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 우리 골프의 기원은 멀리 영친왕으로 소급되고 있다. 1900년도 구한말에 원산세관에 파견나온 영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기록은 있으나 저들만이 이용해 엄밀히 우리의 골프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일제치하가 되면서 그들은 본국으로 철수했고 코스도 폐장되어 이땅에 상륙했던 골프는 긴 휴면기를 맞는다. 한국인들이 직접 참여해서 만들고 플레이 한 골프장은 실제 근래 우리나라 골프장의 모태가 된 효창원코스부터 잡는다. 당시 철도국 직영이었던 조선호텔이 여행객의 서비스와 외국관광객을 유치할 목적으로 마련하게 된 것이 현대 숙명여대와 효창공원부지인 효창원코스이다. 1921년 9홀 규모(7홀만 사용)로 조성됐으나 2년도 되기전에 넓은 부지로 이전을 서둘게 된다. 1924년 국내최초로 18홀(파70)로 구성된 청량리코스다. 이문동 前안기부자리였고 현재는 경종왕릉 자리며 종합예술학교가 자리한 이왕직 능원이다. 허나 각종대회가 치뤄 지고 늘어나는 골프수급을 위해 장소가 좁고 짧다는 논의가 일게 되면서 결국 국제정규 규모의 코스를 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현재의 어린이 대공원 자리에 있던 군자리 코스이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의 한국골프는 일본의 볼모로 가있는 영친왕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 라 할 수 있다. 영친왕은 직접 이씨 왕릉 부지를 하사했고 골프장 건설 투자비까지 내놓으 며 골프장 건설을 격려했을 정도였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실의의 상 황에서 국내골프장 건설에 협조한 것은 하나의 민족 자존심으로 상징 될 수 있는 문제였 다. 당시 영친왕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불운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울분을 골프로 달래고 있었던 터라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쉽게 한국의 골프장 건설에 동의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1차 세계대전, 6.25사변,5.16군사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민족 수난과 운명을 함께 하며 폐쇄, 복구의 악순환을 거듭하며 43년간의 모진 생명을 이어온 코스가 지금은 사라진 군자리 코스다. 한국 골프의 영욕을 증명해 온 군자리 코스의 운명은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고스란히 지 니고 있는 상징성을 갖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군자리코스를 회자하는 이유다. 당시 이왕가(전주 이씨)의 유능 자리인 군자리 코스는 행정구역상 고양군 뚝도면 군자리로 한적한 교외일 뿐 아니라 왕실의 말과 양을 사육하던 곳이었다. 영친왕은 쾌히 승낙하 며 부지 30만평을 무상으로 불하하고 건설 하사금 2만원과 3년간에 걸쳐 매년 5천원의 보 상금도 내 놓았다. 1929년 6월 22일 군자리 코스를 오픈,군자리 시대를 열면서 한국 골프의 본격적인 출범을 알린다. 국제규격이라 할 수 있는 정규규모의 18홀을 가져 세계속의 한국도 체면을 살린 셈이다. 그런 꿈도 14년, 1934년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골프장은 초토화되어 버렸다. 일제가 코스를 폐쇄하면서 잔디밭을 뒤엎고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농토로 만들었다. 또 비행기 훈련장으로 이용하거나 수목에선 송탄유를 채취하고 골퍼들은 강제 징용되어 전쟁터로 끌려나가는 아픔을 함께 지니고 있는 곳이 군자리 코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코스 건설을 쾌히 승낙해 준 영친왕은 군자리 코스에서는 몇 차례 플레이를 했지만 결국 창덕궁의 주인은 되지 못하고 죽은 불운의 왕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대통령은 군사적인 목적에서 골프를 권장했다. 대한민국 개국이후 골프와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한국골프 100년사에 일면을 장식하고 있다. 당시 세계 전쟁으로 골프장이 폐허가 된 뒤로 미군들이 휴일에 한국에서 골프를 하지 못해 군용기를 이용해 일본으로 날아가 라운딩을 즐긴다는 소리를 듣고 이대통령은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서 총무처장에게 골프장을 건설하라는 성급한 지시를 내리게 된다. 1949년 8월 15일,정부수립 제1주년 기념 축하연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어리둥절하게 한 사건이 터졌다. 참석한 주한 외교 사절에게 '휴일에는 어떻게 보내느냐'는 질문에 주한 외국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엔 골프장이 없어 주한 미공군기편으로 일본 본토나 오끼나와 미군기지 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깁니다.'당연히 불쾌감을 느낀 대통령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반일 주인자인데다 유사시 북한군의 침략에 즉각 대처할 수 있을까 하는 섬뜩한 생각이 미치자 아찔해진 이대통령은 격앙된 목소리로 배석했던 총무처장에게 즉각 골프장 건설을 지시하기에 이른 것. 복구공사에 소요된 경비 2백만원은 은행에서 대출받고 마무리 과정에서는 미국측의 장비지원에 힘입어 1950년 5월에 준공했다. 허나 1개월도 채 못되어 이 대통령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듯 6.25을 맞으며 골프장은 또 암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