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테러와 미망인의 편지
1960년대부터 이어진 북한의 무력도발로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은 무척 심각했다.
북한정권은 국가원수의 생명을 노린 직접적인 테러를
세 번 (1·21청와대 기습사건, 육영수여사 피살사건,
아웅산 테러사건)이나 자행하고 있었다.
22년 전인 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는
한반도를 순식간에 전쟁 일보 직전의 벼랑으로 치닫는
'아웅산 테러'가 발생했었다.
북한 총리를 지낸 강성산(姜成山)의 사위였던 강명도씨
는 그의 책에서 1980년대 초 북한 고위층들 사이에서는
"시라소니(박정희)가 죽었다고 좋아했더니 사자(전두환)
가 나타났다"
고 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을 무서워하며 제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쓴 바 있다.
전두환 前 대통령은 북한으로부터 암살위협을 가장 많이
받은 대통령이다.
미얀마 아웅산 테러 때 위기 일발의 순간을 넘겼고, 카나
다 방문을 앞두고 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낸 최홍희가 관련
된 암살 음모 사건도 있었다.
아프리카 순방길에서도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현지에 잠
입한 북한 공작원들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무사했다.
노신영 前 국무총리의 회고록에도 나오지만 동남아 순방길
에서도 북한 공작원들이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필리핀에 잠입한 적이 있었다.
남북 대치가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살벌했을 당시
북한은 버마를 친선방문한 전두환 前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
해 3명의 공작원을 버마(現 미얀마) 현지로 밀파했다.
다음글은 조선일보 이현구 기자가 '랭군' 특파 귀국후 사건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 기사를 요약하였다.
'꽝!!!~'
하는 엄청난 폭음이 나면서 현장은 한순간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아웅산' 묘소앞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던
서석준 부총리등 공식 비공식 수행원 20여명은 폭음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지면서 흙더미에 파묻혔다.
폭발과 함께 천장 서까래와 기와장 부스러기등이 쏟아져 내
린것이다.
'아웅산'묘소 일대는 폭발과 동시에 지붕이 내려앉고 흙먼지
가 일어 한동안 시야를 가렸으며 독한 화약냄세가
코를 찔렀다.
묘소 지붕은 하늘을 향해 큰 입을 벌린듯 뻥뚫려 있었으며
'아웅산' 장군의 대리석 묘는 끝부분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주
위에 대리석 파편들이 그득했다.
돌연한 폭음에 잠시 멈칫했던 버마 경비원과 우리측 경호원들
이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흙더미가 쌓인 사상자들을 꺼내
승용차와 트럭에 닥치는대로 태워 병원으로 긴급 후송했다.
전대통령이 묵고있던 버마 영빈관에서 사고현장인 '아웅산'
묘소까지는 약 4.8km 승용차편으로 서행하여 10분정도가
걸리는 거리다. 전두환 대통령은 사고지점 1.5km 전방을
승용차가 통과할 무렵 폭발사건이 일어나 무사했던 것이다.
그것은 출발에서 부터 천행(天幸)이었다.
전대통령이 '아웅산'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영빈관을 떠날
시각은 이날 오전 10시 20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대통령을 안내하고 '아웅산'묘소로 갈 '우칫라잉' 버마외
상이 5분 늦게 영빈관에 도착했던 것이다.
10시 25분 버마군의 '모터케이드' 선도를 받으며 전대통령과
'라잉'외상이 나란히 탄 국빈차는 영빈관 정문을 미끄러져나
갔다. 약 3~4분을 달렸을 무렵 앞의 선도차에 탔던 버마군인
한 사람이 내려 국빈차의 진로를 옆길로 바꾸도록 신호를 했
다. 무슨 사고가 생긴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영문을 모르고 있던 국빈차는 교통지시에 따라 옆길
로 진로를 바꿨고 얼마뒤 도로 영빈관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날 '아웅산' 묘소에는 전대통령이 도착하기 앞서 '인야
레이크' 호텔에 묵고 있는 공식,비공식 수행원들이 개별적으
로 모여들었다.
행사시간에 여유를 두고 앞서 도착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 공식 수행원들은 묘소
잔디밭에서 담소하고 있었다.
전대통령이 영빈관을 출발할 예정시각이 되자 이들은 잔디밭
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2열 횡대로 늘어섰다. 곧 전대통령이
도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0시 25분께 이계철 '버마'대사가 '모터케이드'의 선도를 받으
며 도착했다.
이대사의 전용차는 차체가 큰데다가 전면에 태극기를 달고 있
어 멀리서보면 국빈차와 비슷하게도 느껴질 수 있다.
더구나 '모터케이드'까지 붙었기 때문에 전대통령 승용차로 오
인되기는 십상이다.
다소 늦게 행사장에 도착하게된 이대사는 빠른 걸음으로 묘소
건물에 올라 이미 도열해 있는 공식수행원들과 악수를 나누면
서 인사했다.
이 장면도 멀리서 보면 전대통령이 수행원들과 악수하는것으로
오인되기에 충분했다.
이대사는 늦게왔기 때문에 예정된 자리보다 아래쪽에 서게
되었다.
이대사가 제자리에 차렷자세를 취한뒤 1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진혼나팔이 올려퍼졌다.
이때가 10시 28분께. 바로 그
순간 지축을 울리는 폭음이 귀청
을 때렸다.
