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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자신에게 되뇌인 듯한 독백으로 보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에서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불교적 가치관이 배어난다. 불자가 아닌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짧은 글은 국민들에게 긴 울림으로 남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고(忍苦)의 투사이자 불의 앞에서 소신을 꺽지 않았던 승부사로 불렸다. 그런 면에서 "근심과 곤란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라"는 보왕삼매론은 그의 삶과 닮았다.
그는 생전 자신을 불교적이라고 표현했다. 아침마다 어머니의 독경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고 불교가 아주 친숙하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 노판석 씨의 위패가 노 전 대통령이 투신한 봉하마을 부엉이바위와 불과 200m 거리에 있는 정토원에 모셔져 있다.
이 정토원은 노 전 대통령에게 고향인 봉하마을과 함께 늘 따라 다닌 추억거리였다. 정토원 선진규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형님이었고, 퇴임 후 가끔 찾아가는 말벗이었다. 그 곳에서 먼저 가신 부모님께 문안을 드리기도 했다.
3당 야합 때 '역사적 반역'이라며 반기를 들었던 노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결별한 뒤 세차례 쓰라린 패배를 맛봤다. 낙선할 것을 알면서도 도전했던 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한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칭도 이 때 생겼다. "농부가 어찌 밭을 탓하겠는가"라는 그의 말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기도 했다.
부산과 서울종로에서 패배해 삼수생이 되었을 때 그는 불교언론에 고정칼럼을 연재하는 인연을 맺었다. 당시 노동조합 창립을 준비하던 교계신문사에 무료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불교에 대한 존경심을 여러차례 내보였다. 그는 대통령후보 시절 역대 후보 중 처음으로 '불교계 10대 공약'을 제시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불교 공약을 별도로 제시한 것도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사회문제로 대두됐던 북한산 관통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천성산 관통 고속전철에 대해 완전 백지화와 대안노선 검토가 첫번째 공약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공약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지율 스님의 처절한 투쟁을 목도해야 했다.
결국 그는 해인사에 주석 중인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을 찾아 "사패산 터널 문제에 대해 지난 대선 전에 불교계 입장을 듣고 공사를 백지화한다는 공약을 했는데, 대통령 되고나서 보니 공사 진척이 많이 돼 그 부분만 남아있더라. 그럼에도 공론조사를 생각했는데, 참뜻이 전달 안돼서 이행할 수 없게 됐다"며 이해를 구했다.
이 때의 빚은 해인사 비로전으로 결실을 맺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 목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비로전을 건립하는데 특별교부금 30억원을 지원했고, 퇴임직전 열린 낙성법회 때에는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직접 참석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직전 권양숙 여사로 하여금 청와대 불상의 불전함을 열어 불전금 280여만원을 봉은사에 전달했다.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으로부터 '대덕화'라는 법명을 받은 권 여사는 봉은사에서 108배를 올리고 "청와대에 있어 봉은사를 찾지 못했다"면서 두 자녀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는 인등 기도비 5년치를 납부하기도 했다.
일반 국민들은 권 여사의 종교가 불교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좀처럼 종교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다니던 사찰에 가는 일도 삼갔다. 자신의 종교를 내세워 종교편향 논란을 불러온 이명박 대통령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재직중 마지막으로 해인사를 찾았던 노 전 대통령은 비로전 낙성법회에서 "오늘은 불교계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대단히 뜻 깊은 날"이라며 "비로자나부처님 복장 의식 때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 상생의 나라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발원문을 써 넣었다"고 말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큰 탈 없이 임기를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부처님의 가피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비운의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해인사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식은 해와 달이 바다로 떨어진 생사거래(生死去來)의 진면목을 보여준다"고 애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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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은 서거 당일인 23일 본산인 서울 조계사를 포함해 해인사·통도사·송광사·수덕사·월정사 등 주요 사찰 25곳에 분향소를 설치했으며, 24일 오후에는 100여곳으로 늘렸다. 조계종 총무원장인 지관스님은 24일 노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자택을 찾아 부인 권양숙씨를 직접 위로했다. 경남 합천 해인사 주지 선각스님 등 350여명도 같은 날 봉하마을 빈소를 찾아 고인의 극락왕생을 비는 독경을 한 데 이어, 25일엔 양산 통도사 주지 정우스님 등 250여명이 뒤를 이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앞서 정우스님은 이날 새벽에 진행된 입관식에서도 직접 염불하며 노 전 대통령의 넋을 달랬다. 26일에는 쌍계사, 27일엔 범어사 쪽 스님들이 봉하마을을 찾는다. 조계종은 노 전 대통령의 49재까지 전국 사찰에서 극락왕생을 비는 축원 기도를 계속할 예정이며, 49재를 조계사에서 봉행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천주교 세례를 받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처럼 불교계가 ‘각별한 애도’를 표하는 까닭은, 노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태도와 정책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평소 어머니 때문에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해온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불교계가 정책적으로 소외되지 않도록 했으며, 전통 사찰 등 문화재 보호에도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이 1995년 종단개혁 이후 실천불교승가회를 비롯한 진보세력 위주로 개편되면서, 참여정부와 공감하는 바도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씨가 2002년 조계종 종정인 법전스님한테서 ‘대덕화’라는 법명을 받은 점도 친밀도를 높인 요인으로 보인다. 불교계는 노 전 대통령이 유서에서 ‘삶과 죽음이 한 조각’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화장하라’고 당부한 것 등은 불교적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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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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