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1815년, 빈 회의의 설계자들은 독일 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의 계승자로 독일 민족국가를 수립하려 하지 않았다. 빈 질서의 창건자들은 독일 연방을 형성하여 독일과 유럽의 임무를 맡기고자 하였다. 이들은 독일 연방이 '연방적 국가(federative nation)' 독일의 새로운 유대가 되고, 빈 체제와 유럽의 계급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는 정치체로서 유럽 전체에 기여하기를 원했다.
유럽의 안보에 대한 역사적 고려에도 불구하고, 1815년 독일의 중부 유럽 재건은 약 200년 간 많은 독일인들에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오명은 1870-1871년의 프로이센-독일의 민족국가, 즉 '후기' 독일 제2제국의 성립으로부터 정치사적으로 비롯된 것이다. 제국역사기록Reichshistoriographie은 역사적으로 프로이센의 독일 임무 달성에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트라이치케는 독일 연방이 독일 통일의 무덤, 즉 약하고 3류 국가보다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다 보았다. 강하고 효과적인 국가의 관념에서 볼 때, 연방에 속한 라인의 작은 군주들로 독일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독일 민족은 프로이센의 편에 설 훌륭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따라서 독일은 국가 건설을 끝내지도 못했고, 부분적으로 연방적이며 부분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국가로 머물게 되었다. 이러한 오해는 연방(Bund)에 대한 오해를 불러왔다. 독일 연방은 독일 민족 국가를 바라지도, 의도하지도 않았다. 독일 연방은 '연방적 국가'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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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 : 유럽 안보의 주춧돌로서
빈 회의에서 합의된 안보 체제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게 독일과 유럽에서 열강으로서 남-북-서유럽의 각 세력들에게 안전과 상호보호를 제공할 의무를 부과하였다. 동시에 양국은 독일연방과 그 회원국의 안정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여겨졌다. 안보 체제의 완성을 위해서 외부의 두 군주가 독일 연방에 초대받았다. 룩셈부르크의 대공으로서 네덜란드 국왕은 회원으로 인정되었다. 이는 네덜란드를 중부 유럽의 국방 체제로 포함하는 조치였고, 룩셈부르크는 독일 연방의 연방 요새가 되었다. 덴마크 국왕은 홀슈타인의 공작으로서 새로운 독일 연방에 회원국으로 참여했다. 홀슈타인을 통해, 덴마크는 다시 한 번 독일연방, 나아가 중앙 유럽의 안보 체제와 연결될 수 있었다.
일찍이 1814년 쇼몽 조약에 적힌 바와 같이, 독일 연방의 수립은 열강들이 추구한 평화와 중부 유럽의 안정,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안전보장회의인 유럽협조체계의 실현과 기능의 핵심이었다. 독일연방은 전후질서에 대한 동쪽(러시아) 또는 서쪽(프랑스)의 공격을 고비용의 모험으로 만들기 위한 말뚝으로 설계되었다. 유럽과 독일의 정치체제 하에서 각 열강들은 서로 다르지만 보완적인 역할을 요구받았다. 프로이센은 독일의 정치세력으로,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정치세력으로 임무를 수행했고 하노버 왕국과 동군 연합 관계에 있는 영국 또한 20년 이상 제3의 독일의 주요한 세력으로 기능했다.
Wolf D. Gruner(2019). Securing Europe after Napoleon: 1815 and the New European, Chapter 8. The German Confederation: Cornerstone of the New European Security System. pp.150-167. Cambridge University Press.
독일 연방(Bund)은 국민국가 중심의 역사관에 의해 독일 통일의 과정, 혹은 장애물 정도로 취급되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연방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중부유럽의 대외적 안보와 대내적 안정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오스트리아를 위시한 열강들은 중부유럽의 안정을 기반으로 유럽 협조체계를 이끌었고, 독일의 작은 영역국가들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얻은 영토를 재편하는 기준으로 연방법(Federal Act)을 참조했습니다. 프로이센은 독일 연방과 관세동맹을 통해 독일 영역국가들을 다루는 방법을 익혀갔죠. 무엇보다 1848년 독일 3월 혁명의 핵심 타격 대상은 빈과 베를린,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였습니다. EU4의 신롬과 비슷하게 독일 연방을 빅토리아3에서 모드로 구현하면 19세기 전반의 국제정세를 보다 사실적으로 옮기고, 1848 혁명 과정을 드디어 재현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좀 있습니다.
