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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게시판 유럽 독일연방(German Confederation, 'the Bund')
이름짓기귀찮아 추천 0 조회 186 22.10.22 23:17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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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2.10.22 23:49

    첫댓글 49년 프랑크푸르트 50년 에어푸르트에서 통합된 국가가 탄생할 가능성이 있긴 했는데 본질적으로 71년 생긴 제국보다 더 진보된 체제도 아니고 권력 기반이 부족해 취약하기만 했더랬죠

  • 22.10.22 23:51

    연방이 아무리 허울뿐인 체제라 해도 최소한 독일 소국들의 보호장치 역할은 잘 수행했다고 봐야겠죠

  • 작성자 22.10.23 13:52

    왜곡된 독일제국이 아니라, 3월 혁명을 통한 부르주아 자유주의 독일 민족국가가 등장했다면? <- 이건 전통적인 독일사 학계의 떡밥이지만 현실성도 없고 정작 실존한 독일제국을 도외시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 22.10.23 12:14

    빅토리아 3에서 독일연방 영토로 통합된 국가가 나오면 세계정복도 가능하겠는데요 (...)

  • 작성자 22.10.23 13:53

    빅2 PDM이었나 독일 연방이 형성가능한 국가인 모드가 있었던 거 같긴 합니다. 사실 대독일만 돼도 전유럽과 맞짱떠도 되는 수준이니..ㅋㅋ

  • 22.10.23 15:18

    막상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민족주의로 들썩이자마자 '외세'인 덴마크를 쫓아버리고자 프로이센, 나중에는 오스트리아까지 합심해서 군사행동에 나섰으니, 어쨌든 한계는 명확했던 것 같습니다.

  • 작성자 22.10.23 18:31

    크리스티안 8세의 사망과 1848 혁명의 여파로 발생한 1차 전쟁은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의 관여로 해소되었습니다. 프레데리크 7세의 사망으로 2차전쟁이 발생한 게 1864년이니, 넉넉하게 본다면 약 50년 간 제 기능을 다한 셈이겠죠. 50년 정도면 꽤 긴 시간인데 이 정도면 한계와 함께 성과에도 주목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역발상이었습니다.

  • 22.10.23 19:13

    @이름짓기귀찮아 1차 전쟁의 해결 과정에서는 독일 연방이라는 일종의 집단안보체제가 유의미한 역할을 해주진 못한 것 같고, 오히려 '독일 연방의 민족국가화'를 꿈꾼 프랑크푸르트의 찬전 여론으로 안보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들 중 하나)이 된 것 같습니다. 독일 연방이 없었으면 프로이센이 홀슈타인 따위의 소국에서 들고 일어난 자유-민족주의자들을 편들어 전쟁에 나설 동인이 대단히 줄어드는 것이니까요.
    체제가 50년 간 유효하기는 하였으나, 덴마크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연방 내부에 존재했다는 것이 체제 안정성에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독일 연방 체제 자체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덴마크가 없었다면 더 오래 유지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앞서는 것입니다.
    물론 룩셈부르크로 연결된 네덜란드, 하노버로 연결된 영국, 오스트리아로 연결된 합스부르크 등 다른 이질적 존재들도 공존하기는 하였으나, 하필 덴마크가 유독 약한 고리였기에...

  • 작성자 22.10.24 04:10

    @인생의별빛 ①독일연방은 유럽협조체제(the Concert of Europe)의 틀 안에서 하부 단위로 존재한 것이고 ②독일연방을 이끌어갈 군주들은 혁명으로 인질이 되었던 것이 위기가 전쟁으로 이어졌던 직접적인 원인인데, 사실 이는 독일연방이 내재한 문제기도 했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제하기 위한 협조체제에서, 50년만에 앞의 목적은 사라지고 협조체제만 남을 줄은 당연히 몰랐을 테니까요
    그런데 (빅토리아에는 제대로 구현이 되어있지 않지만) 슐레스비히 문제의 직접적인 발단이 항상 근세적인 동군연합과 왕위계승문제였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19세기는 중세부터 근세, 근대, 이후 포스트모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풍경들이 얽혀있는 데 그 단면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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