원래 진혼나팔은 전두환 대통령
이 도착한뒤에 불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관측통들은 멀리서 이대
사를 전두환 대통령으로 오인한
음모자들이 이미 장치한 폭발물을 원격조정으로 폭발시킨게
아닌가 추리하기도 했다.
관측통들은 범인들이 이날 전대통령에게 위해를 가하기위해
전대통령이 임석하는 묘소지붕 위에 미리 폭약을 매설한 것으
로 보고 그 조직적인 범죄계획의 치밀성으로 보아서 북괴의 소
행이 틀림없는 것으로 분석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 40분 영부인 '이순자'여사와
함께 '우산유' 버마 대통령의 안내로 제1육군병원의 영안실을
찾아 분향, 조의를 표하고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 전대통령
내외는 또 제2육군병원도 찾아 부상자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
며 다친데를 묻고 따뜻이 위로했다.
전대통령은 이어 오후 4시 15분(한국 시간 6시 45분) '랭군'공
항에 도착. 트랩 아래서 '우산유'대통령을 비롯한 '버마' 정부
요인들의 작별인사를 받고 바로 특별기에 올라 귀국길에
올랐다.
이후 남북 간엔 시퍼렇게 날선 칼 같은 긴장이 짙게 깔리
게 됐다.
사망자: 서석준(부총리/45), 이범석(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서상철(동자부장관), 함병춘(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민정당총재비서실장),김재익(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이계철(駐버마대사), 하동선(해외협력기획단장), 민병석
(대통령주치의), 강인희(농수산부차관),김용한
(과학기술처차관),
이재관(대통령공보비서관),
이기욱(재무부차관-중상치료중사망),
이중현(동아일보기자), 한경희(경호원),
정태진(경호원). 이상17명.
부상자: 이기백(합참의장), 최재욱(청와대 공보비서관),
최상덕(외무부의전과장), 윤병국(한국일보기자), 송진혁
(중앙일보기자), 최규철(동아일보기자), 김기석(KH기자),
최금영(연합통신사진부장), 윤 구(경향신문기자), 임삼택
(문공부사진과), 김상태(경호원), 김기성(연합통신기자),
김상영(문공부사진과), 문진영(MBC기자)
버마 당국의 수사결과 이 사건은 북한 독재자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진모(某)
소좌, 강민철대위, 신기철대위 등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밝혀졌다.
그해 12월 9일 랑군지구 인민법원 제 8특별 재판부에서는
테러범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남조선 출신으로 위장한 아웅산 테러범 북한 공작원들에게,
전두환 대통령이 사망했다고 이야기 하니까 조사받던 북한
공작원이 링거 주사바늘을 빼고 벌떡 일어나서'김일성 만세'
를 부르더란다.
버마 정부는 이 사건의 수사를 매듭지으면서 그해 11월4일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한편,양곤에 있는 북한대사
관 직원들의 국외추방을 단행했다.
한국과 미얀마,
그리고 세계를 경악시켰던 이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곧
역사속에 묻혀 우리의 기억속에서도 사라져가고 있다. 북한
의 또 다른 테러나 무력도발 등이 있을 때나「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잠깐씩 등장할 뿐이다.
6.25참전 용사들과 월남전 참전용사들은 지난 30여년간 북한
이 우리에게 수없이 저지른 테러행위나 무력도발행위를 죽을
때까지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다.
오늘날 북한은 전혀 변하지 않고 있는데 대한민국만 급속히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다. 상황이 이처럼 진행될 경우 대한민
국은 적화 될 것이라는 불안과 우려를 금치 못한다.
북한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대한민국이 대혼란의 시기가 닥쳐
오기전에 월남전에서세계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싸우던시절
을 생각하며 참전용사들이 유비무환의 정신을 다시한번 가다
듬도록 해주어야 겠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김정일과 북한의 평가가 어떤지를 모른다
하더라도 국제사회에서 드러난 그들의 마약, 무기밀매, 위
조지폐 제조, 개인이나 집단의 납치·살인 등의 끔찍하고 창
피스러운 비행을 저지르고 있는데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묵과할 수 있겠는가?
자료편집: 월남전과 한국 www.vietvet.co.kr
첫댓글 절대로 있을수없는 비극 이었습니다.순국하신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맞아요 북한의만행이 이러한대 오늘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요..? 우리 젊은이들이 좀더 냉철해야 할텐대~~! 그래도 우리는 잊지말고 꼭 기억해 둡시다..
우리후세에게 이러한 참상을 잘 교육 시켜야 다시는 대한민국이 테러에서 벗어날수 있습니다. 북괴는 언제든 대한민국을 공격을 할수가 있습니다. 미국인도 도끼로 까죽이는 집단입니다.
저때 얼마나많은 인재들을 잃었나요 저분들이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는 초등학교2학년이었습니다...
아버님말씀은 각하의 수족을 그때 많이 잃었다고 하십니다...
미얀마도 상황이 말이 아닙니다. 군정의 최고 지도자들이 군복을 벗고 대선과 총선에 나설 준비를 마친 상태이니까요. 아웅산 테러때 김재익 경제수석, 이범석 비서실장, 서석준 부총리 등 정말 많은 인재들을 잃었지요......그나마 경제수석은 후에 사공일 수석이 이어받아 훌륭하게 해냈었습니다만....언제 떠올려도 참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