첫댓글 49년 프랑크푸르트 50년 에어푸르트에서 통합된 국가가 탄생할 가능성이 있긴 했는데 본질적으로 71년 생긴 제국보다 더 진보된 체제도 아니고 권력 기반이 부족해 취약하기만 했더랬죠
연방이 아무리 허울뿐인 체제라 해도 최소한 독일 소국들의 보호장치 역할은 잘 수행했다고 봐야겠죠
왜곡된 독일제국이 아니라, 3월 혁명을 통한 부르주아 자유주의 독일 민족국가가 등장했다면? <- 이건 전통적인 독일사 학계의 떡밥이지만 현실성도 없고 정작 실존한 독일제국을 도외시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빅토리아 3에서 독일연방 영토로 통합된 국가가 나오면 세계정복도 가능하겠는데요 (...)
빅2 PDM이었나 독일 연방이 형성가능한 국가인 모드가 있었던 거 같긴 합니다. 사실 대독일만 돼도 전유럽과 맞짱떠도 되는 수준이니..ㅋㅋ
막상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민족주의로 들썩이자마자 '외세'인 덴마크를 쫓아버리고자 프로이센, 나중에는 오스트리아까지 합심해서 군사행동에 나섰으니, 어쨌든 한계는 명확했던 것 같습니다.
크리스티안 8세의 사망과 1848 혁명의 여파로 발생한 1차 전쟁은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의 관여로 해소되었습니다. 프레데리크 7세의 사망으로 2차전쟁이 발생한 게 1864년이니, 넉넉하게 본다면 약 50년 간 제 기능을 다한 셈이겠죠. 50년 정도면 꽤 긴 시간인데 이 정도면 한계와 함께 성과에도 주목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역발상이었습니다.
@이름짓기귀찮아 1차 전쟁의 해결 과정에서는 독일 연방이라는 일종의 집단안보체제가 유의미한 역할을 해주진 못한 것 같고, 오히려 '독일 연방의 민족국가화'를 꿈꾼 프랑크푸르트의 찬전 여론으로 안보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들 중 하나)이 된 것 같습니다. 독일 연방이 없었으면 프로이센이 홀슈타인 따위의 소국에서 들고 일어난 자유-민족주의자들을 편들어 전쟁에 나설 동인이 대단히 줄어드는 것이니까요.
체제가 50년 간 유효하기는 하였으나, 덴마크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연방 내부에 존재했다는 것이 체제 안정성에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독일 연방 체제 자체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덴마크가 없었다면 더 오래 유지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앞서는 것입니다.
물론 룩셈부르크로 연결된 네덜란드, 하노버로 연결된 영국, 오스트리아로 연결된 합스부르크 등 다른 이질적 존재들도 공존하기는 하였으나, 하필 덴마크가 유독 약한 고리였기에...
@인생의별빛 ①독일연방은 유럽협조체제(the Concert of Europe)의 틀 안에서 하부 단위로 존재한 것이고 ②독일연방을 이끌어갈 군주들은 혁명으로 인질이 되었던 것이 위기가 전쟁으로 이어졌던 직접적인 원인인데, 사실 이는 독일연방이 내재한 문제기도 했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제하기 위한 협조체제에서, 50년만에 앞의 목적은 사라지고 협조체제만 남을 줄은 당연히 몰랐을 테니까요
그런데 (빅토리아에는 제대로 구현이 되어있지 않지만) 슐레스비히 문제의 직접적인 발단이 항상 근세적인 동군연합과 왕위계승문제였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19세기는 중세부터 근세, 근대, 이후 포스트모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풍경들이 얽혀있는 데 그 단면 같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