공위를 뱉어내고 모스크바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제 모스크바 공국은 안정화되었고, 러시아 공국들이 드미트리에게 불만을 품을지 언정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자 드미트리는 오랜 러시아의 숙원을 풀기로 결정했다. 바로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지는 것이었다.
<짧은 해방>
- "이제 때가 되었다!" -
이무렵 킵차크 칸국은 내란으로 혼란스러웠다. 마마이(2)라는 인물이 실권을 장악하고 칸을 갈아치우는 일이 일상 다반사였다. 드미트리는 이런 꼴을 지켜보다가 조공을 끊기로 결정하는 한편, 1376년, 드미트리는 자신의 장인이자 과거의 적 수즈달의 드미트리와 함께 과거 볼가 불가리아가 존재했던 볼가강 유역에 대한 침공을 감행했다. 아산이라는 부족장이 이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모스크바와 수즈달의 연합군은 말그대로 과거 볼가 불가리아로 불렸던 이 지역을 말그대로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 "바보 같으니. 도대체 병법을 알기는 하는거냐!" -
분노한 마마이는 1378년 모스크바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하지만 1378년 8월 11일, 보자강 전투에서 킵차크 칸국 군대는 이미 강둑에서 활 모양 대형으로 대기하던 모스크바 공국 군대를 공격하기 위해 도강하다가 역습을 받고 다수가 익사하고 사령관까지 죽는 참패를 당했다. 적이 멀쩡하게 이미 진을 친 상황에서 도강을 한다는 손자가 보면 뒷목 잡을 일을 벌였으니 패배하는 건 당연한 것이긴 했지만.
그러자 킵차크 칸국의 실권자 마마이는 대노하여 1380년, 대략 5만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모스크바 침공에 나섰다. 당시 그는 제노바 용병대와 리투나이아의 요가일라(3)까지 끌어들였다. 말그대로 모스크바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원정이었다. 물론 모스크바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지금이야말로 타타르 이교도들을 몰아낼 기회라며 러시아 공국들을 선동했다. 그 결과 드미트리는 거의 모든(4) 러시아 공국들과 연합하고, 그들의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양 군은 결전지로 정해진 쿨리코보에 집결, 9월 8일에 결전을 벌였다.
- "신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니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
전투는 치열했다. 어떤 연대기에서는 킵차크가 30만, 러시아가 15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했다고 기록했지만 확실히 이는 과장이었다. 단 상당히 많은 수의 병력이 동원된 건 확실했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각종 전설이 생겨났다. 그 중 한 전설에 의하면 전투가 시작됬을 당시 당시 러시아 측에 종군하던 수도승 알렉산데르 프레스베트(5)가 마마이의 전사 한명과 일기토를 벌였고, 서로가 서로를 찔러죽였다고도 전해진다. 또한 드미트리 자신은 적을 속이기 위해 한 젊은 귀족과 옷을 바꿔입었는데, 그 젊은 귀족은 당연히 타타르 군의 표적이 되어 결국 전사했다. 뭐 드미트리 자신도 전투를 벌이다 부상을 입고 쓰러져 시체더미속에 파묻혀버리기도 했다. 참고로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가 매복해있던 러시아군 최후의 예비대가 오후에 킵차크 칸국군을 기습공격하면서 러시아측의 승리로 끝났다. 마마이는 크림 반도로 도주했다.
- "Freedom!" -
라쟌 공작은 이 결과를 보고 얼른 모스크바와 강화 조약을 맺으며 굽신거렸고 전투 이틀 후 현장에 도착한 요가일라는 얼른 철수했다.(6) 이제 러시아 공국들은 해방된 듯 했다. 이 일로 인해 드미트리는 돈강의 드미트리, 즉 드미트리 돈스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긴, 타타르를 물리친 인물에게 이런 칭호는 당연해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타타르의 멍에를 쓰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 같아보였다. 적어도 그 때 까지는...
