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여명을 가지고 너무 호들갑을 떤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유목민족 만여명의 전투력은 절대로 얕볼것 이 못되었습니다. 사기열전에 보면 한나라 시절 흉노병사 3명이 한나라기병 수십명을 격파한 사례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황제가 상주문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도적을 죽음에 빠지게 한 것이다”라 하였다.
그리고 철기 3천명을 준비시키며 전쟁을 준비합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천한오랑캐가 무능한데 단지 내가 방비가 없다고 말하고 감히 여기로 온 것이다. 만약 짐이 이리로 온 것을 안다면, 마땅히 몹시 놀라서 도망갈 것이다. 지금 반드시 사로잡아야지 놓아줄수가 없다. 그러나 이 희봉구를 나가면 길이 좁고 또한 험하니 기병이라야 행군할 수 있다. 만약 제장들이 오랑캐가 병진(並進)하는 것과 일의 기회가 완만해지는 것을 살펴서 짐이 철기 3천으로 먼저 진출한다면 그를 불시에 잡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라 하였다.
위성지도로만 봐도 알정도로 희봉구에서 관하로 빠지는 길은 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입니다. 황제는 이 지형을 정확히 파악하고 많은 병력이 아닌 되려 올량합의 10000여명보다 적은 정예철기 3000명을 준비시키자는 책략을 내지요
그리고 석문역에서 준화현으로 이동하여 군에서 정예기병을 선발하고 무기와 식량을 챙긴뒤에 란양역으로 진군합니다.
9월3일
"준화현에 머물러 정예기사 3천인을 가리고, 한사람이 말 두 마리와 각기 십일치의 전투식량을 소지하였다"
9월4일
"황제가 제장 및 가려뽑은 기사들을 이끌고 준화에서 출발하여 란양역 동쪽에 머물렀다"
란양역 동쪽에 머물다가 9월5일에는 희봉구로 이동한뒤에 9월 6일 밤이 되자 행동을 게시합니다.
그럼 최신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동원해 전투장면을 재현해 보겠습니다.
6일째 되는 밤에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군사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은밀히 관하로 진군하여 새벽에 올량합의 주둔지 20리 밖에 도달하였습니다.
당시 선덕제가 이끌고 간 정예기병은 마상활쏘기가 가능한 정예기사와
신기총(神機銃)을 가지고 있는 기병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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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올량합의 진영에는 만여명 정도의 병력이 있었는데 아마 대부분이 기병이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새벽이어서 적의 장비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지 올량합은 그들을 변방의 일반병사로 착각하고 모두 군영에서 나와 공격합니다.
황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양익으로 군대를 나누어 신기총과 화살로 적을 협격합니다.
올량합의 군대는 이 공격을 견디지 못하였고 명나라 계속해서 신기총을 쏘자 남은 무리는 도망가거나 황제의 깃발을 보고서 항복하였습니다.
이 전투로 선덕제는 포로들과 낙타 말 소와양 적의 치중 등을 노획하였고, 다른 신하들이 잡은 포로들을 모두 죽이자는 주장도 하였으나, 죄는 수령 한 사람만 있다고 하여 수령만 참수하고 나머지 포로들은 식량까지 주어 돌려보내는 등 관대한 조치를 내렸습니다.
참고로 선덕제는 이 승리를 11월에 조서를 보내 조선에 자랑을 하였는데,
조선은 정확한 사정은 파악하지 못했으나, 9월8일에 중국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보고받고 혹시모를 사태에 대비하여(고려조 충렬왕시기 나얀대왕의 반란군이 패하자 그 잔당이 고려경내로 쳐들어와 고려를 쑥대밭으로 만든 사례가 있었습니다), 10월에 황희를 보내 평안도 지역의 성보(城堡)를 점검케 하였습니다.
선덕제는 나중에 금과 은을 감면시켜주는 등 조선의 편의를 봐주기는 하였지만, 초기에는 할아버지인 영락제와 똑같이 공녀(영락제의 후궁이 된 사람의 막내여동생이 선덕제의 후궁이 된다)와 해동청을 바치라고 하는 등 조선으로서는 힘들었기에 세종이 신하들과 황제를 흉보는 기록도 있습니다.
임금이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를,
"윤봉(尹鳳)이 갑작스럽게 나에게 말하기를, ‘홍희 황제(洪熙皇帝)와 지금 황제(皇帝)는 모두 작난[戲事]를 좋아했다.’ 하더니, 홍희(洪熙)는 일찍이 안남(安南)이 모반하였다는 말을 듣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하니, 참으로 담력(膽力)이 없는 임금이로다."
하였다. 지신사 정흠지(鄭欽之)가 대답하기를,
"윤봉(尹鳳)이 저에게 이르기를, ‘홍희(洪熙)는 주색(酒色)에 빠져서 때없이 정사를 들으니, 백관들은 아침과 저녁을 가릴 줄 몰랐으며, 지금 황제도 궁중에서 잔치를 벌이고 늘 잡스로운 장난[雜戲]만 하고 있소. 영락 황제는 비록 실절(失節)한 일은 있었으나, 정사를 들음에 부지런하고 위엄이 있어 가히 두려워할 만하였소.’ 하였사오니, 봉(鳳)은 늘 태종 황제(太宗皇帝)를 사모하고 지금의 황제를 만족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주(人主)의 거동에 절도가 없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하였다.
첫댓글 할아버지 따라 원정도 같이 가고 병법, 무예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리고 할아버지따라 후궁을 할아버지 후궁의 막내동생으로^^;;
@배달민족 건문제 반란진압 성공 케이스.