<그동안 재밌었지?>
당시 킵차크 칸국 안에는 백장 칸국이라는 속국이 존재했다. 일종의 하위 칸국이었던 백장 칸국의 당시 칸은 우루스였는데 티무르의 후원을 받은 조카 토크타미쉬에 의해 1378년에 쫓겨났다. 토크타미쉬는 아예 킵차크 칸국 전체를 먹어버리려고 하였는데, 마마이가 쿨리코보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군대를 움직여 사라이를 점령하고 킵차크 칸국의 칸이 되었다. 마마이는 그에게 패배하고 도망치다가 제노바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토크타미쉬는 킵차크 칸국 전체를 장악한 후 러시아 공국들에게 충성 맹세를 강요했지만, 쿨리코보 전투의 승리로 기세등등했던 모스크바 등 러시아 공국들은 이를 무시했다.
- "저기 머나먼 동방 어느 나라 속담에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간다는 말이 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보여주마!" -
토크타미쉬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행동에 돌입했다. 타타르 군대는 그들의 악명이 아직 사라진건 아니라는듯이 여러 도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장인인 수즈달의 드미트리가 항복하면서, 예상 외로 아직 호랑이의 이빨이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드미트리는 병력을 모으기 위해 모스크바를 비웠다. 그러나 그 사이 토크타미쉬의 군대가 모스크바를 포위했다.
그러나 이미 돌성벽으로 개조된 모스크바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 때 토크타미쉬는 꾀를 냈다. 그는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자신은 싸울 마음을 포기했으며, 다만 모스크바 성 안에 소수의 인원과 함께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놀랍게도 모스크바 시민들은 이 계략 냄새 폴폴 나는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그 결과? 성 안에 들어오자마자 토크타미쉬와 그 수행원들은 성문 경비병들을 죽이고 성문을 장악했다. 당연히 킵차크 칸국의 군대가 쏟아져들어왔고, 모스크바는 불바다가 되었다. 2만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 불타는 모스크바 -
결국 드미트리 돈스코이도 항복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토크타미쉬는 그가 가지고 있던 대공위등은 그대로 인정했지만 그의 아들을 인질로 끌고 갔다. 타타르의 멍에가 다시 씌워진 것이었다.
- "토크타미쉬. 니놈이 뭘 잘못 쳐먹었나보구나. 내가 누군지 잊었나 보지?" -
하지만 이후 토크타미쉬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자신의 후원자이자 물주, 티무르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당연히 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는 실패했고, 티무르와 킵차크 칸국은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의외로 그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티무르가 킵차크 칸국과 토크타미쉬에게 자비를 베풀어 당장 티무르가 쳐들어오는 일은 없었지만 덕분에 모스크바는 토크타미쉬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그래서일까, 1389년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39살의 나이로 죽을 때 후계자로 18세의 장남 바실리를 지명하고, 그 바실리가 바실리 1세로써 모스크바 대공이 되었을 때 사라이의 승인을 전혀 받지 않았음에도 킵차크 칸국은 이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1) 오카강 근처에 있던 러시아의 요새
(2) 그는 베르디베크 칸의 사위였다.
(3) 야기우웨어로도 불리는 그 인간 맞다. 다만 요가일라는 당시 대공위를 두고 벌어진 내란때문에 결전지로 정해진 쿨리코보까지 진격하는데 시간이 지체되었다.
(4) 대부분의 러시아 공국들이 이에 응했지만 리투아니아에게 복속된 벨로루시 지역의 러시아 공국들(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존재들), 모스크바의 합병 위협을 받으면서 동시에 킵차크 칸국의 공격을 강하게 받은 라쟌 공국, 그리고 니즈니 노브고로드는 응하지 않고 오히려 킵차크 칸국의 편에 섰다.
(5) 그는 당시 존경받던 러시아의 성직자 세르기우스가 보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이 분명치 않은데 세르기우스는 평화주의자였다고 한다. 뭐 모스크바의 권위를 인정하는 편이었다는 주장도 있어서 불명확하긴 하지만.
(6) 다만 이 전투에서 동맹이 몰락했음에도 요가일라는 적들을 누르고 리투아니아의 대공이 될 수 있었는데 이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숙부였던 켕스투티스가 리투아니아의 전통적 원칙에서 가장 계승서열이 높았던 요가일라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요가일라는 원칙주의자인 이 완고한 숙부와 사이가 틀어지고, 내란은 2라운드에 돌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